6.
일시적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강태영의 말은 완전히 틀렸다. 일련의 사건 이후로 나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창문이 없는 좁은 공간에선 떨쳐낼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공포감이었다.
그런 공포감은 불쑥불쑥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얼마 전에는 눈을 감고 머리를 감다가도 갑자기 그런 증상이 와서 머리에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눈에 거품이 들어가서 따가운데도 어쩌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서 있었다.
강태영은 그럴 때마다 괜찮다며 나를 달래 줬다. 내가 온몸에 거품 칠을 하고 있든 물을 묻히고 있든 전혀 상관없는 듯 나를 온 힘으로 끌어안고 몇 분이고 등을 쓸어 주고 주변을 정리했다. 나는 증오하는 강태영의 품 안에서 안정감을 찾아 갔다. 그렇게 괜찮아지고 나면 자괴감이 밀려와서 혀를 깨물고 싶었다. 물론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 이후로는 샤워할 때도 문은 닫지 못했다. 그건 강태영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샤워하고 있는데 그가 불쑥 들어와서 섹스로 이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문을 잠글 순 없어서 나는 샤워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강태영을 막을 길은 없었다.
강태영은 별다른 일이 없을 땐 나와 함께 이 집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녀석은 꽤 바빴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 때면 나는 강태영이 그동안 나에게 해 왔던 말을 되새김질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건 일종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상기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그냥 들려오는 거였다.
가장 많이 들린 말은 강재준 때문에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라던 별장에서 들었던 그의 말이었다.
말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됐다. 원망할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희한하게 강태영의 목소리가 짙어질수록 재준이 형에 대한 미움이 커졌다. 정말 내가 강재준 때문에 이렇게 된 것만 같았다. 처음엔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는데. 이제는 내 눈앞에 나타나고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 형이 모든 사달의 원인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따귀를 때렸다. 아플 때까지 때리고 나면 어느 순간부터 환청처럼 들리던 강태영의 목소리가 서서히 옅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죄책감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
“볼은 또 왜 이러는데.”
돌아온 강태영이 턱을 잡고 내 얼굴을 좌우로 돌렸다. 혼자 몇 번이고 내려친 볼은 자고 일어났는데도 가라앉지 않았다. 피가 비칠 듯 붉게 달아올랐던 색은 옅어졌지만 부기는 아직 남아 있어 반쯤 빨다 남은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태영의 큰 손이 부푼 볼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묻잖아.”
“……때렸어.”
“네가?”
“응.”
“너를?”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왜 그랬냐는 물음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 처지에 갇힌 게 재준이 형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원망하려 드는 나를 견딜 수 없어 그랬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내 보지 않아도 강태영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걸 알았다.
“왜 그랬냐니까?”
“멍해서.”
“멍해서?”
“응, 정신 차리려고.”
턱이 잡히고 고개가 들렸다. 초점을 맞출 생각도 없이 흐리멍덩하게 뜨고 있던 눈에 힘을 실었다. 무표정인 것처럼 보이는 강태영의 얼굴에 미묘하게 화기가 서려 있었다. 희미하지만 살짝 일그러진 눈썹과 조금 전까지 나를 닦달해댔으면서 지금은 열린 적 없다는 듯 다물려 있는 입술에서 나는 녀석이 불쾌함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뭐?”
“왜 그렇게 봐?”
비꼼 같은 게 아니라 순수한 물음이었다. 내가 내 몸에 손을 댄 것뿐인데 자신이 맞은 것처럼 싫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좀 놀라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말 돌리지 마.”
미간을 좁힌 강태영은 자신이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며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진짠데.”
“…….”
“진짜야.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아서 때린 거야. 그래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아서.”
강태영은 진실을 감별하려는 기색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낮게 한숨을 쉬고는 뒤로 물러났다. 턱을 잡고 있던 손도 물러났다. 부엌으로 갔다가 돌아온 그의 손에는 아이스 팩이 들려 있었다.
“혼자 그런 짓 하지 마. 맞고 싶으면 나한테 말해.”
“때려 주게?”
내가 묻자 강태영이 “뭘 하든.”이라고 대답했다.
“네가 하는 건 되고, 내가 하는 건 안 돼?”
“어, 안 돼.”
강태영은 단호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낮아져 있었다. 이해되지 않아 살짝 기울어지려는 내 고개를 고정하고 아이스 팩을 볼에 대 주는 손길이 어울리지 않게 섬세했다. 맞는 건 매한가지인데 왜 내가 하는 건 안 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곁에서 느끼기에 강태영은 지금 충분히 인내하고 있었고 이 이상의 질문으로는 녀석에게서 좋게 대답 듣기 힘들 것이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얌전히 볼을 대 주고 눈을 내리깔았다. 차가운 기운이 퍼지는 볼 안쪽을 혀로 느리게 쓸었다. 따귀를 때릴 때 피 맛이 난다 싶더니 볼 안쪽 살이 찢어진 자국이 혀끝으로 느껴졌다. 제멋대로 찢겼다가 다시 엉겨 붙은 여린 살이 혀에 스쳤다.
“여기 봐 봐.”
부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자 강태영이 핸드폰을 셀카 화면으로 두고 들이대며 말했다. 화면 속 비친 얼굴은 내 것이 분명했음에도 낯설었다.
“웃어.”
“뭐, 뭐 하는 거야.”
같은 화면 속에서 강태영과 나란히 어깨를 맞댄 채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빠르게 화면 밖으로 움직였다.
원래도 강태영이 하는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게 태반이었지만 이번 일은 더더욱 기이했다.
강태영은 대답 없이 화면 밖으로 피한 내 어깨를 다시 감싸며 나를 화면 안으로 끌어당겼다.
“싫어, 놔.”
“나랑 사진 찍기 싫어?”
먼저 싫다고 했지만 강태영이 싫으냐고 묻는 물음엔 쉽게 싫다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싫다는 대답을 한 후에 일어날 일이 무서웠으니까.
이번에는 피하지도 않고 싫다는 대답도 못 하고 있자 강태영이 씨익 웃었다. 화면 속에서 웃고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좀 웃어 보라니까?”
웃음이 나올 리 없었다. 강태영의 명령에 억지로 안면 근육을 움직여 봤지만 내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웃는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고 찍히는 것에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내가 흠칫 떨자 강태영이 달래듯 어깨를 어루만졌다.
사진을 확인한 강태영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누가 너 잡아먹기라도 한대?”
아무래도 강태영 역시 사진 속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휴대폰을 들이대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대신 녀석은 어딘가로 내 사진을 전송했다. 내 쪽에서 화면이 잘 보이는데도 내가 보든 말든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뭐, 무슨. 누구한테 보내는 거야?”
누구하고도 나란히 사진 찍어 본 적이 드문데 하물며 강태영과 찍은 사진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송되었다는 것에 놀라 묻자 녀석은 짜증이 섞인 기색으로 “성지후.”라고 대답했다.
“성……지후?”
“어.”
“왜, 왜? 너 성지후랑 연락해?”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나한테 연락해서는 실종 신고라도 하겠다고 깝쳐서, 우리 집에서 같이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 주려고.”
“성지후가?”
다급하게 묻자 강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같이 살면서 재수 준비하느라 휴대폰도 없앤 바쁘신 백하민.”
강태영의 말 중 진실은 내 이름 세 글자뿐이었다.
“성지후가 진짜 귀찮은 새끼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깨동무를 한 채 내 볼을 손가락으로 퉁 튕기던 강태영이 물었다. 답을 들으려는 물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강태영은 그 후로도 나를 옆구리에 끼고 내내 내 몸을 지분거렸다.
이렇게 둘이서 뒹굴뒹굴하고만 있으니 집에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나와는 전혀 다른 감상을 내뱉었다.
“성지후가 먼저 너한테 연락했어?”
“응.”
“걔가 진짜 나랑 연락 안 된다고 실종 신고하겠다고 했…….”
“왜 자꾸 묻는데? 뭐, 다른 생각이라도 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
강태영은 웃으면서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지만 나는 그 말이 꼭 협박처럼 들려서 입을 꾹 다물었다.
“존나 귀찮게 하네, 통화해 볼래?”
강태영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성지후의 휴대폰 번호가 떠 있는 다이얼 화면이 다가오다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뒤로 멀어졌다.
“허튼소리하면 알지?”
강태영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거리자 통화 버튼을 누른 녀석이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연결음이 금방 끊겼고 성지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태영의 전화라서 그런지 성지후의 목소리는 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나와 연락할 때 듣던 그 편한 음성은 확실히 아니었다. 성지후와 다시 연락할 수 있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 목소리가 반가우면서도 나 또한 아무런 준비 없이 전화하게 된 거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강태영? 그래서 하민이는…….
“성지후, 나야.”
-어? 백하민, 너야?
“으, 으응.”
바로 옆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시선을 받으며 대답했다.
-야, 뭐야! 너 죽을래?
곧장 한 옥타브는 올라간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연락 자주 한다며!
“아, 그게…… 내, 내가 재수 준비…….”
아까 전 강태영이 했던 말을 기억하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그건 강태영한테 듣긴 했는데, 진짜야?
“응.”
-갑자기 웬 재수? 대학 가려고? 안 간다고 했었잖아. 그때 숙식 제공되는 곳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어?
“생각이 바뀌어서…….”
-그럼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되지 존나 멀리 가는 척 선물 주고 가서는 연락도 자주 한다더니 개뿔, 아예 연락은 두절되고! 난 또…….
“미안, 그냥 잘 될지도 모르고. 아무튼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
성지후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칼로 물 베기도 아니고 얼굴도 안 보고 살 것처럼 하다가 또 같이 산다고 그러질 않나……. 싸울 때는 치고받고 장난도 아니면서 너희도 참 희한하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강태영과 나에 대해 말하는 거였다.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차가운 눈으로 옅게 웃고 있던 강태영과 눈이 마주쳤다.
‘인제 그만 끊어.’
강태영이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이제 끊어야겠다.”
-폰은 수능 볼 때까지 계속 없이 사는 거냐? 너랑 연락하고 싶으면 이쪽…… 어, 그러니까 강태영 폰으로 연락하면 되는 건가? 아, 싫은데.
성지후의 칭얼거림에 옆쪽에서 기가 찬다는 듯 웃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성지후는 듣지 못한 듯했다.
“응, 당분간은 휴대폰 없이 공부에만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 그, 급한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해.”
강태영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내 마음대로 내린 결정에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뻔했다.
-어어, 알겠어.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까 좀 낫네. 공부 잘하고. 가끔 폰 빌려서 연락이라도 해.
“응, 잘 지내.”
통화가 종료되고도 옆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강태영 쪽으로 더 가깝게 쓱 밀고 말았다.
“애틋하네, 둘이 그냥 친구 사이 맞아?”
“성지후가 너 같은 줄…….”
기막힌 물음에 발끈해 빽 소리를 내다가 말을 줄였다. 말 같지도 않은 말에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나 같은 줄? 왜 말을 하다 말아?”
강태영이 옆으로 치대듯 달라붙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 녀석에게 딱 달라붙은 어깨를 반대쪽으로 뺐다.
미세한 틈이 겨우 만들어졌다 싶을 때 강태영이 꼭 그만큼 더 다가왔다. 움찔거리며 피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아예 내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몸을 밀착했다.
다정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깨 위로 올라온 팔을 조금 더 뻗어 볼을 쓰다듬는 행위가 낯설었다. 나도 모르게 목을 거북이처럼 움츠리고 등을 웅크렸다.
“다신 이런 짓 하지 마.”
그러더니 아까도 했던 말을 또 했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조금 웃었다. 내 웃음소리에 강태영의 눈썹이 살짝 위로 치솟았다.
“웃겨?”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웃음기를 감추지 못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그만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수록 뭐가 웃기는지도 모르겠는데 더 우스워졌다. 뭔가가 단단히 고장 났나 싶었다.
부드럽게 볼을 쓰다듬던 강태영의 손길이 뻣뻣해진다 싶더니 곧 멈췄다. 이제 때리려는 건가?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입에서는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걱정과 달리 강태영은 나를 때리지 않았다. 그저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내 머리가 드디어 내 말을 듣고 웃음을 멈출 때까지.
@김골드 공금
“먹고 싶은 거 있어? 올 때 사 올게.”
나갈 채비를 하던 강태영의 옷차림이 한껏 가벼워졌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진한 브라운 니트가 흰 피부와 잘 어울렸다. 왜인지 나와는 다르게 처음보다 더 좋아진 얼굴은 생기가 넘실거렸다. 아마 나가면 그에게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도 많겠지. 더 어릴 때도 그랬으니까.
“백하민.”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내 이름을 부른 강태영이 “먹고 싶은 거 있어?”라며 재차 물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만 있으면 안 심심해?”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나를 향해 다가온 강태영이 쓸데없는 걸 물었다.
“너 어제도 잠꼬대하던데.”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앞에 몸을 굽히고 앉은 강태영이 내 무릎을 잡았다.
“또 학교 가는 꿈 꿨지?”
그랬나, 그랬던 것도 같다. 꿈을 많이 꾸는 편인데 깨고 나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강태영의 말을 들으니 꿈 내용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별장에서 잠깐 꾸었던 꿈과 비슷하게 이어지는 내용의 꿈이었다.
대학생이 된 내가 평범하게 캠퍼스 생활을 하는 그런 꿈. 그런 꿈을 꾼 날에는 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답답해졌다. 당장이라도 숨을 몰아쉬고 싶었지만 강태영에게 티 내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강태영은 내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세우고 관찰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내가 볼이 잔뜩 부을 정도로 따귀를 때려댄 이후로는 그런 기색이 더욱더 짙어졌다.
“가 볼래?”
“……어딜?”
“학교.”
“학교?”
“가고 싶으면 데려가 줄게. 원하면 구경도 시켜 주고.”
가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고, 나는 그걸 또 타기가 무서웠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강태영은 “아직도 무서워?” 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고, 가고 싶어지면 말해. 대가리 굴리지 말고.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제안을 거절당한 것임에도 강태영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먹고 싶은 건?”
“진짜 없는데…….”
“먹고 싶은 게?”
“……응.”
“없어도 생각해 놔. 오늘 나 돌아올 때까지, 숙제야.”
“으응.”
“자.”
말을 마친 강태영이 물 잔과 함께 비타민을 내밀었다. 며칠 전부터 챙기기 시작한 일이었다. 녀석은 나가기 전 꼭 나에게 비타민을 먹인 뒤 외출했다. 집 안에서만 있느라 햇빛도 잘 보지 못하니 먹는 것으로라도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먹게 한 뒤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행해지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녀석이 내민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내가 삼키는 게 진짜 비타민인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강태영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나에겐 중요한 일이었고 그를 위해서는 이런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아.”
입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삼키고 나서는 입을 벌려 안쪽을 검사받았다. 내가 약을 삼키는 것을 다 확인한 후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강태영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하고 집을 나서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귀를 붙였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봤다. 딱 여기까지였다. 내가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서는 소파 위에서 시간을 죽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시간이 잘도 갔다. 원래 할 게 없으면 시간이 안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달리 LED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누군가 시침을 툭 밀어 놓은 것처럼 시간은 확확 달라져 있었다.
한 번씩은 까무룩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일어난 것 같기도 했다. 비타민 덕분인지 자신을 괴롭히고 싶게 만들었던 상념도 요즘은 머릿속을 잘 침투하지 못했다.
우울한 쪽으로 생각이 튀려고 하면 스위치가 꺼지듯 뇌 속에서 뭔가가 탁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멍한 채 있는 게 바보가 되는 것도 같았지만 스스로 따귀를 때리고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오늘도 역시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앉아서 시간을 죽이고 있으면 볼일을 끝낸 강태영이 돌아올 것이고, 별일이 없으면 그와 난폭할 정도의 섹스 후 새벽이 되어서야 기절하듯 잠들 것이다.
꿈은 꿀 수도 있고 안 꿀 수도 있다. 꾸더라도 금세 잊어버릴 거고, 그 뒤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겠지.
머릿속에 간단하게 그려졌다. 그 정도로 단순한 루틴이었다. 나는 이 일상이 깨지기를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더 나빠질지도 모르는 것보다는 지금이 낫다고.
TV를 켰다가 껐다. 끄는 순간 까맣게 된 화면에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내가 보이는 게 싫어서 다시 켜면 또 끄고 싶었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심리였다. 나는 축 처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다가 말았다.
비타민인지 뭔지 모를 약을 먹으면 우울한 상념이나 쓸데없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서 좋았지만 그와 별개로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쓸데없는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왠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더 무섭지 않을 것 같은 기분 같은.
그렇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내가 나갔다는 것을 강태영이 알아채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알게 되면 그 뒤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지옥도가 펼쳐질 게 분명했다.
주위가 갑자기 밝아진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떴다. 어느새 또 소파 위에서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강태영이 어둑해진 거실 등을 켜고 리모컨으로 발코니 창 블라인드를 쳤다.
“내가 내준 숙제는 다 하고 자고 있는 거야?”
소파로 다가온 강태영이 물었다. 숙제가 뭘 말하는 건지 생각하다가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먹고 싶은 걸 생각해 두라고 했었던가. 생각나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뭔가를 특정해서 먹고 싶다고 마지막으로 생각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잠결의 힘을 빌려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 대답하는 강태영은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
“일어나.”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강태영이 손수 소파 앞 테이블에 포장해 온 음식을 늘어놓았다. 금방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그렇지 않아도 없던 식욕이 더 없는 상태에서 음식 냄새를 맡아서인지 좋지는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먹기 싫어?”
어느새 내 표정을 확인한 강태영이 상을 차리다 말고 물었다.
“지금 일어나서 입맛이 없나 봐. 좀 이따가 먹을게.”
“씻고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 정신 차리고 있어.”
강태영이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토도독 두드리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아직 멍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머리를 살짝 흔들며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음식 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다. 시야도 또렷해졌다. 강태영이 반쯤 차리다 만 음식이 보였다. 파스타, 스테이크, 필라프……. 냄새부터 느꼈지만 역시나 자고 일어나서 바로 먹기에는 기름지고 무거운 음식이었다. 나는 판판한 배를 쓰다듬으며 다리를 완전히 소파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먹은 게 없었다. 먹긴 먹어야 했다. 굶은 것도 굶은 거였고 애써 사 온 걸 먹지 않고 방치해 두는 걸 강태영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먹기 위해 소파 아래로 내려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지이잉.
젓가락을 들고 겨우 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진동음이 들렸다.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이 갔다. 강태영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어차피 나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물건이었다. 휴대폰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눈앞에 음식을 두고도 어쩐 일인지 식욕보다도 진동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자꾸만 시선이 강태영의 휴대폰으로 향했다. 나는 아직도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욕실 문과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봤다. 나도 내가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내 손은 어느새 강태영의 휴대폰으로 뻗어 갔다.
아무런 미사여구 없이 딱 세 글자로 저장된 누군지 모를 이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아까처럼 진동이 크지는 않았다. 꽤 오래 울리던 전화가 끊긴 후 나는 침을 삼켰다. 다시 한번 욕실 쪽을 바라봤다. 아직 물소리가 거셌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휴대폰을 만졌다.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강태영의 생일, 1111, 0000, 1212, 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번뜩 떠오른 강태영의 휴대폰 번호 뒷자리 숫자까지 입력해 봤지만 어느 것으로도 잠긴 휴대폰을 풀 수 없었다.
그사이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멎었다.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원래 있던 곳에 놓아두고 제자리로 돌아와 젓가락을 들었다.
막 스테이크 한 점을 집었을 때 아랫도리에 수건만 두른 채로 욕실에서 나오던 강태영과 눈이 마주쳤다.
“맛있어?”
강태영이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응.”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내 신경은 온통 강태영의 핸드폰으로 향해 있었다. 뭘 할 수도 없으면서 이게 무슨 미련인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시선이 멋대로 그쪽으로 향하려는 것을 막느라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도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강태영이 방에서 트레이닝 숏 팬츠만 걸치고선 젖은 머리를 털며 방에서 나왔다. 거의 동시에 짧은 진동음이 두 번 정도 울렸다. 음식을 나르고 있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급하게 강태영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녀석은 내 반응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보디 워시 향을 풍기면서 다가온 강태영이 휴대폰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내 오른팔 옆으로 강태영의 다리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쭉 뻗어 있었다.
“전화 왔었네?”
나는 못 들은 척 입을 오물거리며 시선을 음식에만 고정했다.
“전화 온 거 못 들었어? 무음은 아닌데.”
갑자기 강태영이 옆에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래? 먹는 데 집중하느라 몰랐나 봐.”
놀라 까무러칠 뻔한 것을 겨우 참고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강태영이 알겠다며 마저 먹으라고 하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전화했네?” 하고 시작하는 말로 봐서는 아까 전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식사를 이어 가던 내내 강태영 쪽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 애썼다. 무방비하게 진동음을 울리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휴대폰을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뛰어대던 심장은 씻고 누운 지금까지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어쩌면……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혔다.
오늘 강태영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런 밤은 흔치 않은데도 왠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끝이 자꾸만 움찔댔다.
등 뒤로 신경을 집중하자 강태영의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뒤로 돌아 똑바로 누워 있는 그를 살폈다. 높은 콧대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반대쪽 얼굴의 음영이 더 짙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도 몰랐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는 내가 봤던 어느 사람보다도 좋았다. 하영 이모가 워낙 예쁘니까 그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강태영의 외모 역시 설명하기에는 입 아픈 수준이었다.
평화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중, 고등학교 내내 녀석이 좋다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 정도였다. 대학생 누나들까지 강태영의 번호를 물어보곤 했을 정도였으니. 어릴 땐 이렇게 모자람 없이 다 가진 녀석을 두고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강태영이 이런 새끼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죽은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이 누워 있는 강태영이 이질적이었다. 정말 자고 있는 게 맞는지, 눈만 감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한참을 노려보듯 쳐다보다가 얼굴 위로 손바닥을 흔들어 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손바닥으로 미세하게 느껴지는 숨결이 아니라면 마치 죽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잠잠했다.
나는 강태영의 얼굴 위를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허공에서 녀석의 목을 조르듯 모양을 잡아 봤다.
그냥 죽여 버릴까?
무의식적인 행동과 생각이었다. 실제로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뭔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 강태영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내렸다.
한 번 더 강태영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흔들었다. 작게 부채질을 해 바람도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도 강태영은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의 소음도 만들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느리게 한 발씩 침대 밖으로 뻗었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강태영의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럽게 잠든 녀석의 손가락을 잡았다.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자꾸만 입 밖으로 이상한 신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현기증이 나고 맥박이 미친 듯 뛰어대는 것도 다 같은 이유 때문일 터였다.
숨도 참은 채 강태영의 손가락을 이용해 지문 인식을 마쳤다. 조심스럽게 강태영의 기척을 살폈다. 숨소리도 변하지 않았고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잠금 화면이 풀린 휴대폰을 들고 거실로 나와서야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성지후의 연락처를 찾았다. 그러나 저장된 번호도 없었고 지난번 내 사진을 보냈던 흔적도 다 지운 건지 찾을 수 없었다.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당연히 저장은 해 뒀으리라 생각했는데 낭패였다. 머리를 쥐어짜내도 번호의 가운데 숫자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도무지 뒷자리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결국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는 건가.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고 진절머리가 나서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텅 빈 북을 치는 소리가 났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 강태영이 휴대폰을 없애지도 않을 거고. 이런 거라면 매일 살 부대끼고 사는 상황에서 얼마든지 기회는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욕심내다가 일을 그르치기보다는 진짜 기회를 잡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강태영은 아까 전 자세 그대로 누워 있었다.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놓아두고 조심스럽게 그의 옆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체온 높은 살이 닿았다.
강태영이 미동 없이 잘 자고 있다는 걸 두 번 세 번 확인했지만 언제든 갑자기 두 눈을 뜨고 잠이라고는 잔 적조차 없는 기색으로 나를 바라볼 것만 같아서 빠르게 눈을 감았다.
•••
잠에서 깨자마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엔 나 혼자였고 소리는 거실 쪽에서 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지?
“강태영?”
내 부름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까부터 신경을 갉작이던 소리는 거실에 틀어 놓은 TV에서 나고 있었다.
“이게…….”
처음엔 성인 방송 채널을 틀어 놓은 줄 알았다. 누가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다고 생각할 만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으니까.
살짝 화질이 좋지 않은 영상 속 인물이 나라는 걸 알기 전에는.
그렇지만 영상 속 인물이 나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화면을 끄고 그 앞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막았지만 미세한 틈으로 희미하게 다른 소음이 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 봤어? 잠깐 나갔다 온다고 안 껐는데.”
강태영의 태연한 목소리가 가린 손바닥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깨 위로 손이 올라온 순간 몸을 털며 손길을 피했다. 뒤돌아본 곳엔 강태영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내 쪽을 향해 등과 무릎을 살짝 굽힌 채였다.
“뭘 그렇게 피해.”
“……뭐, 뭐야?”
“뭐가?”
“저거 뭐냐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강태영에게 조금 전까지 영상을 내보이고 있던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녀석은 뭘 새삼스럽게 그러느냐는 듯한 얼굴로 “봤으면서 뭘 물어?” 하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너…… 저거 나 보라고 틀어 놨어?”
“그럼 누구 보라고 틀어 놔, 이 집에 사람이라곤 너랑 나 둘뿐인데. 어땠어? 잘 나왔던데, 난 그 영상 볼 때마다 세 발은 빼.”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말이었다. 이런 행동을 하겠다고 뇌가 사인을 보내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따로 조준한 것도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강태영의 입가로 침이 떨어졌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녀석이 잠시 뒤 혀를 내밀어 내 침이 묻은 쪽을 느리게 핥더니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해당 부위를 부러 소리 나게 빨았다.
“달다, 더 뱉어 봐.”
여전히 강태영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고 그에 반해 나는 씨근덕거리며 울 듯 인상을 찡그렸다.
“……왜?”
“뭐가 왜야.”
“…….”
“잘 때 손가락 간지러워 죽는 줄 알았네.”
강태영이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새벽녘 내가 녀석의 휴대폰 잠금 화면을 풀기 위해 썼던 손가락이었다. 동공이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강태영은 작게 웃더니 곧 언제 웃었냐는 듯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 손목을 잡아챘다.
강태영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욕실 안이었다. 아프고 차가웠다. 선반을 열어 뭔가를 꺼낸 강태영이 욕실 바닥에 널브러진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윽, 너 뭐 하는…… 싫어!”
강태영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발로 쳐내려고 하다가 발목이 잡혀 역으로 끌려갔다. 녀석이 들고 있는 건 면도기였다. 날이 선뜩하게 빛났다.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금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됐다. 면도날이 금방 맨살에 닿았다.
“칼 댔는데도 움직이면 너 다친다? 이거 보기보다 날카로워.”
발버둥 치는 발목을 틀어잡으며 강태영이 말했다. 걱정하는 듯했지만 실상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나를 다치게 하겠다는 경고와 다를 바 없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싫어서 죽을 것 같은 눈으로 강태영을 쳐다봤다.
“하지 마…….”
“뭐 할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그냥 하지 마, 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내 말을 사뿐히 무시한 강태영이 내 다리를 벌리며 그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강태영의 양 허벅지 위로 벌어진 두 다리가 하나씩 걸쳐졌다.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이어지는 팔뚝으로 욕실 바닥을 지탱하고서 숨을 죽였다. 강태영을 믿을 수 없었다. 녀석에 나에게 하려고 하는 짓도 그 의도를 알 수 없었고. 날카롭다는 저 칼날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살갗에 파고들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태영은 간밤 일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지금 이건 그 일로 인한 일종의 나를 벌하는 행위였다.
살갗을 스치는 칼날과 발기하지 않아 물렁물렁한 살덩이를 조심스럽게 잡는 강태영의 손길에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이상한 신음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나는 안간힘으로 몇 번이나 흘릴 뻔한 신음을 참아야 했다.
서걱서걱.
침묵이 흐르는 공간을 다른 소리가 메웠다. 강태영은 의외로 섬세하고 신중했다. 녀석이 지금 하는 짓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표정만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심혈을 기울여 그림이라도 그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실제론 그것과는 한참 먼 행위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떨리는 허벅지를 가까스로 단단히 하고 눈을 감았다.
“다 됐다.”
내게는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간 후 들린 강태영의 말에 눈을 떴다. 시야에 걸린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민둥한 아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생각보다 더 생경한 꼴에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괜찮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읏.”
대답을 더 종용하지 않고 웃기만 하던 강태영이 미세하게 발기한 성기를 퉁, 튕겼다.
“섰네?”
성기 끝 벌어진 구멍을 손톱으로 긁으며 하는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 흣.”
양 겨드랑이 사이로 강태영의 손이 들어온다 싶더니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었다. 강태영은 나를 세면대 위에 앉다시피 기대게 했다.
그 움직임에 반쯤 발기한 성기가 흔들렸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옆으로 꿈틀 움직인 성기를 본 강태영이 살짝 웃더니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하지, 마……앗, 으.”
미묘하게 성기 근처를 지분거리던 커다란 손이 기둥을 감싸 쥐고 악력을 조절했다.
쿵 소리를 내며 정수리가 거울에 닿았다. 위로 들친 턱을 강태영이 이로 살짝 깨물었다. 아래를 조였다 푸는 힘에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아,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였다가 조금 더 힘을 풀었다가 다시 좀 더 강하게. 위, 아래로 반복적으로 훑고 흔드는 손짓에 나는 헉, 소리를 내며 숨을 참았다. 프리컴이 줄줄 새어 나왔다. 투명한 액이 흘러나와 강태영의 손을 적셨고 그의 움직임이 더 부드러워지게 도왔다. 뜨거운 손바닥이 조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면 아랫배가 잘잘 떨렸다. 간지러움이 지나쳤다. 벌레 수십 마리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감각이 좋았다. 동시에 감질나서 누군가 그것들을 다 터트려 죽여 버리고 배를 강하게 쳐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래로 내려간 강태영이 민둥민둥해진 아랫배를 혓바닥으로 핥고 부리 쪼듯 쪼았다. 느끼는 건지 발기한 성기가 멋대로 움찔거렸다. 내 몸인데도 보고 있기 민망했다. 강태영이 민둥한 살을 앞니로 씹으면 발끝이 찌릿했다. 볼수록 수치스럽고 이상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눈을 질끈 감자 감각은 더 선명해졌다.
부르르.
아기 배에 대고 하듯 볼을 부풀려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기도 했다. 발가락이 움찔거리고 몸이 꼬였다. 혀의 넓은 면이 살갗을 집요하게 핥다가 발기한 기둥이 시작되는 부위에서는 앞니를 세워 갉작이면 내 몸은 속절없이 튕겨 오르며 비명을 닮은 신음을 내질렀다.
“좆 이렇게 흔들어 주는 거 좋아?”
이제 완전히 발기한 좆은 강태영의 손 밖으로 삐져나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요도구에서 프리컴이 줄줄 흘렀다.
“하으으읍, 아!”
기둥을 손으로 감싼 강태영이 성기 끝 갈라진 구멍을 손톱으로 작게 긁었다. 나는 발작하듯 소스라치며 강태영의 어깨를 짚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풀린 다리가 휘청휘청 휘어졌다. 강태영이 잡고 있는 탓에 넘어지지 않았지만 몸은 어디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흐물흐물했다.
강태영은 위아래로 기둥을 쓸며 좆머리를 입에 물고 빨았다. 아랫배가 땅땅하게 땅겼다.
“흐아, 흐앗.”
강태영이 기둥을 강하고 길게 빤 후 뱉어내자마자 참을 새도 없이 긴 사정이 이어졌다.
“아응…… 아, 아.”
팔딱거리며 저절로 오그라드는 근육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흰 정액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자, 잠깐…… ! 하, 우윽.”
배가 둥글게 말렸다. 머리를 치는 쾌감에 허리를 펼 수 없었다. 강태영은 경련하는 내 몸 곳곳에 입을 맞추며 회음부 살을 문질렀다. 그것만으로도 찌르르 아래가 떨렸다. 구멍 주변에 손가락이 미끄러져 닿기만 해도 내벽이 움찔댔다. 이 안으로 좆이 처박히는 상상을 하면 계속해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뒤로 하는 게 더 좋지, 너는?”
“하으으, 끕!”
손가락이 쭈욱 미끄러져 들어왔다. 수월하게 들어찬 손가락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강태영의 손가락이 안쪽에서 벌리고 오므리며 가위질할 때마다 찌걱찌걱 물에 젖은 소리가 들렸다.
“후읏.”
몸이 아래로 꺼진다 싶더니 어느새 바닥에 거의 누운 채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엉덩이가 치켜 올라가 아래가 훤히 내비쳐졌다. 강태영의 손가락이 늘어났다. 세 개, 네 개. 아프기는커녕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반응 좀 봐, 앞 만져 줄 때랑 완전 달라. 알아?”
작게 웃던 강태영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손가락을 한꺼번에 쑥 빼냈다. 흥건하게 젖은 손이 허벅지를 꾹 눌렀다. 몸이 거의 반쯤 접혔다.
아아……!
딱딱한 바닥에 짓눌린 엉덩이가 아파 비명을 지르는 입이 틀어막혔다. 얽혀 들어오는 혀와 함께 몸이 좀 더 편하게 눕혀졌다. 그래도 딱딱한 바닥은 여전했다. 다만, 꼬리뼈 쪽이 아니라 등허리가 넓게 닿으니 아픔은 덜했다.
쯔긋.
“하, 아윽.”
흉기 같은 살덩이가 밀고 들어오자 구멍 입구 주름이 안으로 함께 밀려들면서 빠듯하게 벌어지는 게 훤히 보였다.
음모가 사라지자 꿈틀거리며 거대한 좆이 느리게 들어가는 통로가 다 비쳤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징그러우면서도 자극적인 꼴이었다. 좆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가 쏠려 분홍빛으로 살이 물들었다.
벌벌 떨면서도 핏물이 쏠린 것처럼 진한 분홍빛으로 번진 입구를 가르고 들어오는 기둥을 나도 모르게 쳐다봤다.
거미줄처럼 엉겨 붙은 흰 실이 난잡하게 늘어났다. 푹, 푹 좆이 박힐 때마다 입구에 거품이 일었다.
“읏!”
“너 더 잘 보라고.”
꼿꼿하게 발기한 내 성기를 눌러 배에 꾹 붙게 만들며 강태영이 웃었다.
“네가 봐도, 후으, 미쳤지? 아, 씨바알…… 하.”
귓가로 떨어지는 강태영의 숨결이 뜨겁고 축축했다. 그러나 녀석의 물음이 무색하게 나는 그 광경을 더 감상하지 못했다. 음낭까지 닿을 정도로 훅 치고 한꺼번에 들어온 성기 탓이었다.
“아, 아아아!”
벌어진 턱이 떨렸다. 한껏 뒤로 젖혀진 머리가 바닥에 닿았다. 쿵, 꽤 강하게 부딪혔는데도 아래의 감각이 너무 강렬해서 머리 쪽은 아프지도 않았다.
닿은 소리를 들은 강태영이 내 머리와 바닥 사이에 손바닥을 넣었다.
“하아, 후회된다.”
꾸욱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으며 올라온 강태영이 내 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럴 걸, 진짜.”
“으으, 흐앗.”
“진짜 후회돼.”
쪽, 쪽. 부리 쪼듯 자신이 깨물었던 턱에 입을 맞추던 입술이 곧 볼과 코, 이마로 올라왔다. 감은 눈 위쪽으로도 입술이 쏟아졌다. 뒷머리를 손으로 둘러 덮듯이 쥔 강태영의 손 때문에 아래에서 치받는 힘에도 내 몸은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만큼 강태영의 성기는 온전히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만큼 끝까지 들어와 박혔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 하며, 내벽 끝닿는 부분에서 쥐가 나는 것처럼 전기가 오르고 간지러웠다.
복근이 돋아나고 상체가 앞으로 들렸다. 강태영이 부들부들 떠는 내 팔을 자신의 목에 감겼다.
“하윽, 아, 흡!”
열 발가락이 모두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어느새 강태영의 어깨 위에 올려진 다리가 바람에 이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자신의 얼굴 옆에서 달랑이는 발을 발견한 강태영이 곧 몸을 일으켜 복숭아뼈며 발목도 혀를 내어 핥았다. 굽은 발가락 사이사이를 핥고 발가락을 빨았다.
츄으읍.
젖은 입 안은 뜨거웠고,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말캉한 혀는 너무 부드러웠다.
그 모든 것을 느끼는 동시에 강하게 빨아들이는 흡입력까지 더해지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강태영이 닿는 곳곳이 형용할 수 없이 좋아서 뇌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빨간 혀가 들락거렸다.
몸이 이렇게 접힐 수도 있는 줄 그 전에는 미처 몰랐다. 희음부에 경련이 일었다.
“하아아읏……! 아.”
강태영과 내 상체에 갇힌 성기에서 투명한 물이 솟구쳤다. 내 턱은 물론이고 강태영에게도 물이 튀었다.
입술 쪽에 튄 물을 혀를 내어 핥은 강태영이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붙이고 씩 웃었다.
내 몸에서 쏟아진 물을 핥아낸 혀가 곧 입 안으로 들어왔다. 혀끼리 비벼지는 소리가 야했다. 녀석의 혀에서 묘한 맛이 났다. 울고 싶었다. 슬프지도 않은데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좋으면 눈물이 난다던데 이 감정이 그것인가 싶었다.
“그렇게 좋아? 울 정도로?”
울먹이는 기색을 알아챈 강태영의 물음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믿고 싶지 않게도 더 해 달라는 말을 내뱉으면서.
욕실에서 시작된 섹스는 침실까지 이어졌다. 몇 차례 사정 후 축 늘어진 나를 들고 침실로 돌아온 강태영은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경련이 이는 회음부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어쩌다 스친 게 아니라 마치 새로운 구멍이라도 뚫으려고 하는 것처럼 강한 힘이었다. 아파서 강태영의 손목을 잡으며 파드득 떨었다. 다리 사이를 오므리는 나를 보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프냐고 묻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 아파. 흑……!”
민감도가 오른 몸은 건드리기만 해도 미모사처럼 바짝 오그라들며 떨렸다. 질척한 아래는 손바닥으로 살짝 스치기만 해도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젖어 있었다.
유륜을 한입에 삼킨 강태영이 볼이 팰 정도로 강하게 빨았다. 있지도 않은 젖이 빨리는 것 같았다. 한 번 빨고 뱉어냈을 뿐인데, 손도 대지 않았는데 욕실에서부터 이미 뾰족하게 솟은 유두가 투명한 침으로 번들거렸다.
“흐앗, 아.”
솟은 유두를 엄지로 둥글게 굴리며 문질렀다.
“윽.”
반대편도 똑같이 빨아대던 강태영의 성기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조금의 막힘도 없이 끝까지 박아 넣은 강태영은 상체를 세웠다. 그는 양 가슴을 괴롭히며 나를 내려다봤다.
느리게 뒤로 빠졌다가 다시 끝까지 밀어 넣는 감각에 몸을 떨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바닥 아래에 감겨 오는 이불을 잡아 뜯을 듯 움켜잡았다.
안에 싸질러진 정액이 얼마나 되는지 속이 더부룩한 것도 같았다.
“소리, 내.”
강태영이 깨물린 입술을 벌리며 지시했다. 녀석의 말에 나는 목을 간질이는 신음을 더욱 참으려 했지만 윽, 윽 튀어나오는 억눌린 신음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그거라도 좋다는 듯 눈이 풀린 강태영이 예쁘게 웃었다.
•••
모든 건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고 끝났다. 말로 직접 하지 않았지만 강태영의 협박은 충분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강태영이 주는 비타민을 받아먹고 집을 나서는 그를 얌전히 배웅했다.
잠깐 자고 일어난 후에는 술을 찾았다. 시간을 죽이는 일을 매일 반복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어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술이었다. 관심을 안 가지고 있어서 몰랐지만 이 집엔 꽤 다양한 종류의 술이 있었다. 술을 마시면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호기심에 손을 댔다가 이제는 강태영이 없는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 찾는 지경이 됐다.
와인은 마셔 보니 딱히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그보다 더 적은 양으로도 빠르게 알코올에 절여질 수 있는 게 좋았다.
와인 셀러를 지나쳐 양주가 있는 선반으로 향했다. 오늘은 보드카를 꺼냈다. 내가 야금야금 마셔서 반쯤 남아 있는 병을 가지고 거실로 향했다. 컵은 쓰지도 않았다. 강태영이 따로 말을 하지 않아서 내가 술을 마신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모르는 게 없는 놈이니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을 보면 이건 녀석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웃겨서 픽 웃으며 뚜껑을 열고 유리병 주둥이에 입을 갖다 댔다.
나가기 전에 강태영이 뭐라고 했더라. 끼니 거르지 말고, 또……. 뭐라고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마치 몇 시간 전의 일인데도 오래된 일처럼 기억이 희미했다. 어쩌면 듣는 순간부터 딱히 강태영의 말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강태영이 나에게 할 말이야 사실 뻔했다.
밥 먹어.
기다려.
헛짓하지 마.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도 별다른 말은 없었을 거였다. 나는 의무처럼 강태영이 했던 말을 기억해내려고 하던 것을 멈추고 몸을 기울였다.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지만 물도 찾지 않았다. 몇 모금 마셨는데 벌써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딘가를 부유하는 기분이 좋았다. 소파 가죽이 이랬나 싶을 정도로 물컹거렸다. 나는 비죽비죽 웃으면서 소파 위에 볼을 비볐다. 손이 가볍다 싶더니 술병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언제 놓쳤는지도 모르겠다. 쏟은 술을 닦고 유리병을 치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른 강태영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을 하도록 뇌가 두 개로 쪼개진 것 같았다. 강태영을 기다리는 나와 영원히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원하는 내가 매일 싸웠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둘이 있는 게 낫지.
요즘 강태영은 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상태였다. 폭력도 쓰지 않았다. 난폭한 섹스도 좋았다. 술 같은 게 없어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해 주는 짜릿함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생활에 적응해 버린 것 같았다. 몇 번의 실패는 의욕이라는 것을 앗아 갔다.
며칠 전에는 성지후와 한 번 더 연락했다. 내가 먼저 통화를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강태영이 흔쾌히 휴대폰을 건네줬다.
이건 또 무슨 함정이야? 라는 물음표를 달고 강태영을 바라보자 녀석은 웃는 낯으로 ‘너 요즘 얌전하고 착하게 구니까 상 주는 거야.’라고 했다.
성지후는 나에게 공부가 잘되어 가고 있는지, 어려운 점은 없는지, 그렇게 칩거하면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혀가 굳어 버려서 대화를 잘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진짜 수능이 끝나야만 얼굴을 볼 수 있는 건지 물었다. 나는 강태영의 옆에서 ‘응.’, ‘아니야.’ 정도의 대답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독한 새끼네, 이거.
나에게 네가 그렇게 독한 놈일 줄 몰랐다는 성지후의 말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광대가 저릿할 정도로 웃어 본 것 같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웃긴 말도 아닌데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웃어 재낀 게 나조차도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엔 따라 웃던 성지후도 내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자 나중에는 좀 당황한 것도 같았다. 공부하다가 돌아 버린 거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진심이었지만 성지후는 장난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재수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냐고 웃는 녀석의 목소리에 좀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내가 진짜 미친 것 같았다.
‘엄청 잘 웃네.’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돌려주자 강태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낮게 말했다. 녀석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내 몸이 움찔했지만 강태영은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찌푸린 눈으로 나를 얼마 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삐친 애처럼 하루 종일 툭툭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 때문인지 모든 감각이 둔해졌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가 쿵 하고 소파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청각이며, 촉각이며 모든 게 둔해져서 그런지 평소에는 기민하게 알아차리던 인기척이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느끼지 못했다.
“……어.”
눈앞에 서 있는 인물에 딱 좋은 정도로 풀려 있던 근육이 아예 얼어붙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희게 질린 얼굴로 굳어 선 채 엉망인 날 내려다보는 인물은 하영 이모였다.
처음엔 악몽인가 싶었다. 얼마 뒤 정신을 차린 이모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술에 취해서 헛것을 봤다거나 꿈이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너 뭐야!”
아직 바닥에 붙어 있던 몸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몇 번을 두들겨 맞고 나서야 이모가 나에게 들고 있던 가방을 사정없이 휘둘렀음을 알았다.
“아윽.”
가방에 박혀 있던 징이 얼굴을 때렸다. 광대가 얼얼하게 아팠다. 나는 뒤늦게 얼굴을 두 팔로 막으며 피했다. “이모, 이모! 잠깐만요.” 하고 잔뜩 꼬인 혀로 웅얼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퍽퍽 소리가 요란했다. 술기운 탓인지 너무 놀라서인지 물리적인 아픔은 크지 않았다.
이모는 연신 악쓰며 소리쳤다. 기겁할 만했다. 내가 이 집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만할 텐데 외관상 보이는 모습 하며 바닥에 엎어진 술병까지 이모가 펄쩍 뛰며 소리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한참 전에 집을 나간 애가 끔찍하게 예뻐하는 아들의 집에서 헐벗은 채로 대낮에 잔뜩 취해서 뒹굴뒹굴하고 있는 모습 따위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겠지.
아…….
생각할수록 퇴로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변명조차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요즘 내내 머릿속이 개운하지 않고 뿌옇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생각이란 것 자체를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폭격처럼 쏟아지던 폭력이 멈췄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리고 어지러운 것을 참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힘이 빠진 건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희게 질린 낯으로 이모가 바닥에 주저앉아 움직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르던 술기운이 찬물을 끼얹은 듯 확 깼다.
“너…… 너, 네가 지금…… 여기 뭐 하는.”
나는 이모 주변을 둘러봤다. 집이 완전 난장판이었다. 이모가 곱게 싸 왔을 테지만 지금은 바닥에 떨어진 반찬통은 뚜껑이 부서졌는지 바닥에 온갖 음식물을 토해낸 모양새로 엎어져 있었다.
“이건 뭐…….”
바닥을 짚었던 손바닥이 흥건히 젖자 손을 들어 올린 이모가 뜨악한 표정으로 그 옆에 굴러다니고 있는 보드카 병을 발견하고 다시 나를 쳐다봤다.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가 지독했다. 함께 살면서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이모…… 아, 저 그게…….”
정신은 아찔했는데 말이 묘하게 느리고 발음이 샜다. 똑바로 하려고 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이모의 시선이 내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더 커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눈이 커졌다. 이모의 눈에 경멸이 깃드는 것을 보자 수치심이라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몸이 간지러웠다.
“……너 옷 제대로 입고, 따라 나와.”
“…….”
“당장!”
이성을 찾은 듯 보이는 이모가 일어서며 말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온통 강태영의 옷이었지만 대충 손에 잡히는 옷을 걸쳐 입었다.
뭔가가 몸을 감싼다는 것에 아직 거부감이 남아 있었지만 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작게 휘청거리며 이모에게 다가갔다. 이모는 내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 현관으로 향했다.
아직 술기운이 남은 건지 몸이 아주 완벽히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발을 밟고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며 이모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빨리했다.
“이, 이모.”
“이모라고 부르지 마!”
이모가 던진 가방이 가슴에 부딪힌 후 떨어졌다. 가방을 다시 줍지도 않고 현관 밖으로 나간 이모가 어딘가로 전화했다.
“죄송, 죄송해요.”
나는 내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사과했다. 이모가 치켜뜬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어느새 현관문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나는 신발도 신지 못해 맨발이었지만 이모나 나나 어느 누구 하나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일손 필요한 쪽으로 연락해서 사람 좀 보내요. 최대한 빨리.”
이모가 알 수 없는 말로 통화를 마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간 이모가 내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타.”
“……아, 저.”
“안 타?”
갑자기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날 며칠 동안 산소가 없어 말라 죽어 가거나 아래로 추락하는 상상 따위가 시작되려고 하면 귀신같이 뇌가 차단기를 내렸다.
“빨리 타라니까!”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이모가 큰 소리를 냈다. 이모의 흰 얼굴이 더 희게 질려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발을 내디뎠다. 원래라면 절대 타지 못했겠지만 역시나 술이 안정제 역할이라도 하는 건지 전처럼 죽어 버릴 것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바를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20초만 버티자고 다짐했다. 옆에서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시야가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며 뱅뱅 돌았다.
20, 19, 18, 17…… 숫자가 점점 더 낮아질수록 다행히 아찔한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섰고 식은땀이 났지만 죽지 않고 그 안에서 버틴 나는 꽤 오랜만에 지상 땅을 밟고 섰다. 내가 죽지 않고 무사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는 감상을 즐기기도 전에 하영 이모가 머리채를 잡고 끌었다. 맨발로 끌려가는 나를 1층에 서 있던 경비가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게 흐릿하게 보였다.
•••
차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이제야 술이 깨는 건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된 나는 티 나지 않게 내 꼴을 살폈다. 내 모습을 살피고 나자 더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뒤늦게 제대로 인지한 뇌는 과부하가 걸린 듯 좀처럼 의미 있는 사고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그 집엔.”
한층 차분해진 음성으로 이모가 물었다. 놀라서 고개를 돌렸지만 이모는 차가운 눈으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며, 몇 주…….”
“너 내가 우습니?”
“아, 아뇨! 아니에요, 이모.”
“이모라고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니?”
이렇게 서늘한 음성은 들어 본 적 없었다.
“너 태영이랑 무슨 사이……. 후, 아니다.”
또 어떤 질문이 들려올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이모는 나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강태영의 본가였다. 이모가 살고 있고 내가 살았던 그 집. 아무 말 없이 내린 이모를 따라 내렸다.
“따라올 거 없어, 넌 여기서 기다려.”
현관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이모를 따라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이모가 그 말만 남기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눈앞에서 육중한 문이 닫혔다. 다행히 고급 주택가 안쪽이어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모자라도 쓰고 나올걸. 아까는 그런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길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잠시 뒤 웬 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지나가는 차이겠거니 생각하고 고개를 들지 않았는데 차가 멈춰 선 곳은 내 앞이었다. 검은 차 안에서 웬 남자 두 명이 내렸다.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불쾌하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백하민 씨?”
“네? 제 이름을 어떻…….”
“잡아.”
나를 알 리도 없는 남자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더니 팔이 잡혔다. 우악스러운 힘이었다. 반사적으로 급히 털어냈는데도 갈고리 같은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잡는 힘이 더 강해지더니 아예 근육을 쥐어짜기라도 할 것처럼 비틀어서 아픔에 악 소리쳤다. 조용한 주택가에는 내 비명만 크게 울렸다. 남자들은 사람을 제압하는 데 익숙해 보였다. 살이 좀 빠졌다고는 하나 키나 뼈대 자체가 엄청 얇은 편도 아닌 내가 몸부림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지가 결박돼 공중으로 들렸다. 차 문이 열리고 남자가 뒷좌석에 나를 집어 던져 넣었다.
발을 뻗어 닫히려는 차 문을 밀어내고 얼른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남자가 내 머리를 밀어 넣으려고 했다. 까딱 힘을 풀었다가는 목이 삐끗 꺾일 것 같았지만 나는 자세를 고수하고 계속 힘을 줬다.
“얌전히 갑시다, 좀.”
“허억, 누, 누구…… 왜, 이러는……!”
“그건 당신이 알 거 없……. 억!”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나에게 살기를 띠고 있던 남자가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뭐야!”
그사이 트렁크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던 남자가 소리치며 이쪽으로 달려오려는 것 같았지만 막혔다. 갑작스러운 소란 때문인지 내내 굳게 닫혀 있던 저택 문이 열렸다.
“태영아!”
흉기를 휘두르려던 남자가 멈칫한 사이 강태영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을 발로 차 떨어트렸다.
이모가 달려 나왔지만 강태영은 무섭게 굳은 낯으로 멍청하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를 차에서 꺼내기만 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아니, 일단 잠깐 집에 들어와, 응? 엄마랑 얘기 좀 하고 가.”
뒤에서 이모가 애달프게 강태영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다. 대꾸하지 않고 나를 자신의 차 조수석에 태운 강태영이 보닛을 돌았다. 이모가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강태영은 투명 인간처럼 이모를 지나쳐 운전석에 올라탔다. 황망한 시선이 이쪽으로 닿았고 강태영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태영은 운전하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독 같았다. 아프고 무서웠다. 나는 눈치도 보지 못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애꿎은 허벅지만 쥐어뜯었다.
“이젠 엘리베이터 타도 괜찮나 봐?”
처음으로 강태영이 입을 연 건 다시 돌아온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별장에서 돌아오던 날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겠다며 난리를 떨어대던 나를 기억하고 하는 말이었다.
“이러라고 먹인 약은 아니었는데.”
먹인 약? 강태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녀석을 바라봤다. 가라앉은 시선이 나를 꿰뚫듯 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화가 난 건지, 아무렇지 않은 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오히려 생각보다 너무 고요해서 괜히 두려워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순간 깨달았다.
“아, 악!”
뒤에서 내 오금을 발로 걷어찬 강태영이 엎어진 내 멱살을 쥐고 빠르게 움직였다. 현관문에서 중문 그리고 욕실까지 정신없이 끌려갔다.
“우우븝…… 헉.”
순식간이었다. 머리카락을 낚아챈 강태영이 내 얼굴을 그대로 변기통에 처박았다. 충격에 한껏 벌어진 입 안이며 코 속으로 물이 들어찼다.
꼬르륵 올라온 물거품이 보글보글 끓었고, 나는 허공에서 한참 허우적거리던 손으로 겨우 변기통을 붙잡았다.
강태영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지만 물이 들었다 나가는 귀와 쇼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푸하……! 으, 끅!”
젖은 머리와 얼굴을 타고 물이 흘렀다. 뒷머리를 누르는 힘이 다시 강해지는 게 느껴져서 필사적으로 변기 커버를 잡고 버텼다.
“힘, 빼.”
감정이라고는 담기지 않은 목소리에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강태영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손에서 힘을 빼는 순간 다시 변기통에 머리가 처박힐 걸 알았기에 쉽게 그의 말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머리통을 쥐고 있는 손에서 느리게 힘이 빠졌다. 어깨 근육이 빳빳해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나 역시 천천히 힘을 뺐다.
“으풉.”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머리가 변기 안에 처박혔다. 하필 숨을 들이쉬고 있을 때였다. 코를 통해 물이 들어왔다. 눈도 감지 못한 채 도리질 쳤다. 비축하고 있는 산소 따위는 없었다. 금세 숨이 막혔다. 바닥에 널브러진 다리를 발버둥 치며 머리를 누르고 있는 손을 잡아 뜯었다.
“푸하으, 끄읍.”
강태영이 진짜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지려고 할 때, 머리가 들렸다.
파하!
허억, 허억. 거칠게 호흡하는 소리가 듣기만 해도 괴로울 정도였다.
“으윽, 흑.”
이번엔 반대로 머리카락을 잡고 고개를 꺾었다. 시야가 천장을 향했다. 강태영의 얼굴이 시야 가득 걸렸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지만 강태영이 내 얼굴을 훑듯이 보고 있음을 알았다.
물과 눈물로 온통 범벅이 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강태영이 혀를 차더니 손에서 힘을 뺐다.
수납장에서 새 수건을 꺼낸 강태영이 내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뭉개지는 두툼한 천에 얼굴을 맡겼다. 조심성 없이 아무렇게나 피부 위를 문대던 천이 사라지고 양 겨드랑이 사이로 팔이 들어왔다.
움찔 몸을 굳혔다. 반사적으로 피하며 밀어내려고 했던 손짓을 중간에 멈췄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려는 듯 가만히 있던 강태영은 내가 힘을 풀자 내 몸을 안듯 끌어 올렸다.
그에게 안기다시피 걸음을 옮기고 나니 침대가 무릎에 닿았다. 쓰러지듯 침대 위로 엎어졌다. 완벽하게 닦이지 않은 물기가 이불을 축축하게 적셨다.
다행이다.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
살, 았, 다.
입 안에서 그 말만이 맴돌았다. 조금 전만 해도 변기통에 머리가 빠져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자마자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타고 올라왔다.
“이딴 걸로도 빌빌거리면서 어딜 가겠다고.”
엎드린 채 발발 떨고 있는 나를 향해 강태영이 조소했다.
“백하민.”
강태영이 젖은 내 볼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왜 이렇게 학습 능력이 없어.”
“…….”
“누가 함부로 나가래?”
“…….”
“아무나 따라가도 될 것 같았어? 지난번에 봐줬더니 괜찮을 것 같았어?”
“이, 이모는 아무나 아니…….”
“내가 아니면 다 ‘아무나’야.”
헐떡이면서 말하는 내 목소리에 공포심이 가득했다. 터지는 울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놀라서 이러는 건지 무서워서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입 안으로 연신 짠물이 들어왔다.
“네 발로 따라 나갔잖아. 못 타겠다던 엘리베이터도 타고.”
“…….”
“아니야?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봐.”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나 보자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강태영의 말이 사실이었다. 어됐든 내 발로 따라나섰고 녀석의 앞에서는 못 타겠다고 버텼던 엘리베이터도 탔다.
“내가 거기 안 갔으면 너 어떻게 됐을지나 알아?”
말을 이으며 강태영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좁은 틈을 비집고 밀려오는 좆에 저절로 엉덩이가 위로 들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당연히 강태영의 성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묘하게 다른 느낌에 겁을 집어먹은 채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아, 흐.”
내 안으로 억지로 파고들고 있는 것은 강태영이 아니라 그의 손에 들린 모조성기였다. 싫어서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강태영은 내가 도망가도록 두지 않았다. 놀라서 벌어진 내 눈을 보고서도 강태영의 시선은 무심하기만 했다.
“싫…… 하윽.”
온기라고는 없는 물건이 무자비하게 안을 파고들었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벌어지려고 하는 허벅지를 강태영이 잡아 모았다. 전희도 윤활제도 없이 빠듯하게 다물린 구멍은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모조성기 손잡이 부분을 눌러 막무가내로 안쪽으로 밀어 넣던 강태영이 남은 부분을 잡고 둥그렇게 돌렸다. 제대로 풀어 주지 않아 밀어 넣은 만큼 뱉어내던 내벽이 조금씩 빠듯하게 모조성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흐윽. 이거 싫어…….”
“너 좋으라고 이러는 것 같아?”
확인 사살이 떨어졌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하는 말에 기분이 더 비참해졌다. 단순히 벌을 주기 위한 행위라는 걸 여과 없이 드러내는 말이었다. 차라리 강태영의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뒤를 쑤시고 있는 물건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았다.
“너는 말로 해서는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아, 안타깝게.”
강약 조절도 요령도 없이 안쪽으로 쑤셔지기만 하는 물건에 자세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똑바로 힘을 주라는 무서운 음성과 함께 손이 날아들었다.
“히윽, 이, 이거 싫…… 아, 말고, 흐윽……. 이거 마, 말고.”
“정말 널 어떻게 해야 좋을까.”
모조성기가 끝까지 들어왔다. 배 속이 더부룩했다. 밀려 나오지 않을 때까지 모조성기를 꾸욱 눌러 밀어 넣은 강태영이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네발짐승처럼 엎드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몇 번이고 처맞은 엉덩이가 뜨거웠다. 보지 않아도 살갗이 잔뜩 부풀었을 게 분명했다.
이런 건 싫었다. 강태영에게 차라리 네 걸 넣어 달라고 비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울음과 함께 섞여 웅얼거리는 말을 나오는 대로 뱉어내자 강태영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턱 밑을 느리게 쓸던 손으로 내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강태영은 바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고 있으려면 목이 아팠지만 버텼다. 강태영의 눈이 붉어진 눈가를 쓸었다. 물기가 묻어 나왔다.
“끄윽, 욱.”
아프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힘에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턱을 감싸던 손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이거 싫어?”
강태영이 이미 가득 들어찬 모조성기를 꾹 누르며 물었다.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영의 앞섶이 얼굴에 비벼졌다. 천에 가려졌음에도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가 완전히 발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싫었으면 말을 잘 들어 처먹어야지. 안 그러려고 하는데도 왜 자꾸 이렇게 만들어.”
“……윽.”
“괴롭히고 싶게.”
“…….”
“일부러 그러지? 응?”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닿아 있던 천에 피부가 자연스럽게 뭉개졌다. 순간 강태영의 입에서 한숨을 닮은 뜨거운 신음이 쏟아졌다. 축축한 앞머리에 내려앉은 숨결이 무거웠다.
“네가 멍청하게 굴 때마다 씨발,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지이익, 소리와 함께 지퍼가 내려갔고 살짝 젖은 드로어즈가 드러났다.
“……우윽.”
훅 끼치는 더운 열기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뒤로 물리려다가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은 아픔에 눈을 질끈 감았다.
코와 양 볼에 문대어지는 성기의 윤곽이 뚜렷했다. 익숙한 냄새에 모조성기가 박힌 구멍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건 내가 명령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뇌 한구석에 기계적으로 박힌 명령어에 의해 반사적으로 수행된 움직임일 뿐이었다. 앞에 서 있기 때문에 강태영이 그 움직임을 보지 못할 거라는 게 유일하게 다행인 점이었다.
프리컴 때문인지 살짝 젖어 있던 부드러운 천이 내 얼굴에 문대진 후 더 빠르게 젖어 갔다.
“빨아.”
목을 긁는 듯 거친 목소리로 강태영이 명령했다. 나는 멍하게 속옷 윗부분을 앞니로 갉작이며 내렸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아랫배에 완전히 닿아 있던 천이 떨어지자마자 거세게 튕겨 나온 좆 머리는 완전히 번들거릴 정도로 질척했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손끝으로 찍어 닦아낸 강태영이 아까와 달리 달래듯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쓸었다.
그 행동 하나에 두려움으로 부풀었던 가슴이 조금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혀를 내어 천 위로 튀어나온 귀두 부분을 핥았다. 단단한 살덩이는 머리 부분부터 무식하게 컸기 때문에 한입에 삼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구욱, 윽.”
“잘 좀 해 봐.”
내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 강태영이 드로어즈를 완전히 내리고는 내 뒷머리를 잡아 눌렀다.
“커헉, 끄으으.”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맥박이 요동치는 성기가 그대로 처박혔다. 목구멍 안까지 찌르고 들어온 성기에 웩, 웩 헛구역질을 하는데도 강태영은 잡아 누르고 있는 손 힘을 풀어 주지 않았다.
“으브, 븝.”
나는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턱에서 아예 힘을 빼고 코로 숨을 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악, 우브.”
코로 호흡을 제대로 시작하자 오심이 줄어들고 헛구역질도 차츰 줄었다. 잘했다는 듯 강태영이 귀를 주물렀다. 손가락이 귓바퀴를 문지르고 귓구멍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나는 터진 입가를 느끼면서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찢어진 입가에서 비린 맛과 함께 볼을 타고 흘러 들어온 눈물 탓인지 짠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얻어터져 뜨거운 볼이 두꺼운 좆에 눌려 불룩 튀어나왔다.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끄윽, 끅 하는 소리까지 참을 순 없었다. 아무리 목구멍을 벌리고 받으려고 해 봐도 성기가 남았다. 어쩌다 한 번씩 강태영이 허리에 힘을 주면 음낭이 턱을 쳤다.
강태영은 형편없을 내 얼굴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뜨거운 시선이 얼굴에 닿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시선을 올려 그를 마주하지는 않았다.
감정을 느끼는 부분이 고장이라도 난 건지 괴로운 건지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 아팠다. 지금도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쑤셔진 채 모조성기가 박혀 있는 아래며 막무가내로 벌어진 입술과 목구멍, 붉게 부어오른 볼때기까지.
내내 고통뿐이었다. 그러나 발기한 채 꺼덕거리며 아랫배에 올라붙은 성기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내내 눈물이 솟구치고 있는데도 울고 싶었다. 그러니까 엉엉 소리 내서 울고 싶었다.
숨통을 틀어막을 듯 입과 목구멍을 가득 채운 좆도 괴로웠고, 내벽을 억지로 채우고 있는 모조성기도 싫었다.
무엇보다 이 상황이 다 끔찍했다.
강태영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 남자들에게 끌려갔으면 나았을까, 싶다가도 곧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을 따랐어도 겪게 될 건 절망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떤 길로 가도 비극적인 결말밖에 만날 수 없는 정해진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애초에 내 인생의 결말엔 행복한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계자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도망을 치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든 당장은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아도 잔뜩 농락당한 내가 결국 도달할 곳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럴 수가 없지.
“다른 생각 할 여유도 있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젓자 볼을 타고 주르륵 흐르던 눈물이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뻐업, 으으…… 켁, 흐윽.”
강태영이 제 좆을 잡고 입에서 빼냈다. 침으로 온통 번들거리는 성기가 빠져나가자 길게 늘어난 침이 이어졌다.
“아아윽, 흣.”
강태영이 뒤로 손을 뻗어 모조성기를 쑥 뽑아냈다. 하나도 젖지 않은 내벽이 부드득 쓸렸다.
“돌아.”
상체가 무너져 내린 나는 어깨로 기다시피 몸을 돌렸다. 이제는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것도 몰랐다. 아래를 강태영의 앞에 갖다 대고도.
바로 뜨겁고 미끄덩거리는 살덩이 끄트머리가 구멍 입구에 닿았다. 이상하게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귀두 끝만 깔짝거리며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던 성기는 강태영이 힘을 주려 하면 푹, 회음부를 미끄러지며 애꿎은 살을 찔렀다.
“……아파, 아.”
차라리 그냥 넣는 게 나았다.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한 움직임은 애꿎은 고통을 낳았다.
“아! 흐윽.”
팔을 뒤로 뻗어 붙어 오는 허벅지를 밀었지만 강태영이 매섭게 손을 쳐냈다.
“왜 밀어? 넣어 달라며. 다리, 벌리지 말고 붙여.”
강태영이 귀를 물어뜯으며 말함과 동시에 자신의 성기를 잡고 억지로 밀어 넣었다. 투둑,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름이 벌어지는 느낌이 선연했다. 입이 점점 벌어졌다. 곧 비명이 튀어나오려고 하는 입이 큰 손에 막혔다.
“하…….”
“읍, 읍! 우으윽.”
삽입은 멈추지 않았다. 갈 길을 잃은 손이 이불 위에서 어지럽게 흩어졌다. 북북 긁던 이불을 쥐어 잡고 양손을 벌벌 떨었다.
반쯤 억지로 욱여넣어진 좆은 천천히 안쪽으로 끝까지 들어왔다. 한 손으로는 내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는 배 아래에 손을 넣은 강태영이 자신의 상체로 내 등을 덮듯 꽉 끌어안았다.
치골 옆으로 단단한 허벅지가 내 몸을 결박하여 다리를 벌리지 못하게 고정했다. 떨어진 강태영의 손바닥은 내 입에서 흐른 침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윽, 빼, 빼 줘……. 이거 너무 아프……, 흐읍.”
“벌이니까 아파야지.”
배 안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이불에 닿은 살갗이 툭 튀어나와 이불에 닿는 감촉도. 회음부를 타고 뭔가가 느리고 끈덕지게 흐르는 느낌이 났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더 내려 아래를 보자 벌겋게 달아오른 입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기어코 피를 본 내가 소리를 내 울음을 터트렸다.
강태영은 내 턱을 잡고 돌려 울고 있는 내 얼굴을 빨아 먹었다. 입 안으로 들어와 휘젓던 혀가 눈물도 핥고 턱도 씹었다.
“허윽, 빼…… 빼.”
“지랄하지 말고, 너나 힘 더 빼.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면 어쩌라고?”
쯔걱.
“아악, 우, 움직…… 아, 쁘읏.”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움직이지 말라는 애원에도 강태영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찢어진 입구가 다시 벌어졌다가 좆과 함께 딸려 들어왔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가슴만 바닥에 붙인 채 얼굴을 돌렸다. 볼에 닿은 침구가 온통 축축하게 젖었다.
“아, 아아, 아.”
벌어진 입에서 앓는 신음이 터졌다. 쯔읏, 강태영이 젖은 내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내벽에 좆을 비벼댔다. 좆이 내벽 안쪽 끝을 찔러 올 때마다 꼭 그만큼 아랫배 가죽이 튀어나왔고, 성기에서는 투명한 물이 픽, 픽 쏘아졌다. 오줌이라도 지리는 건지 깔린 아래에 이불과 몸이 젖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 따위는 없었다. 강태영이 혀를 내어 길게 볼을 핥아 올렸다. 눈물 자국으로 버석하던 얼굴 위를 이번에는 축축한 젤리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흡, 하…… 아으으읏!”
머리가 찌릿하고 울렸다. 손끝과 발끝은 물론이고 온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힘을 겨우 짜내 강태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가슴에 닿는 온기를 느끼며 강태영의 어깨에 젖은 얼굴을 파묻었다.
강태영의 단단하고 뜨거운 팔이 내 등을 감쌌다. 한쪽 팔은 어깨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누르듯 감겨 있어서 아래에서 강하게 치받고 올라와도 붙은 살갗은 떨어지지 않았다.
기묘한 안정감이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내 몸은 허겁지겁 강태영에게 안겨 들었다. 왜인지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던 것 같다.
쿵쿵 거세게 뛰어대는 심장 박동이 내 것인지 강태영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집요한 섹스가 이어졌다. 한 지점을 찌르고 들어오면 다른 때보다 더 극한 쾌감이 치달았다. 머리가 다 녹는 것 같은 기분과 눈앞이 번쩍 튀는 성감에 몸이 펄떡 뛰어대며 바르르 떨었다.
“하아앗, 으흣.”
진동하는 기계처럼 떨어대는 내 움직임이 멎기도 전 또 같은 곳을 찌르고 들어오면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지나친 쾌감은 두려움과 닮아 있어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온몸이 얽혀 있어 강태영을 벗어날 순 없었다.
살이 엉겨 붙고 온갖 난잡한 체액이 자국으로 남은 몸이 비벼졌다. 정신을 잃고 힘이 풀리려고 하면 강태영은 내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뱃재에 화상 입은 자국을 손톱으로 누르거나 뒤에서 목을 조르기도 했다.
“끄으으.”
나는 눈알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사정했다. 동시에 배 안 가득 무언가가 퍼졌다. 강태영의 성기가 꿀렁이면서도 내벽 전체에 정액을 펴 바르듯 움직였다. 움직임에 바깥으로도 흰 정액이 줄줄 샜다. 뭔가가 흐르는 기분에 반사적으로 아래에 힘을 주자 강태영이 낮게 신음하며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씨발, 처물지 마.”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래에서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거품이 이는 입구에서 뷰륵, 뷰릇 민망한 소리가 났다.
강태영이 좆을 빼지 않고 내 몸을 돌렸다. 다리가 부채처럼 넓게 벌어졌다. 사정한 후에도 빼지 않은 좆이 안에서 그대로 부피를 다시 키웠다. 단단해진 성기가 다시 철벅이며 안을 때려 박았다. 강태영이 내 팔로 자신의 어깨를 두르게 했다. 그러나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는 팔이 풀리고 상체가 뒤로 넘어가자 자리에 앉은 그가 나를 마주 눕히듯 기대게 했다.
“아흑, 으…… 아, 윽!”
나는 강태영의 단단한 가슴에 축 늘어진 채 그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렸다. 엉덩이를 잡은 손이 힘을 풀 때마다 배 안쪽까지 깊게 찌르고 들어오는 좆은 내벽 끝, 좁아지는 부분까지 억지로 열고 들어왔다. 배 안쪽을 주먹으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끄읍…… 그, 마안…… 아, 아.”
고통 속에서도 미약하게 느껴지는 쾌감이 나를 미치게 했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겨우 쥐고 강태영의 등을 때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고 까무룩 정신을 잃을 때까지도 강태영은 몇 번이고 고문 같은 섹스를 이어 가며 내 안에 정액을 싸질렀다.
이미 배 안쪽은 꽉 찬 것인지 강태영이 사정한 만큼 액이 흘렀다. 장기 속이 출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감각은 이제 제대로 힘을 주지도 못해 다물리지 않는 아래에서 정액이 후드득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요의 때문에 깼다고 생각했는데 차단되었던 통각 스위치가 켜지기라도 한 듯 아래에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이 밀려들었다.
“으읏.”
다른 곳도 그랬지만 성기가 드나드는 입구와 아랫배가 특히 아팠다.
“이게 뭐…… 아.”
동시에 이물감과 고통이 느껴져 손을 뻗어 더듬더듬 아래를 만져 보다가 아직 강태영의 성기가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팔은 거의 몸을 옭아매고 있는 수준이었다. 나는 욕실에 가기 위해 움직였다. 강태영이 깨지 않도록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발기가 풀리지 않은 채 쑤셔 박혀 있는 좆을 빼내기 위해 엉덩이를 앞으로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일라치면 밤새도록 얻어터진 것처럼 온몸이 아파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한번 인지한 고통은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너무 아파서 더 자려고 해도 잘 수가 없었다.
푹신한 침대 위였는데도 침구에 닿아 있는 근육마다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흐으으, 윽!”
“어디 가.”
자고 있는 줄 알았던 강태영의 낮은 음성과 함께 반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그대로 밀고 들어와 내벽 안쪽을 쿡 찍었다. 아릿한 둔통과 내벽 안쪽이 조이는 쾌감이 동시에 밀어닥쳤다.
“하으, 으…… 흐, 놔, 놔줘.”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벌어진 다리 사이로 뿌리까지 박은 강태영이 귀를 씹고 빨았다. 쾌감이 치달을수록 요의 역시 참을 수 없어졌다.
“나, 싸…… 하읏, 쌀 것…… 아아.”
“싸, 언제는, 후…… 안 싼 것처럼 말하네.”
“그, 그거 아니…… 아, 아흐으.”
“그거 아니야? 그럼 뭔데?”
“히으윽……!”
내벽의 축축한 살이 딸려 나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기둥을 빼내던 강태영이 강하게 쳐올리며 물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헐떡거리는데 이제 정말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배를 꽉 조이고 있는 단단한 팔에 주먹질을 하고 꼬집었다. 아래를 움직여 벗어나려고 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원하는 걸 똑바로 말해 보라며 아래를 치받는 강태영에게 결국 엉엉 울면서 오줌이 마렵다는 말을 한 뒤에야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강태영은 나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아래는 아직도 연결된 채였다. 이미 한계였다. 내려 달라며 실랑이할 겨를도 없었다.
“……안 나가?”
“응, 너는 네 볼일 봐, 난 할 일 할 테니까.”
그렇지만 욕실에 와서도 강태영이 나가지 않을 줄은 몰랐다. 강태영은 변기 앞에 나를 세워 두고 내 허리를 틀어잡았다.
“시, 싫어…… 나가, 나가.”
손을 뒤로 뻗어 강태영을 밀었지만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싫어.”
금방이라도 무언가 쏟아낼 것처럼 퉁퉁해진 성기는 이제 아플 지경이었다.
“터지겠다, 너.”
강태영이 어깨 너머로 내 아래를 본 건지 귀를 짓씹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얼른 싸.”
“하윽, 아…… 아, 싫…… 흑.”
반항은 소용없었다. 강태영은 안간힘으로 참고 있는 내 성기를 쥐고 살살 흔들었다.
“쉬.”
“하, 으.”
맥이 풀렸다. 쪼르륵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이 나이가 돼서 누군가의 손을 빌려 소변을 보게 되다니 미칠 것 같았다. 막은 귀로도 소음은 완벽히 차단되지 못했다. 참은 만큼 길게 이어지는 희미한 물소리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강태영의 성기가 다 느껴졌다.
더 이상 나오는 게 없자 강태영의 손이 떨어졌다. 휴지로 앞을 닦아 준 녀석이 변기 커버를 닫고 물을 내렸다.
강태영이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눈과 귀를 막은 상태였다. 뒤에서 움직이는 녀석을 따라 몸이 흔들렸다. 귀를 막은 손도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떨어졌다. 살갗이 비벼지고 차지게 부딪쳤다가 떨어지는 끈적한 소리가 고막을 치댔다. 울음이 섞인 내 신음과 강태영의 거친 숨소리까지도 방에서보다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우웁, 흐으.”
내 턱을 잡아 돌린 강태영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벌어진 입 안으로 눈에서 흐른 눈물이 한가득 들어왔다. 강태영 역시 이 짠맛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했다. 혀로 혀를 문대고 갈급증이 이는 사람처럼 혀를 빨아대는 녀석의 목에 팔을 감았다. 허리가 살짝 비틀려서 중심을 잃을 것 같았지만 강태영이 잡고 있는 덕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으, 윽…… 웁.”
녀석이 허리에 힘을 주고 깊게 쑤셔 넣었다가 빼낼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연방 아래를 울렸다. 나는 강태영의 입 안에서 신음하고 울었다. 강태영의 엉치뼈가 뒤로 떨어지면 어느 순간부터 끈적한 뭔가가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보지 않고 만지지 않아도 엉망진창이 된 아래가 온갖 체액과 마찰에 의한 거품으로 질척거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상체가 자꾸만 앞으로 숙여졌다. 쾌감이 짙어질수록 몸을 펴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절로 배가 딱딱해지고 몸이 앞으로 쏠렸다.
양 허벅지 사이는 점점 좁혀 들었다. 거의 붙기 직전이 되어서야 강태영이 무릎으로 오른 발목을 옆으로 차서 그 사이를 더 벌렸다.
“아……!”
허벅지는 다시 벌어졌지만 중심을 잃은 내 상체는 앞으로 쓰러졌다. 변기 커버 위를 짚고 서서 끈질기게 따라붙는 성기를 받아내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커버 위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뚝뚝 떨어졌다.
•••
욕실에서도 몇 번이나 사정한 후 내벽에 떡칠 된 정액을 긁어내고 난 뒤에야 나는 녀석의 품에 안겨 실려 나왔다.
“아으…….”
의자에 엉덩이가 닿자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을 찌푸리고 있는 나에게 시선을 한 번 준 강태영이 냉장고를 열었다. 다시 돌아온 뒤에 이 집에서 한 것이라고는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하고 운 것뿐이었다. 내내 굵고 긴 몽둥이 같은 것이 박혀 있던 아래는 아직도 온전히 다물리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아무런 감각도 없는 곳에 이물감이 상당했다. 불편해서 자꾸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 움직여 봐도 편한 자세라는 게 없었다.
“아파?”
물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죽을 데워 온 강태영이 내 앞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니.”
“근데 왜 그렇게 가만히 못 있어? 뭐 마려운 개처럼.”
“…….”
“또 싸게 해 줘?”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싫다고 빠르게 반응하는 내가 웃겼는지 실소를 터트린 강태영이 “난 괜찮았는데.”라고 말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젓가락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반대쪽 손으로 잡아 진정시켜 보려고 해도 별 소용은 없었다. 왜 이런가 생각해 보니 거의 하루 동안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짓만 했다. 힘이 다 빠져 손이 떨릴 만했다. 웃기지도 않는 모습에 강태영이 작게 실소를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먹여 줄게.”
됐다고 대답했지만 손의 떨림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영이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아.”
그러더니 죽을 뜬 숟가락을 내 입술로 가져왔다. 내가 입을 벌리지 않자 녀석의 눈동자가 살짝 짙어졌다.
“입, 벌려.”
녀석의 재촉에 결국 입을 벌렸다. 적당히 따뜻한 죽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물컹한 식감의 죽은 씹지 않아도 잘도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아.”
두 번째 숟가락은 더 빨리 다가왔다. 이번에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중간에 배가 부르다며 그만 먹겠다는 의견을 던져 봤지만 그대로 묵살됐다. 결국 죽 그릇을 완전히 비울 때까지 나는 강태영이 떠 주는 죽을 얌전히 받아먹어야 했다.
양치하고 나오자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강태영이 기다렸다는 듯 “이리 와.” 하고 말하며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너 방금 아다 뗀 것처럼 걷네, 귀엽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던 강태영이 웃으면서 말한 한마디에 걷는 게 완전히 어색해졌다. 그게 어떻게 걷는다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좋게 들리진 않아서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단단히 조이고 걸었다.
강태영이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다 안다는 듯 웃는 얼굴이 얄미웠다.
나는 허벅지까지 오는 커다란 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강태영이 다른 옷은 내어 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다른 걸 더 요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번에도 앉다가 앓는 소리를 낼까 걱정하며 천천히 움직이는데 강태영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녀석의 허벅지 위에서 마주 보고 앉은 자세가 되어 있었다.
울긋불긋한 울혈이 낭자한 허벅지 위로 강태영의 손바닥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등 뒤를 감싸 안는 팔이 단단했다.
“또 도망갈 생각이었어?”
맞닿은 코끝을 부비며 묻는 음성이 어울리지 않게 다정해서 강태영이 무슨 말을 했는지 빠르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그냥 이모가 너무 놀라서 나, 나오라고 하니까…….”
“경고도 못 알아 처먹는 거야, 이제? 아니면 그런 척하는 거야?”
“…….”
“한 번만 더 오늘처럼 멍청하게 굴면 그때 봤던 영상 보게 될 사람이 너만은 아니게 될 거야. 알아들었지, 내 말?”
강태영의 말에 나는 ‘아’와 ‘어’ 발음의 중간쯤 되는 신음을 흘렸다.
“꼭 이렇게 해 줘야 알아듣는 거 피곤하지 않아?”
강태영은 답답함을 숨기지 않았다.
“원래 같으면 한쪽 다리라도 부러트려서 다시는 그딴 짓 못 하게 해야 하는데.”
“…….”
“지금 엄청나게 참는 중이야.”
강태영은 그런 자신이 기특하지 않으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꾹 닿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하는 순간 턱이 잡혔다.
“참는 중이라고 했는데.”
엄지로 내 아랫입술을 꾹 누른 강태영이 “됐다.” 하고 턱을 놔주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여기 누워서 봐.”
강태영이 나와 뭘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굼뜬 동작으로 모로 누워 단단한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강태영은 볼 게 없다고 하면서도 채널을 돌리며 이마로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은 정돈이 되었다가도 금세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강태영은 단순히 머리카락을 치우려는 게 목적은 아닌 것처럼 짜증 하나 없이 오히려 좋다는 듯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다시 쓸어 올렸다.
내 눈은 송출되는 화면이 계속 바뀌고 있는 TV를 향해 있었지만 모든 감각은 강태영의 손길이 닿는 이마 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상하게 잠이 오는 손길이었다.
“졸려?”
앞이 가물가물했다. 나는 작게 “응.”이라고 대답했지만 너무 작아서인지 발음이 불분명하게 들려 꼭 앓는 소리처럼 들렸다.
채널을 한참 돌리던 강태영이 끝내는 볼 게 없다면서 TV를 아예 꺼 버렸다. 까맣게 죽은 화면 속에 담긴 내가 고스란히 보였다. 나는 강태영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녀석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잠이 쏟아지는지 눈을 반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기묘한 모습이었다. 이렇게만 보고 있으니 녀석과 내가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그 생각에 미치자 몰려오던 잠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이모가 떠올랐다. 우리를 두고 이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이모…….”
“뭐?”
낮은 내 목소리에 강태영이 얼굴을 살짝 내 쪽으로 낮추며 물었다.
“이모가 알 거야, 우리…….”
그러니까 그렇게 화가 났을 거였다. 단순히 내가 강태영의 집에 있다는 그 사실보다. 그때 내가 어떤 꼴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리자 급격히 아찔해져서 눈이 질끈 감겼다. 사색이 되었던 이모의 얼굴이 진하게 떠올랐다.
“뭐, 너랑 나랑 떡 치는 사이인 거?”
천박한 말에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참고 있다는 강태영의 말이 세뇌라도 된 양 머릿속을 내내 둥둥 떠다닌 게 아니었다면 일으키고도 남았을 거였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충동을 참았다. 일어나서 강태영의 목을 조르고 싶은.
“알아도 상관없어.”
“……뭐?”
경악하며 묻자 강태영이 웃었다.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으로 그런 말을 쏟아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으읏.”
미묘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강태영의 손이 등을 지나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붓긴 엄청나게 부었네.”
나는 입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매만지는 강태영의 팔을 매달리듯 부여잡고 신음했다. 단순히 확인을 해 보려는 것이었던 듯 다행히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은 강태영이 중지를 뻗어 회음부에서 구멍까지 한꺼번에 길게 비볐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의도치 않게 녀석의 허벅지 위로 얼굴을 파묻은 모양새가 되었다. 곧이어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연방 입술의 갈라진 틈을 뚫고 새어 나왔다. 강태영은 내 움직임을 즐기는 것처럼 입구쯤에서는 파고들 듯 말 듯 손가락 끝에 꾹 힘을 줘 눌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 된다는 말도 똑바로 하지 못한 채 녀석의 허벅지에 묻은 얼굴을 도리질 치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목을 잡았다. 놀란 몸이 파드득 떨리는 것도 함께였다.
“왜 잡아. 여긴 좋다고 움찔대는데.”
“아, 니야. 아파, 아직 너무 아프…….”
“알아, 안 해.”
안 한다는 말에 혹시 강태영이 화가 났을까 눈치를 봤다. 걱정과 달리 다행히도 강태영의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녀석은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고서도 한동안 아래를 지분거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넌 다른 거 생각할 필요 없어.”
부은 아래에서 손을 뗀 강태영이 내 이마 위로 입술을 내리며 말했다. 살갗에 닿은 입술이 느리게 움직이면서 간지러움이 일었다.
“한숨 자.”
이마와 감긴 눈두덩이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이모가 뭔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용돌이치던 가슴이 강태영의 한마디에 잔잔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