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열쇠 구멍에 열쇠를 맞춰 넣고 돌렸다. 달칵, 잠금이 풀리는 감각이 좋았다. 그러나 좋다는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본 게 있으니 시설이 좋을 것이란 기대는 없었지만 이건 좀…….
아무리 생각해도 배민혁인지 뭔지와 모텔 주인에게 당한 게 맞는 듯했다. 욕실은 문도 없고 이상한 비닐 커튼으로 만든 가림막이 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고 방 안은 청소를 한 건지 만 건지 지하도 아닌데 지하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차피 돈을 다시 돌려줄 것 같진 않았고 3일 이후 떠나야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으며 언제 빨았을지 의심되는 이불 위에 몸을 눕혔다. 다행히 이불에서마저 이상한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누런 천장이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었다.
고시원도 이것보다는 좋았는데. 하영 이모 집에서 살았던 건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좋았고,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있던 강태영의 집도 무지 좋긴 했…….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머리를 털었다.
좋았으면 뭐. 거기 다시 가고 싶기라도 하다는 거야? 내 자신에게 성질을 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라도 열어 두면 퀴퀴함이 좀 사라질까 싶어서였다.
창문은 컸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었다. 문을 열자 아무런 도움 없이는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 같은 촘촘한 쇠창살이 보였다.
거창한 뷰를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바로 옆 건물의 회색 벽이 보이자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밖을 볼수록 갑갑해지기만 해서 바닥에 앉아 빌려 온 충전기를 꽂고 핸드폰 전원을 켰다. 휴대폰 상황은 아까 전 켰을 때 봤던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하아.”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올라왔다. 나는 곧장 강태영의 번호를 먼저 차단했다. 해당 번호로 온 메시지도 모두 삭제했다. 메신저 애플에서도 녀석을 차단한 뒤 대화방 그대로 삭제해 버렸다. 그동안 쌓인 메시지가 궁금했지만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어떤 무서운 협박으로 내 발로 자신에게 돌아오게 만들지 몰랐다.
강태영과 관련된 것만 정리했는데도 정신적 피로감이 엄청났다. 나는 다른 건 보지도 않고 휴대폰을 다시 종료했다. 완전 충전이 될 때까지 충전기는 그대로 연결해 둘 생각이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움직일 때마다 끼이익 소리를 내는 침대 위에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
추위 때문에 눈을 떴을 땐 완전히 새까만 밤이었다. 창문 밖에서 인공적인 불빛이 들어왔다. 창을 열어 둬서인지 방 안의 냉기가 장난 아니었다. 냄새도 어느 정도 빠진 것 같아서 곧장 창문을 닫았다.
다행히 이불 아래 전기장판이 있어서 바로 전원을 켜고 다시 기어들어 갔다. 5분쯤 지나자 뜨끈한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겨울에 가까운 날씨였다. 이러다가 또 갑자기 더워지겠지만 아직은 확실히 아니었다.
몇 시나 됐는지 궁금해서 당연하게 핸드폰을 들었다가 꺼 놓고 잠들었다는 걸 다시 상기했다.
차단해 뒀으니 이제는 켜도 괜찮겠지, 싶어서 다시 폰을 켰다.
다행히 아까처럼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부재중 통화가 찍혀 있거나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뜨지는 않았다.
이대로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고 숨죽이며 살다 보면 강태영도 나에게 가진 비정상적인 관심을 끊어내겠지. 눈에 밟히니까 계속 괴롭히고 싶은 거였다. 걸리적거리니까. 멀리 도망쳐 오니 강태영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이대로 조금만 버티면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조차 갖지 않을지도 몰랐다. 강태영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녀석이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바람이기도 한 상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찬 곳에 노출되어 있던 관절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불을 켜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파우치가 눈이 들어왔다. 아까 모텔 주인 남자에게 방 열쇠와 함께 받았던 물건이었다. 속을 살피자 몇몇 물건이 들어 있었다. 구리긴 해도 이런 건 또 주는구나 싶어서 물건을 바닥에 털었다.
일회용 면도기, 칫솔, 치약과 같은 간단한 세면도구와 함께 콘돔과 러브 젤이라고 적힌 비닐 팩이 쏟아졌다.
원래 모텔에서 이런 것도 주나.
왠지 손으로 만지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다. 필요한 것만 챙긴 후 콘돔과 러브 젤은 도로 파우치에 넣어 방 한쪽 구석으로 치워 버렸다.
그래도 간단하게 쓸 만한 것들이 생겨서 다행이었다.
이젠 버티기 싸움이었다. 충동적으로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지만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돈은 최대한 아낄 수 있을 때 아껴야 했다. 세면도구는 해결했으나 속옷은 필요할 것 같았다. 이제는 슬슬 배도 고픈 것 같아서 모텔 방을 나섰다.
아까 돈을 뽑기 위해 갔던 편의점으로 향했다. 속옷 한 벌과 컵라면과 휴대폰 충전기 그리고 고민 끝에 산 라이터를 들고 시식이 가능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자 금세 맡기만 해도 자극적인 라면 냄새가 올라왔다. 그 냄새를 맡으니 급격하게 배고픔이 밀려왔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는지, 아까는 영원히 배도 고프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새 빨리 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가 웃겼다.
•••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먹었는데도 아쉬웠다. 자극적인 라면 맛이 오히려 식욕을 돋운 것도 같았지만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다시 모텔로 돌아가기 위해 편의점 문을 열려고 손을 뻗는데 손이 닿기도 전, 문이 먼저 열렸다.
“어? 잠시만요. 너 여기서 뭐 해?”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배민혁이었다. 통화 중이었는지 휴대폰에 대고 상대방에게 잠깐 양해를 구한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밥 먹었어요.”
“그래? 모텔 들어갈 거지? 같이 가. 예예, 사장님. 말씀하세요.”
그러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배민혁은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그 때문에 나는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야 했다.
“쥐새끼처럼 구는 걸 어떡하라고요. 그래도 거의 다 잡았다니까요? 그 새끼, 지 자식들도 어차피 형님 손에 있는 거 안다면서요. 아, 그러면 곧 알아서 기어 나와요. 예? 제가 지금까지 누구 놓친 적 있어요?”
배민혁은 알아들을 수 없는 통화를 이어 가며 손가락으로 아르바이트생에게 손짓했다. 그는 그런 배민혁의 행동이 익숙한 듯 같은 종류 담배 3갑을 카운터에 올려 두었고 배민혁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카드를 꽂아 내밀었다.
“예? 누구요? 아직 그 자식도 못 잡았는데 갑자기 누굴…….”
역시 익숙하게 카드를 뽑아 계산을 마치자 배민혁은 카드와 담배를 받아 들고 몸을 돌렸다.
“알겠어요! 아, 일단 오늘은 좀 쉬고요. 서울에서 강릉까지 왔는데 당연히 피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좀! 예예, 전화 또 드릴게요. 들어가세요.”
편의점 밖으로 나온 배민혁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통화를 마치고 곧장 담뱃갑 포장을 뜯었다.
“진짜 나이 들더니 돈독만 올랐나.”
배민혁은 꺼진 화면에 대고 욕을 내뱉더니 휴대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 먹었어?”
“라면이요.”
“한 개?”
“네.”
“사내새끼가 컵라면 한 개 먹고 배가 차?”
배민혁은 어딘가 낮에 봤을 때보다 부쩍 거친 감이 있었다. 아마도 이쪽이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았다.
“배 많이 안 고팠어요.”
나는 괜한 실랑이라도 하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배민혁의 묘한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내가 사람을 좀 많이 만나는데 말이야.”
“…….”
“넌 아무리 봐도 좀 사연이 있는 새끼 같거든.”
“…….”
“내가 또 사연 많은 인간을 자주 보다 보니까. 그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고.”
지금 보니 그에게선 술 냄새도 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말투도 더 거칠게 느껴졌다.
“알았어, 알았어. 안 물어볼게.”
사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배민혁이 킥킥 웃으면서 달래듯 말했다.
생각을 모조리 간파당하는 기분에 절대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며 걸음을 옮겼다.
“어? 둘이 왜 같이 와?”
모텔에 다다라서야 내 어깨에 올려 두었던 팔을 내린 배민혁과 내 고개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모텔 주인 남자가 쓰레기봉투를 내다 버리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만났어.”
“아아, 일은 다 끝났고?”
“며칠은 더 있어야 해.”
“그럴 것 같아서 안 그래도 방 하나 빼 뒀어.”
“빼 두긴, 원래 빈방 천지면서.”
“야. 다른 데 가라.”
“고맙다고요, 형님.”
배민혁이 실실 웃으면서 남자가 내미는 열쇠를 받아 들고는 장난스럽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일부러 그런 건지 하필 배민혁도 나랑 같은 층이어서 방에 들어갈 때까지 그와 함께 계단을 올라야 했다.
문을 열기 직전 자신의 방에서 술을 마시자고 졸랐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후우.”
오늘 하루가 진짜 길었다. 외투를 벗어 두고 잠시 누워 있다가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계약서를 꺼냈다.
찢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이런 건 완벽하게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라이터를 사 오고야 말았다.
방 안에서 불을 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욕실로 계약서와 라이터를 들고 들어왔다.
탓, 타앗.
생경한 감촉과 소리 끝에 불이 화악 타올랐다. 계약서 끝을 불에 가져가자 기다렸다는 듯 종이에 옮겨붙었다. 불이 종이를 순식간에 삼켰다. 나는 어느 정도 잡고 있던 종이를 욕실 바닥에 두고 가만히 지켜봤다.
하얀 종이가 금세 까만 재가 되었다. 재를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괜히 차가운 물을 바닥이 흥건하게 뿌렸다. 그제야 체기가 있는 것처럼 답답하던 가슴이 좀 내려가는 것 같았다.
•••
지이잉- 지이이잉-
으음.
모처럼 단잠을 깨우는 반갑지 않은 소리에 이불로 귀를 틀어막고 버티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잠을 깨운 건 충전기를 꽂아 둔 휴대폰이었다. 방바닥 위에서 애처롭게 울던 휴대폰은 잠을 다 깨워 놓고 나서야 그 움직임을 멈췄다.
“뭐야.”
끊겼으니 그냥 다시 잘까 하다가 왠지 모르게 서늘한 감각에 이불을 걷어 내고 바닥으로 팔을 뻗었다.
몇 시간 사이 휴대폰은 배터리가 가득 차 있었다. 연결된 충전기를 빼고 화면을 켰다. 진동음이 꽤 이어지기에 어디서 전화라도 온 건가 했는데 부재중 전화는 찍혀 있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야.]
[차단 풀어.]
[이딴 식으로 튀면 내가 너 못 찾을 거 같지?]
[먼저 연락해, 아직 안 늦었어.]
[백하민, 나 이제 진짜 한계야.]
[잘 생각해.]
[내가 너 잡기 전에 네 발로 다시 기어들어 오면 봐줄게.]
[대신 네 발로 돌아오기 전에 내가 너 찾으면.]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뒤에 무슨 말이 붙어야 할 것 같은데 끝맺음을 제대로 맺지도 않고 끝나 버리니 더 두려웠다.
분명 모르는 번호였지만 보낸 이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심장이 급격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구토감이 일었다. 나는 메시지를 모두 삭제했다.
휴지통 비우기까지 하고 난 깨끗해진 휴대폰을 보자 조금 전 확인했던 메시지 내용들이 현실이었는지 상상이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웅크렸다. 바닥이며 천장이 다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아서 눈을 뜨지 못했다.
지이이잉-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지금 보고 있어?]
뻐억!
짧은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휴대폰을 그대로 던졌다. 벽과 부딪혀 떨어진 휴대폰 액정에 금이 간 게 보였지만 그것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있지 않았는데도 강태영이 어디선가 꼭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심스럽게 기어가서 휴대폰을 집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마저 삭제하고 곧장 새로운 번호마저 차단한 뒤 휴대폰을 종료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휴대폰을 바닥에 버리듯 내버려 두고 문도 달리지 않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 신물이 올라왔다.
나오는 게 없이 웩, 웩 요란히 구역질만 해대고는 진이 빠져 한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 속에 허옇게 질린 얼굴이 비쳤다.
메시지 하나에 이 지경이라니 우스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서웠다. 몸의 반응은 내 의지를 벗어난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 보려고 해도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샤워 호스로 차가운 물을 틀고 옷을 다 벗었다. 끔찍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별 지랄이었다.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도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정신없이 1층까지 뛰어 내려왔더니 모텔 주인 남자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네.”
“……아.”
“진짜 귀신이라도 봤어? 굿이라도 해야 하나, 진짜.”
“아, 아니요.”
헐떡대며 말하자 남자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서 뭔가가 달랑거리기에 보니 걸레가 들려 있었다. 청소라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아, 귀신은 아니야? 다행이네. 그 방에서 귀신 봤다는 사람이 꽤 있어서.”
남자가 하는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결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귀신 어쩌고 하는 말에 인상을 쓰자 남자는 내 표정이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면 바퀴벌레? 얼마 전에 싹 잡았는데 아직 있나?”
남자의 말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아직도 얼빠져 있는 나를 보더니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너, 그냥 여행 온 거 아니지?”
“…….”
“여행 왔다는 사람이 무슨 이런 모텔에 처박혀 있기만 해? 편의점 갈 때만 겨우 나가고. 지금은 무슨 사색이 돼서는 뛰쳐나오지를 않나.”
남자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혀를 찼다.
“나 점심 시킬 건데, 같이 먹을래?”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나를 카운터 안쪽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익숙하게 주문한 그가 TV를 켰다.
안쪽 공간은 꽤 컸다. 내가 지내고 있는 방 크기랑 비슷했다. 카운터 일을 보면서 아예 살더라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방을 둘러보는 기색을 읽었는지 남자는 “나 여기서 살거든. 살 만하지?”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난 행동을 하지도 않는데 남자는 내가 뭔 행동을 할 때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요?”
“아니, 미어캣 알아?”
“……미어캣이요?”
“어, 동물인데. 적이 나타나면 이렇게 딱 일어나서 주변을 살펴보거든? 네가 방 구경하는 게 꼭 걔네 같아서.”
남자가 미어캣 흉내를 내는 건지 주먹을 만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목을 빼 두리번거렸다.
“아.”
“안 그래도 오늘 한 번 올라갈까 했는데 잘 내려왔네.”
“왜요?”
“생사 확인?”
이쯤 되니 하는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르게 말하는 건 이 사람의 특징인 듯했다. 내가 죽을 줄 알았다는 건가 싶어서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였다는 건 좀 충격이었다.
“그리고 방세도 받아야 하고.”
“방세요?”
“3일 치 방세만 내셨잖아요, 손님.”
벌써 방세 낼 때가 되었느냐고 묻자 남자가 안 그렇게 생긴 놈에게 돈 떼어먹힐 뻔했다며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세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시간의 흐름이 놀라웠다. 거의 방 안에만 틀어박혀 생활하다 보니 그만큼의 일수가 흘렀다는 게 더 와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원래는 3일만 채우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곳을 찾아 돌아다닐 체력이나 정신 상태가 되지 못했다.
“……돈 뽑아 올게요.”
여기서 조금 더 머물면서 나갈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시킨 밥은 먹고 가.”
아까 보니까 이것저것 많이 시키는 것 같던데. 한 푼이 아까운 시기에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나 내가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문을 끝냈는데 인제 와서 먹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 좀 하고 말할걸. 아까는 강태영의 메시지에 놀라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에이, 밥은 내가 살게. 지금 밥값 생각하고 있었지?”
“……아, 고맙습니다.”
“표정을 잘 못 숨기네.”
그런가. 나는 머쓱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점차 가출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남자의 관찰하는 것 같은 시선이 불편해질 때쯤 배달이 도착했다. 남자가 시킨 건 중국집 음식이었다. 둘이 먹는 것일 텐데 짜장, 짬뽕, 볶음밥에 탕수육과 깐쇼새우까지 한 상이 가득 차려졌다.
“뭘 이렇게 많이…….”
“한창때 남자 둘이 먹는 건데 이게 많아?”
양을 보고 기겁하는 나에게 남자는 오히려 이게 뭐가 놀랄 양이냐며 타박했다.
“먹어.”
“잘 먹겠습니다.”
“내내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만 때우는 것 같던데, 그것도 한 끼 정도만 먹는 것 같고.”
티는 나지 않았지만 남자는 모텔에서의 내 생활에 대해 다 살피고 있던 모양이었다. 혀를 쯧쯧 차며 열심히 포장을 벗긴 남자가 나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백하민?”
“네?”
음식을 먹다 말고 불린 이름에 깜짝 놀랐다. 남자에게 이름을 알려 준 적도 없는 터라 더 그랬다.
“배민혁한테 들었어, 이름.”
“아, 네.”
“스무 살이라며?”
“네.”
“난 스물아홉, 마재진. 성이 좀 특이하지? 형이라고 불러.”
“네.”
“원래 말이 없어?”
“잘 모르는 사람하고는…….”
“낯가린다는 말이네. 하긴 스무 살이면 낯가릴 나이다.”
마재진은 손님을 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말을 잘 붙였다. 그는 여러 가지를 물었다. 어디서 왔는지, 학교는 다니고 있는지, 가족은 어디 있는지 등등. 나는 곤란한 질문에는 뜸을 좀 들이면서도 대답을 이어 나갔다.
“그러면 여기는 어쩌다가 왔어? 애초에 여행이라고 한 거는 별로 믿지도 않았어. 짐도 없고 하다못해 휴대폰 충전기도 없다고 나한테 빌렸잖아? 누가 봐도 어디서 쫓겨나거나 도망쳐 온 사람처럼 구는데 믿을 리가 있나. 배민혁도 전혀 안 믿었을걸? 이래 봬도 매일 사람 만나는 직업인데 우리가 그것도 구분 못 하겠어?”
일부러 그런 건지 마재진은 식사가 거의 끝날 때쯤 대답하기 가장 곤란한 질문을 꺼냈다. 만약 식사 초반에 이걸 물어봤다면 거기서 식사는 끝났을 테니까. 그가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 두는 나를 바라봤다.
“아니 뭘 좀 알아야, 우리도 대충 생각을 하지. 막말로 어디 사채라도 끌어 써서 도망치다가 여기 숨은 거면 나중에 우리가 피해 볼 수도 있으니까.”
“그,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잠깐 바람 쐬러…….”
마재진은 횡설수설하는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끝까지 말 안 하겠다는 거네. 그럼 이것만 사실대로 말해 봐. 살인, 마약, 사채 다 아니야?”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하는 말에 놀란 건 나였다.
“아니에요! 그런 건.”
중지까지 접고는 뭐가 더 없나 고민하는 그에게 황급히 대답했다.
“진짜?”
“네.”
“그럼 됐지, 아, 마지막으로 자살?”
“그것도 안 해요.”
마재진이 빠르고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보더니 만족한 듯 웃었다.
“좋네.”
“잘 먹었습니다.”
“오냐, 내가 샀으니까 정리는 네가 좀 해.”
“네.”
마재진은 입 짧을 것처럼 생겨서는 잘 먹었다. 이걸 두 사람이 다 먹을 수 있나?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많이 남기지도 않았다. 나 역시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 터라 그런지 평소보다 좀 더 잘 먹었던 것 같다. 흘린 국물을 닦고 마재진이 알려 준 곳에서 일반 쓰레기봉투를 꺼내 와 남은 쓰레기를 치웠다.
“나갈 거야?”
“네, 돈도 뽑아야 하고…….”
“그래, 다녀와.”
식사 한번 같이했다고 마재진이 그 전보다는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습게도 그런 감정을 느끼자 이런 상황에 왜 사람들이 친해지기 위해 밥 약속을 잡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재진과 있으면서 살짝 잊고 있던 기억이 쫓기듯 내려왔던 계단을 오르자 다시 떠올랐다. 4층에 가까워질수록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속이 답답해졌다. 405호 앞에 섰을 땐 손까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문 앞에서 손만 쥐었다 펴다가 결국 차게 식은 손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나간 지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방이 낯설었다. 사람이 머무른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극히 적은 방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모든 건 그대로였다. 휴대폰 역시 내가 마지막에 던져 놓았던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공포심에 헛것을 본 건 아닐까? 그러나 휴대폰을 다시 켜서 메시지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대로 발끝으로 구석진 곳으로 밀어 두고 이불로 덮었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확인 따위도 필요 없었다.
나는 카드와 첫날 마재진에게서 빌렸던 휴대폰 충전기를 챙기고 다시 방을 나섰다. 강태영의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시 방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제는 단골이라도 된 것 같은 모텔 앞 편의점 ATM기에서 3일 치의 모텔비를 더 뽑고 충전기를 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나온 김에 오늘은 좀 나갔다 와 볼까 싶었다. 마재진의 말대로 너무 방 안에만 있었다. 어제도 저녁에 편의점에 나갔던 것을 빼고는 방에서 병든 닭처럼 내리 잠만 잤다. 이래서야 나를 두고 위험한 상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장은 그 방에 계속 있고 싶지도 않았기에 아무 버스를 잡아타고 번화가로 보이는 곳에 내려 보이는 옷 가게에서 그나마 저렴한 옷을 몇 벌 샀다.
돈을 아껴야 했지만 단벌 신사로 이 이상 버틸 순 없었다. 쇼핑 이후에는 강릉까지 온 참에 바다도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바다도 구경했다.
바다 근처에 저마다 나름의 특색 있는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주말도 아닌데 대부분의 카페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오랜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다녀오니 피곤하고 기가 빨렸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면 강태영의 생각에 두려움만 떨고 있었을 텐데 잠시나마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일이었다.
다시 모텔로 돌아왔을 땐 완전 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모텔비랑 빌렸던 충전기요.”
방으로 올라가기 전 카운터에 들렀다.
“오늘은 이상하게 하도 안 와서 토낀 줄 알았는데, 놀다 왔나 봐?”
마재진이 내 손에 들린 새로 산 옷 쇼핑백을 보더니 웃었다. 입가에 경련이 일어난 듯 어색하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뒤에서 저녁 안 먹고 왔으면 같이 먹자는 말이 들렸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오랜만에 많이 움직여서인지 몸이 노곤했다. 돌아다니기를 잘했다. 왠지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하아.”
예상이 틀렸다. 오랜만에 몸을 많이 움직였으니 잠이 잘 올 줄 알았건만 초가 지나는 순간순간을 세고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고, 시간도 멈춘 것 같은 새벽이었다. 씻고 바로 누웠을 땐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더니 한 시간쯤 선잠을 겨우 잔 뒤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종료해 둔 휴대폰은 혹시나 필요한 일이 갑자기 생길까 봐 새로 사 온 충전기를 연결해 두기만 한 상태였다. 그러니 진동이 온다거나 벨이 울릴 리가 없다는 걸 아는데도 한 번씩 진동음이 울리는 환청을 들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구석에 밀어 둔 휴대폰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허술한 방문을 열고 강태영이 들이닥칠 것 같은 공포 역시 나를 미치게 했다.
팔로 눈을 길게 가렸다. 자고 싶은데 잘 수 없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더욱더 괴로운 건 사위가 조용한 틈에서 끔찍한 상황만 그려대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 거였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일수록 잠은 더욱 달아났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느껴졌다. 더 누워 있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아예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방 안에 있던 구형 컴퓨터를 켰다. 낮에 돈을 뽑으면서 확인한 통장 잔고가 떠올라서였다. 외지인인데 일을 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구인 사이트를 찾았다.
컴퓨터가 오래되어서인지 속도가 매우 느렸다. PC방이 간절했지만 한 푼이 아쉬운 지금은 방 안에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음에 감사해야 했다.
아침 해가 완전히 밝아 올 때까지 이리저리 사이트를 뒤져 봤지만 서울에서처럼 일자리 수 자체가 많은 것도 아닌 데다가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일도 많지 않았다. 그동안 썼던 이력서에서 주소지만 이곳으로 수정한 후 그나마 이력서라도 봐줄 만한 몇몇 곳에 지원했다.
아침이 되면 졸릴 줄 알았는데 머리는 아팠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1층으로 내려갔다.
“이상하지? 근데 사진이 그냥 존똑이야. 정리해서 보내 준 특징도 그렇고 거기에 이름까지 같은 건 빼박이잖아.”
“진짜냐? 우연이라도 이럴 수가 있어?”
“아, 형. 나 진짜 뭐 알고 걔한테 접근한 거 아니다? 좀 수상한 냄새가 나긴 했어도.”
1층에 다다르기 직전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로 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인물은 배민혁과 마재진이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모텔 주인 남자가 틀어 놓은 TV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는 것을 빼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젯밤에 새로 들어온 의뢰가 진짜 405호 같다는 거야?”
405호?
나는 손에 들린 열쇠를 살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405호는 내가 묵고 있는 방 호수였다. 그러니까 지금 저 사람들이 지칭하는 405호는 나를 말하는 확률이 높았다. 이 허름한 모텔에 405호가 두 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아직 계단 벽에 가려져 있어 그들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을 거였다. 나 역시 대화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 근데 걔를 찾는 사람이 뭔가 존나 장난 아닌 것 같아.”
“왜? 어떤데.”
“정 안 되면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고 했대. 어떻게 잡든 목숨에만 지장 없으면 된다고. 일단 잡기만 하라고.”
“뭐어?”
“어디서 떼먹고 이쪽으로 튄 건가? 보통 흥신소 의뢰면 그거지 뭐, 일수.”
“그럴 애 같지는 않았는데…….”
“그거 아니면 업소지. 꼴리게 생기긴 했던데.”
“어제 같이 점심도 먹었는데 아무튼 그런 쪽은 아닌 것 같았어.”
“그쪽이 뭐 그런 거 가리는 거 봤어? 그런 것들이 아니면 흥신소 통해서 사람 찾을 일이 뭐가 있어? 그것도 얼굴 다 터진 애를. 난 이쪽 일 하면서 별별 꼴을 너어무 많이 봐서 편견 없잖아.”
마치 자랑을 늘어놓듯 하는 배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도치 않게 대화를 엿들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죄책감 같은 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 속 등장하는 인물이 나인 게 분명했으므로. 보지 않아도 뻔했다. 강태영이 꾸민 짓이었다.
‘흥신소.’
한 단어가 유독 귀에 똑똑히 박혔다.
지난번 가게에서 일하고 있던 내가 마치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것처럼 말하던 것도 흥신소에 의뢰해서 알 수 있었던 걸까? 아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 품었던 의문이 뒤늦게 해소되었다.
고작 4일 정도의 인연이라 깊은 정 같은 게 벌써 붙을 일도 없었지만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은 분명 배신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게?”
“아직 안 나왔지?”
“나가는 건 못 봤는데.”
“오키. 나 지금 다 잡은 새끼 하나 있어서 그쪽 먼저 처리하고 올 테니까 혹시 어디 나갈 기미 있으면 형이 좀 잡고 있어. 저녁 전에는 올 테니까.”
“당장 나가진 않을걸. 안 그래도 어제 숙박 연장했어, 돈도 냈고.”
“그래? 잘됐네.”
“야, 민혁아.”
“왜.”
“살살 해, 아직 애잖아.”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나도 걔한텐 악감정 없어. 협조만 잘하면 손 안 대고 안 아프게 넘겨주는 게 내 목표야.”
배민혁은 감시 좀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모텔을 나섰다. 마재진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둘의 대화를 엿듣는 내내 볼 안쪽 살을 어찌나 강하게 씹었는지 너덜너덜해진 살갗에서 피 맛이 다 났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조용히 다시 계단을 올랐다.
망했다.
시발, 시발.
욕이 절로 나오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다행이라면 저들이 당장 나를 잡으러 오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배민혁은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다른 의뢰를 끝내기 위해 나간 것 같았고 카운터에는 내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하는 마재진 혼자 남아 있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표정 관리를 한 후 대충 짐을 챙겨 모텔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고 방문을 열었다.
쇼핑백에 옷가지와 개인 물건을 대충 챙겨 넣는 동안 계속해서 손이 떨렸다. 떨리는 왼손으로 오른손으로 덮으며 잡아 보았지만 손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강태영 미친 새끼.
왜 이렇게 나를…….
떨림을 막는 것은 포기한 후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뜨거운 물기가 느껴졌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기다렸다. 숨을 깊고 느리게 쉬려고 노력했다.
몸의 떨림은 점차 멎어 갔지만 심장이 미친 듯 뛰어대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배민혁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는 건 위험했다.
저녁 전에는 온다고 했으니 당장 오지는 않겠지만 되도록 빨리 여길 벗어나는 게 좋았다. 욕실 거울을 보며 표정 관리를 연습했다. 입꼬리를 늘였다 줄였다 하며 표정이 어색해 보이지 않게 근육을 풀었다. 마재진의 앞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수십 번 얼굴 근육을 움직여 보고 나서 챙겨 놓은 쇼핑백을 들고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자 마재진이 “일찍 일어났네?” 하고 물었다. 어제 나에게 같이 점심 먹겠냐고 물었던 얼굴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서 아까 전 들었던 대화가 꿈속 대화처럼 느껴졌다.
“어디 가게?”
마재진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네, 어제 나갔다 오니까 방에만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아서 오늘도 좀 움직여 보려고요.”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바깥 공기도 쐬는 게 건강에 좋지. 근데 그건…… 뭐야?”
내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발견한 후 묻는 표정에서 살짝 이질감이 느껴졌다. 당황이 뒤섞여 떠보는 것 같던 얼굴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감췄지만 마재진의 얼굴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나는 찰나의 순간 지나간 표정을 캐치할 수 있었다. 이로써 아침에 들었던 대화가 꿈에서 들었던 것 따위가 아님이 확실해졌다.
“아, 이거 어제 산 옷인데 사이즈가 안 맞아서 교환하려고요.”
미리 생각해 둔 변명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긴장으로 수축했던 마재진이 입술 근육이 그 변명에 느슨하게 풀리는 게 보였다. 내가 이렇게 사람 표정을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싶어 나조차 신기했다.
“뭐야, 입어 보지도 않고 샀어?”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은 마재진이 느긋하게 물었다.
“네.”
“아직 옷 가게 문 열기엔 이른 시간 아닌가?”
“배고파서 나간 김에 밥도 좀 먹고요.”
“아침 먹을 거면 나하고 같이 먹고 나가는…….”
“괜찮아요, 이따 저녁은 같이 먹어요. 어제는 형이 점심 사 주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살게요.”
“어…… 그럴래?”
저녁을 같이 먹자는 말에 마재진의 경계가 완전히 풀린 게 느껴졌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인생 최대의 표정 관리였다. “다녀올게요.” 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재진에게서 뒤돌아서는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한껏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순식간에 아래로 처박혔다. 혹시라도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천천히 걸어 나오던 나는 모텔을 벗어나자마자 미친 듯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현기증이 나고 토기가 쏠렸다. 큰길가로 나오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멀미가 나서 창문을 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여기에 왔던 것처럼 가장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는 버스표를 샀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렇지만 물 한 통 살 수 없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도망 다녀야 한다면 돈이 바닥나는 건 순간이었다. 이제는 정말 돈과 시간 싸움이었다.
강태영이 사람을 써서 내 뒤를 쫓고 있다는 걸 안 순간 한곳에 오래 머물 순 없었다. 다가오는 모든 이를 경계해야 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머리 아픈 일이었다. 나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무지 강태영을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는 눈앞처럼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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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서 정리해, 정리!”
“다들 고생했네!”
“다음 주에 봅시다.”
정리하자는 말이 나오자마자 먼지투성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가 지면 일을 할 수 없어서 시간이 되면 칼같이 작업은 거기서 마무리였다.
공사 현장에서 일한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인력사무소에서 당장 구할 수 있는 일로 이곳을 소개해 줘서 들어온 게 시작이었다. 힘도 못 쓸 것같이 생겨서 안 봐도 하루도 못 하고 도망칠 것 같다며 안 받아 주려고 하던 걸 빌고 빌어서 겨우 얻어낸 일이었다. 일은 미친 듯 고됐지만 매일 일당이 지급된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마재진과 배민혁의 대화를 주워듣고 그길로 모텔에서 도망친 후 일주일 동안 지역을 세 군데나 옮겨 다녔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언제 강태영이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돈이 풍족할 때나 할 수 있는 일임을 곧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차비조차 댈 수 없는 잔고 앞에서 나는 결국 마지막 지역에서 멈췄다. 혹시나 위치 추적이 될까 싶어 휴대폰은 첫 번째로 옮겨 갔던 지역의 어느 버스 정류장 쓰레기통에 버렸다.
도망쳤으면서도 나는 불안감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매일같이 악몽이 이어졌다. 대체로는 실체 없는 무언가에 쫓기거나 강태영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몸을 숨긴 채 낯선 곳에서 잠들어 있는 나를 찾아내는 꿈이었다.
꿈에서는 문이 열려도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활짝 열렸다. 문밖은 온통 시커멨다. 나는 달달 떨면서 어둠을 바라봤다. 그러다 보면 꼭 그 어둠에 홀리는 느낌이 들었다. 블랙홀처럼 모든 게 그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조차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다.
문밖의 암흑은 고요하고 잔잔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내가 내 발로 걸어 나와 자신에게로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일어나서 내가 다시 문을 닫을까 하다가도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던 건 내가 문 가까이 다가가면 어둠 속에서 갈고리 같은 손이 훅 뻗어 나와 나를 잡아챌 것 같아서였다.
나는 계속 고민하고 망설인다. 일어날까? 가서 저 문을 내 손으로 닫을까? 그러면 편해지지 않을까? 어둠 속은 평화로워 보이잖아. 아니야, 문 근처로 갔다가 잡히면? 근데 누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누가 나를 잡지? 지금 내 눈에 안 보이는 거지 저 어둠 속에 누가 있을지 어떻게 알아?
생각이 이어지면 꿈속에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내가 깰 때까지 악몽 같지 않은 악몽은 계속된다.
오늘도 그 꿈을 꿨다. 오늘의 꿈에서는 몸을 일으켜 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어둠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다가갈수록 기묘함이 더욱 강해졌다. 문을 닫기도 전에 저 어둠 속으로 빠질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가 조금 더 문 가까이 다가가면 뒤에서 누군가 내 등을 밀어 저 안으로 빠트릴 것 같았다. 나는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꿈이면 깨어나라고 소리쳤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악다구니를 썼는지 깼을 때는 목이 따가웠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현장 일용직 일을 구한 후에는 그나마 몸이 피곤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기절하듯 잠든 적도 한두 번 있었는데 오늘은 하필 악몽을 꿔서인지 몸이 더 힘들었다.
“비실비실해서 금방 도망갈 줄 알았는데, 오늘도 용케 왔네?”
투박한 손이 안전모를 툭 치고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지 않아도 멍투성이 어깨였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인 어깨를 떠올리며 악 소리가 나오려는 걸 참고 올려다보자 반장 아저씨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전모를 벗은 머리가 땀에 젖어 푹 가라앉아 있었다.
“먼지 바닥에 그만 앉아 있고, 얼른 들어가. 먼저 간다.”
“네, 들어가세요.”
지쳐 앉아 있던 나는 현장 임시 철제문이 닫히기 전 거의 마지막으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저녁 식사를 하긴 해야 했지만 젖 먹던 힘을 내서 움직이고 있는 지금은 젓가락을 들 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계속 도망만 쳐 왔는데 힘쓰는 일을 하려니 몸이 영 버티지 못할 만도 했다. 옷가지 등을 담기 위해 시장에서 팔천 원에 구입한 스포츠 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천금처럼 무거운 다리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몸이 힘겨웠다. 견디지 못하고 몸이 비틀거릴 때면 주변에서 걷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흘깃 쳐다볼 정도로 크게 휘청거렸다.
같은 모텔에서는 최대한 이틀만 머무른다. 이제 부지런히 오늘 밤 지새울 곳을 찾아야 했다.
얼른 씻고 싶다, 눕고 싶다, 자고 싶다. 배도 고팠지만 피곤한 게 더 커서 뭔가 먼저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똑같은 일을 했는데도 오늘은 유난히 힘들었다. 체력적으로 버티는 게 한계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 악몽도 모자라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코피까지 쏟았다.
평생 궂은일은 해 본 적 없는 몸이 도망에 막노동까지 하는 것을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순 없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하루살이 같은 삶이었다.
결국 오늘 묵을 곳을 찾기도 전에 지쳐서 생각에도 없던 백반집에 들어왔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라기보단 그냥 당장 어딘가에 앉아서 쉬고 싶었다.
주문하겠느냐며 다가온 식당 주인에게 된장찌개를 주문하고 식탁 위로 엎어졌다. 머리가 무거웠다.
“총각, 총각 일어나 봐. 반찬 놔 줄게.”
흔드는 손길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반찬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식당 주인은 작업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근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냐며 알은체했다. 나는 작게 고개만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쩜, 어리게 생겼는데 험한 일을 다 하네. 어머, 땀 좀 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된장찌개도 금방 나오니까 자지 말고 세수라도 하고 와요.”
“네.”
아주머니 말대로 세수를 한 후 고개를 들자 젖은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잠을 설치고 코피까지 쏟아서인지 오늘 컨디션이 진짜 안 좋다는 말로 표현이 안 됐다. 현장에서 쓰러지지 않은 게 기적 같았다.
욕실에서 손과 얼굴을 닦고 나오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도 곧이어 나왔다. 뭐가 들어갈 것 같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식사 도중 반찬이 더 필요하면 말하라며 나를 챙겨 주었다.
원래는 대충 몇 숟가락 뜨고 조금 쉬다가 나갈 생각이었지만 챙겨 주시는 아주머니를 보니 음식을 남기는 게 마음에 걸려서 꾸역꾸역 공깃밥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조금 쉬고 배를 채워서 그런지 아까보다는 몸 상태가 나았다.
“잘 먹었습니다.”
“밥 좀 많이 먹어야겠구먼. 힘든 일 하는데. 이렇게 말라서 힘을 쓰겠어? 요 앞에서 일하는 거면 자주 와.”
계산을 마치고 식당 주인의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들은 후 식당에서 나왔다. 얼마쯤 걷자 길 건너에 작은 모텔이 보였다. 오늘은 저기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듯싶었다. 저녁도 먹었으니 가서 씻고 바로 자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나마 조금 힘이 났다.
이상한 기척을 느낀 건 신호등 있는 건널목을 건넌 후 모텔이 있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휙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몸이 허해서 그런가. 팔짱을 끼고 걸음을 더 빨리했다.
기분 탓이었던 건지 모텔방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을 풀 수 있었다. 잠금장치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메고 있던 스포츠 백을 내려놨다.
땀과 먼지로 더러워진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뜨끈한 물이 온몸을 감싸자 기분이 나른해졌다. 잠옷은 필요 없었다. 대충 모텔에 걸려 있던 가운을 입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드디어 누웠다. 내일은 일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말이었다. 모처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푹 잘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 매우 이른 시간이었지만 고된 하루 끝에 까무룩 꺼지는 의식 앞에서는 시간은 별 의미 없는 숫자였다.
오늘은 꿈도 꾸지 않고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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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저절로 뜨였다. 모로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자는 사이 뒤척이기라도 한 건지 가운 끈이 풀려 사이가 다 벌어져 있었다. 나는 가운을 여미며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부직포로 만든 것 같은 재질의 일회용 슬리퍼에 발을 넣고 욕실로 향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어제보다 컨디션이 확실히 좋았다. 몸도 가벼웠다. 샤워 내내 어쩐지 콧노래가 나왔다.
출근 첫날부터 몸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근육통도 조금 줄었다. 확실히 일주일쯤 되니 몸도 적응한 모양이었다. 어제는 코피까지 흘려서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어젯밤 들어올 때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주체할 수 없던 몸이 모텔을 나서는 지금은 솜사탕처럼 가벼웠다.
가방 깊숙이 일주일 동안 공사 현장에서 일하며 모았던 일당을 고스란히 집어넣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래도 돈이 꽤 모였다. 이 정도면 며칠은 일하지 못해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오늘은 지역을 이동할 생각이었다.
돈을 모아야 해서 이미 이 지역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 휴대폰도 없는 마당에 나를 추적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더 오래 있는 건 위험했다.
나는 곧장 고속버스를 타고 지역을 옮겼다. 푹 자고 난 뒤여서 그런지 버스에서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했다. 어제 느껴지던 이상한 불안감 역시 지금 떠나온 곳에 두고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둑한 돈 봉투에서 오는 편안함일지도 몰랐지만 나는 지금의 이 편안함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동하고 보니 또 바다 근처 지역이었다. 잠깐 배를 타고 아예 섬으로 들어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서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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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곳에서 보낸 주말 동안의 시간은 모처럼 천국 같았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그 정도인가 싶겠지만 나에겐 딱히 과장된 표현도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던 악몽도 없었고 고된 일을 하러 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는 일도 하지 않아도 됐다. 악몽도 몸이 너무 힘들다 보니 꿨던 것 같았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보면.
돈이 있으니 눕고 싶을 땐 얼마든지 누울 수 있었고 지겨울 때까지 쉴 수 있었다. 자고 싶은 만큼 잔 후에 배가 고프면 대충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불과 이틀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최근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에게는 꿀 같은 휴식이었다.
아무래도 이 지역이 나와 잘 맞는 건지 아니면 충분히 쉬어 주니 좋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체력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많이 좋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피어오르던 불안감도 줄었고 왠지 모르게 이제는 예전의 나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항상 어딘가로 옮겨서도 강태영이 여기까지 쫓아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먼저였는데 여기선 그런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이제 이 생활에도 적응이 된 건가.
짧으면 2, 3일에 한 번, 길어 봤자 일주일에 한 번꼴로 어딘지도 잘 모르는 지역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도 더는 피곤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우스운 말일 수도 있는데 다음 지역은 어디로 가 볼까 하는 기대감이 슬그머니 들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금 게으름을 부렸다. 어차피 일을 구하려고 한다면 크게 어렵지 않은 편이라는 걸 지난번 경험에서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지 멀쩡하고 나이도 젊은 데다가 일을 가리지 않다 보니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일을 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월요일부터 인력사무소에 가서 일을 구할 예정이었지만 한 번 쉬고 나니 조금만 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좀 미뤘더니 내일이면 수요일이었다.
돈이 다 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미리미리 일을 구해야 했다.
“내일은 진짜 가 봐야지.”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근처 인력사무소 위치도 알아 놨으니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일을 구하러 가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하루만 더 쉬고 싶다.
또 들기 시작하는 안일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알람용으로 샀던 작은 탁상용 시계의 알람을 다시 맞춰 두고 편의점 로고가 박힌 봉지를 열었다.
나는 살짝 자조적으로 웃으면서 맥주 캔을 땄다. 캔 뚜껑이 딸칵 소리를 내며 열렸고 뒤이어 청량한 소리가 작은 모텔방 안을 울렸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 넘어가는 맥주가 시원했다. 안주라고는 과자 한 봉지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이 났다. 스무 살이 됐다고 성지후와 술을 마시고 취했던 때가.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내 앞날이 이딴 식으로 흘러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물론 그때도 강태영과는 비정상적인 관계였지만 그게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이러고 있으니 그때 있었던 일들이 지극히 비현실적인 꿈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성지후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렇게 인사하고 떠난 뒤로 한 번도 연락하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더 이어지려고 하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차단했다. 우울해지려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장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이었다.
옛날 생각을 하면서 땅굴을 파고 있어 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그래도 그 전에 비하면 지금은 희망이 조금씩 보이니까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면서 지내는 게 최선이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강태영이 먼저 나를 포기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녀석의 삶에 또 다른 흥밋거리가 생긴다거나 하면……. 애초에 단순히 나를 괴롭히는 게 목적이었던 것일 텐데 애써 고생을 하면서 달아난 나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적어질 게 분명했다.
아니면 사실 벌써 포기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맥주 맛이 조금 더 달게 느껴졌다.
•••
일을 마친 후 받은 봉투를 들고 작업장을 벗어났다. 며칠 동안 도배 작업의 일손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온종일 현장에 있다 보면 도배용 풀 냄새에 머리가 살짝 아팠지만 푹 쉰 뒤여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몸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도배를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 작업자들의 지시에 따라 몸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되는 거여서 더 수월했다.
내일은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예정이라 미리 오늘까지만 하겠다고 말한 뒤 나온 거라 속이 다 후련했다.
저녁으론 뭘 먹을까? 가는 길에 음식을 포장해서 갈까? 아니면 사 먹고 들어갈까?
일상적인 생각을 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살짝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다. 이제는 다른 걱정보다 일상적인 생각을 하는 게 더 익숙했다.
모텔로 가는 길에 있는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 가야겠다. 이곳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치고는 꽤 소박한 느낌이었지만 이틀 전 처음 먹어 봤던 떡볶이 맛이 꽤 좋았기에 한 번쯤 더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네 캔에 만 원 하는 맥주도 샀다. 이런 상태라면 다음 지역에서는 조금 더 오래 있어도 될 것 같았다. 한곳에서 머무르는 기간을 조금씩 늘려 가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정착해서 지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적응이 됐다고는 해도 계속 옮겨 다니면서 지낼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때가 되면 성지후에게도 편하게 연락할 수 있을 거였다.
지금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돈도 벌고 잘 지낼 수 있겠지. 하루살이로 사는 것도 그만둘 수 있을 거고. 돈은 성실하게만 벌면 혼자 살 수 있을 정도로는 모을 수 있을 테니까.
희망을 꿈꾸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
오늘은 버스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을 내 볼 생각이었다.
“어?”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인 뒤 기분 좋게 욕실에서 나오는데 발에 뭔가가 걸렸다. 지퍼가 다 열린 채 안이 헤집어져 있는 스포츠 백이었다.
“이게 원래 여기 있었나?”
분명 어제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 바로 앞에 내려 뒀던 것 같은데 이게 왜 이 앞에 있지? 게다가 가방 지퍼를 열었던 기억도 없었다. 어젠 와서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씻은 뒤 모텔 가운을 입고 그대로 침대에 다이빙했던 게 다였다. 아무리 피곤해서 잊은 것이라고 해도 가방을 열어서 뒤졌던 기억만큼은 전혀 없었다.
설마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왔던 걸까? 소름 돋는 가정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평온했던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우선 열린 가방을 탈탈 털었다.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 그동안 일한 일당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큰돈은 아니더라도 당분간 은신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얼른 가운을 벗고 가방 안에 있던 옷 중 하나를 꺼내 갈아입은 뒤 총알처럼 방을 벗어났다.
모텔 복도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아무리 그래도 주말인데 이렇게 인기척이 없을 수도 있나? 하나가 이상하게 느껴지자 모든 게 다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내가 있는 5층을 향해서 엘리베이터가 오르기 시작했다. 1, 2, 3…… 바뀌는 숫자를 보자 맥박이 점차 빨라졌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닿기 전에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머리로 생각한 뒤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몸이 본능적으로 먼저 움직인 거였다. 뒤에서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내리는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을 뒤로하고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갔다.
쿵쿵쿵 비상구가 큰 소리로 울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1층에 도착했다. 막 모텔로 들어서던 사람이 비상구 계단 쪽에서 튀어나온 나를 보고 놀랐는지 작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사람을 지나쳐 모텔을 아예 빠져나갔다.
어제도 보았던 골목길이 낯설기만 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나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오른쪽 길로 움직였다. 일단 이쪽으로 나가면 큰길이 나오니까 나가서 택시를 잡아타든, 뭘 하면…….
“잘 잤어?”
뒤에서 그것도 꽤 가까운 거리에서 들린 목소리에 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잊으려고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뭐라고 물었는지는 뇌에 저장되지도 않았다. 숨 쉬는 법도 까먹었다.
“일이 힘들긴 했나 봐, 아니면 하도 돌아다녀서 그런가? 살 더 빠진 것 같네?”
옆구리로 들어온 손이 배를 쓰다듬었다.
“모텔에서 가운 입고 자던 거 보기 좋던데.”
“……어, 어떻…….”
너무 놀라서 그런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복근 생기려고 하나 봐. 고작 며칠 막일했다고.”
눈을 접어 가며 웃고 있는 얼굴은 익히 알고 있던 강태영의 것이 맞았는데 화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강태영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같은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강태영의 손을 날카롭게 쳐낸 후 몇 걸음 떨어졌다. 진짜 강태영이었다. 강태영이 내가 쳐낸 자신의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감싸고는 아, 소리를 냈다. 앓는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야.”
“……아, 왜. 너…… 네가 여, 여기.”
“와, 내 옆으로.”
강태영이 까딱까딱 제 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싫…….”
“길바닥에서 씨발, 처엎어지고 싶은 거 아니면. 닥치고 네 발로 와, 나 엄청 화났어. 웃고 있으니까 모르겠어?”
강태영의 말과는 반대로 내 몸은 자꾸 녀석에게서 멀어지고 싶은지 뒷걸음질 치게 됐다. 머리로는 그냥 가만히 서 있으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몸이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문자 본 거 다 알아. 네 발로 오면 봐준다고 했었는데. 기억하지? 근데 어쩌지, 네가 말 안 들어서 내가 너 찾아왔네?”
“…….”
“어떻게 할까?”
강태영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내내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만.”
“…….”
“한 발자국만 더 뒤로 가면 나 여기서 진짜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녀석의 그 말에 거짓말처럼 발이 묶였다. 계속 뒷걸음질 쳤던 것 때문에 강태영과 나 사이의 거리는 처음 보다 멀어졌다.
“이리 와.”
강태영이 나에게 팔을 뻗으며 말했다. 녀석이 행한 마지막 인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한 행동은 가방까지 바닥에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속으로 연신 욕을 삼켰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이렇게 놓아둘 리 없는데도 뒤에서 나를 쫓아오는 기색이 없었다. 수없는 갈등 끝에 살짝 뒤를 돌아봤다. 강태영이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도망치는 나를 보고만 있었다.
왜?
“아윽.”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 있는 강태영에 의문을 가진 그 찰나의 순간 어깨 위로 둔탁한 뭔가가 떨어졌다.
길바닥 위로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미안, 의뢰를 받아서 어쩔 수가 없네. 나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 너 도망쳐서 나도 저 자식한테 뒈질 뻔했어.”
고개를 들자 배민혁의 얼굴이 보였다.
“진짜 뭐냐? 둘이 무슨 관계야? 빚을 얼마나 졌길……. 아니다, 이 마당에 이런 걸 물어봐서 뭐 해. 그러게 왜 토껴, 토끼길.”
혼자 말을 잇던 배민혁이 한 번 더 손을 들었다.
“읍, 으브븝.”
피할 새도 없이 하얀 손수건이 코와 입을 막았다. 몸부림쳐 봐도 우악스러운 손길로 막고 있는 손수건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몸부림치느라 호흡을 크게 할수록 젖은 수건이 입가와 코에 들러붙어 숨 쉬는 게 괴로워졌다.
“살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고 강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숨 푹 자.”
무릎을 굽히고 나를 내려다보는 강태영의 얼굴이 희미했다. 웃는 건가? 싶은 의문이 든 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으…….”
몸이 흔들릴 때마다 골 전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특히 어깨와 등 부분이 아팠고 머리가 개운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여기서 뭘…….
“으윽!”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딘가에 이마를 박았다. 게다가 몸도 전체적으로 몹시 불편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온통 어두웠다. 두 손은 뒤로 묶여 있었고 눈을 떴는데도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입술도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안면 근육을 움직일 때마다 비린 테이프 냄새가 났고 살갗이 쓸려 따가웠다. 그 와중에도 몸은 계속 흔들렸다.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없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보이는 것도 없고 어디에 있는 건지 어떤 상황에 놓인 건지 알 수 없자 두려움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증식했다. 유일하게 외부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뚫려 있는 귀에서는 심장 뛰는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나는 정보를 얻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심장 박동 사이로 희미하게 다른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구릉쿠릉, 타다닷.
뭔가 구르는 소리와 자갈 같은 게 튕겨 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흔들림도 익숙했다. 한 번씩 어딘가를 넘는 듯 크게 덜컹거리기도 했다. 시야가 가려진 채 반동이 일자 속이 메슥거렸다.
설마.
스쳐 지나간 끔찍한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달리는 차 안속, 그것도 트렁크 안인 것 같았다.
접힌 다리를 뻗을 수도 없이 비좁은 공간도 그렇고 이 흔들림도 그렇고. 나는 믿을 수 없는 끔찍함에 몸을 흔들었다. 다리를 뻗어 닿아 오는 벽을 쾅쾅 바로 찼다.
막힌 입으로 차를 세우라고 소리도 질렀다. 그래 봤자 들리는 건 억눌린 신음 같은 소리뿐이었다.
한참을 발광하고 나자 갑자기 산소가 모자란 것처럼 현기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불현듯 이곳에 갇힌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턱 막히며 눈물이 났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두려움에 떨던 나는 조금 쉬다가 다시 악을 쓰며 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쾅, 쾅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여기저기 부딪친 다리에선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은 건지 점차 속도가 줄어들던 차가 완전히 정차했다. 나는 트렁크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빨리, 빨리. 제발 문 좀 열어.
누구든 좋으니 문만 열어 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깼어?”
그러나 바람과 달리 문은 열리지 않았고, 잊을 수 없는 목소리만 들렸다.
강태영이다.
나는 대답으로 차 벽을 두어 번 찼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윽.”
입을 막고 있는 젖은 테이프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의 다 왔어.”
발목이 찌릿할 때까지 차 벽을 쳤다.
“계속 지랄하면 그냥 거기 평생 가둬 버린다?”
곧 웃음기를 거둔 강태영의 말이 들렸다. 그 말이 진짜일 것 같아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다리를 천천히 다시 접었다.
“끄으……흑.”
침과 눈물에 젖어 입에 붙은 박스 테이프 한쪽이 너덜거렸다.
“강태영…… 어디 가아, 꺼내 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왕왕 울렸다. 큰 소리를 내면 또 녀석의 신경을 거스르게 할까 봐 일반적인 목소리로 애원했으나 이게 강태영에게까지 닿을지는 미지수였다.
“나, 나 토할, 우윽…… 거 같아, 응?”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진심이었다. 트렁크 안에 갇혀서 멀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토기가 치밀었다.
그러나 속도는 다시 줄어들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속을 게워냈다. 좁은 공간에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현실감 없는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한 차례 게워내고 나자 메슥거림은 가라앉았지만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입가를 닦아낼 수도 없었다. 짐승만도 못한 처지가 끔찍이도 서러웠다.
얼마나 갇힌 채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 애원하지 않았다. 숨만 겨우 쉬는 상태였다. 진이 다 빠진 채 축 늘어져서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힘겹게 들렸다. 좀 전부터는 요의마저 들기 시작했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이 상태로 오줌을 쌀 것 같았다.
차는 점점 더 거친 길을 달렸다. 그래도 전보다는 속도가 줄었고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일도 잦아졌다. 다시 속이 안 좋아질 것 같을 때 차가 완전히 정차했다.
두통을 일으키는 것 같던 엔진 소리마저 꺼진 건 처음이었다. 끝난 건가. 고문을 받는 것과도 다름없던 시간이? 나는 바짝 긴장했다. 달칵 소리와 함께 트렁크 문이 열렸다. 갑자기 쏘아대는 빛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힘들었어? 토했네.”
강태영은 트렁크 안 꼴을 보고도 여상히 말했다. 역겹다거나 더럽다거나 하는 기색도 없었다. 턱을 덜덜 떨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으윽.”
강태영이 너덜거리던 입가의 테이프를 확 떼어냈다.
“몸은 어때? 어깨 아파?”
나는 달달 떨며 고개를 저었다. 강태영이 만족스럽게 듯 웃더니 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게 왜 거기서도 말을 안 들어서 처맞아, 맞길.”
강태영이 속상하다는 듯 혀를 찼다.
“다리에 힘줘.”
바닥에 발을 딛고 서자 휘청거리는 나를 두고 강태영이 명령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넣었다.
“여기 알지? 오랜만에 오네.”
강태영의 말에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녀석의 말대로 아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오는 곳도 맞았다. 강태영의 집에 맡겨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의 가족들과 함께 와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강태영의 가족 별장이었다.
그래, 잊고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물밀듯 밀려왔다.
한 번쯤 더 오고 싶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별장 근처 계곡에서 재준이 형과 물놀이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데 이곳을 이런 식으로 다시 오고 싶지는 않았다.
“참 변한 게 없어. 그치?”
강태영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해가 진 뒤 남아 있는 어슴푸레한 빛을 등지고 선 녀석은 연신 웃는 낯이었다.
“그때도 강재준 좋아했어?”
“그때가 어, 언제…….”
“여기 왔을 때.”
“아, 아니.”
“그럼 언제부터였는데?”
나는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그랬다. 이제는 재준이 형의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오히려 후회되는 일이었다. 애초에 재준이 형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을 강태영에게 들켰을 리도 없었을 거고 이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지 모른다는 그런 후회였다.
“지금 무슨 생각 해?”
강태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강재준 생각해? 여기서 놀았던 거?”
“아……니, 나 이제 재준이 형, 아윽!”
재준이 형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재준이 형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발이 날아들었다. 뒤로 엎어졌다. 무방비 상태에서 아랫배를 걷어차인 거였다. 왜 맞았는지 이유도 몰랐다.
“으윽.”
어안이 벙벙한 것도 잠시 아픔과 함께 아래가 축축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배를 감싸 쥐고 신음을 삼켰다.
“뭐야, 젖었네?”
참고 있던 오줌이 터진 모양이었다. 수치심에 눈물이 터졌다.
“흐으윽, 아……!”
강태영이 아랫배를 지그시 밟았다. 막을 손도 없이 나는 하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찔끔찔끔 미처 다 나오지 못한 오줌이 질질 새며 속옷과 바지가 더 젖어 갔다.
“씨발, 개 같네, 너. 개들이 너무 좋아도 오줌 싸거든, 꼭 너처럼.”
“흐으읏, 하, 하지 마, 제발…… 아, 아.”
“너 여기 오고 싶어 했던 거 알아.”
“……흐윽.”
“좋은 추억 만들고 가자? 내가 강재준하고 놀았던 것보다 더 잊지 못할 기억 만들어 줄게. 이제 여기 생각해도 나만 떠오르게.”
•••
“윽.”
별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강태영은 나를 욕실에 밀어 넣었다. 손은 여전히 묶여 있었다. 직접 양치와 세수를 시킨 강태영이 내 옷을 벗겼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곧장 손과 발이 날아들었다. 나는 울면서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내려갔다. 상의를 마저 벗기던 강태영은 손이 묶여 있어 옷을 제대로 벗겨낼 수 없자 나가서 뭔가를 들고 왔다.
가위였다.
멀쩡하던 옷이 그의 손에서 마구잡이로 찢겨 나갔다.
“끄으, 윽.”
“일어서.”
욕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서자 샤워기를 튼 강태영이 온도를 맞추고는 물을 뿌렸다. 뒤로 물이 쏟아졌다. 차갑지 않았는데 냉수라도 맞고 있는 것처럼 계속 몸이 떨렸다.
“돌아.”
나는 천천히 강태영 쪽을 향해 돌아섰다. 쏟아지는 물이 온몸을 적셨다.
“내가 할…….”
샤워 볼에 거품을 낸 강태영이 내 몸에 직접 거품 칠까지 하려고 했다.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강태영은 내 손을 쳐냈다.
“가만히 있어.”
강태영이 입고 있는 옷이 젖어 갔지만 녀석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몸 구석구석 강태영의 손길이 뻗쳤다.
목과 쇄골을 지나 사타구니까지 강태영의 손이 닿았다. 손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강태영 역시 자연스럽게 몸을 굽혔다. 어쩐지 온몸을 집요하게 훑는 것 같으면서 미묘하게 사타구니 사이를 스치는 손길에 입술을 사리물었다.
“다리 벌려.”
강태영이 붙이고 있는 다리 사이를 손등으로 툭 치며 말했다. 모욕적인 언행에 목덜미에서부터 얼굴까지 화드득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말을 듣지 않고 머뭇거리자 강태영이 눈만 치켜뜨며 나를 올려다봤다.
“벌려.”
고압적인 음성에 더 버티지 못하고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손까지 묶여 있는 상태에서는 반격도 쉽지 않았고 까딱 잘못했다가는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져 크게 다칠 것 같았다.
“아!”
미세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강태영의 손이 파고들었다. 팔을 길게 쑥 넣어 가랑이 사이, 회음부와 성기까지 강태영이 손길이 이어졌다. 다른 곳보다 더 집요하고 길게 이어지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닐 것 같았다.
거품이 묻은 손가락이 구멍 입구 주변을 덧그리듯 꾹 누른다거나 음낭을 살짝 감싸 쥐는 것 같은 이상야릇한 감각에 아래로 점차 피가 쏠렸다.
“흐으.”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 손을 피해 엉덩이를 뒤로 뺐다. 그러나 곧장 엉덩이가 벽에 닿았다. 성기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터라 그 변화를 모를 리 없는 강태영이 시선을 들자 눈이 마주쳤다.
까만 시선에 얻어맞은 듯 몸이 떨렸다.
“뭐 하냐?”
“…….”
“무섭고 아프면 꼴려? 말로만 싫다고 하는 거지?”
“안, 아니. 이건 그런…….”
“너도 정상은 아니라니까.”
피식 웃으면서 내뱉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친동생처럼 아껴 준 사람한테 발정하기나 하고, 간 크게 그 집에서 자위하다가 그 동생한테 들키질 않나. 이런 상황에서 세워?”
“아흑.”
강태영의 손등이 반쯤 발기한 성기를 다시 퉁 튕겼다. 그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던 건 녀석의 말대로 내 성기는 이 와중에도 차근히 부피를 키워 가고 있었고, 아랫배로 피가 쏠리는 느낌을 내가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남자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런 식의 자극이라면 같은 반응이 올 거라는 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스스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다른 사람도 나처럼 반응할까?
나는 차마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아니면? 강태영의 말대로 진짜 나도 답 없는 새끼라면?
녀석의 말을 들으니 정말 그런 것도 같고.
“너나 나나 구제 불능이라고.”
이어진 강태영의 말이 쐐기처럼 박혔다. 눈물이 다시 터졌다.
“다리나 더 벌려.”
강태영은 명령하면서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내 몸을 돌려 뒷머리를 꾹 눌렀다. 덕분에 이마가 욕실 벽에 닿았다. 하마터면 코가 깨질 뻔했지만 너무 늦지 않게 머리에 힘을 주고 그렇게는 되지 않도록 버텨서 다행이었다.
강태영의 허벅지가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다리가 양옆으로 좀 더 벌어졌고 내 몸에서 떨어지고 있는 거품과 물기가 녀석의 옷을 적셨다.
“윽……!”
아래로 손가락이 파고든 건 순식간이었다. 엉덩이를 바짝 조이며 까치발을 들고 서자 강태영이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힘을 빼라고 종용했다. 고작 손가락 한 개였는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 건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그나마 같이 밀려 들어온 거품이 윤활제 역할을 했다.
“힘, 빼라, 니까.”
“아, 파……. 아파, 살, 살.”
“힘을 빼야 살살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강태영이 다른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잡아채며 말했다. 나는 울먹이는 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바짝 긴장한 아래에 힘을 빼려고 노력했다. 강태영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살기 위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까치발 들었던 발꿈치를 내리고 입으로 훅, 훅 숨을 내쉬며 긴장한 몸에서 힘을 풀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마치 씹는 것처럼 강태영의 손가락을 조이고 있던 아래가 아까보다는 덜 빠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악!”
그러자마자 손가락 한 개가 더 들어오며 아까보다 깊숙이 박혔다. 아파서 바르르 떠는 나를 무시한 강태영은 내 애원에도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위아래로 쑤셨다.
왕복 운동을 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조금씩 부드러워졌고, 내 입에는 눈에서 흐른 짠물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났고 강태영은 끝까지 밀어 넣은 손가락으로 가위질을 하며 내벽을 풀었다.
쏴아아.
“아, 윽…… 싫!”
풀어진 안쪽으로 샤워기 머리를 갖다 댄 강태영이 물을 틀었다. 강태영의 손가락이 박혀 늘어진 아래로도 물이 살짝 들어왔다. 놀라서 파드득 떠는 내 입을 막은 강태영은 물로 거품을 씻어 내렸다. 아래에서 위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미끄럽게 떨어지는 거품이 느껴졌다.
물소리가 멎고 지이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아까부터 엉덩이에 닿아 있던 단단한 살덩이가 생으로 느껴졌다.
뒤로 묶인 손에도 강태영의 발기한 성기가 닿았다. 강태영이 결박을 풀어 주고 손바닥으로 좆을 감싸 쥐게 했다. 팔딱 뛰는 맥박과 표면에 튀어나온 혈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잡아.”
귓가에 닿은 강태영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습기 찬 한숨이 길게 나를 간질였다. 나는 강태영의 성기를 잡았고 강태영의 손은 내 손등을 감쌌다.
맥동하는 뜨거운 생좆이 손안에서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한참이나 벗어난 길이에 강태영이 움직일 때마다 젖은 귀두가 허리 가운데 움푹 팬 골을 꾹 누르며 비벼졌다.
거대한 뱀과 같은 좆 머리가 마른 등에 닿아 크기가 느껴졌다. 이 홧홧하고 큰 살덩이가 좁디좁은 내벽을 빠듯하게 벌리며 들어와 머리가 하얘질 정도의 쾌감을 이끌어 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고통 뒤에 따르는 쾌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나 내가 결국엔 느끼고 만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 손을 털어낸 강태영은 허리 위를 비비던 자신의 성기를 잡고 구멍 입구에 맞췄다.
“하으읏!”
입구에서 깔짝대던 귀두가 잠깐 들어왔다가 쑥 빠져나갔다.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맥없이 풀렸다. 그보다 아래로 들어와 회음부 쪽을 찌르듯 하더니 물과 좆물에 젖어 미끄러운 살갗을 비비기도 했다.
사람을 갖고 놀려는 심산인지 같은 행위가 몇 번 반복되자 긴장하던 것도 차츰 풀렸다.
“아! 아윽……쁩!”
마치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끝까지 푹 처박힌 좆에 엉덩이 사이를 조이며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나 내벽을 가르며 들어오는 침입을 막기에는 한참 늦은 움직임이었다. 강태영이 삐끗 넘어질 뻔한 내 허리를 양손으로 강하게 틀어잡았다. 악력이 세서 골반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손을 놓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손이 아니었다면 미끄러운 욕실 바닥에 엎어져 앞니가 나갔을 거였다.
짜악!
“어흑, 흣.”
강태영의 손에 올려 쳐진 볼기짝에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바르작거렸다.
기다란 성기가 뱃가죽을 뚫고 나올 듯 끝까지 박혔다가 빠져나갔다. 조이면서 밀어내는 울퉁불퉁한 내벽 사이를 가르고 들어와 안쪽을 쿵, 쿵 찌를 때마다 고통은 뇌가 바스러지는 것 같은 쾌감으로 치환됐다.
“아, 아, 윽.”
판판한 아랫배 가죽에 제 좆 자국이 찍혀 나오면 강태영은 배를 감싸고 있던 손을 꾹 눌렀다.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쾌감에 몸이 세차게 경련하면 녀석의 입에서도 뜨거운 숨이 터졌다.
“그, 싸……, 쌀 것, 아욱…… 히윽!”
얼굴에서 불이 났다. 뜨겁고 따가운 얼굴이 눈에서 흐른 짠물로 범벅이 됐다. 머리가 뻥,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내 얼굴보다는 조금이라도 온도가 낮은 욕실 벽에 연신 볼때기를 비벼대며 애원했다.
복근이 선명한 판판한 상체는 아무리 밀어내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딸꾹질하듯 히뜩거리며 쌀 것 같으니 멈춰 달라는 말은 단 한 문장도 제대로 되어 나오지 못했다.
“싸, 후으…… 같이, 싸.”
내 애원에 대한 답은 쿡쿡거리는 비웃음 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긴, 거짓말 좀, 그만, 해.”
“아, 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 성기에서 나오는 건 없는데 요란하게 몸이 떨렸다. 반사적으로 수축하는 내벽에 좆을 꽂아 넣으며 강태영은 내 귀를 물어뜯었다. 너무 조여 대서 좆이 끊어지겠다는 말이 튕기듯 끊어져 들렸다.
음낭에 두들겨 맞은 구멍 아래 회음부 쪽에서도 경련이 일었다. 보지 않아도 벌겋게 부었을 예민하고 여린 살에서 첩, 첩 하고 물기 찰박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윽!”
쑤욱 내장까지 딸려 나가듯 빠져나간 성기가 곧바로 오밀조밀 오그라들려는 내벽을 파고들어 왔다. 더 들어올 곳도 그를 피해 내가 도망갈 곳도 없는 곳까지 들어온 좆이 아랫배에 깊게 머무르며 요동쳤다. 배 안에서 거대한 구렁이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아, 아! 하으…… 읏!”
내 입은 더 이상 내 의지로 다물어지지 않았다. 침을 흘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동시에 아까부터 뭔가를 잔뜩 싸 버릴 것처럼 꺼덕거리던 내 좆도 욕실 벽에 쏴아아 소리를 내며 맑은 물을 잔뜩 쏘아댔다. 투명한 액체가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씨발, 미친…….”
더 심하게 경련하는 아랫배를 바투 잡은 강태영이 어깨며 뒷덜미에 집요하게 입을 맞췄다. 나는 아예 엉엉 울며 힘이 다 풀린 몸을 놓고 싶었지만 강태영이 잡고 있어 그러지도 못했다. 하다못해 정신이라도 잃을 수 있다면 하고 수도 없이 바랐다. 그러나 쓸데없이 건강한 육체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무슨, 뭐가 싫고, 뭘 그만하라고.”
“……하악, 하아.”
“벽에 대가리 찧어대도 아픈 것도 모르고 좋아서 우는 주제에.”
“으윽.”
얼마나 벌어진 건지 뻐끔거리며 숨 쉬는 게 느껴지는 구멍에서 주르륵 정액이 흘러내렸다. 허벅지를 진득하게 타고 흐르는 뿌연 흰 액을 얼빠진 채 보고 있다가 머리채가 잡혔다.
“아악.”
엉금엉금 옮겨져 세면대 앞 거울에 얼굴이 닿았다. 아랫배에 차가운 세면대가 닿는 순간 뚫린 뒤로 사정을 하고도 강도를 잃지 않은 좆이 푸욱 박혔다. 강하게 쳐올리는 힘에 볼이 거울에 완전히 짓뭉개졌다. 눈물과 침이 사정없이 문대져 지저분한 자국을 남겼다. 차마 그 꼴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질끈 감자 아래가 퍽, 짓쳐 올려졌다. 장기까지 다 뚫리는 아픔에도 가까스로 눈을 뜨지 않았다.
강태영에 의해 한쪽 다리가 아예 세면대 위로 올려졌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강태영의 허리가 더 수월하게 움직였다. 뻐끔거리는 구멍은 성기가 쑤셔질 때마다 어렵게 아까 싸질러진 그의 정액을 질질 흐르는 게 느껴졌다.
“눈 떠.”
“우욱.”
강태영이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기며 명령했다. 두피가 당겨져 억지로 눈꺼풀이 올라갔다. 눈을 뜬 것을 확인한 강태영이 내 턱을 잡고 돌려 거울을 보게 만들었다.
“네 얼굴 좀 봐.”
“허윽, 으……욱, 싫……, 하지 마아.”
“나 아니면 누가 널 이 지경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상대해 줘야 좋다고 싸대는데…… 네가 일반적인 섹스로 만족할 수 있을까? 어떨 것 같아? 나는 아니라고 보는데. 아래가 너덜거리게 박아 줄 때랑 아닐 때랑 네 안쪽이 얼마나 다른 줄 알아? 넌 그냥 나랑 이러려고 태어난 거야, 근데 넌 그것도 모르고.”
“아흣, 읍.”
“누굴, 후으…….”
“아, 아! 흐아.”
“이런 건 강재준도 못 해 줘.”
아니야, 아니야, 그만해. 듣기 싫어, 싫어. 그 이름 꺼내지 마. 그런 말 하면서 형의 이름 꺼내지 말라고! 개새…….
“너 강재준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야, 지금.”
“우브븍, 끄.”
생각이 이어질 틈이 없었다.
“너나 개소리 그만해, 나도 듣기 싫어.”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나오는 대로 말을 지껄여대자 양 볼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아프게 힘을 줘 누른 강태영이 낮게 경고했다.
“아, 어지…… 욱, 나 어…… 하윽.”
뒷머리가 잡힌 채 거울에 쾅쾅 이마를 몇 번 들이박았다. 세 번 정도 찧어진 후에는 정신이 완전히 해롱해롱해졌다.
“아아, 아.”
거울 속에 비친 내 이마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눈은 잔뜩 풀려 있었고 우는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열이 올라서인지 붉은 얼굴을 하고 벌어진 입으로는 들뜬 신음과 교성을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뜨거운 입김에 거울이 하얗게 흐려졌다가 뚜렷해지기를 반복했다.
“우응, 읍.”
자신이 잡고 있는 볼 때문에 벌어진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은 강태영이 쩌업, 츕 외설스러운 소리를 내며 침을 빨았다. 혀의 넓적한 면을 성교하듯 비벼대고 뾰족한 끝을 세워 입 안 이곳저곳을 툭툭 건드려댔다.
얽혀 오는 혀를 빨고 떨어지려는 입술을 씹었다. 회음부가 움찔움찔 떨렸다. 강태영의 좆이 맛있다고 오물오물 입질하며 먹어대는 아래가 그대로 느껴졌다.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아랫배 안쪽까지 찌릿한 기분이 좋았다. 진짜 이 꼴을 하고도 좋다고? 생각하다가 막힌 입으로 부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강태영의 말대로 말로만 싫다고 하는 꼴이었다.
벌리면 벌리는 대로 닿을 생각도 없이 입 안을 내어 줬다. 입으로도 아래로도 온통 강태영이 침범했다.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복당한 뇌는 정액에 전 건지 희뿌연 의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강태영에게 혀를 빨리고 아래를 쑤셔 박히는 내 성기에서 찔끔찔끔 뿜어진 정액이 기둥을 타고 길게 흘렀다.
현실인가?
가물거리는 시야로 거울에 비친 광경을 넋 놓고 보았다. 눈동자가 완전히 풀린 익숙한 얼굴이 흐리게 웃었다.
•••
몸을 뒤척이다가 팔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나를 깨웠다.
눈을 완전히 뜨고 불편한 왼쪽 팔을 쳐다봤다. 살에 바늘이 꽂혀 있었고 투명한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위로 시선을 들고 나서야 링거를 맞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바늘이 꽂힌 자리가 욱신거렸다. 수액 양이 거의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아 링거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거웠다. 무엇보다 목 안쪽이 너무 아팠다. 맥박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는 관자놀이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선가 고소한 내가 났다.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 뜨거웠다.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데 이마에서 뭔가 만져졌다. 살짝 축축하고 물컹한 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더듬더듬 만져 보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깼어?”
“…….”
“그거 아기들 열날 때 붙이는 패치.”
강태영의 설명을 듣자마자 이마에 붙어 있던 패치를 떼어냈다. 패치 표면에는 애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정신없게 박혀 있었다.
“잘 어울렸는데 왜? 아직 열 안 내렸을 텐데.”
“…….”
“일어난 김에 밥 먹어, 어차피 약도 먹어야 하니까.”
강태영은 대답 없는 나를 얼마간 바라보다가 방 밖으로 나갔다. 조금 뒤 녀석이 쟁반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을 들고 왔다.
허벅지 위에 트레이가 올라왔다. 그러나 고소하게 퍼지는 죽 냄새에 식욕이 돌기는커녕 속이 울렁거렸다. 강태영은 억지로 내 오른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먹고 약…….”
죽을 쟁반째로 내팽개쳤다. 강태영의 목소리도 동시에 뚝 멎었다. 공포감을 조성하는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안 먹어.”
개미만 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아래로 수그리고 말을 하려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리 없었다. 강태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할 용기는 차마 없었다. 방금 한 짓도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1초도 되지 않아 저지른 짓을 후회했다.
“고개 들어.”
“…….”
“반항할 거면 제대로 해야 재미라도 있지.”
조소 가득한 말에 그리 길지 않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강하게 손을 말아 쥐었다.
“대답 안 할 거야?”
“…….”
“진짜 안 하네.”
강태영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윽.”
고개가 훅 뒤로 꺾였다. 위로 향해진 시선 한가득 강태영의 잘난 얼굴이 들어왔다.
“아픈 사람 가지고 이러기는 싫은데.”
“…….”
“가끔 넌 꼭 처맞고 싶은 듯 구니까, 헷갈리잖아.”
“……으으.”
“아니면 진짜 맞고 싶어서 이래?”
얼마간의 눈싸움이 이어지고 나서 강태영은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 아윽.”
위로 들어 올리는 손길은 무자비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해 놓고는 완전히 몸을 일으킬 때까지는 기다려 주지도 않은 녀석이 무심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 손아귀 힘에 질질 끌려가는 꼴이 되었다. 바닥에 엎질러진 물컹한 죽이 밟히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
포악스러운 움직임을 견디지 못하고 수액 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태영 자, 잠깐.”
순간적으로 바늘이 빠져나갔다. 곧 바늘이 꽂혀 있던 자리에서 나온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봐도 기괴한 상황에 강태영을 불러 봤지만 녀석은 멈칫하는 것도 없었다.
내내 갇혀 있던 욕실 문 앞에 도착해서야 멈춰 선 강태영이 욕실 문을 열었다. 녀석이 지금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그대로 뇌가 굳어 버렸다.
“아아, 싫어. 하, 하지 마.”
넝마 같은 몸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해 멈췄다. 발끝으로 바닥을 디디고 있는 힘껏 힘을 주느라 발가락이 다 곱고, 쥐가 날 것도 같았지만 힘을 풀 순 없었다. 필사적으로 벽까지 붙잡았다.
“내가 끌고 들어갈까, 네 발로 들어갈래.”
강태영의 무심한 말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 싫어.”
“싫어?”
“……흐, 윽. 싫어.”
“근데 왜 자꾸 사람 피곤하게 굴어? 나도 너한테 이러기 싫어.”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아윽.”
욕실 안에 그대로 처넣으려는 듯 강태영이 손에 다시 힘을 줬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이대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차라리 녀석을 끌어안았다. 내 딴에는 죽지 않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살기 위해 녀석의 목에 팔을 감고 안겨 들자 강태영의 움직임이 멎었다.
“잘못, 잘못했어…….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이건 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너, 맨날 하라는 대로 한다면서 말 존나 안 듣잖아. 이 김에 버릇 제대로 고치자.”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 욕실 바닥에 엎어진 내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욕실 문이 잠겼다. 놀라서 곧장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해 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시끄럽게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뭐, 뭐 하는……! 강태영!”
이렇게 빨리 나갈 수 있을 리도 없으니 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을 텐데도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태영아…… 가, 강태……!”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다. 설마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둬 둘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손이 아프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목이 터져라 강태영을 부르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저 내가 원하는 반응은 전혀 없이 외침과 쾅, 쾅, 쾅. 욕실 문을 부술 듯 두드리는 소리만 귓가를 왕왕 울렸다.
까딱.
까무룩 잃어 가던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냉기 어린 욕실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아.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욕실 문에 귀를 댔다.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강태영……, 흑.”
완전 쉬어 버린 목소리로는 이제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우는 소리를 냈지만 마른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목이 말라붙어서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받아 마셨을 때 이후론 울지 않았다.
창문도 무엇도 없는 곳에 갇혀 있으려니 시간 개념은 금방 증발했다. 얼마나 흐른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욕실에 갇혀 있는 건 생각보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냉기를 뿜어내는 차가운 타일이 힘들었다. 원래 앉아 있던 자세에서 조금만 흐트러져도 화들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타일에 맨살이 닿아 소스라치기 일쑤였다. 다시 몸을 움직여 그나마 온기가 남아 있는 타일 쪽으로 몸을 다시 기댔다.
강태영에게 그냥 맞아도 좋으니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생리적으로 요의를 느낄 땐 강태영이 나를 가둬 둔 곳이 다른 데가 아니라 욕실이어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춥긴 해도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킬 수는 있는 곳이니까.
다리를 굽혀 무릎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엎드렸다. 온 신경을 욕실 바깥에 집중했다. 그러나 집중은 오래가지 못했다. 점차 정신이 흐려졌다.
이대로 강태영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아냐.
불쑥 치솟은 생각을 치워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나 한번 뚫고 나온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가둬 둔 채 방치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몸을 더 웅크렸다.
그런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무도 없는 별장 욕실에서 알몸으로 혼자 사망한 채 발견되고 싶지는 않았다.
‘강재준이, 좋다면서 후으, 내 밑에서 이러고 있으면 기분이 어때?’
강태영이 내게 쏘아댔던 말들이 환청처럼 들렸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몸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한기 때문인지 몸이 점점 굳는 것 같아서 일어났다. 세면대를 짚고 거울을 들여다봤다. 부어 있는 볼에 핏기 하나 없는 입술까지, 형편없는 얼굴이 보였다.
자꾸만 멍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했다. 그러나 그게 역효과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차가운 물까지 끼얹으니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정신은 자꾸만 꺼지려고 했다. 이런 데서 그냥 잠들었다가는 입이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얼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인가.
시간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니 이게 다 악몽이라면…….
자꾸만 눈이 감겼다.
•••
몇 번이나 정신을 잃고 깼지만 내가 있는 곳은 변하지 않았다. 얼음장같이 변한 차가운 몸을 안고 정신이 아득해질 때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져 갔다.
•••
“어때? 정신 좀 차렸어?”
드디어 욕실 밖에서 흐릿하게 강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려고 했지만 까끌까끌한 목에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목을 쥐어짰지만 성대를 긁히는 느낌에 기침만 나올 뿐이었다.
잠시 뒤 강태영이 욕실 문을 열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그에게로 기어갔다. 그러나 채 문에 닿기도 전에 강태영이 욕실 바닥에 죽 그릇을 내려놓고 다시 문을 닫았다.
내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한 건 또다시 죽 그릇을 욕실 문에 집어 던지는 거였다. 나가게만 해 달라고 꺼이꺼이 울었다.
다시 욕실 문이 열렸고, 강태영은 널브러진 그릇과 하얀 죽이 사방에 튀어 있는 것을 보자마자 나를 끄집어냈다.
그의 손에서 반항하다가 까무러치며 정신을 잃었다.
•••
의식은 이미 돌아왔지만 눈을 뜨는 게 무서워 최대한 눈을 감은 채 버텼다.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다. 이번엔 악몽이 끝났을까? 눈을 뜨면 방일까? 하는 생각을 수십 번을 하고 더 이상 등과 어깨가 배겨 누워 있고는 버티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어렵사리 눈을 떴다.
누워 있는 곳을 확인하고 안심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방 안 침대 위에 곱게 누워 있었다. 트렁크 안도 아니었고 욕실도 아니었다. 또 이 별장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다락방이나 지하실도 아니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뒤 방 안으로 들어온 강태영이 내가 깬 것을 보고 또다시 죽을 가지고 왔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지겨운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 지겹지 않았다. 겪을 때마다 무섭고 두렵고……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죽이 담긴 트레이를 내 무릎 위에 올려 둔 강태영은 내가 어떻게 하는지 놓치지 않고 지켜보겠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전과 달리 얌전히 죽을 떠먹었다.
“이제야, 착하게 구네.”
욕실에 갇혔을 때와 같은 상황이 나온 뒤에도 한 번 더 있었다. 나는 또 말을 듣지 않았다. 강태영이 그려 놓은 답안지에 오답을 적어 냈다.
결과는 역시 좋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연이어 따귀를 맞고 차 트렁크에 갇혀 울퉁불퉁한 길을 내달렸다. 멀미 끝에 토악질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강태영은 첫날과 같이 씻기고 강간했다.
그렇게 지금이 되어서야 나는 드디어 강태영의 마음에 드는 짓을 했다.
“오늘은 나가서 산책하자. 네가 말 안 듣는 바람에 와서 한 게 없잖아.”
입에 넣자마자 그대로 넘기다시피 죽을 먹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태영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무조건 그의 말에 긍정했다. 학습의 결과였다.
“맛있어? 잘 먹네, 많이 먹어.”
강태영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아무런 맛도 느끼지 못했지만 또 맛있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
식사를 마친 뒤 강태영이 입으라고 챙겨 준 옷을 입고 얌전히 기다렸다. 먹은 그릇을 치우고 온 그가 뜬금없이 ‘손’이라고 말했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박이며 그를 가만히 쳐다보자 강태영이 내 손을 잡아챘다.
“이것도 못 알아듣겠어? 손 달라고.”
아.
강태영이 하는 걸 보고 있으면 꼭 우리가 무슨 놀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강태영이 억지로 가져간 내 손목에 두꺼운 팔찌가 채워졌다. 팔찌에는 꽈배기 모양의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다. 사슬의 반대쪽 끝은 강태영이 손잡이처럼 잡고 있었다.
족쇄인가? 목줄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거 어때? 예쁘지?”
“으응, 예뻐.”
나는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웃었다. 강태영이 내 반응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네, 이제 산책하러 가자.”
외출 준비가 끝났다며 일어난 강태영을 따라 별장을 나섰다. 강태영과 내가 움직일 때마다 찰그랑찰그랑 청명한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계곡과 연결된 별장 마당 앞 계단을 내려갔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계곡물은 여름에도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찼었다. 여름이 아직 채 시작되지도 않은 지금이라면 심장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울 게 뻔했다.
계곡물을 따라 난 작은 산책로를 강태영과 나란히 걸었다. 정확히는 한 걸음 정도 뒤에서 그를 따라 걸었다. 강태영의 손에서 이어진 은빛 실이 내 손목까지 예쁘게 감겨 있었다.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나는 홀린 듯 바라보며 걸었다.
한창인 봄의 계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곳곳에 푸른 새싹이 자라고 있었고 어디선가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여기 기억나?”
앞서 걷던 강태영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멈췄다. 나는 그의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가 어딘데? 지금까지 계속 보면서 걸어왔던 계곡이었다. 별다른 것도 없는 곳을 보고서는 확인하듯 나를 살피는 그를 영문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기억 안 나?”
“……여기가 어딘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겨우 물었다. 혹시 중요한 곳인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또 얻어맞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히, 힌트 주면 기억할 수…….”
“네가 강재준한테 수영 배우겠다고 깝쳤던 곳.”
강태영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랬던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때 많이 배웠어? 확인해 볼래?”
그 말이 내게는 ‘여기서 죽어 볼래?’라고 들렸다. 아직 이렇게 추운데. 게다가 그때 재미 삼아 잠깐 배웠던 거로는 수영은커녕 물에 뜨기만 하는 것도 겨우 성공했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이 상태 그대로 물속으로 나를 밀어 넣어 버릴 것 같은 녀석을 피해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왜 피해? 무서워? 못 하겠어? 헛배웠나 보네.”
겁을 집어먹고 희게 질려 피하는 나를 보던 강태영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비웃거나 실소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 모양새였다. 강태영이 눈까지 접으며 웃는 얼굴이 생경했다. 웃음이 만연한 얼굴엔 이차 성징이 시작됐던 중학생 이후에도 간혹 여자애인지 하는 질문을 받던 예쁜 얼굴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득 녀석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같은 남자애라는 말을 듣고 놀랄 정도로. 그때 나를 보던 강태영의 눈이 어땠…….
“뭘 그렇게 겁먹었어, 내가 너 여기서 밀어 버릴까 봐? 안 그래, 이리 와.”
첫 만남을 반추하던 나는 생각을 멈추고 강태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무서웠고 녀석은 즐거웠다.
“내가 널 죽일까 봐? 나 너 못 죽여. 죽일 거였으면 이미 몇 번은 죽였지.”
강태영이 이상한 말을 했다. 여태 죽일 것처럼 굴어 놓고 나를 죽이지는 못한다니.
“그나저나 그 지랄을 떨면서 배운 건 하나도 없네. 뭘 얼마나 배웠나 했더니 기억도 못 하고. 존나 하찮다. 강재준 좋아했던 거 맞아?”
내 기억력을 비웃던 강태영은, 자신은 모두 기억한다는 뜻 모를 한마디를 덧붙이고 돌아가자고 말했다. 덜덜 떠는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강태영의 품은 믿을 수 없게도 따뜻했다.
•••
“더 있다가 오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떠니까.”
쇠사슬 팔찌를 풀어 준 강태영은 나를 소파에 앉혀 두고 난방 온도를 올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따뜻함에 소파 위로 몸이 점점 늘어졌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눈꺼풀은 그런 건 모른다는 듯 금세 무거워졌다.
“빽하! 과제 했냐?”
과제? 누군가 등을 아프지 않게 치며 물었다.
“아! 아파, 놀랐잖아.”
돌아본 곳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성지후가 세 번 넘게 부르면서 왔는데 놀라긴 뭘 그렇게 놀라느냐며 장난식으로 등을 한 번 더 쳤다.
“예민은, 그래서 과제는 하셨냐고요.”
“무슨 과제?”
내 물음에 성지후가 미친놈 보듯 눈을 흘겼다.
“무슨 과제는 무슨 과제야, 조직 행동론 과제!”
조직 행동론 과제? 성지후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내가 서 있는 곳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또래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중에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걷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통점은 다들 즐거워 보인다는 거였다.
잘 가꿔진 잔디와 화단이 있었고 일관성 있는 건물들이 나란히 늘어져 있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알 것 같았다. 여긴 대학교 캠퍼스였다. 그런데 내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이 새끼 왜 이래, 너 뭐 잘못 먹었어? 뭘 그렇게 처음 본다는 듯 둘러보고 있어?”
“처음 보는 거 맞는데…….”
“뭐? 시발, 무섭게 왜 이래. 장난 그만해.”
“여기가 어딘데?”
“어디긴 학교잖아. 학교 다니기 싫어서 정신 놓기로 한 거야?”
성지후가 “드디어 진짜 미친 거야? 너 진짜 지독한 회피형이구나, MBTI 뭐라고 했었지?”라고 끝없는 질문을 하며 내 어깨에 매달렸다.
“야, 성지후.”
“왜 이 자식아.”
“나 좀 때려 봐.”
무겁게 매달리는 녀석을 떼어내고 때려 보라고 하자 성지후가 “진짜? 진짜 때린다?”라고 말하며 기다렸다는 듯 주먹으로 어깨를 툭 쳤다. 호기롭기 말한 것과는 달리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그게 성에 차지 않아서 나는 두 손바닥으로 양 볼을 두어 번 내려쳤다.
지금까지는 장난기를 담고 있던 성지후의 표정이 그제야 살짝 굳어졌다. 그러고는 진짜 어디가 아픈 거냐며 진지하게 물어 왔다.
안 깨?
왜 안 깨지?
이거 꿈이잖아.
나는 더 아프게 따귀를 때렸다. 계속, 계속. 성지후가 말릴 때까지.
“야, 야! 너 진짜 왜 이래! 미쳤어?”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하얗게 질린 성지후의 얼굴이 한참 뒤에야 눈에 들어왔다.
이제 성지후는 거의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얼얼하다 못해 터져 나갈 것같이 쓰라린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진짜라고?
여기가 진짜면…… 그러면.
“흐윽.”
생각을 이어 가다가 별안간 눈물이 터졌다. 완전히 심각해진 성지후가 나를 이끌고 일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벗어났다.
사람들은 우리가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자세를 틀어 길을 내주었다. 성지후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교내에 위치한 카페였다. 나에게 따뜻한 라테를 사 준 성지후는 맞은편에 앉아 울음을 그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냐?”
“응.”
“왜 갑자기 그래? 뭐 힘든 일 있었어?”
“아니.”
“그럼 무슨…… 에휴 됐고, 너 얘기하고 싶을 때 얘기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 혼자 앓지 말고.”
“응.”
“그럼 이제 일어나자, 지각하겠다.”
“응, 미안.”
“진짜 무슨 일이야, 갑자기. 미친놈아.”
먼저 몸을 일으킨 성지후가 겨우 다시 웃으며 빨리 일어나라고 나를 재촉했다.
“일어나.”
일어나.
백하민, 일어나.
나에게 내밀어진 성지후의 손을 맞잡으려고 할 때였다. 몸이 흔들리더니 성지후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도 생생하던 풍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건 성지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싫어.
깨기 싫어.
내 앞에 서 있던 인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젖은 눈꺼풀이 무겁게 올라갔다.
“뭔 꿈을 그렇게 요란하게 꿔?”
아, 아아.
“울기까지 했어?”
“…….”
“애타게 성지후를 찾던데, 좋은 꿈이었나 봐? 깨기 싫을 정도면?”
삐뚜름하게 올라간 강태영의 입술은 보기 좋은 핏빛이었다.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은 한없이 다정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강태영의 물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느리게 젓는 일밖에 없었다.
“작은 머리통에 나만 넣으라는 게 어렵나?”
“…….”
“강재준이고 성지후고 다 모르고, 그냥 나만 알고 나만 보라는 게 어려워?”
아니라고, 어렵지 않다고. 알겠다고, 알겠다고 되뇌며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강태영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그 이상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봐줄 모양이었다.
“고마, 워.”
나는 조금 더 눈치를 살피다가 인사했다.
“뭐가.”
“……내가 잘못했는데 벌 안 줘서.”
“그래서 고맙다고?”
되묻는 강태영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으응, 고마워.”
“그럼, 말로만 그러지 말고 표현을 해 봐. 그렇게 말만 해서는 네가 진짜 고마워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는데.”
“뭐라고 하는지 안 들려.”
“어떻게 하면 되는데?”
“키스해 봐.”
키스해 보라고 말하는 붉은 입술을 바라보다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강태영은 내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여 주었다. 밀착된 몸을 느끼며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췄다.
“혀도 넣어야지.”
가만히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입술을 잠깐 뗀 강태영이 낮게 말했다. 그의 말에 내가 먼저 움직이기도 전에 강태영이 다시 입을 맞췄다.
“으읍.”
녀석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점점 뒤로 쏠리더니 소파 위에 완전히 드러누운 자세가 됐다.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강태영이 상체를 내려 키스를 이어 갔다. 바지를 뚫고 나올 듯 단단해진 강태영의 성기가 아랫배에 느리게 비벼졌다. 기분 탓인지 그 부분이 뜨거웠다. 키스가 길어질수록 점점 더 부피를 키워 가는 강태영의 성기 윤곽이 그대로 느껴졌다.
강태영이 빠르게 옷을 벗겨냈다.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끌려 내려갔다. 강태영은 맨살이 드러나 대롱거리는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만들고는 목과 쇄골을 빨았다. 혀로 느리게 핥다가 이를 세워 살갗을 깨물면 허리가 찌르르 울렸다.
“아……!”
콱 깨물린 살갗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맨살이 드러난 성기에 아직 옷을 벗지 않은 강태영의 좆이 닿았다. 강태영이 가슴을 모아 빨다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살짝 솟은 돌기를 깨물었다. 물고 빨리고 있으려니 마치 강태영의 먹잇감이 된 것 같았다.
“으읏, 아. 그…… 하지, 아응, 흣.”
점차 아래로 내려가던 강태영이 반쯤 발기한 성기를 귀두부터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혀를 세워 쿠퍼액이 흐르는 귀두를 핥다가 입을 벌려 기둥을 삼켰다. 빨대를 빨듯 쪼오옥, 빨면서 위, 아래로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 근육이 확 조여들고 눈이 질끈 감겼다. 감은 눈앞에 섬광이 일었다. 강태영의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가 풀리고 목 안쪽에서는 끅끅거리는 신음이 흘렀다.
“아윽, 으으읏.”
아래로 손을 뻗치면서 힘겹게 실눈을 뜨자 강태영의 치켜뜬 눈과 마주쳤다. 볼이 홀쭉하게 팰 정도로 깊숙하게 성기를 빨아 올린 강태영은 점점 고개가 뒤로 넘어가는 나를 탐색하듯 살피다가 불쑥 위로 올라왔다.
피할 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혀가 입 안을 쑤셨다. 아래로는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아직 단단하게 닫힌 아래는 손가락 하나도 빠듯하게 받았다. 강태영이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마른 내벽이 녀석의 손짓을 따라 밖으로 딸려 나갔다가 안으로 다시 처박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파서 다리를 흔들었지만 강태영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아파, 아파.
키스하는 와중에도 뻐끔거리는 말뜻을 읽은 건지 내벽을 파고들던 손가락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부은 내벽이 아릿했다. 강태영이 몸을 살짝 떼어내자 번들거리는 빨간 입술이 보였다.
“아파?”
녀석이 웬일인지 그렇게 물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를 살피던 강태영이 내 양다리를 잡아 벌리면서 내 쪽으로 말아 들었다. 그 와중에도 훤한 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난 아래가 수치스러워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아래를 가리자 강태영이 어울리지 않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좆은 넣지도 않았는데 왜 아파.”
“……하윽.”
“할 때마다 아프다고 하니까 더 자주 해야겠다, 그치?”
아프다는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내 손을 밀어낸 강태영이 혀로 구멍 주변을 핥다가 아래를 빨았다. 뾰족한 혀끝이 아래에 쏙,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쩌업, 쩝. 외설적인 소리가 점점 커졌다.
깊게 들어오지는 않고 오히려 입구를 적시듯 살짝 들어왔다 나가자 나도 모르게 안달이 나는 건지 아래가 간지럽고 침이 말랐다.
내벽 안쪽으로 강태영이 뱉은 침이 느리게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 선연했다.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이 이상해서 나도 모르게 아래를 바짝 조였다.
“씨발.”
주름을 좁히며 조여드는 구멍을 본 강태영이 못 참겠다는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욕을 내뱉고는 빠르게 파스너를 내렸다. 이미 완전히 젖어 발기한 강태영의 성기가 브리프 위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브리프 위쪽 밴드 부분만 내려 기둥을 꺼낸 강태영이 곧장 귀두부터 밀어 넣었다.
“아, 윽! 아프, 흐윽, 아파아!”
“몇 번을, 후…… 했는데. 왜.”
손가락도 제대로 받기 힘들었던 구멍에 저 거대한 성기를 원활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고통에 꺽꺽대고 있자, 강태영이 방 안에서 뭔가를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뭔가를 내 엉덩이 사이에 쭉 짜냈다. 차가운 점성질의 액체가 느리게 골 사이를 타고 흘렀다. 강태영은 젤을 손가락에 묻힌 뒤 그대로 손가락 세 개로 구멍을 쑤셨다. 여전히 빠듯했지만 미끄러운 액체가 윤활제 역할을 해서인지 아까와는 달리 쑤욱 들어왔다.
“하윽, 헉. 읍.”
강태영의 길고 곧은 손가락이 빠르게 내벽을 쑤셨다. 조급함이 실린 움직임에 나는 윽윽거리며 허리를 튕겼다. 아파서 피하고자 했던 움직임이었지만 강태영은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보채지 말라며 허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내 아랫배를 꾹 눌렀다.
“아윽! 잠깐…… 태영, 으윽, 욱.”
아래를 휘젓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잠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귀두가 들어왔고 기둥 부분이 밀려들었다. 손톱으로 강태영의 팔을 긁고 발꿈치로 녀석의 등을 쳐대도 이번에는 꿈쩍도 하지 않은 녀석이 가차 없이 흉포한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내벽 가득 차 있는 성기 표면에서 박동이 느껴졌다. 이미 부어 있을 게 뻔한 입구가 찢어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후으.”
끝까지 밀어 넣은 채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던 강태영이 낮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윽, 하읏.”
수직으로 찍어 누르듯 쿵, 쿵. 성기가 처박힐 때마다 아랫배에 찍히듯 강태영의 성기 윤곽이 드러났다.
찌익, 찌이익.
“하악, 아으.”
어느새 땀에 젖은 몸이 소파 가죽에 밀리자 살갗이 밀려 쓰라렸다. 강태영이 내 목 뒤에 손을 넣어 자신의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쩌어억, 가죽에 닿아 있던 살갗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강태영은 나를 끌어안은 채 소파 위에 앉았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된 내 안으로 더 깊숙이 녀석의 성기가 박혔다. 나는 헉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강태영의 어깨를 깨물었다. 강하게 이를 박아 넣은 듯했지만 강태영은 움찔하지도 않았다.
강태영이 내 엉덩이 아랫부분을 잡고 허리를 쳐올리는데 녀석의 온 근육이 움직였다. 나는 뒤로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강태영을 바짝 끌어안고 녀석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뿌리 끝까지 박히는 성기에 내장이 위로 쏠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하아, 읏!”
아래가 모조리 꿰뚫린 아픔과 희미하게 퍼지는 쾌감에 몸을 파드득 떨며 강태영의 등을 긁어댔다. 깊게 박힌 강태영의 성기가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긴장이 순식간에 탁 풀렸다. 완전히 힘을 뺀 채 강태영에게 온몸을 기댔다. 다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땀에 젖은 이마를 강태영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고 있었다. 녀석의 가슴팍이 거친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내벽 안에 가득 쏘아졌던 정액이 조금씩 아래로 새기 시작했다. 사정했는데도 아래를 터트릴 듯 부푼 성기의 크기는 차이가 없었다.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움찔거리자 성기가 안에서 몇 번 더 꺼덕거렸다.
“흘리지 마, 바닥에 떨어져.”
강태영이 귓가에 속삭였다. 수치스럽고 괴롭게 하려고 하는 게 뻔한 말이었다. 귓불이 강태영의 입술에 물렸다. 귓속으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귀가 먹먹해졌다.
“하아.”
강태영은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성기를 살짝 빼냈다가 넣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정액은 더 많이 아래로 쏟아졌다. 강태영의 허벅지 위로 흐른 정액이 움직일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큼한 냄새가 진해졌다.
“후.”
“으, 으윽.”
성기를 빼내지 않은 채, 소파에서 일어난 강태영이 걸음을 옮겼다. 걸음에 맞춰 성기가 얕게 박혔다.
“하윽, 그, 그만…….”
앉아서 할 때와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자극이 일었다. 녀석이 걸을 때마다 쿵쿵 찧어지는 성기는 매번 다른 곳을 찍어 올렸다. 그때마다 성기에서 찔끔찔끔 뭔가가 흘렀다. 정액보다는 투명했고 색도 옅었다.
“읏.”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다시피 나를 내려놓은 강태영이 양손으로 허리를 강하게 잡았다. 맨살을 꾹 누르는 손아귀 힘이 어찌나 강한지 그의 손 모양대로 살에 자국이 날 것만 같았다.
한 번 넣은 뒤로 절대 완전히 빼낸 적 없는 성기가 다시 끝까지 처박혔다. 고환이 틈도 없이 밀착된 아래에서 부욱, 하고 처음 들어 보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뭔가가 잔뜩 꿀렁거리며 흘렀다. 허리를 틀어잡고 있는 강태영의 양 손목을 간신히 붙잡고 신음을 억눌렀다. 눈이 저절로 질끈 감겼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허윽, 하.”
“이거 봐 봐.”
강태영의 말을 따라 어렵사리 실눈을 떴다.
“……무, 뭐 하는. 으윽.”
강태영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건 내 배 쪽이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
자세 탓에 복근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와 함께 내벽이 조여든 모양인지 강태영의 흥분감 섞인 탁성이 튀어나왔다.
“하윽.”
다시 턱이 허공으로 추켜올려지고 벌어진 입가로 침이 줄줄 샜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신음은 억누르고 있었지만 차마 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순 없었다. 목에서 꺽꺽, 숨구멍이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커윽, 흣.”
강태영이 더 이상 들어올 공간도 없는 아래를 더욱 밀착시키며 성기로 내벽을 느리게 비볐다. 그러면서 한쪽 손을 떼어내 배꼽 바로 밑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는데, 순간 내장을 다 토해낼 뻔했다.
“헉.”
강태영이 누른 지점까지 성기가 틀어박힌 건지 거대한 기둥이 내장을 짜부라트리는 것 같았다. 무서울 정도의 압박감에 강태영의 손목을 틀어잡고 있던 손으로 버둥거리면서 녀석의 배를 밀어냈다.
“아, 빼. 이거 빼……! 윽.”
그러나 강태영은 자신을 밀어내는 손길을 가뿐히 무시하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젖은 살덩이가 마찰하는 소리가 빠르게 귓전을 울렸다.
“씁, 후으.”
느리게 빠져나가는 성기를 따라 그를 감싸고 있던 내벽 안쪽 살이 함께 딸려 나갔다. 귀두 끝만 걸치듯 넣어 둔 채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성기가 다시 쭈우욱 여린 내벽을 뚫고 들어왔다. 울퉁불퉁한 내벽이 그 움직임에 벌어졌다가 다물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아, 하윽.”
“지금 네가 누구랑 씹질하고 있는지 잘 봐. 잊으면 뒤져, 진짜.”
협박과 함께 쑤셔대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다시 강태영의 팔을 움켜잡은 내 손은 허옇게 질렸다. 치대는 힘이 강해질수록 미미하게 느껴지던 쾌감이 커졌다.
어느새 정수리가 침대에 닿을 정도로 고개가 꺾였다. 이제는 신음을 억지로 누를 수조차 없었다. 커흑, 목구멍이 막히는 소리와 새된 신음이 마구잡이로 섞여 나왔다.
거친 삽입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상체를 비틀며 자신의 손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나를 강태영이 온몸으로 옭아맸다. 상체를 내려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바짝 밀착시키고는 양팔을 겨드랑이 사이로 넣어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아래에서 아무리 강태영의 성기가 강하게 처박혀도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녀석의 좆질을 감내해야 하는 자세였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팔을 바르작거리고 녀석의 등 대신 이불을 쥐어뜯으며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그러나 강태영의 움직임을 막을 순 없었고 곧 아무렇게나 흔들리던 두 다리도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큭.”
“하읍.”
퍽, 퍽.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수없이 왕복 운동을 하던 성기가 준비할 틈도 없이 뽑혔다. 온몸을 족쇄처럼 감고 있던 강태영의 몸도 떨어져 나갔다. 군데군데 핏줄이 불거진 몽둥이 같은 성기가 겨우 뜬 눈에 비쳤다. 발갛게 달아오른 좆이 곧장 벌어져 있던 입 안으로 처박혔다.
조금 전까지 아래를 들쑤시던 성기가 이번엔 입을 들쑤셨다. 비죽 나와 있던 혀가 그의 거대한 성기에 뭉개졌다. 턱 밑으로 흐르는 침의 양이 더 많아졌다. 강태영은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내 머리칼을 잡고 제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토하기 직전처럼 신물이 넘어왔다. 거대한 살덩이가 식도까지 들이닥쳤다. 반사적으로 피하려 움직이는 고갯짓을 강태영의 손이 막았다.
“우욱.”
강태영의 양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내 머리통을 꽉 잡았다. 살기 위해 목구멍에서 힘을 뺐다. 쌔액쌔액 온 얼굴을 이용해 힘겹게 호흡하는 소리와 함께 목구멍을 넘어 고환까지 내 입 안에 처박은 강태영이 콧잔등을 구기며 사정했다.
“커윽.”
“후으, 삼켜.”
괴로움에 자신의 손등을 쥐어뜯는 나를 향한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 삼키라는 명령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미 식도를 넘어가 있던 성기 탓에 정액은 저절로 그 길을 따라 온통 삼켜지고 있었다. 내 의지로 삼키고 뱉어내고 할 것도 없었다는 말이었다. 비릿한 정액 냄새가 온 입 안에 진동했다.
“쿨럭, 끅. 하아, 하아.”
사정을 마친 좆이 빠져나갔다. 그를 따라 열렸던 식도가 닫히고 목구멍이 다시 조여들었다. 목 안이 칼칼하고 따끔했다. 동공이 풀린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시야가 다시 초점을 잡기 시작한 건 강태영이 내 성기에 무슨 짓을 할 때였다.
뭔가가 아플 정도로 성기를 조여 오기에 없는 힘을 끌어모아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강태영이 태어나 처음 보는 물건을 내 성기에 끼웠다. 아직 발기한 채 서 있던 성기가 발갛게 부풀었다. 귀두 끝이 더 벌어졌다. 숨어 있던 요도구가 훤히 드러났다.
“싫……!”
뭔지는 모르겠지만 싫었다.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일 게 분명했다. 나는 손을 아래로 뻗었다. 좆을 터트릴 듯 조여 오는 링을 잡아 빼려고 했다.
“싫은 거 아니야.”
아래로 뻗는 손에 깍지를 끼며 움직임을 저지한 강태영이 내 허벅지가 맞닿게 모아 붙이며 나른하게 말했다. 이어지는 섹스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나는 뭔지 모르는 물건에 덜컥 겁을 먹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더럽지도 않은지 강태영은 정액과 땀과 눈물로 더러워졌을 내 입술을 혀로 핥았다. 녀석이 내 몸을 순식간에 뒤집었다. 순식간에 엉덩이를 치켜들고 개처럼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허벅지가 맞붙었다. 양다리에 힘을 줘서 내 허벅지를 조이게 만든 강태영은 맞붙은 살덩이 사이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링이 끼워진 채 퉁퉁 부은 모양새가 된 내 성기가 허벅지 사이를 드나드는 녀석의 좆에 마찰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강태영이 자신의 것과 내 것을 손안에 모았다. 녀석의 손 가두리 안에서 비벼지는 두 성기가 훤히 보였다. 찌걱거리며 비벼지는 소리와 시각적인 자극까지 더해져 피가 빠르게 쏠렸다. 터질 듯 부푼 성기가 완전 빨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하으응, 읏. 푸러……, 풀어 줘, 흑.”
정수리를 뚫고 나갈 것 같은 쾌감에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을 이불에 문대며 울었다. 찌르르 아랫배가 울려 미칠 것 같은데 자극만 더해지니 아파 왔다. 울며 애원하는 소리에도 강태영은 자꾸 흐트러지려는 내 자세를 바로잡으며 허벅지 사이를 연신 드나들 뿐이었다. 강태영의 성기가 젖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빠르게 마찰하는 힘에 허벅지 안쪽 살이 점점 쓰라렸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흉기 같은 성기가 허벅지 안쪽 살을 밀고 들어왔다가 뒤로 빠질 때마다 더 빨갛게 부어오르는 살갗이 보였다.
아랫배가 위아래로 꿀렁이며 요동쳤다. 사정감이 끝까지 치달았는데 분출하지 못하자 쾌감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이제 신음은 거의 오열로 바뀌었다.
“제, 제발…… 끄읍.”
나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하아.”
강태영의 좆이 얼굴 위로 마구잡이로 비벼졌다. 얼마 뒤 사정한 강태영이 여전히 링이 끼워진 내 성기를 잡고 드러난 갈라진 부분을 손톱으로 긁었다. 나는 괴성과 다름없는 신음을 내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요도구를 손톱으로 꾹꾹 누르면서 입을 맞추던 강태영이 내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와 함께 예고도 없이 링을 확 잡아 뺐다. 불어 터질 것 같던 성기가 쏴아아 물줄기를 뿜어댔다.
허억, 하윽.
거친 숨소리가 강태영의 입 안으로 고스란히 먹혀 들어갔다. 쥽쯉 혀가 빨리는 와중에도 허리가 저절로 튕겨 올라갔다.
오줌처럼 내뿜어지는 물에 홍수라도 난 것처럼 이불이 젖었다. 강태영과 내 몸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강태영은 경련을 멈추지 못하는 내 숨통을 조이듯 끌어안았다.
“싫은 거 아니라고 했지?”
“하으윽, 끄윽.”
“너 지금 엄청 떠네.”
물 밖으로 튕겨 올라온 물고기처럼 파득파득 떨었다. 경련은 꽤 오래 지속됐다. 머릿속이 새하얀 도화지가 되었다.
“네가 형 생각하면서 손장난하기 훨씬 더 전부터 나는 너 엎어 놓고 쑤셔 박는 상상 했는데. 넌 아무것도 몰라.”
강태영의 말이 끈끈이처럼 고막에 달라붙었다.
“한 번만 더 지랄해.”
“…….”
“좋게 끝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뜨거운 눈시울에 입을 맞추면서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적절한 협박이었다.
•••
“단둘이 있는 거 좋았는데, 아쉽네.”
묻는 음성이 어울리지 않게 발랄했다.
다행히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의 내 자리는 트렁크가 아니라 조수석이었다. 이제는 트렁크 문만 봐도 신물이 올라오고 현기증이 일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리 길지는 않았겠지만 나에게는 영겁 같은 시간이었다.
맨몸으로 돌아온 곳은 다시 강태영의 집이었다. 호기롭게 도망쳤지만 그 전보다 못한 꼴로 되돌아오고야 만 것이다.
익숙한 건물이 보이자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실소하는 소리가 들리자 강태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다시 오니까 좋아서 웃어?”
뭐라고 묻는 소리에는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네, 앞으로 계속 여기서 지내게 될 건데.”
강태영의 말에 가슴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
“너 말 잘 들으니까 나도 뭐 하나 알려 줄까?”
강태영의 차를 인식한 차단기가 위로 올라갔다. 서행하던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강태영의 목소리가 이제는 무슨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강재준.”
부욱, 길지도 않은 손톱이 안전벨트를 할퀴는 소리가 났다. 강태영의 입에서 나온 이름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몰라.”
크게 움찔하며 강태영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그 사진, 형 보기 전에 지웠거든. 영상도 안 보냈어. 네가 그때 눈 돌아서 확인을 제대로 안 했던 거니까 내 탓은 하지 말고.”
뭐?
“근데 넌 자격 운운 소리나 하면서 빡돌게 하고, 일만 크게 만들고. 아무튼 일 벌이는 데 소질 있다고, 너.”
강태영의 웃는 낯이 악마의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아직 형은 모른다고. 어때? 다행이야?”
“……그, 걸 왜, 이제…….”
“다시 말하면 언제든지 알릴 수 있다고, 네가 형한테 더럽게 발정했던 거.”
그건 또 다른 협박이었다. 목에 족쇄를 차는 기분이었다.
•••
엘리베이터 문이 몇 번이나 닫히다가 열렸다. 종내에는 삐-삐-삐- 하는 경고음까지 흘러나왔다.
팔짱을 끼고 안쪽에서 나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던 강태영이 팔을 풀고 나를 잡으려고 했지만 뒷걸음질 쳐 그를 피했다. 처음엔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웃던 그의 얼굴에서도 표정이 사라졌다. 결국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태영이 내게로 다가왔다.
“반항해? 내가 미리 말 안 해 줬다고?”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은 건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창문 하나 없이 네모난 좁은 공간을 보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분명 저 네모난 상자는 엘리베이터일 뿐이고 몇 초도 되지 않아 내리게 될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폐쇄적인 공간을 인식한 순간 살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수백 번은 탔을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왜.”
왜냐는 물음에 답하기 어려웠다. 나도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엘리베이터 안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식은땀이 났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저 안에 들어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나조차 이해 안 되는 생각이 이어졌다.
“무, 무서워.”
“……뭐?”
“……무서워서 못 타겠어.”
“무서워? 이게?”
“응, 이거 타면…… 죽을 것 같아.”
강태영이 또 무슨 개수작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리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장난해?”
“진짜야.”
“그럼 계단으로 가.”
“아.”
강태영이 팔뚝을 강하게 그러잡고 계단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뭐 해?”
계단 앞에 서 있자 강태영이 등을 밀었다.
“엘리베이터 못 타겠다며. 그럼 계단으로 가야지, 별수 있어?”
“…….”
“앞장서.”
멍하게 제 얼굴을 보고 있는 나에게 강태영이 올라가라며 턱 끝으로 계단 위를 가리켰다.
겨우 3층이었다. 천천히 올라온 것 같은데 숨이 차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았다. 쥐어뜯기는 것 같은 가슴을 퉁퉁 두드리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이 상태로 20층을 넘게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감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던 강태영이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진짜야? 진짜 엘리베이터 못 타겠어? 그래?”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춘 강태영이 땀에 젖은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물었다.
숨을 할딱거리며 그렇다고 힘겹게 대답하는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강태영이 눈썹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이리 와.”
강태영이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고 나에게 손짓했다.
“……못 타.”
“한 번만 참으면 다신 타라고 안 해. 안 타도 돼.”
우리가 1층에서 잡아 놓고 타지 못했던 엘리베이터는 그동안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건지 그대로 1층에 멈춰 있었고 금방 우리가 서 있는 3층으로 올라왔다.
네모 상자의 문이 열리고 관 같은 게 아가리를 벌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강태영은 이미 그를 예상했다는 듯 내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힘이 빠진 몸이 그를 따라 앞으로 쭉 끌려갔다.
“으으……!”
기겁하며 밖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나를 강태영이 꽉 끌어안고 구석으로 붙어 섰다.
처음엔 놓으라며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랄 발광을 하며 강태영을 때리고 할퀴고 깨물었다. 그럴수록 강태영은 나를 더 꽉 끌어안기만 했다. 뒷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몸부림친 시간은 길지 않았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숨을 할딱였다. 강태영에게 안겨서 혼자 지랄 원맨쇼를 펼쳤다는 것에 부끄러워할 정신도 없었다.
고작 몇 초의 시간이 영원처럼 길었다. 모든 감각이 평소 능력치에 비해 과하게 오픈된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면서 우우웅 하고 울리는 소리, 네모난 철제 상자를 끌어 올리기 위해 밖에서 작동하는 기계음이 귀에 때려 박듯 들렸다.
그 끝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띵, 하는 소리가 구원자의 음성처럼 들렸고 드르릉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순간 강태영을 밀쳐내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입가에선 진득한 침까지 흘렀다.
팔짝 뛰는 나와는 달리 강태영은 느긋했다. 잡아먹힐 뻔한 괴물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문 앞에 바짝 붙어 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식은땀이 흘렀다.
강태영이 곁에 와 서는 게 느껴졌고 그때서야 엘리베이터 문이 뒤늦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참았던 숨이 쏟아졌다. 이제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트렁크에 갇혔던 것 때문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강태영이 스치듯 말했다. 보고만 있자 나를 훑는 얼굴은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태연자약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잊고 말았다.
•••
“아직도 진정이 안 돼?”
강태영이 물을 떠다 주면서 물었다. 진정은 됐다. 금방이라도 정신이 아득해져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나, 질식해 죽어 버릴 것 같은 공포도 가신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나는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공포를 겪은 것과 그 상황에서는 도무지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던 내 모습에서 받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더욱이 강태영과는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아직 정신 차리지 못한 척했다.
“소파 두고 바닥에 앉아서 뭐 해, 멍청하게.”
강태영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거 아니야, 일시적인 거일 수도 있고.”
별거 아니긴 뭐가 별거 아냐. 네가 뭘 알아! 라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녀석과 눈을 맞췄다. 비록 쏘아보는 눈빛이었지만.
병신처럼 구는 나를 보는 게 재미있어 죽겠는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강태영은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강태영의 손이 입술에 닿았다. 윗니로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을 빼 주는 손길에 내가 그제야 입술을 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게 계약서까지 써 놓고 도망을 왜 가.”
“…….”
“내가 너 하나 못 찾을까 봐?”
“…….”
“다음번엔 그냥 신장 하나 떼서 팔아 버리라고 할 거야.”
다정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강태영이 마주 보고 앉았다.
강태영이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있는 내 볼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쭈욱 끌어당겼다. 쪽, 쪽. 아이들에게나 할 법한 입맞춤을 하고는 씨익 웃는 낯에 정신이 혼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