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강태영은 부은 볼에 아이스 팩을 대고 있었다. 볼이 찢어질 것처럼 차가울 텐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얼굴로.
강태영의 옆으로는 이미 닫힌 방문이 보였다. 녀석은 침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 더 필요해?”
울면서 빌어 보라고 웃기지 않는 말을 했던 게 진심인 모양이었다.
“내 인내심 시험해 보는 거야?”
나는 강태영이 아래층에 내려갔던 짧은 시간 동안 무슨 행동을 해야 나에게 더 득이 될지를 따졌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자존심만 세운다고 하더라도 이제 더는 나도 버티고 싶지 않았다.
“안 할래.”
안 하겠다는 대답에 강태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치켜 올라간 눈썹이 녀석의 불편한 심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차피 나가려고 했어, 나도 이제 버티기 싫어.”
“너 지금 자존심 세울 때 아니지 않아?”
“…….”
“너 지금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돈으로 네 목줄 쥐고 있어?”
그 말에 내 눈은 강태영이 쥐고 있는 그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애초에 내가 안일하게 굴지만 않았어도……, 강태영이 그 영상을 가지고 있지만 않았어도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지도 않았을 텐데.
울컥울컥 목구멍을 솟구쳐 올라오는 감정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입 안이 씁쓸했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끝날 일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켜냈는데 이번 일로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었다. 얼른 강태영이 이 질 나쁜 장난을 그만두기만을 바라면서 되지도 않게 부리던 고집을 꺾고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그러나 두 무릎이 채 바닥 위에 닿기도 전에 강태영이 나를 멈췄다.
“그게 아니지.”
“……빌라며.”
“내가 너한테 언제 무릎 꿇고 빌라고 했어?”
“……그럼?”
“아까처럼 바닥에 엎드려서 빌어야지.”
강태영은 완벽하게 그 상황을 재연하기를 원하는 듯했다. 나는 아까 전 당했던 수모와 치욕을 상기시키는 행동에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몸을 틀었다.
“이제 빌어.”
“…….”
“울면서.”
바닥을 짚은 손끝이 내면의 분노로 파들파들 떨렸다. 우는 건 생각 외로 쉬웠다. 분노와 억울함, 증오와 나에 대한 연민 등이 어우러진 눈물이 참고 있었던 것처럼 뚝뚝 흘렀다. 바닥이 금세 눈물방울로 얼룩졌다.
“한, 번만 봐줘. 내가…… 끄, 잘못했어.”
나는 강태영이 요구했던 대로 고개를 숙인 채 울면서 빌었다.
“앞으로…… 안 그럴…… 흡, 안 그럴게.”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해?”
“……으응.”
“그럼 가까이 와.”
요구가 끝이 없다. 시선을 살짝 들자 녀석의 벌어진 파스너 사이로 어느새 꼿꼿하게 선 성기가 보였다. 가까이 오라는 이유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검붉은 표면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나는 양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욕을 내뱉으며 강태영을 향해 다시 달려들 것만 같았다.
나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천불을 삭이며 엉금엉금 기어갔다. 더 추락할 바닥도 버릴 자존심도 없었다. 강태영이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서 녀석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자리를 잡았다. 벌어진 파스너 사이의 성기로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잡기도 버거운 단단한 살덩이를 두 손으로 느리게 비비자 구멍에서 투명한 액이 줄줄 흘렀다. 엄지손가락으로 쿠퍼액을 찍어 귀두에 느리게 펴 바르자 흥분감이 섞인 한숨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부드럽게 들어온 강태영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강태영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붙잡고 몸을 위로 세웠다. 그리고 녀석의 귀두에 혀를 댔다. 녀석의 체취가 훅 끼쳤다. 촙촙 귀두를 빨다가 기둥을 머금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강태영의 얼굴을 확인하게 됐다. 녀석은 살짝 달뜬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손을 뻗어 내 볼을 매만졌다.
“……내가 말했었나?”
눈물 자국이 남은 길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려가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너 우는 얼굴 꼴린다고.”
아직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녀석의 손길에 닦였다.
“계속 울리고 싶을 정도로.”
악취미. 괜히 쳐다봐서 저딴 말을 들었다.
개 같은 말에 시선을 돌린 나는 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턱이 빠질 것처럼 얼얼할 때까지 녀석의 좆을 열심히 빨았다.
좆 기둥이 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부풀었다. 군데군데 핏줄로 울퉁불퉁한 성기는 신체 기관이라기보다는 흉기에 가까워 보였다.
귀두가 성대를 지나 목구멍 아래까지 뚫고 들어올 때마다 질식사할 것만 같았다.
“끄읍, 윽.”
강태영은 내 뒷머리를 잡고 자비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불알까지 입 안에 들어올 정도로 강하게 뒤통수에 힘을 주고 앞쪽으로 밀어붙일 때면 녀석의 음모에 코와 입 주변이 다 파묻힐 정도였다.
“우욱, 웁!”
숨이 막혀 강태영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쳐댔다. 그런데도 강태영은 뒷머리를 누르고 있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입 안에서 녀석의 성기가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뱀처럼 움직였다.
“후으…….”
죽을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고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해 봤지만 철떡거리는 소리만 들리고 목구멍이 벌어지지 않았다.
목구멍 가득 들어차 통로를 막고 있는 성기에 정말 질식해서 죽어 버릴 것 같은 순간, 강태영이 내 양 볼을 잡고 거대한 좆을 쑤욱 뽑아냈다.
“쿨럭, 커읍! 흑…… 하아.”
얼굴 위로 비릿한 정액이 쏟아졌다. 뚫린 것처럼 아픈 목을 부여잡고 눈을 감은 채 기침하고 있자 겨드랑이로 들어온 손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나를 들어 올렸다.
엉덩이에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강태영이 자신의 다리 위에 나를 올려놓고는 정액 범벅이 된 얼굴을 핥았다. 얼굴을 핥던 혀가 머지않아 숨을 몰아쉬느라 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왔다.
강태영의 부드러운 혀가 좀 전 자신의 좆처럼 내 입 안을 헤집어댔다. 쩌업거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더 요란했다.
“하아, 씨발. 아…….”
미친 것처럼 급하게 혀를 섞던 강태영이 이번에는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나는 그제야 눈가의 정액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 해.”
시야에 뭔가가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들린 강태영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성기가 입 속으로 처박혀 들어왔다. 강태영은 내 가슴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기를 쑤셔 넣었다.
“아욱, 으.”
“아, 씨발.”
쫘악!
“아!”
놀라서 나도 모르게 이를 세웠다가 따귀를 처맞았다. 입 안에 들어와 있는 성기 때문에 고개가 크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의식적으로 입을 다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더 아팠다. 볼이 터졌는지 피 맛이 났는데도 강태영은 좆을 빼내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강태영의 허벅지를 잡았다. 멀어지려고 고개를 뒤로 물리는 내가 고까웠는지 강태영이 내 머리채를 잡고 앞으로 당겼다.
“아으, 아! 우읏.”
성기는 더 깊숙이 들어오고 머리카락은 뽑힐 것처럼 아팠다.
“놔줘?”
“흐으, 흑…… 으, 응.”
두피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고통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울음까지 터져서 숨 쉬는 게 더 곤욕스러웠다.
“그럼 뒤로 피하지 말고 제대로 해, 알겠어?”
“으응…… 흑, 흐윽.”
“한 번 더 이 세우면 뽑아 버릴 거야.”
꿀꺽.
비릿하고 끈적거리는 액체를 남김없이 넘기는 것을 확인한 강태영이 핸드폰을 들었다. 목구멍이 자극되어 생리적으로 고인 내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지금 통화 괜찮아요?”
-응, 우리 아들.
스피커폰 기능을 켠 강태영의 전화에서 이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렸다.
좀 전에 얼굴을 보고 나갔음에도 강태영의 전화가 반가운지 고양된 목소리가 신기하기만 했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곧 뺨은 어떤지에 대한 물음이 이어졌다.
“우읍.”
강태영이 정액과 침으로 범벅이 된 좆을 마구잡이로 내 얼굴에 문질렀다. 혹시나 소리가 새어 들어갈까 봐 얼른 입을 다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괜찮고요, 할 말이 있는데.”
-할 말? 엄마한테? 뭔데?
“백하민이요, 엄마가 이번엔 좀 봐줘요. 제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살짝 다투다가 실수한 거니까.”
-어우, 뭐? 실수? 실수라고 해도 엄만 하민이 걔 이제 좀 안 봤으면 좋겠…….
“이 겨울에 그런 식으로 내보냈다가 걔가 어디 가서 찌르기라도 하면 감당하기 귀찮아지지 않겠어요? 아버지 회사 이미지도 있고,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어이구, 네가 언제부터 그 양반을 신경 썼다고?
“아무튼 이번만요.”
-네가 괜찮은 거면…….
“괜찮아요, 저는.”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강태영의 손과 성기는 여전히 내 얼굴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고 하면. 엄마도 괜찮다고 해야겠지?
“백하민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응, 그럴래? 근데 태영아.
“네.”
-하민이랑 자주 그렇게 싸웠니? 왜 싸운 거야? 엄마가 자세히 듣지는 못했는데 걔가 재준이 얘기도 하는 것…….
강태영이 바라는 바를 얻어내고도 길어지는 통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핸드폰을 살짝 멀리 떼어내고 수화기를 막은 뒤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진짜.”
나른한 눈이 살짝 떠서 삼백안처럼 보였다.
“바쁠 텐데 이제 그만 일 보세요.”
이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통화를 끝낸 강태영이 더 이상 울지 않는 내 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자신이 터트려 놓은 볼을 쓰다듬었다.
“나랑 같은 쪽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미간을 찌푸리자 강태영이 다른 손으로 나에게 일부러 얻어맞은 자신의 볼을 툭툭 쳐댔다.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는 강태영의 뺨을 보다가 눈시울이 다시 뜨거워졌다. 눈물이 나는 건 억울함 때문일 거다.
“또 우네, 꼴리게.”
놈은 내 표정이 어떻든 말든 양손으로 볼을 잡더니 내 입술을 쪽쪽 빨았다. 어쩐 일인지 고개를 돌려 그를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집요해지기만 했다.
•••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강태영 ‘덕분에’ ‘아직은’ 쫓겨나지 않았다.
아직 풀지 않고 방 한쪽에 그대로 세워 둔 캐리어가 보였다. 장기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캐리어에서 필요한 물건을 그때그때 꺼내 쓰고 다시 넣어 두는 일은 꽤 귀찮았지만 다시 짐을 풀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여행용 가방을 틈만 나면 노려봤고 그럴 때마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강태영에게 맞은 볼이 잊을 만하면 화끈거리는 기분이다. 살이 얇고 살성이 연약해서인지 실핏줄까지 터졌던 볼엔 아직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직 욱신욱신하게 둔통이 이는 볼을 매만지자 강태영에게 따귀를 맞은 날 그의 방을 나설 때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난 네가 여기에 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말한 적 없으니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방에서 나가려는 나를 불러 세운 강태영이 말했다.
‘……뭐?’
‘네가 이 집에 있는 게 싫어서 그런 거냐고 화냈잖아.’
그제야 이모에게 내쫓길 뻔한 내가 홧김에 녀석에게 한 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그 반대야. 사라질 생각 하지 마.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으니까. 지금 너랑 내 사이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끝날 관계 아니야.’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강태영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네 맘대로 끊어낼 수 있는 사이는 더더욱 아니고.’
“…….”
‘그러니까 멋대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다음부턴 안 봐줘.’
아무래도 강태영은 이 좆같은 장난을 쉽게 끝낼 생각이 없단 확신이 드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던 것 같다.
말을 마친 녀석이 샤워하려는 건지 욕실로 향했고 나는 강태영이 없는 방 안에서 한참이나 물소리를 듣고 난 후에 멍하게 캐리어를 끌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었다. 따지고 보면 진짜 쫓겨난 것도 아닌데 실제로 먼 곳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캐리어 속의 짐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강태영이 나에게 했던 말만 하루 종일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무서웠다.
진심으로 강태영이 무섭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웃음기가 완전히 거둬진 후 녀석의 표정에 일순간 온몸으로 소름이 끼쳐 나가게 할 정도였다.
몸을 일으켰다. 여행 간 재준이 형이 보고 싶었다. 이 집 안의 유일한 나의 안식처.
형의 체취라도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그의 방으로 향했다.
주인 없는 방은 고요했다. 형의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희미하지만 재준이 형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조금씩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근육이 부드럽게 풀리고 기분이 점차 편안해졌다. 형이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잘 버틸 수 있을 텐데…….
끔뻑끔뻑 눈을 떴다. 재준이 형 방에서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주인도 없는 방에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형의 체취가 느껴지는 방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내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폰을 들었다.
몇 시나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기다리던 재준이 형의 연락이 와 있었다. 여행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였다. 사진 속의 형은 행복해 보였다. 맛있게 먹은 음식, 멋진 풍경 그리고 여자 친구와 함께 사랑스럽게 찍은 사진들이 이어졌다.
[잘 지내고 있어? 얘들아 여기 진짜 좋다ㅋㅋ! 너희도 나중에 꼭 와 봐라!ㅋㅋ]
메시지에서 형의 신남이 느껴져서 절로 광대가 올라갔다. 형에게 이것저것 오두방정을 떨고 싶었지만 문제는 형이 강태영과 나 모두를 초대해 채팅방을 만들었다는 것에 있었다. 아직 녀석은 형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 ‘1’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지만 여기서 티를 내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좋아 보인다ㅠㅠ 부러워, 형. 잘 놀다 와. 몸 잘 챙기고. 아픈 데는 없지?]
나는 하고 싶은 말 중 가장 무난한 것을 골라 겨우 답장을 보냈다. 나는 형이 보내 준 사진을 다 저장했다. 형하고 찍은 사진이 몇 개 없었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여기서 뭐 해?”
봤던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재준이 형에 대한 그리움을 삭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파고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그러나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서 이쪽을 바라보는 인영에 환청이 아님을 깨달았다.
“주인도 없는 방에서 뭐 하냐니까.”
물어 오는 강태영의 목소리가 한겨울 바람처럼 싸늘했다. 문을 잠근 듯 딸칵하고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녀석의 목소리 뒤에 곧장 따라붙었다.
“그, 그냥.”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척추를 타고 삐죽 소름이 돋았다. 엉거주춤 일으키려다 중심을 잃고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강재준 생각하면서 또 자위했어?”
“아니야.”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까지 같이 흔들었다. 문가에 기대서 있던 강태영이 어깨를 뗐다. 다가오는 모습은 어느 때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내 말을 믿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코앞에 다가온 녀석이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왔다. 녀석은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느리게 움직였고, 그를 피해 뒤로 몸을 물리던 내 등엔 침대 헤드가 닿았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안 어울리게 그치?”
그렇게 말하며 놈이 바닥으로 무언가를 내던졌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툭 떨어진 뭔가를 향했다. 상처가 날 때 바르는 연고였다.
“읏.”
강태영이 멍하게 연고를 바라보고 있는 내 턱을 잡고 억지로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는 혀로 느리게 내 입술을 핥았다.
“나를 좋아했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핥던 입술을 빨아낸 강태영이 내 몸 위를 타고 오르며 말했다.
“나는 언제 좋아할래?”
강태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말을 끝낸 녀석은 싱긋 웃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불을 켜지 않았음에도 꽤 밝았던 재준이 형의 방이 순식간에 암흑으로 물들었다. 강태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윽!”
정신을 차리자마자 강태영을 밀쳐내고 침대 밖으로 발을 막 내딛는 순간 고개가 뒤로 확 꺾였다.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힘에 내 몸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침대에 눕혀짐과 동시에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끌려 내려갔다. 벗겨진 옷과 속옷을 잡아 올리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입에서는 머리를 거치지 않은 악다구니가 쏟아졌다. 강태영은 악을 쓰는 내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위에서 무자비한 힘으로 내리눌렀다.
“들키고 싶은 거면 계속 그렇게 소리 질러.”
내 귓가에 바짝 대고 읊조린 강태영이 천천히 손을 떼어냈지만 나는 끽소리도 못 냈다. 아래층에는 아직 저녁 준비가 한창일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었다. 녀석의 말대로 소리쳐서 이 꼴을 들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자 강태영이 내 볼을 잡고 입술을 모아 키스했다. 그의 입 안으로 입술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짜다.”
강태영에게 이런 짓을 당하는 게 처음도 아니었지만 재준이 형의 방에서는 이러고 싶지 않았다.
“싫어……!”
“쉿.”
“제발, 응?”
나는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제발 네 방이든 내 방이든 좋으니 여기서는 싫다고 빌었다.
그러나 강태영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네가 싫다니까 더 해야겠다, 이제 여기 와도 나만 생각나게.”
녀석은 버둥거리는 내 다리를 쉽게 잡아 벌렸다. 손을 밑으로 내려 아래를 가렸다.
강태영은 어떻게든 막아 보려 애쓰는 내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더니 내 다리를 잡은 채 그대로 돌려 눕혔다. 얼굴이 재준이 형의 베개에 처박혔다. 숨이 막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포근하게 느껴지던 재준이 형의 체취가 이제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마치 재준이 형이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강태영이 아랫배에 손을 팔을 넣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두 다리를 녀석에게 짓눌려 바르작거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끄으, 읍. ……강태영, 읏.”
“왜.”
다리 사이로 손을 넣은 강태영이 내 성기를 잡으며 대답했다.
“제발…… 하지 마, 흑.”
“빌지 마, 기분 더 좆같아지기만 하니까.”
빌지도 말라는 소리가 꼭 내 귀에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으으응, 읏.”
“앙탈은.”
강태영이 손바닥을 말아 쥐고 내 성기를 비벼댔다. 녀석이 일부러 힘을 줬다 빼자 자극이 더 심해졌다. 손짓이 점점 빨라졌다. 그럴수록 내 몸은 조금씩 무너졌다. 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팔에 얼굴을 기댔다.
“하읏, 아…… 아윽.”
열이라도 나는 듯 팔에 닿은 볼이 뜨거웠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강태영의 방도 내 방도 아닌 약간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이 보였다. 의심할 바 없이 재준이 형의 공간이었다. 꿈도 아니고 환상은 더더욱 아니었다.
“시, 싫어. 흑…… 형, 바, 방에서는…….”
여기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헐떡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발바닥으로 침구류를 밀어내며 강태영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벗어나려고 하면 더 옥죄어 오는 덫처럼 녀석의 손길은 더 집요해졌다. 요도구를 손톱으로 긁히자 짜릿,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발기한 성기가 강태영의 손안에서 부르르 떨렸다.
“흐윽…… 재, 준이 형.”
재준이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투둑, 툭. 내가 쏟아낸 정액이 재준이 형의 이불에 떨어졌다. 기어코 사정하게 만들고 나서야 손을 뗀 강태영이 침대 밖으로 움직였다.
“다시 말해 봐.”
나도 모르게 재준이 형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이었다. 강태영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했다.
“흑, 하지 마아…… 커윽, 윽!”
그대로 목이 졸렸다.
짜악!
강태영의 우악스러운 손이 목을 비틀었고 동시에 따귀가 날아들었다.
“다시.”
“아, 아파…… 으.”
“지금 여기서 누구 이름을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
맞은 곳을 채 다 낫기도 전에 또 맞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졸린 목 때문에 숨 쉬는 게 어려워 발을 버둥거렸다. 그렇지만 자유 대신 날아온 건 또 손바닥이었다.
“멍청한 건지, 일부러 긁는 건지 모르겠네.”
“아……!”
여전히 목이 잡힌 채로 고개가 꺾였다.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침대 위로 튀긴 침이 빨갰다.
“쿨럭, 컥.”
바들바들 떠는 나를 지독하게 집요한 눈으로 바라보던 강태영이 드디어 나를 풀어 줬다. 녀석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마자 나는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조용해진 뒤가 이상하게 싸늘해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찰칵.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강태영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몇 초가 지나서야 알아챘다. 이번에는 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영상 촬영이 시작될 때 들리는 음이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얗게 젖은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강태영에게 달려가 손을 뻗었다.
“미, 미쳤……! 내놔……!”
강태영은 나를 놀리듯 팔을 위로 쭉 뻗어 올렸다. 녀석이 나보다 살짝 크기는 했지만 올라간 핸드폰을 낚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손을 뻗으면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 움직이는 탓에 내 손끝은 살짝살짝 폰을 스치기만 할 뿐이었다.
짜증과 울분이 뒤섞여 이상한 신음이 자꾸 튀어나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강태영의 폰을 빼앗아 박살을 내야 한다는 생각뿐인 내가 필사적으로 굴수록 강태영은 더욱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즐거워? 흑, 시발 새끼야…… 으윽, 즐겁냐고! 흐윽.”
결국 두 손으로 녀석의 가슴팍을 퍽 밀쳤다. 폰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아래로 떨군 강태영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조금 전까지 즐거운 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던 표정이 순식간에 서늘하게 굳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지독하게 무성의했다.
“아니, 별로.”
순식간에 즐겁다는 듯 미소 짓고 있던 강태영의 표정이 급변했다. 표정이 무채색으로 변하자 녀석 특유의 서늘한 눈빛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네가 말 존나게 안 들어서 재미없어.”
“…….”
“떡은 나랑 쳐 놓고 이 방에 와서 강재준 생각하는 것도 별론데, 강재준 방이라고 나랑 매일같이 붙어먹던 짓을 안 한다고 발버둥 쳐대는 건 더 최악.”
“…….”
“넌 강재준이 네가 언제까지나 기댈 수 있는 언덕 같아?”
“…….”
“그 생각 깨부숴 주면 다시 좀 재미있어지려나.”
말을 마친 강태영이 피곤하다는 듯 목을 좌우로 꺾었다. 움직이는 내내 시선은 나에게로 고정돼 있었다.
예상치 못한 강태영의 반응에 당황하고 있을 때 녀석이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그는 나를 앞에 세워 두고는 화면을 무심하게 툭툭 쳐댔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엉겨 붙어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았던 재준이 형의 방에는 강태영의 손가락이 폰 화면을 두드리는 소리만 울렸다.
그리고 녀석의 손가락이 멈춤과 동시에 언제부턴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내 폰이 드르륵,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 등줄기로 식은땀이 비죽 흘렀다. 뭔가 잘못됐다. 그 생각이 강하게 뇌리를 스치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폰을 주워 들었다. 이상하게 손이 덜덜 떨렸다.
[(사진)]
미리 보기 화면에 떠 있는 단어를 보는 순간 눈앞이 하얗게 멀어 버린 기분이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떨리는 손이 자꾸 미끄러져서 겨우 메시지 애플을 켰다.
강태영이 보냈을 메시지가 재준이 형이 여행 사진을 보내 줬던 단체 채팅방에 와 있었다. 손이 허공에서 움찔거렸다. 감히 확인할 수조차 없어 화면을 터치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강태영을 멍하게 바라봤다.
“형은 아직 안 보네.”
목이 메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무슨 짓이냐고, 이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속에서 자꾸 뭔가가 울컥울컥 올라와 목구멍을 막는 기분이었다.
“안 궁금해?”
“…….”
“사진, 뭔지?”
강태영은 나를 조롱하며 느긋하게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윽.”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가가 급격하게 뜨거워졌다. 강태영은 호의라고는 절대 베풀지 않을 모양이었다. 뭐 때문에 갑자기 또 휙 돈 것처럼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다 강재준이 먼저 본다?”
강태영은 나를 겁주듯 말했다. 내 손가락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는 것을 보면서 웃기도 했다. 재준이 형이 먼저 본다는 녀석의 협박에 눈을 질끈 감고 대화방에 들어갔다.
대화방에 들어서자마자 뜬 사진을 보자마자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재준이 형의 침대 위에서 아래를 다 내놓고 엉덩이만 치켜든 채 눈물범벅이 된 내가 보였다. 이걸 보고도 핸드폰을 놓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아, 아.
다행히 강태영의 말대로 아직 재준이 형은 내가 보냈던 메시지도 확인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강태영의 실체를 알게 된 순간부터 미친놈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래도 믿고 있었던 거다. 눈앞의 강태영을.
“지워, 지워 줘. 빨리.”
목소리가 볼품없이 달달달 떨렸다. 허벅지가 후들거리고 누군가 목구멍에 바람이라도 불어 넣는 것처럼 성대가 출렁거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폰을 강태영에게로 들이밀며 말했다.
“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내 입에서는 추위에 떨 때처럼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마저 들렸다.
“흐윽, 빠, 빨리…… 으윽.”
나는 애처럼 발을 구르며 떼를 썼다. 재준이 형이 이 메시지를 보기 전에 얼른 사진을 지워야만 한다는 생각만 나를 지배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강태영이 자신의 발을 핥으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만 형이 보기 전에 지워 준다면 강태영이 뭐라고 하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거 지워 주면 넌 뭐 해 줄래?”
“다, 다 할게…… 네가 하라는 거 다, 흑, 하, 할 테니까…….”
“진짜?”
“응, 응. 다 해, 할게.”
목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끄덕이며 빌었다.
“싫어.”
그러나 당장 발이라도 핥으라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던 내 귀에 꽂힌 건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솔직히 조금 끌리긴 했는데, 이제 방법을 바꿔 보려고. 어차피 내 말이야 이런 거 아니더라도 잘 들을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되는 건데, 뭐.”
강태영은 까맣게 꺼진 폰을 그냥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나는 대화창을 다시 확인했다. 믿을 수 없는 사진이 아직도 커다랗게 떠 있었다.
“강태영!”
“그렇게 안 불러도 들려.”
“지우라니까!”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강태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사람을 돌게 만들어 놓고는 한껏 여유로운 놈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재준이 형 방에 있는 물건을 다 집어 던지고 강태영의 멱살을 잡고 닥치는 대로 주먹이며 발을 내질렀다.
“개새끼야! 사람을 가지고 놀아……!”
내가 지금까지 뭐 때문에 그렇게 굴렀는데! 머리에서부터 발끝으로 모조리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악을 썼고 강태영은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고 자신에게 휘두르는 모든 것을 받고만 있었다.
똑똑똑.
“무슨 소리야?”
잠긴 문밖에서 도우미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고받아 물건이 떨어지고 악을 쓰는 소리가 결국 1층에까지 다다른 모양이었다. 재차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 강태영과 나뿐만 아니라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가라앉힐 수 없는 울분과 함께 내가 나체라는 상태까지.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면 이 꼴을 그대로 보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소름이 돋았다. 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덜덜 떨리는 몸으로 빠르게 옷을 주워 입었다. 꼭 1,000미터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숨이 차올랐다.
똑똑똑.
“태영아, 여기 있니?”
철컥, 철컥.
문고리가 달싹거렸지만 강태영이 잠금장치를 걸어 둔 문은 열리지 않고 쇳소리만 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히끅거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강태영이 낮게 대답했다. 나에게 내내 맞고만 있던 강태영의 볼에는 이런저런 생채기가 나 있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려가세요, 아무 일도 아니니까.”
강태영의 말에 잠시 조용하던 밖에서 곧 알겠다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계속하지 왜? 들킬 각오 하고 그 지랄 떤 거 아니었어?”
완전히 조용해지고 나서 강태영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보면 겁이 없는 건 또 아닌데.”
녀석이 나를 비웃으며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야.”
“……오지 마, 진짜 죽여 버릴 거니까.”
“어떻게?”
강태영은 내 경고를 깡그리 무시하고 다가왔다. 나는 깨달았다. 강태영은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녀석과 마주 보고 있는 건 내 신상에 좋지 않았다. 이 장소 자체가 나에겐 불리한 공간이었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재준이 형의 방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딸깍.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잠금장치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 인내심으로 나는 더 소란 피우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강태영이 간신히 내장을 쏟아낼 것 같은 기분의 나를 건들지만 않았다면.
“사진은 좀 약하지? 영상도 보낼까, 확실하게?”
강태영은 다시 한번 나를 할퀴었다.
“시발, 이 개자식!”
녀석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대로 뒤돌아 강태영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나한테 왜, 왜 이래! 내가 뭘 그렇게…… 흑, 뭘……! 잘못했는데!”
금세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나의 마지막 인내심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방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패악을 떨었다. 잠시 뒤 누군가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태영아!”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 아주머니의 짧은 비명이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머, 어머! 태영아, 이게 무슨 일이야! 백하민! 너 그만 안 둬?!”
이성을 잃고 지랄병이 난 것처럼 난리 치는 내 몸이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에 확 넘어갔다.
“아아! 악!”
분을 이기지 못하고 제지당한 내 눈에 마지막으로 보인 건 강태영의 희미한 미소였다.
@김골드
눈을 뜨자 목 안쪽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이 떠오르자마자 다시 머리가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졌다.
혹시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폰을 찾았다. 그렇지만 강태영이 했던 미친 짓은 꿈이 아니었다.
차마 무서워서 메시지 창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미리 보기로만 메시지를 보다가 화면을 껐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가 재준이 형이 보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형도 결국 본 거겠지. 다 끝났다.
최악의 악몽이 현실로 실현되었다. 끔찍했다. 뒷골을 타고 소름이 끼쳤다. 정수리부터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강태영은 약속을 어겼고 아마 재준이 형의 얼굴을 다신 볼 수 없을 거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섰다. 이럴 줄 알고 짐을 풀지 않았나 싶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실소가 터졌다.
실성을 했는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는데 마지막을 이딴 식으로 맞이할 줄은 몰랐다.
2층에서도 1층에서도 이 사달을 일으킨 강태영은 보이지 않았다.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그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났니? 몸은 좀 어때?”
캐리어를 끌고 내려오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살피는 눈으로 물었다.
“아까는 왜 그랬어? 태영이랑 무슨 일 있었어? 사모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태영이를 그렇게 때렸어, 정신 나갔나 싶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저번에도 그렇게 야단을 일으켜 놓고 또 왜…….”
아무런 대꾸 없이 현관으로 향하는 내가 이상했는지 아주머니가 팔을 잡았다.
“이 짐은 뭐니? 어디 가?”
“……네.”
“뭐? 어디? 태영이가 너 일어나면 가만히 있으라고…….”
나는 아주머니의 손을 떼어내고 몸을 움직였다.
“하민아! 어머, 쟤가 왜 저래.”
“…….”
“태영이가 집에 있으라고 했다니까?”
아주머니가 다시 한번 나를 잡아 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더 빨리 그 손을 털어냈다.
“하민아! 백하민! 얘!”
나는 신발도 대충 구겨 신고 빠르게 현관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행동이 점점 빨라졌다.
“응, 태영아. 난데. 하민이가…….”
강태영과 통화를 하는 듯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는 움직임을 더욱 재촉했다.
이놈의 집구석은 역시나 쓸데없이 넓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하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지난 생일, 재준이 형에게 선물 받은 운동화가 몇 번이나 벗겨질 뻔했다.
혹시라도 강태영을 마주치게 된다면 뒷일은 나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진짜 죽여 버릴지도 몰라.
“헉, 허.”
대문을 나선 후에는 뛰다시피 했다. 일단 강태영에게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만이 내 몸을 지배했다. 목적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걷다가 숨이 턱 끝까지 차서야 서서히 걸음을 늦췄다. 손이 아파서 내려다보니 내 손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한 캐리어 바퀴 한쪽이 빠져 있었다. 바닥에 이리저리 치이고 구른 캐리어는 꼭 누구처럼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손잡이를 꽉 잡고 있던 손이 얼얼해 풀어 보니 마디마디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성이 조금 돌아오자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도망치기는 했지만 당장 수중에 돈도 몇 푼 없었다. 가진 것도 없었고 연락할 가족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생각나는 얼굴이 하나 있긴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폰 화면을 켰다. 간헐적으로 울리고 있는 메시지 앱이나 부재중 전화는 애써 무시했다. 연락처 목록에서 ‘ㅅ’을 찾아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빽하. 생존 신고 해 주는 거야?
성지후는 마치 어제도 통화한 사람처럼 전화를 받았다.
-뭐야? 여보세요?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 자물쇠라도 잠긴 듯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하민?
전화를 건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성지후가 처음의 장난기를 지우고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성지후 나 좀 도와, 도와줘.”
겨우 입을 떼고 한 첫말이었다.
-뭘 도와줘, 갑자기?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여기 그 우리 집, 흡, 아니 강태영네 집. 버스, 정류장…… 응? 도와주라, 흑.”
-야, 백하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우냐?
“……으흑, 빨리.”
-아, 알겠어. 어디라고?
성지후에게 위치를 말해 준 후 끊긴 전화를 붙들고 주변을 살폈다. 어디선가 강태영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불안감이 치밀었다. 분노도 함께였다.
개새끼, 미친 새끼. 시발 새끼!
비밀을 지켜 주겠다며 그딴 걸 요구했을 때부터 녀석이 돌아 버린 미친놈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개새끼.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나는 핸드폰을 잡은 손을 이마에 붙이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지금까지 버티고 서 있었던 게 용할 정도로 다리가 떨리기 시작해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백하민!”
얼마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을까 성지후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택시를 타고 온 듯 녀석의 뒤로 멈춰 서 있던 택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성지후는 놀란 눈을 하고 곧장 이쪽으로 뛰어왔다.
“너, 뭐야? 괜찮냐? 무슨 일이야?”
성지후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야, 너 얼굴은 왜…….”
나를 제대로 확인한 성지후의 눈이 커졌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걸 보니 내 몰골이 처참하긴 한 모양이었다. 사실 어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 쫓겨났어.”
그리고 그런 녀석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녀석의 커진 눈이 내 옆에 삐딱하게 서 있는 바퀴 빠진 캐리어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
성지후의 집 안으로 발을 들이며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긴 했어도 녀석의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집 앞까지 온 적은 있어도.
오면서 성지후에게 들었던 대로 집에 다른 가족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정집 하면 딱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집이었다. 가족들이 깔끔한 성격인지 필요한 가구나 TV 등의 가전제품을 제외하고는 바깥에 나와 있는 물건조차 없었다. 성지후만 봤을 때와는 쉽게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집 안 풍경에 잠시 의아하게 녀석을 바라봤다.
“아빠가 집에 뭐가 널브러져 있는 걸 못 봐서. 그거라니까 완전. 그거 뭐냐. 어, 맞아. 결벽증이라니까, 결벽증.”
성지후는 내 시선에 담긴 속뜻을 읽었는지 왜 쳐다보냐고 묻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도 운은 좋다. 부모님은 여행 가셔서 안 계시고, 누나도 자취방으로 돌아가서 나 혼자 있으니까 편하게 있어도 됨.”
“고마워.”
바퀴 빠진 캐리어는 신발장에 세워 두었다. 폰도 캐리어 안에 쑤셔 넣었다. 오면서 이제 쓸모도 없을 폰은 꺼 둔 상태였다.
다시는 그 집안과 엮일 일도 그 형제의 얼굴을 볼 일도 없겠지.
아니, 없어야 했다.
재준이 형을 생각하면 자꾸만 울컥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재준이 형이 그 사진을 봤다면 어차피 형과의 관계도 박살 난 것과 다름없었다.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안전한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절망이 나를 덮쳤다.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쉬고 있자 손등에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물이라도 마셔, 너 지금 얼굴 완전 하얘. 아예 넋 나간 사람처럼.”
“……응, 고마워.”
성지후는 자신이 건넨 냉수를 한 번에 들이켜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냐?”
멍때리고 있는 내 옆자리에 성지후도 천천히 앉았다.
“너 이렇게 된 거 강태영도 알고 있어? 도대체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무것도 모르는 성지후의 질문이 나를 날카롭게 할퀴었다.
“응.”
“근데 아무 말도 없어? 그 새끼, 개소리는 잘하더니! 그래도 몇 년 동안 한솥밥 먹던 친구가 쫓겨나……. 설마 강태영이 그런 건 아니지?”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을 아끼자 성지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강태영이냐? 진짜?”
“…….”
“왜? 싸웠어, 걔랑?”
“그냥…… 좀.”
“아니, 뭘 어떻게 했다고 애 얼굴을 이렇게…….”
성지후가 내 턱을 잡고는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괜찮아, 나도 때렸어. 아무튼 좀 크게 싸워서 이제 거긴 못 갈 것 같아. 오늘 진짜 고마워, 부모님 오시기 전엔 나갈게.”
나는 나를 살피는 녀석의 손을 떼어내며 작게 대답했다. 아까는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는 성지후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아 오기는 했지만 이런 민폐도 없었다. 성지후는 묻고 싶은 게 잔뜩 있는 얼굴을 하고도 용케 입을 다물었다. 강태영에 대한 얘기가 길어져 봤자 나에게 좋을 건 없었다. 미안하지만 부러 성지후의 말을 끊어내야 했다.
“어차피 지금 부모님 시골 가셔서 며칠은 안 오실 거야. 그리고 얘기 잘하면 좀 더 있어도 괜찮…….”
“아니야.”
앞길이 막막했지만 언젠가 오고야 말 상황이 조금 더 앞당겨졌을 뿐이다.
“부모님도 불편하실 거고, 나도 안 편하고.”
“……그래, 너 편한 대로 해라.”
성지후가 나를 편하게 해 주려는 듯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의 배려에 거짓말처럼 조금 마음이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야, 라면 먹을래?”
한참이나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뚫고 나온 물음에 “응.” 하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라면을 먹고 나서는 쿵쾅거리던 심장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머리가 조금 차가웠다. 이성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기분 좋을 정도의 포만감을 느끼며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집에 먹을 거 없어서 마트 갈 건데 같이 갈래?”
성지후가 설거지를 막 끝낸 나에게 물었다.
“아니, 난 좀 쉴래.”
“그래, 그럼.”
“나 노트북 좀 써도 돼?”
“노트북? 어, 어.”
설거지를 하면서 계속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일단 전화번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태영이든 재준이 형이든 관련된 사람들과 연결될 고리를 모조리 끊어야 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든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야 했다.
성지후는 갑자기 노트북을 쓰겠다는 내 말에 살짝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흔쾌히 그러라고 하고는 집을 나섰다.
당장 폰을 바꿀 거금은 없으니 번호만 바꾸는 법이 있는지 알아봤다. 다행히 번호만 바꾸는 건 꽤 쉽게 할 수 있었다. 번호를 바꿔 놓고 나서는 켤 엄두가 나지 않던 폰을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다시 켰다.
전원을 켜자마자 마치 불이라도 난 것처럼 울려대는 진동에 손이 다시 덜덜 떨렸다. 어떠한 것도 확인하지 않기 위해 실눈을 뜨고 인터넷에 나온 대로 곧장 핸드폰을 초기화시켰다.
다시 켠 핸드폰이 처음 구매했을 때처럼 완전히 깨끗해진 것을 확인하자 아주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발품을 팔아 알아봤던 곳 중에서 가장 저렴했던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몇 없는 짐이었지만 옮기는 것도 도와주고 그래도 첫 독립 아니냐며 점심까지 사 준 성지후가 힘내라는 듯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고맙다, 진짜.”
녀석에게는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맙다는 말뿐이었다.
“뭘, 공짜 아닌데? 너 어차피 나중에 다 나한테 갚아야 하는데.”
“알겠어.”
“들어가.”
“어.”
“연락하고.”
“응, 너도 조심히 가.”
킥킥 웃는 성지후를 뒤로하고 고시원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각오한 것보다 작았다. 짐이랄 게 없어 다행이었다. 내 집도 아니었지만 전에 살던 곳과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보육원에 데려가지……. 엄마는 하필 나를 거기다가 맡겨서는 주제도 모르고 눈만 높아졌다. 괜히 해 보지 않던 엄마 원망도 슬쩍 하며 간단히 방 정리를 마쳤다.
고시원 방비는 달에 30만 원.
이것 역시 내 생각보다 비쌌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이 근방에서는 이보다 저렴한 방은 찾을 수 없었다.
수중엔 기껏해야 70만 원 남짓의 돈밖에 없었다. 고시원에서라도 연명하기 위해서는 당장 일을 해야만 했다.
•••
며칠 연달아 PC방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구인 사이트에서 이력서를 넣기 위해서였다. 학력도 초라하고 쓸 말도 없는 터라 내가 봐도 엉성한 이력서를 닥치는 대로 넣었다. 어떤 곳은 아르바이트일 뿐인데도 자기소개서를 요청하는 곳도 있었다.
요즘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더니 아르바이트 하나 구하는 데도 그 말이 적용되나 싶을 정도였다. 힘들다고 하는 물류 센터 아르바이트 연락도 쉽게 오지 않았다. 선착순으로 받는 건지 순위 안에 들었을 땐 일을 하러 오라는 메시지가 왔지만 그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다행스럽게 어제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술집에서 매장 관리를 하는 일 같았다. 취객을 상대하는 일은 더럽게 꼬이는 경우가 많다고 들어서 그쪽으론 일부러 지원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가릴 처지가 아니므로 지원한 곳이었다.
오늘은 면접이 있었다. 일찌감치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돈을 벌면 일단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옮기고 그 후엔 보증금을 모아서 작은 월세라도 구해야지. 그러면 뒷날은 또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면접을 보기로 한 장소는 가게였다. 그냥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술집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당도한 가게는 내가 상상한 그런 술집이 아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번쩍거리는 건물을 보고 나는 내 모습을 살폈다. 그냥 술이나 마시는 곳일 줄 알았지, 이런 고급 술집인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런 곳은 외모도 더 볼 텐데. 나는 유리문에 비친 내 후줄근한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미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니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까먹은 건가? 오늘 면접 보기로 한 걸? 아, 여기마저 안 되면 안 되는데. 면접도 보지 못하고 땡 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막 핸드폰을 꺼냈을 때였다.
“늦었지? 미안, 미안.”
닫혔던 가게 문이 열리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업 전이라 고요하게 가라앉은 가게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 좋았다. 홀이 있었고, 홀 가운데 원형 모양의 바가 있었다. 내부는 굉장히 넓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쪽 곳곳에 통로도 있는 거로 봐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은 듯했다.
“이름이?”
“백하민이요.”
“그래, 맞다. 하민이.”
장사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남자는 웃음이 많았다. 대화를 걸 때마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쪽으로.”
나는 남자를 따라 어두운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 끝 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공간이 있었다. 빛이 뿌옇게 번졌다.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이 사무실로 쓰이는 공간인 것 같았다. 책상과 소파가 있는 바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드러났다.
“여기 앉아요.”
밝은 사무실 안에 들어와서야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꽤 곱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가리킨 소파에 어색하게 앉으며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마실 건?”
“괜찮아요.”
사무실 왼쪽에 마련된 미니 냉장고를 뒤적거리던 남자가 내 말에 문을 닫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 손에는 그의 몫으로 보이는 캔 커피를 들고 있었다.
“사진보다 실물이 낫네.”
“아,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왜인지 집요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다시 들기가 민망하다고 생각하던 와중 캔 뚜껑을 따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이력서 사진, 그거 휴대폰으로 찍은 거죠?”
“네? 아, 네. 죄송합니다. 그…… 사진 찍을 돈, 아니 시간이 없어서요. 급하게 찍다 보니.”
돈이 없었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려던 걸 고쳤다. 너무 궁상맞아 보이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고 화질이 좀 구려서 실물이 더 궁금했거든.”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실물이 더 나아서 좋을 뿐이라고 말을 덧붙였다.
“나는 여기 매니저로 일하고 있고, 정채원이라고 해요. 일하는 애들은 뭐,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많이 부르니까 하민 씨도 편한 쪽으로 부르면 되고. 음, 스무 살 맞죠?”
“네? 네.”
“근데 일할 땐 앞머리 올려야겠다. 너무 어려 보이네.”
정채원이라고 소개한 남자의 손이 훅 다가와서 나도 모르게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렸다.
“놀랐어? 미안, 그냥 머리 좀 올려 보려고 한 건데.”
“아.”
처음 본 사람이, 그것도 면접 자리에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손이 올라오자 맞는 줄 알았다. 순간 떠오른 건 강태영의 얼굴이었다. 동시에 녀석의 커다란 손이 함께 생각나 쓰읍, 숨을 들이켜면서 애꿎은 입술을 물었다가 놨다.
“제, 제가 할게요.”
나는 어색함을 숨기고 얼른 손으로 앞머리를 들췄다.
“음, 좋네. 역시 머리 올리는 게 낫겠다. 술집인데 괜히 미성년자 쓴다고 오해 사긴 싫거든. 내가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네.”
“학교는?”
“안 다녀요.”
“아, 그러네?”
남자의 시선이 몇 자 적힌 것도 없는 이력서로 향했다.
“지금 고시원에 살아?”
“네.”
“가족은?”
“……없어요.”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없어?”
“네, 없어요.”
단호한 대답에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이력서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일은 안 해 본 것 같은데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지냈어?”
“아는 분 댁에서 지내다가 얼마 전에 나왔어요.”
“아는 분? 친척?”
“아뇨, 그냥 부모님이 아시던…….”
“그럼 돈 많이 필요하겠네.”
“네?”
“혼자 살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다고.”
“…….”
“다섯 시까지 나올래?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집에서 쉬다 와도 될 것 같은데.”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몰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던 중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오늘부터 일하자고.”
시계를 보던 그가 말했다.
“저 된 거예요?”
“응.”
“감사합니다.”
그제야 멍하던 정신을 가다듬고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코가 땅에 닿겠네.”
허리를 펴니 웃음기를 단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쉬다가 이따 시간 맞춰서 출근해.”
“네.”
“나가는 길은 안 데려다줘도 되지?”
“네, 이따 뵙겠습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아까 전 매니저 형을 뒤따라 들어왔던 검은 통로를 혼자 걸으니 은근히 무서웠다. 분명 밖은 훤한 해가 떠 있는 대낮인 걸 아는데도 검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검고 적막한 통로를 점점 빨리 걸었다.
“아.”
막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뭔가와 부딪쳤다.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하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남자가 서 있었다.
“앞을 보고 다녀야지, 안 그래도 어두운데.”
“죄, 죄송합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는 상체를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아직 가게 오픈 시간도 아닌데 누구지? 하는 물음 같은 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역시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저 밖으로 향했다.
•••
몇 시간 만에 다시 찾은 가게는 아직 오픈 전이었지만 아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안으로 들어서니 일단 인기척이라고는 없던 낮과는 달리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낯선 얼굴인 나를 보고 흘깃거렸다. 우물쭈물 서 있는 것도 뭐해서 낮에 면접을 봤던 사무실로 향했다. 통로 끝 사무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어? 왔어?”
매니저 형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본 사람인데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겼다. 아마 그 옆에 서 있는 남자 때문일지도 몰랐다. 온통 검은 남자. 그는 아까 면접을 끝내고 나가던 중 어둠 속에서 마주쳤던 저음의 남자 같았다.
“네.”
“얘가 내가 말한 오늘 면접 본 친구.”
“알아.”
“알아?”
매니저 형이 나를 잡아끌며 남자에게 소개했다.
“아까 여기 들어오다가 마주쳤어.”
“근데 왜 말 안 했어?”
“그런 얘기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간다, 그때 봐. 매출 관리 좀 잘 하고.”
“알았다니까, 들어가.”
나를 두고 매니저 형과 떠들어대던 남자는 가겠다고 인사한 후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사장이야.”
“네?”
“아니,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나간 남자가 사장이라고 알려 준 매니저 형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살갑게 웃었다.
“이제 일 배워 볼까?”
•••
정신없었던 아르바이트 첫날이 지나가고 벌써 이곳에서 일한 지도 몇 주가 지나갔다.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얼굴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몇 주가 되도록 왁스를 바른 채 앞머리를 넘긴 얼굴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민아 이따 나갈 때 쓰레기 좀 버려 줘.”
“네.”
같이 일하는 형의 부탁에 알겠다고 대답한 뒤 캐비닛을 닫았다. 터질 정도로 꽉 담긴 흰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어깨로 뒷문을 열었다. 일반 쓰레기 버리는 곳에 봉투를 내려놓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오는 애들이 누군데 저래?”
홀로 나가자 영업 준비를 하는 분위기가 평소와 좀 달랐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매니저 형이 오늘 더 주의하라잖아.”
“어차피 지하로 빠질 테니까, 우린 몸 안 사려도 되겠지?”
“어어, 하민아.”
“네.”
“오늘 아래쪽으로는 더 얼씬도 하지 마.”
나는 석훈 형이 가리킨 통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에는 아직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일반 홀은 일반 손님들도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곳이었지만 통로 끝 계단을 내려가면 회원제로만 운영되는 공간이 있었다.
같이 일하는 형들의 말에 따르면 돈 많고 심심한 금수저 자식들이 드나드는 곳이라고 했다.
직원들은 편하게 그곳을 ‘지하’라고 불렀다.
일하는 직원들도 구분이 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월급도 훨씬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잘하면 하루 동안 일하고 손님들에게 받는 팁이 월급을 웃도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들었다. 그에 반해 내가 일하는 일반 홀은 팁을 받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나이는 다들 어려 보인다고 하던데 그냥 좀 또라이가 아닌가 봐.”
“또라이는 무슨, 씨발. 여기서 일하면서 그런 재수 없는 새끼들 하루 이틀 보냐?”
석훈 형이 태양이 형에게 속닥이는 소리가 내 귀에도 닿았다. 꼭꼭 감춰져 있는 비밀스러운 곳에는 언제나 그와 상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도 왠지 끌리지 않는 이유는 본능적인 방어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민아, 매니저 형이 너 찾는다.”
한창 바쁜 시간이었다. 홀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뒤돌아서기만 해도 호출 벨이 울렸다. 욕실도 겨우 갈 만큼 피크인 시간에 석훈이 형이 나를 찾았다.
“사무실.”
그러더니 어깨를 툭툭 치고는 호출이 울린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막 들고나온 안주만 주문한 테이블에 전달하고는 통로 안쪽 사무실로 향했다.
“저 찾으셨다고 해서요.”
“어, 왔어? 앉아.”
굳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매니저 형의 얼굴이 나를 보자 누그러졌다. 매니저 형은 볼 때마다 잘 빚어 놓은 가면을 쓴 것처럼 느껴졌다. 찰나 본 굳은 얼굴이 진짜겠지. 난 속으로 생각하며 그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네.”
“바쁘지?”
“평소랑 같아요.”
“그래? 평소에도 바쁘니까 그게 바쁘다는 말 아닌가?”
맞는 말이어서 그냥 웃음으로 때웠다.
“부른 이유는 다른 건 아니고, 지하 쪽 일손이 갑자기 부족해서.”
“네?”
“지하는 아직 넘어가 본 적 없지?”
“……네.”
불길했다. 나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좀 전에 같이 일하던 형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하민이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네? 제가요?”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응, 그냥 허드렛일만 급하게 해 주면 될 거라 다른 애들 보내기도 좀 그렇고.”
“저는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제가 갔다가 괜히 민폐만 끼치는 건 아닌지…….”
“다른 직원들이 도와줄 거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하민이는 그냥 트레이 치우고 서빙하고 쓰레기만 버리면 돼. 어려운 것도 아니야, 어차피 지금 여기서 하는 일이랑 다른 것도 아니고. 지금 홀도 바빠서 오래된 애들 보내기가 좀 그래.”
“……네.”
“지금 애 하나 보낸다. 아직 얼마 안 된 친구니까 기본적인 것만 시키고, 게스트 상대는 시키지 마.”
매니저 형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나는 끝까지 찜찜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랐다.
가드가 지키고 있는, 회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지하 입구에서 왠지 상기된 얼굴의 직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니저 형이 보내서 온 거죠?”
묻는 그의 목소리에 가뿐 숨결이 섞여 있었다.
“네.”
“혼자 왔어요?”
“네, 매니저 형은 같이 오시다 갑자기 찾는 무전이 와 돌아갔습니다.”
“아, 진짜 매니저 형은 이 상황에 완전 어린애를 보내면 어쩌자고……. 따라와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혼잣말 수준의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잘 들렸다. 그 반응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었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었는데.
“원래 일하던 직원이 있었는데 지금 좀 일이 생겨서 병원에 가서요.”
“네?”
“그래서 갑자기 일손이 부족해져서 그런 거니까. 기본적인 일만 좀 도와줘요, 누가 뭐 다른 거 시켜도 그냥 오늘 처음이라고 하고 적당히 빠지고요. 쓰레기 치우고 버리고 서빙이랑 손님 나간 룸 청소해 주는 정도면 될 것 같거든요? 일단 3번 룸 치우는 것 좀 도와줘요.”
“네, 알겠습니다.”
일하던 직원이 병원에 갔다는 건 뭐고 다급해 보이는 표정 하며 어수선한 이곳 분위기도 좀처럼 적응되지 않았다. 매니저 형이 이쪽으로 가라고 했을 땐 이런 분위기일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막상 넘어오니 뭔가 묘했다. 나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3번 룸을 찾아갔다.
같은 가게라고 해도 회원들이 이용하는 곳이라 그런지 인테리어부터 구조가 전혀 달랐다.
“저기, 지원 오신 거예요?”
“아, 네. 직원이 부족하다고 하셔서.”
3번 룸 분위기는 더 이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질적인 냄새와 함께 직원 한 명이 안을 치우고 있었다. 그런데 남은 흔적이 일반적인 술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꼭 무슨 싸움이라도 났던 것처럼 깨진 술병에, 마치 피처럼 보이는 붉은 물기도 보였다.
저게 뭐야? 진짜 피인가?
“뭐 해요, 가만히 서서. 큰 유리는 대충 치워서 이따가 청소기 돌리면 될 거고 나머지 정리 좀 해 줘요. 술이랑 피도 닦아 주고.”
비릿한 냄새에 굳어 버리자 금세 타박이 들렸다.
진짜 피라고? 놀라서 직원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 사람은 자신은 바빠서 나가 봐야 한다며 나에게 걸레를 넘기고 지나쳤다.
“이게 다 무슨…….”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일단 시킨 대로 청소를 시작했다.
•••
허리가 뻐근했다. 테이블뿐만 아니라 바닥이며 소파까지 구석구석 쓸고 닦았다. 매장용 청소기를 끌고 와서 남아 있을지 모를 유리 조각까지 치우고 나서야 쓰레기봉투를 들고 룸을 나섰다.
“어떻게 됐대?”
“몇 바늘 꿰맸다던데.”
“미치겠다, 진짜. 어? 그걸 왜 여기까지 가져왔어요?”
쓰레기봉투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휴게실까지 들고 왔을 때 안쪽에서 대화 중이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이거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요.”
“그거 화장실 바로 옆에 두면 되는데.”
“아, 네.”
나는 다시 봉투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근데 화장실은 또 어디야.
원래 일하던 위쪽에서는 통로 끝 쪽에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같지 않을까 싶어서 룸이 이어져 있는 기다란 통로 끝으로 향했다.
위층에도 룸은 있었다. 그러나 인테리어 때문인지 여기와는 분위기가 아예 달랐다. 룸 내부 공간에도 차이가 있는지 문끼리 이어진 간격도 여기가 더 넓었다.
예상대로 통로 끝에 화장실이 있긴 했다. 여긴 화장실도 왜 이렇게 좋아.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웃겨서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고 쓰레기 두는 곳을 찾았다.
“여기가 아닌가.”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쓰레기를 모아 두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안쪽인가 싶어 들어가려던 찰나 나오는 사람이 있어 살짝 몸을 비켜섰다.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였다. 다리를 보니 유니폼이 아니라 사복이어서 손님이겠거니 했다. 여기서 나오는 손님이라면 회원인 고객일 거고 그렇다는 건 괜히 눈이 마주치거나 띄는 행동을 해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고객이 먼저 지나가면 그다음에 천천히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벽 쪽에 붙어 기다리는데 뭔가 이상했다. 스쳐 지나가는 듯했던 발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나 먼저 가라는 건가 싶어 내가 먼저 비껴가려고 했지만 시야에 걸친 구두가 왠지 모르게 친숙하다는 생각이 들자 발이 말을 안 들었다. 순간 등줄기가 싸했다.
“잘 지냈어?”
익숙한 음성과 함께 흰 손이 유니폼에 달려 있던 내 명찰을 훑었다.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는 가게용 닉네임이 쓰인 명찰이 강태영의 손끝에서 퉁, 튕겼다.
“오랜만인데 얼굴 좀 보여 주지?”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킥킥 웃음소리를 곁들인 낮은 목소리에 오금이 저렸다.
“저기요, 여기서 뭐 하는…….”
내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낯선 사람이 끼어들면서 얼어붙어 있던 공기가 쨍, 하고 깨졌다. 겨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까 전 쓰레기 버리는 곳을 알려 준 직원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내 앞에 선 사람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신입이라서요. 고객용 화장실로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고객님.”
직원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던 내 팔을 잡아끌며 강태영에게 머리를 숙였다. 고객용 화장실? 그렇다는 건 여기는 직원용 화장실이 따로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처음부터 자세히 좀 알려 주지. 괜한 원망이 솟구쳤다.
“직원용 화장실은 저쪽 코너 돌면 있으니까 그쪽에 쓰레…….”
“잠깐.”
직원이 내 팔을 잡고 움직이려고 할 때, 가만히 있던 강태영이 손을 들어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예?”
“난 이쪽 직원한테 볼일 있는데.”
“죄송합니다, 아직 신입이어서 그런 건데……. 뭐 해? 얼른 죄송하다고 사과드려.”
직원은 강태영이 단순히 고객용 화장실에서 쓰레기봉투를 들고 길을 막고 있던 걸로 화내려 하는 줄 알았는지 다급하게 내 뒤통수를 눌렀다.
“사과는 됐고, 따로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요.”
“…….”
“따라와, 뒤엎기 전에.”
강태영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명령했다. 직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불안한 듯 눈알을 굴리며 나를 보기만 했다.
퍽.
“헉.”
내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가 강태영의 발에 차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직원이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야.”
“…….”
“내 말 안 들려?”
직원이 내 팔을 툭 쳤다. 지금까지 나를 잡아끌던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강태영을 따르는 내 등 뒤로 작은 한숨과 함께 ‘일 났네, 진짜.’라고 말하는 직원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렸다.
•••
강태영을 따라 들어간 곳은 아무도 없는 빈 룸이었다. 따라오라더니 조용한 공간에 들어서자 강태영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알아서 입을 열어 보라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장 뭐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게 더 무서웠다.
“진짜 여기 있었네.”
한참 뒤에 나온 말에 손끝이 움찔했다. 진짜 여기 있었네? 확인하는 말투잖아. 어떻게? 마치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온 것처럼 말한 강태영의 발끝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진다 싶더니 뒷걸음질 치기도 전에 녀석의 손에 턱이 붙잡혀 들렸다. 억지로 시선이 닿았다.
“오랜만에 보는데 얼굴 좀 보여 주지?”
가까이서 마주한 강태영은 그사이 얼굴선이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동안 좋았어? 나 없으니까?”
왁스를 발라서 넘긴 앞머리를 툭 치며 강태영이 물었다. 입술만 깨물고 아무런 말 없이 녀석을 노려봤다. 이곳에서 녀석은 어찌 되었든 고객이었고 나는 직원이었다. 감정대로 대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강태영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함부로 입을 열지도 못했다.
“나는 너 좆 빠지게 찾아다녔는데.”
“…….”
“성지후는 너 어디…….”
“연락했어? 성지후한테?”
“이제야 입 여네.”
강태영이 실소했다.
“걔가 말 안 해?”
“왜, 걔한테…… 무슨, 무슨 짓 했어? 걘 진짜 아무것도 몰라!”
“알아, 진짜 아무것도 모르더라고. 그래서 고생 좀 했어.”
피해가 갈 수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내가 도망치면 강태영이 혹여 성지후를 찾아가 내 행방을 가지고 녀석을 괴롭힐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그 집에서 나온 후에는 일부러 연락도 잘 하지 않고 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자세히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성지후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모호하게 대답하는 강태영을 보고 있자 후회가 치밀었다.
“성지후한테 무슨 짓 했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
“안 믿는 얼굴이네.”
“빨리 말해…….”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그냥 물어본 게 다야. 직접 확인해 보든지.”
눈이 시큰했다. 강태영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성지후한테 연락을 한 건 맞는지, 했다면 진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묻기만 한 건지, 혹시 녀석에게 해를 끼친 건 아닌지. 수많은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나같이 끔찍했다.
“대단한 우정이세요. 아니면 우정이 아닌 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사람 일을 어떻게 알아? 나도 네가 우리 형 두고 그딴 짓 할 줄은 몰랐던 사람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강태영의 손안에서 뭔가가 팅, 팅 튕기는 소리가 났다. 금속 라이터 뚜껑이었다.
쟤가 담배를 피웠었나? 언제부터? 의문도 잠시 강태영이 곧 담배를 물었다. 쓰읍,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담배 끝에서 주황 불빛이 보였다.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내 눈에는 낯설기만 한 광경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얼굴에 직접적으로 닿았다. 강태영은 기침하는 내 얼굴을 붙잡고 관람했다. 흰 담배 연기 사이로 사냥감을 탐색하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괴로워서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빠져나가려고 할수록 턱을 잡고 있는 손힘은 더 강해졌다. 턱이 아릿하게 아파서 더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감은 채 눈물과 콧물을 쏟았다.
지잉, 지이잉.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렸다. 강태영의 휴대폰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끊어 버리는 것 같았지만 휴대폰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씨발, 귀찮게.”
낮게 욕을 내뱉은 강태영이 전화를 받았다. 이곳에 함께 온 지인들인지 어디냐며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태영은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말을 끝으로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내고서는 아예 폰을 꺼 버렸다. 흰 연기가 사라졌다. 눈을 뜨자 여전히 나를 향해 있는 시선과 마주쳤다. 강태영이 담배를 테이블 위에 비벼 끄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재떨이가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은 심연 같은 눈동자가 내 몸을 품평이라도 하듯 훑었다. 시선 대치가 길어질수록 턱에 힘이 들어갔다.
“벗어.”
갑자기 턱을 놓아준 강태영이 명령했다. 낮은 음성에 눈을 홉떴다.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안 들려?”
“…….”
“벗으라고.”
“……싫어. 여기 그런 일 하는 곳 아니야.”
“하민아, 나 지금 어때 보여?”
강태영은 계속 알 수 없는 물음만 물어댔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좋아, 보여.”
“우리가 오랜만에 보긴 했나 보다, 누구 때문에. 네가 내 표정도 못 읽는 거 보면.”
“…….”
“좋아 보인다고? 나 지금 존나 빡돌기 일보 직전인데. 모르겠어?”
“…….”
“알아서 행동해, 대신 내가 움직이면 너 진짜 죽어.”
강태영은 내게 마지막 자비라도 베푼다는 듯 말했다.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나는 옷을 벗는 대신 재빨리 뒤로 돌았다. 이곳을 벗어나자. 일단 나가서 매니저 형에게 오늘 일찍 퇴근하겠다고 하고 나가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가게 안은 아니어야 했다.
쾅!
그러나 한 걸음도 채 떼기 전에 문 옆 벽으로 뭔가가 날아와 부딪쳤다.
헉.
재떨이였다. 너무 놀라 더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조금만 옆으로 날아왔으면 뒤통수를 맞았을 게 뻔했다.
“내가 움직이게 만들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언제 움직인 건지 테이블 위에 있던 재떨이를 던진 강태영이 점차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 어깨 부근에서 녀석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옅은 담배 향이 묻어 있는 숨이었다. 놀라 경직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돌아서.”
주먹이 쥔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뒤, 돌아. 세 번째는 말로 안 해.”
두려움 때문인지 숨이 가빠졌다. 나는 헐떡대며 천천히 뒤로 돌았다. 예상대로 강태영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삐딱하게 꺾은 고개로 나를 내려다본 채로.
“벗어.”
“……왜, 이래. 너 이제 나한테 이럴 자격 없잖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지만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약속 어긴 건 너니까, 나 이제 네 말 들을 필요 없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말을 잇고 있는 내 양 볼을 강태영이 한 손안에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돌렸다. 녀석의 손에 잡혀 쭈그러진 볼이 아파 억눌린 소리가 튀어나왔다.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자격이 없어?”
“……으, 윽.”
“내가? 왜?”
“재, 재준이 형한테 말 안 한다고 했으면서 네, 가…… 으윽, 흡.”
“자격 같은 건 내가 만들면 그만이야.”
“…….”
“아직도 모르겠어?”
강태영이 볼을 잡은 채 손가락으로 톡톡 가볍게 볼을 두드렸다.
“……시, 싫어.”
강태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잡힌 턱이 빠개질 것 같았다. 내가 싫다고 했다는 것에 강태영의 기분이 상한 듯했다. 녀석은 잠시 화를 참듯 숨을 고르다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래도 일하는 곳이고 남의 영업장인데 여기서 강제로 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제 내보내 주겠지. 그 후에 어떻게 되더라도 이 방에 나를 오래 붙잡아 둘 순 없으리라 생각하는 순간 강태영이 아까 전 자신이 집어 던져서 깨진 재떨이 조각을 주워 들었다.
“뭐, 하는……! 하, 하지 마!”
강태영은 날카롭게 깨진 큰 조각을 억지로 내 손에 쥐여 줬다. 손바닥에서 기분 나쁜 따가움이 느껴졌다. 강태영이 조각을 쥐게 된 내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그의 힘이 강해질수록 조각도 더 깊이 손바닥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아프……!”
잡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 녀석을 밀어내려고 할 때였다. 강태영이 내 손을 잡고 자신의 목 부근을 그었다. 유리가 꽤 깊숙이 들어갔고, 녀석의 흰 피부가 벌어졌다. 그 틈으로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벌어진 살이 훤히 보였다.
이, 미친.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자살이나 하려는 건가 싶었다. 강태영이 손을 놓자마자 내 손바닥을 파고들었던 재떨이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뚝, 뚝 핏방울도 함께였다.
충격에 입만 금붕어처럼 벙긋거렸다.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눈물샘에 바늘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강태영은 내 얼굴을 보면서 주먹으로 벽면을 쳤다. 직원을 부르는 호출기가 눌렸고, 곧장 다른 직원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
가게가 발칵 뒤집혔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전에 고객들 간에 싸움을 말리려다가 다친 직원이 나온 상황이었다. 그에 땜빵으로 투입된 내가 고객으로 온 강태영을 공격해 다치게 만든 꼴이 됐다.
“오늘 진짜 미치겠다. 마가 꼈나.”
“…….”
“하아.”
오늘만 벌써 두 번째 호출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뭐라 하든 다친 사람은 손님인 강태영이었다. 가게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형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설명한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강태영이 내 손을 이용해 스스로 목을 그었다고 한다면 왜냐는 물음이 따라올 테니까.
“수찬이가 그러던데 아까 그 고객이랑 하민이 너랑 화장실 앞에서 실랑이가 있었다고. 맞아?”
“…….”
“하민아,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어떻게 된 건지 말을 해야 우리도 뭔 대처를 하든지 하지, 응? 이거. 그 고객이 다른 소리라도 하면……!”
똑똑똑.
노크 소리에 매니저 형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겨우 고개를 슬쩍 들어 본 그 역시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누구.”
“형, 저 수찬이요.”
“들어와.”
문이 열리고 아까 전 나와 함께 고객 전용 욕실 앞에서 강태영을 맞닥트렸던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고 물은 건 매니저 형이었는데 수찬이라는 직원의 시선이 내 얼굴을 향했다.
“사장님이요, 형 전화받으라고 하시는데.”
“씨발, 돌겠다, 진짜.”
매니저 형의 욕은 처음 들어 봤다. 자신의 휴대폰을 확인한 매니저 형이 통화하기 위해서인지 폰을 들고 사무실 안쪽 작은 개인 공간으로 들어갔다.
“저기요.”
“…….”
“그 고객이랑 원래 아는 사이예요?”
남자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분위기 보니까 뭐 있는 것 같던데, 가게 장사 망치려는 거 아니면 둘이 해결 좀 잘 봐 봐요. 잘못 건들면 안 된다고 하던 애들인데. 그 사람도 무슨 기업 아들이라면서요? 그 사람 병원 가는 거 따라간 직원 얘기 들어 보니까 일 커질 것 같은데. 매니저 형도 사장님한테 존나 깨질 것 같고. 그렇지 않아도 우리 가게 요즘 매출 별로라고 사장한테 매니저 형 맨날 깨지고 있거든요?”
나에 대한 적대와 원망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의 말을 들었다. 아랫입술을 무는 힘이 더 강해질 뿐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작은 욕을 내뱉은 남자가 사무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들거리는 다리에서 자꾸만 힘이 빠졌다.
“하민.”
잠시 뒤 매니저 형이 나를 부르면서 나왔다.
“……네.”
“소파에 앉아 봐, 얘기 좀 하자.”
매니저 형이 맞은편에 앉으면서 사무실 냉장고에서 꺼내 온 생수를 내밀었다.
“마셔, 너도 놀랐을 텐데. 아까 윽박질러서 형이 미안하다.”
“……아니에요.”
“사장이 그 고객 만났다고 하는데.”
“…….”
“병원비도 병원비고 합의금으로 부르는 게 좀 커. 그거 아니면 폭행죄로 너 고소할 것 같다네. 너뿐만 아니고 가게도…….”
“…….”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좀 어려워지거든. 우리 영업장 특성상 경찰들하고 엮여서 좋을 것도 없고. 아무튼 하는 거 보면 있는 집 자식이라 단순히 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닌 것 같거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현기증이 났다. 도움도 되지 않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손바닥에 난 상처를 더 후비며 참았다.
“병원비는 가게 부담으로 해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일단 가서 고객하고 얘기 좀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리하고 고객한테 연락해 봐. 응? 네 연락 기다리겠다고 했대, 직접 사과 듣고 결정하겠다고.”
“…….”
“하민아 부탁 좀 하자. 좋게 끝나는 게 너한테도 좋잖아.”
•••
유니폼을 갈아입고 직원 출퇴근용 문으로 나갔다. 매니저 형이 종이에 적어 준 강태영의 번호를 눈이 시큰할 정도로 노려봤다.
휴대폰을 초기화하면서 잊은 줄 알았는데 한 번 보자마자 각막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익숙했다. 외우려고 한 것도 아닌데 종이를 구겨 버려도 눈앞에 열한 자리 숫자가 떠다녔다.
얼마 다니지도 않은 가게에 피해를 줬다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강태영이 설마 그딴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일반인이라면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이겠지만 강태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걔는 일반인이 아니니까. 강태영이 어떤 인물인지 고작 몇 주 떨어져 있었다고 간과했던 게 문제였다.
내가 방심한 죄.
강태영이 피워대는 꼴을 봐서일까 피워 본 적도 없는 담배가 생각났다. 사고를 쳤으니 수습을 해야 했다. 강태영과의 만남이 불가피하다는 말이었다. 여차하면 혼자 도망이라도 칠까 했는데 강태영은 그를 원천 차단했다. 이 상태로는 마음대로 가게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터질 정도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나서 겨우 강태영의 번호를 입력했다.
-네.
신호음이 세 번 정도 울리고 강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하민?
번호를 바꾸고는 처음 하는 전화여서 내 번호를 몰랐을 텐데도 강태영은 곧장 내 이름을 불렀다.
-성지후가 너 폰 없앴다고 하던데, 그것도 역시 거짓말이네?
처음에는 웃음기가 묻어나던 목소리가 끝에는 차갑게 식은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왜 전화했어?
“……얘기 좀 해.”
-많이 혼났어? 목소리가 안 좋네?
“…….”
-메시지 보낼 테니까 이쪽으로 와.
•••
강태영이 보내 준 주소로 오니 고층 건물 몇 채가 어우러져 있는 오피스텔 단지였다. 부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상주 경비가 낯선 얼굴이어서 그런지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고 나는 강태영이 알려 준 호수를 말하며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친구.’
그냥 할 수 있는 말인데도 혀가 움직이지 않아서 애를 썼다. 원래 가족과 함께 살던 곳은 단독 주택이었으니 아마도 이곳은 강태영이 혼자 지내는 곳인 듯싶었다.
발바닥에 끈끈이가 붙은 것 같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젊은 남녀가 내렸다. 잠깐 옆으로 비켜서 있다가 그들이 내린 후 무거운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6]
[17]
[18]
[19]
엘리베이터 안에서 빨간 숫자가 점점 커지는 것만 멍하게 바라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27층에 내렸다. 중앙에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양옆으로 두 집이 마주 보고 있는 구조였다.
[2707호]
강태영이 보내 준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잘 찾아왔다면 이곳이 맞았다. 손가락부터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주먹을 말았다 쥔 후에야 벨을 눌렀다. 달칵, 인터폰을 받는 소리가 나더니 아무런 물음도 없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 쪽으로 걸어 나오는 강태영이 보였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금방이라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것처럼 운동화 안의 발이 달아날 준비를 했지만 참았다. 그사이 강태영은 나와 자신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중문을 열었고 역시나 한마디 말도 없이 들어오라는 듯 턱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대로 강태영만 사는 집인 듯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 마실래?”
여상히 물으며 강태영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고개를 저었다. 뭘 얻어 마시려고 온 것도 아니었고 여유롭게 녀석과 단둘이 한 공간에 길게 있고 싶지 않았다.
“밝은 데서 보니까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맥주 캔을 따며 다가온 강태영이 내 얼굴을 살폈다. 강태영의 목엔 두툼한 거즈가 붙어 있었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느꼈는지 강태영이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웃었다.
“생각보다 아프진 않더라?”
“…….”
“난 너한테 맞았던 게 더 아팠던 것 같아.”
“…….”
“말 안 하고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온 이유가 있을 텐데?”
“……병원비.”
“병원비?”
“시간만 좀 주면 갚을게.”
맥주를 마시던 강태영이 그 말에 픽 웃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그가 소파에 가서 앉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할 말 그게 끝 아니잖아, 그냥 말로 할 때 앉지?”
강태영이 숨을 크게 쉬면서 말했다. 진짜로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입술을 깨물며 강태영이 앉으라고 두드린 자리에 앉았다. 녀석과 허벅지가 닿고 어깨가 스쳤다. 의식하는 순간 몸이 굳었다. 그걸 느꼈는지 옆에서 강태영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나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얘기 들었어? 내가 원하는 거.”
욕이 절로 나왔다. 내가 한 짓도 아닌 일로 이딴 협박을 받는 것도. 근데 그 협박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내 상황도. 모두 끔찍했다.
“……해.”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녀석이 원하는 대로…….
“응? 잘 안 들리는데.”
“……미안해, 으윽!”
“누가 사과를 그렇게 해. 까먹었어?”
강태영이 내 머리칼을 잡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억지로 마주친 녀석의 눈이 들끓고 있었다. 잠시 나를 불같이 노려보던 강태영이 머리를 밀치며 강하게 놓았다.
잠시 상체를 휘청거리던 나는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강태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뼈가 닿아 아팠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항상 나를 짓밟고 싶어 하는 강태영.
자신의 아래에 있는 나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강태영.
놈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미안해, 합의금이든 병원비든 다 갚을 테니까…… 신고만 하지 말아 줘.”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목이 수그러져서인지 목소리가 개미만큼 작았다.
“왜? 가게 때문에?”
“…….”
“오래 일한 것도 아니라며.”
“……나 때문에 사람들 피해 보는 거 싫어.”
강태영이 내가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이 상황이 즐거운지 웃음기 섞인 신음을 냈다.
“병원비야 그렇다 쳐도 합의금으로 내가 얼마를 부를 줄 알고 갚는다고 그래? 가진 거 좆도 없으면서.”
신음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턱 아래에 강태영의 발끝이 닿았다. 발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린 강태영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나를 탐색했다. 모욕적인 자세에도 나는 반격하지 않기 위해 참아야 했다.
“그래.”
“…….”
“그래도 같이 살 부대끼고 살았던 정이 있는데.”
낮은 음성으로 그대로 기다리라고 말한 강태영이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는 무릎뿐만 아니라 바닥에 닿은 종아리 쪽도 아팠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강태영의 명령이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잠시 뒤 나타난 강태영은 웬 종이와 펜을 바닥에 떨궜다. 고개를 들고 이게 무엇이냐는 듯 묻는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자 “계약서.”라는 예상치도 못한 단어가 들렸다.
“너 통수 잘 치잖아.”
강태영이 발로 종이를 밀었다.
“써. 나 너 못 믿겠거든.”
“…….”
“싫어? 싫으면 신고…….”
“쓰, 쓸게!”
곧장 휴대폰을 찾아 든 강태영에게 외쳤다. 펜을 집어 들고 녀석을 바라보자 픽, 웃은 강태영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손에 들린 핸드폰이 소파 위에 던져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종이 위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강태영이 부르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하필이면 재떨이 조각에 베인 손이 오른손이라 펜을 잡자 통증이 일었다. 가게에서 대충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온 게 다였는데 힘을 주자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손을 움직이자 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글씨가 나열되기 시작했다.
<계약서>
1. 백하민(이하 을이라고 한다)은 강태영(이하 갑이라고 한다)에게 입힌 상해에 대한 병원비와 합의금을 합당하게 지불한다.
2. 을의 상환 능력에 따라 병원비와 합의금은 현금 또는 갑이 원하는 것으로 치환할 수 있다.
막힘없이 글씨를 써 내려가던 손이 움찔했다. 2번 조항에서부터 저항감이 들었다. 그러나 녀석에게 비는 소리를 하며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며 겨우겨우 손을 움직였다.
3. 만약 해당 사항에 대해 불복종한다면 즉시 갑은 을에게 법적 조치를 취한다. 법적 조치는 을과 사고가 발생한 업장 모두 해당된다.
4. 갑에 연락에 대해 을이 1시간 이상 무응답일 시 역시 3조항과 같은 조치를 한다.
조항이 생길수록 가슴이 묵직해졌다. 답답하고 막막해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느라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지독한 강태영은 말 같지도 않은 계약서를 작성하게 한 뒤에 그를 지키겠다는 각서까지 쓰게 했다.
“……그래서 내가 갚아야 할 건 얼만데?”
“2천.”
“뭐?”
고작 그 정도 상처에? 그것도 내가 진짜로 한 것도 아닌 일에 대한 금액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눈을 치켜뜨며 크게 되물었다.
“되게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거 특수 상해가 될 수도 있다더라? 그것도 가게에 찾은 고객을 상대로 직원이 저지른 거고. 어느 쪽으로든 바깥으로 이 일이 나가면 누구 손해일 것 같아? 게다가 이거 흉 질 수도 있대. 여기 셔츠 입어도 아슬아슬하게 다 보이는 부위인 거 알지?”
“…….”
“아물면 흉터 치료도 해야 할 거고, 거기다 내가 받은 정신적 피해 보상금하고 합의금까지 포함된 거라고 생각하면 엄청 많이 봐준 건데, 왜? 너무 적어?”
이렇게 될 거였으면 저 잘난 얼굴이나 그어 버릴걸. 자신을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안다는 얼굴로 웃은 강태영이 계약일을 적고 사인을 하라고 했다. 욕을 삼키며 휘갈기듯 사인을 하자 강태영이 그 옆에 자신의 서명을 새겨 넣었다.
“나 진짜 이대로 할 거야.”
“…….”
“병원에서 치료받은 것도, 병원에 그 술집 사장이 왔던 것도 다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 개같은 짓거리 꾸밀 생각은 하지 말고.”
“그렇게 해. 어떻게든 갚을 거니까, 그럼 됐지? 이제 나 갈…….”
더 듣고 싶지도 한 공간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엎어진 물이었고 지금 당장 급한 불을 껐으니 벗어나고 싶었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얼른 조용한 곳에서 의식을 놓고 싶었다.
“아!”
그러나 중문을 채 지나기도 전에 머리채가 잡혔다. 몸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등을 찧었다. 등으로 알싸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놔……! 놓으…… 아, 으윽!”
거기에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강태영이 잠시 놓았던 머리채를 다시 잡았다. 강태영은 놔 달라고 비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잡은 채 어디론가 질질 끌었고, 나는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 줄이기 위해 강태영의 손목을 부여잡고 끌려 들어갔다.
등이 바닥에 쓸리고 발은 이리저리 난잡하게 흔들렸다. 강태영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전보다 더 무자비해졌고 흔들림 없었으며 강했다.
혹독한 손에 끌려 온 곳은 방이었다.
아마도 강태영이 쓰는.
“강태……, 강태영! 이것 좀…… 노, 읏.”
강태영과 나밖에 없는 완벽한 밀실.
듣는 귀도 보는 눈도 많았던 하영 이모의 집에서와는 전혀 다른 공포감이 엄습했다.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던 그때의 그 감정이 고스란히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가 하얗게 점멸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강태영은 방 안에 들어와서야 강하게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표정이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왜, 왜 이래.”
눈가가 축축했다. 생리적으로 눈물이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강태영이 머리를 놓아주자마자 발딱 몸을 일으켰다.
“누가 가도 된대?”
“네가 하라는 대로 했잖……!”
“사람 꼴받게 좀 하지 마.”
강태영의 경고를 듣고도 멈추지 않았다. 몸을 돌리고 있는 힘껏 다리에 힘을 실었다.
“아윽!”
또다시 잡혔다. 우악스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잡아챈 강태영이 나를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끄……읍, 보내, 보내 줘. 흑.”
바닥에 누운 자세가 된 내 몸 위로 올라탄 강태영에게 빌었다. 그러나 놈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너 없어져서 내가 얼마나…….”
말을 흐리고 날 깔아뭉갠 강태영은 삽시간에 양팔을 결박하듯 내리눌렀다.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녀석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딜 간다고. 너 토껴서 못 한 씹질이 얼만데.”
“흐흑, ……잖아.”
“뭐? 다시 말해 봐.”
뻔뻔한 말에 어금니를 물고 읊조리자 잘 들리지 않았는지 강태영이 내 입가로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나는 다시 대답하는 대신 강태영의 귀를 물어뜯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투둑, 살점이 뜯기는 느낌과 함께 녀석의 귀에서 피가 났다.
“아! 씨발.”
짜악!
눈앞에 번쩍 불길이 일었다. 뺨이 그대로 터져 나간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침에서 쇠 맛이 났다.
아.
벌어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저절로 쏟아져 나왔다. 후드득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너무 뜨거웠다. 얻어터진 볼이 타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흐린 시야로 방 안에 있던 침대 밑의 어두운 빈 공간이 보였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실내는 거실의 불빛이 겨우 들어와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존나 참은 거 알지.”
얼굴 위에서 강태영의 거친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 가게에서 그냥 뚫어도 됐어. 근데 내가 참았지?”
“……흐으.”
“그리고 너도 알잖아, 너 어차피 그거 다 돈으론 못 갚아. 네가 갚는다고 해도 어느 세월에? 남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 그럼 그냥 닥치고 내 밑에서 기어야지.”
“…….”
“나한테 자격이 없다고? 자격 같은 건 만들면 된다고 그랬지? 나 말고 누가 너한테 이럴 자격이 있겠어, 안 그래?”
강태영이 귀를 혀로 느리게 핥아 올리며 말했다. 축축한 음성이 고막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또 할 말 있어?”
“……흐.”
빠르게 짓밟힌 자아는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끅, 끅 울음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드디어 우네.”
쪽.
강태영은 눈물만 뚝뚝 흘리는 나를 가만 내려다보다 볼이 잡혀 부리처럼 동그랗게 모인 입술에 입을 맞췄다. 상황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
강태영은 마치 놀이를 하듯 경쾌하게 말했다.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리는 손길은 막을 새도 없이 신속하고 깔끔했다.
“……아, 하지…… 말, 흑…….”
다리 사이를 파고들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모아 봤지만 벗기는 손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태영은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내 움직임은 녀석에게 조금의 방해도 되지 않았다.
어느새 무릎 아래쯤에 걸쳐진 바지와 속옷은 이제 오히려 내 움직임을 방해했다. 걸리적거리는 옷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걸렸다. 헛발질만 내젓기 일쑤였다.
녀석은 버둥거리는 내 양손을 한데 모아 위로 올려 결박하고는 키스했다. 녀석의 입술에 찍힌 내 눈물 때문에 짠맛이 났다.
“오랜만에 하는 건데, 왜 울고 그래. 씨발, 구멍은 움찔대면서.”
강태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울고 있는 내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 나를 또 한 번 좌절하게 했다.
손목에 단단한 뭔가가 감긴다 싶더니 가죽 벨트가 나도 모르는 사이 수갑처럼 감겨 있었다. 손을 미친 듯이 흔들고 비벼댔지만 손목이 쓰라리고 아플 뿐 벨트는 풀어지지 않았다.
나와는 다르게 두 손이 자유로워진 강태영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목 끝까지 티를 걷어 올린 녀석이 유두를 빨고 깨물었다.
“아, 읏.”
잘근잘근 살이 씹힐 때마다 나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강태영의 혀와 입술이 닿을 때마다 뱃속이 꿀렁거려서 미칠 것 같다. 크게 입을 벌려 유륜까지 입에 머금고 크게 빨자 허리가 비틀렸다.
“감도 좋네, 그동안 다른 새끼랑 한 거 아니지?”
“하읏, 읍.”
“이 짓도 중독이잖아, 특히 너는 뒤로 잘 느끼고.”
“아, 아파. 등…… 아, 윽!”
딱딱한 바닥에 찧어대는 등이 아파서 몸을 비꼬자 강태영은 내 멱살을 잡고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아니면 또 강재준 생각하면서 쑤셨어? 응? 말해 봐, 죽여 버리게.”
“윽.”
하얀 살결을 흡착하는 입이 떨어지면 그 자리엔 꼭 빨간 자국이 남았다. 상체를 지분거리던 강태영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흐앗! 하으, 윽.”
쿡쿡 웃는 소리와 함께 오금에 손을 넣어 내 두 다리를 위로 말아 올린 강태영이 예고도 없이 귀두를 입에 넣었다. 혀로 느리게 핥다가 입을 벌려 축축하고 따뜻한 점막으로 기둥을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았다.
아……. 부드러운 점막이 기둥에 달라붙어 조일 때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녀석의 불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빨아 당기면 발가락 끝까지 찌릿했다.
“아읍, 읏.”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이성이 날아갈 정도의 쾌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아랫배가 간질간질 떨리고 빛을 받지 못해 하얀 허벅지가 덜덜 떨리며 저절로 벌어졌다. 반쯤 발기했던 성기는 완전히 발기해서 아랫배가 뽑힐 듯 팽팽해졌다.
“하으읏, 윽.”
느끼고 싶지 않은데. 의지와 달리 달아오르는 몸이 괴롭고 싫었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느리게 혀로 기둥을 핥던 강태영이 고환을 한쪽씩 입 안에 넣고 굴렸다. 그때마다 입에서 괴이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내지른 것이라곤 믿고 싶지 않은 새된 신음이었다. 결박된 손을 내려 입을 막았다. 새어 나오는 숨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신음을 토할 것 같을 때마다 질겅질겅 손등을 죄다 짓씹었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손등엔 잇자국이 짙게 나 있었다. 강태영의 머리가 앞, 뒤로 움직일 때면 아랫배가 파르르 떨렸다. 근육이 당당하게 팽팽해졌다가 느슨해지고 순식간에 다시 바짝 조여졌다.
“윽, 으읏. 나, 나올 것 같…….”
사정할 것 같은 느낌이 치밀어 급하게 두 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밀어내 보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강태영은 좆을 입에 문 채 눈만 치켜떠 나를 살폈다. 눈알이 마음대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 근육 역시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녀석은 혀로 귀두를 휘감듯 굴리다가 내 성기를 뿌리 끝까지 삼키고 강한 힘으로 빨았다. 소리 없이 입이 벌어지고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으으읏! 아, 아읏!”
눈앞에 흰빛이 번쩍이고 긴 사정이 이어졌다.
꿀꺽, 꿀꺽. 강태영의 입 안에서 요동치는 성기에서 꿀렁꿀렁 쏘아진 정액은 고스란히 그의 목 깊숙한 곳으로 넘어갔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정액을 받아 마시고 기둥부터 귀두 끝까지 쪼옥, 빨아내고서야 강태영은 성기를 뱉어냈다.
발끝까지 힘을 있는 힘껏 주고 있어서인지 다리에서 쥐가 나려고 했다.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허벅지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빨아대고 연이어 고환까지 한입에 훔쳐낸 강태영이 불쑥 올라와 입을 맞췄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혀에서 묘한 맛이 났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알기에 도리질 치며 옭아매는 혀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강태영이 강하게 턱을 잡아 피하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아.”
강태영이 내 입을 벌리고 안으로 침을 흘려 넣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천장을 간질이면 침이 고였다. 반은 입가로 새어 나왔고 반은 강태영의 입 안으로 넘어갔다. 부드러운 혀가 얽혀 들 때마다 왜인지 구멍이 움찔거렸다.
턱이 빠개질 것처럼 얼얼해질 때까지 난폭한 키스를 이어 가던 강태영은 도장을 찍듯 꾹 입술을 찍어내고는 떨어졌다. 녀석의 입술이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것으로 번들거렸다. 얇은 실이 살짝 처지다가 끊겼다. 입으로 하는 섹스나 다름없는 키스였다.
“하아, 앗.”
축 늘어져 있는 나를 강태영이 뒤집었다.
“하읏, 하지…… 아, 그거 싫……!”
널브러진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벨트로 한데 모여 있는 두 손가락이 모두 활짝 펴졌다.
“아윽.”
“가만히, 좀, 있어.”
싫다며 몸을 비틀자 강태영이 볼기짝을 강하게 내리쳤다. 엉덩이를 잡아 벌린 녀석이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구멍 주변부를 핥던 혀끝이 곧 닫혀 있는 구멍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높은 코가 엉덩이 살을 쿡쿡 찔렀다.
키스할 때부터 이미 움찔거리던 내벽의 움직임이 더욱 심해졌다. 보고 있지 않아도 빨간 혀가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더욱 상상이 풍부해졌다. 나를 뒤엎어 놓고 혀를 세워 아래를 적시는 녀석이 눈앞에 그려졌다.
활짝 펴진 손바닥으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으흑, 읏.” 하고 갈무리할 수 없는 신음이 흘렀다. 아래가 젖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침이 흘러 들어오는 느낌이 선연했다. 혀가 내벽을 꾹 누르고 쭈읍, 빨면 아랫배와 침대 사이에 깔린 성기가 꿈틀거렸다.
강태영의 아래에 깔려서 이런 반응을 내보이는 스스로가 끔찍했다. 이미 녀석에게 길든 것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모든 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한참 아래를 적시던 강태영이 몸을 세우자 녀석의 타액으로 젖은 구멍에 익숙한 살덩이가 닿았다.
“흐읏.”
단단한 기둥이 엉덩이 사이에 비벼졌다. 강태영이 내 두 다리를 벌리며 자리를 잡는 게 느껴졌다. 이불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턱을 이불에 대고 숨을 쉬었다. 둥근 귀두 끝이 입구를 꾹 눌렀다.
“아, 윽.”
버거운 크기의 성기를 한 번에 넣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몇 주 만의 섹스였으니 확실히 무리가 따랐다. 고작 귀두 부분이 들어왔을 뿐인데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쓰읍.”
강태영도 쉽게 삽입되지 않는 게 답답한지 느리게 숨을 집어삼켰다.
“안 쑤시긴 했나 보네, 후으, 아다가 다 된 걸 보면.”
“……윽.”
“아, 씨발. 윽, 처음 너 따먹었을 때 생각나.”
“하윽…… 아, 아파!”
몇 번 더 삽입을 시도해 봐도 쉽게 벌어지지 않자 결국 강태영은 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굴었던 행동을 내다 버렸다.
입구에 겨우 귀두 끝만 걸쳐져 있던 성기가 자비 없이 푹 꽂혔다. 허공을 휘저어대는 발목은 강태영에게 잡혔다. 난폭한 삽입이 계속 이어지며 몸이 흔들리자 잡힌 발목이 아파 왔다.
“아흑.”
“너 여기서부터 다시 좁아지는 거 알아?”
강태영의 말과 함께 그의 성기가 다시 좁아지는 안쪽 어느 부분을 지났다. 근육인지 장기인지 모를 부분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우윽, 하읏.”
결박된 손으로는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녀석을 저지할 수도 없었다. 나는 저 앞의 이불을 잡고 배로 기어 나갔다. 그러나 고통을 피해 꾸물꾸물 달아나면 꼭 그보다 더 뒤로 잡아당겨졌다. 다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강태영의 좆은 그때마다 더 깊숙이 쑤셔졌다. 강태영의 성기가 박히는 족족 이불에 맞닿아 있는 아랫배가 볼록하게 부풀어서 녀석의 성기가 어디까지 들어왔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됐다.
여기까지 들어와도 되나 싶은 곳까지 밀고 들어오던 성기는 어느새 배꼽 부근까지 삽입되었다. 큰 귀두에 닿은 뱃가죽이 둥글게 솟았다. 속이 더부룩하기까지 했다.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 같아 울면서 팔꿈치로 포복해 벗어나려 했다.
주르륵.
“흐윽, 아파, 아읏…… 아프.”
그리고 또다시 발목을 잡고 끄는 힘에 그만큼 아래로 딸려 내려왔다.
“거봐, 안 하다 하니까 아프잖아.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강태영이 위에서 내 등을 꾹 짓누르듯 상체를 겹치며 목과 어깨에 입을 맞췄다.
“우윽, 커읏.”
“하, 어차피 하는 거, 매일 하는 게 좋다니까.”
“아윽.”
삼 분의 일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쿵, 내벽을 찍어 올렸다.
“……아, 아.”
“다른 새끼랑 하라는 소린 아니고.”
“아흐흑……!”
쑤욱 빠져나가서 아랫배가 비면 다시 쾅 쑤셔 박혔다. 내 배는 납작해졌다가 볼록 솟아오르기를 반복했다. 뱃가죽이 곧 뚫릴 것처럼 아릿했다. 아래에서 꺼덕거리는 성기에서는 강태영의 좆이 뿌리 끝까지 박힐 때마다 정액이 뚝뚝 흘렀다. 차라리 계속 고통스럽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아아, 으읏.”
어느새 얼굴이 난잡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음모가 입구를 짓이길 정도로 성기가 깊숙이 박혔다. 까슬한 음모에 닿은 살갗이 따끔거렸다. 질척한 음모가 살갗에 비벼졌다. 끝까지 박은 강태영이 뱃가죽에 비죽 드러난 제 좆을 꾸욱 눌렀다.
“하으윽.”
파드득 몸을 떨자 내벽 안의 성기가 함께 꺼덕거렸다.
위로 뻗친 하체 때문에 배 근육이 뻐근했다. 엑스자 모양으로 교차된 다리는 강태영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위로 솟구쳐 있었고 무릎으로 선 강태영은 자세 때문에 더욱 좁혀진 내벽 안을 쾅쾅 들이박았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시선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물먹은 머리카락이 강태영의 움직임에 따라 무겁게 찰랑거렸다.
내 배 위에는 이미 내가 몇 번이나 사정한 정액이 이리저리 난잡하게 튀어 있었다. 배꼽에 고여 흐르기까지 했고 음모에도 허옇게 말라붙은 정액이 한가득이었다.
“강재준이, 좋다면서 후으, 내 밑에서 이러고 있으면 기분이 어때?”
귀에 꽂히는 음성이 따가웠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억울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저의가 잔인해서 베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강태영은 내 일그러지는 표정을 비웃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꽂히는 성기는 몇 번의 사정 끝에도 줄어들 기미가 없었고 녀석은 오랜만에 되찾은 장난감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치고 욕을 해도 나를 구하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집에서도 그랬고 여기서도 그랬다.
그래서인지 의욕이 흐려졌다. 강태영의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고 흔들리는 몸의 감각도 점점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