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31화 (외전1 완결) (131/131)

외전1 25화. Pour Sejin(12)

‘웬일로 괜찮은 선물을 준비했던데?’

그 말을 멍청하게 넘겼던 때부터 지금까지, 권이정을 처리하는 건 내게 사명이나 다

름없었다. 한때는 손쓸 틈도 없이 법의 처벌에 선수를 뺏기고 말았으나, 이번만큼

은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다만 정세진에게 집중하기 위해 보류해 두었

을 뿐이었는데, 또 같은 짓을 저지르려고 한 순간 그 계획조차 수정해야만 했다.

‘그 새끼를 거기서 죽일 걸 그랬죠.’

창립 기념식 이후, 나는 곧장 권이정의 신변을 파악했다. 원래부터 긁어모으던 정

보 외에 개인적인 복수를 이룰 루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일정은 물론, 연락하는 사

람과 최근 들른 장소까지. 샅샅이 뒤져 정보를 취합한 뒤, 머릿속에만 있던 계획을 곧

장 실천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약 파티라도 열 생각이었는지, 적당한 타이밍에 그가 인

적 드문 별장에 알아서 처박힌 것이다. 전파가 닿지 않는 깊숙한 산속은 은밀한 행위

를 저지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브로커를 매수해 장소를 알아내고, 약에 취할 만큼 취한 권이정을 남들 모르게 빼돌

렸다. 할아버지 임종에 맞춰 알 만한 기자에게 실종이라고 정보를 흘린 뒤, 은근슬

쩍 마약과 관련된 냄새를 맡게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누나가, 권이정의 범죄를 덮

기 위해 그의 실종마저 사망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그 망할 놈이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죄책감은 없었다. 원래도 권이정은 남

아도는 시간과 돈으로 온갖 범법 행위를 일삼는 놈이었으니까.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

한 욕구를 그런 식으로 푸는 모양인데, 집안에서도 굳이 그런 해충 같은 녀석을 품

고 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누나와 합의하에 처리하려 했던 거고, 나는 그 시기

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다.

‘뭐야……. 씨발, 너네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아? 어!’

그래서 그를 내 손으로 죽였느냐, 단언컨대 나는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다만 피해

자들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고 지금까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돌려받게 만들었

을 뿐. 알파라고 해서, 오메가가 당했던 일들을 당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나한테 왜 이래! 이거 안 놔? 악! 씨발…… 아, 아악……!’

우습게도, 권이정은 몇 번이나 이유를 물었다. 어두운 창고 속, 손과 발이 묶인 채

로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 눈이 가려진 탓에 ‘창고’라는 사실까

진 몰랐겠지만 말이다. 본인이 저지른 악행에도 이유가 없는데, 정말 제게는 이유 없

는 불행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은 걸까.

당연히 나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엔 그가 저지

른 잘못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게다가 콕 집어 한 가지를 언급해 봤자, 그에겐 고

작 탓할 거리 하나 쥐여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밤사이 목숨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권이정이 죽었다. 벌써 죽었단 사실을 아쉬워해야 할지, 그게 아니면 반년

이 넘게 버텼단 사실에 감탄해야 할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은 아니었으나 내심 허무

해진 건 사실이었다.

‘적당히 처리해. 진짜 산짐승한테 던져 줘도 되고.’

자살인지, 아니면 타살인지. 나는 굳이 그 사인까지 캐묻진 않았다. 어차피 죽어 버

린 목숨이라면 그 미개한 마지막을 되새길 필요는 없을 테니까. 벌레만도 못한 인생

을 산 권이정에겐, 이 정도 대우가 딱 적당했다.

“박 비서, 오늘은 이만 들어가지.”

퇴근을 앞뒀을 땐, 머릿속에서 권이정의 생각이 완전히 지워진 뒤였다. 사실상 반

쯤 방치하고 있었기에 죽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아무

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란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면 모를까.

뭐, 만약 정세진이 알게 되면 심성 고운 그는 조금 껄끄러워하겠지만.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요.」

대략 5분 전에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건물 아래로 내려왔다. 별거 아닌 메시

지 하나에 이토록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노릇이다. 물론, 지금 느껴지

는 설렘이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로비를 가로질러 입구로 나가는 길엔 마주치는 직원들이 꾸벅꾸벅 인사를 해왔

다. 대충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아 주고, 경호원과 비서진을 대동한 채 걸음을 빨리

했다. 정세진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장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나를 전화 한 통에 뛰게 만드는 사람은 정세진 씨밖에 없거든요.’

그때는 전화 한 통이었는데, 이제는 메시지 한 통인가. 아니, 어쩌면 손짓 한 번

에 당장 달려 나갈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사실 굉장히 비현실적인 일

이라, 평소에는 하지 않을 행동도 그를 위해서라면 기껍게 느껴졌다.

건물 밖으로 나와 아직은 한적한 대로변을 둘러봤다. 푸르른 5월의 하늘 아래, 익숙

한 자동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그에게 선물했던, M사에서 나온 새하얀 세단. 그

리고 그 앞에 서 있는 단 한 사람의 모습까지.

“…….”

그는 드물게 머리를 세팅하고 손에는 하얀 리본이 달린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반

쯤 드러난 이마엔 곧은 눈썹이 자리하고, 올곧게 나를 향하는 두 눈은 이내 반달 모양

으로 예쁘게 접혔다. 가슴 언저리가 뻐근하게 옥죄는 순간, 그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

어오기 시작했다.

“…….”

“…….”

심장이 딱 기분 좋을 만큼 뛰었다. 그의 기분과 내 기분이 내리쬐는 햇살만큼이

나 따사로웠다. 나도 그에게 걸어갈 수 있었지만, 그저 나 하나만 보고 걸어오는 모습

이 마음에 들어서 굳이 그러지 않았다.

“빨리 나왔네.”

“……하.”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가 내민 꽃다발이 은방울꽃이라서. 부케

에 쓸 것처럼 청초한 모양새가 우리가 약혼했던 그 날을 떠올리게 하는 기분이

라. 풀 냄새가 섞인 향긋한 꽃 냄새는 꽃다발이 아닌 정세진 그에게서 풍겨 오고 있었

다.

“그 꽃은…… 내 건가?”

누가 봐도 내게 건네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

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세진은 재미있다는 듯 느슨히 입매를 당기며 웃었다. 벌어

진 입술 틈에선 사뭇 장난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가지려고 사진 않았겠죠.”

그에게 내가 했던 말이었다. 장미꽃을 내밀며 했던 말을 정세진이 그대로 따라 하

고 있었다. 그걸로 모자라 더없이 기분 좋은 말까지도.

“내가 꽃을 줄 만한 애인은 권이도 씨밖에 없지.”

홀린 듯 꽃을 받아 들었다. 형식적인 꽃다발은 많이 받아 봤지만, 이렇게 개인적으

로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선물로.

“……예쁘네.”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던 물건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그에게 줄 꽃을 고르면서

도 이 보드라운 꽃잎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는데 말이다.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입

을 벌렸지만, 그보다 정세진이 더 빨랐다.

“그러게요.”

가벼운 목소리였다. 그는 마치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뒷말도 덧붙였다.

“……이런 기분이구나.”

그게 어떤 기분인지, 거기까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전해지는 감정으로 그가 몹

시 기뻐하고 있단 사실만 알게 됐을 뿐. 녹아내릴 것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은 정세진

은 내게 한 손을 내밀며 우리 데이트의 시작을 알렸다.

“가요, 밥부터 먹어야지.”

***

정세진이 예약한 식당은 우리의 약혼이 끝났던 그 레스토랑이었다. 미쉐린 가이드

에서 별 세 개를 받은 곳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

다. 마지막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연애하게 된 이후엔 단 한 번도 찾

아오지 않았다.

“일부러 여기로 예약했어요.”

그는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를 건네고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는 대신 빙긋 웃기만 했

다. 메뉴는 지난번과 동일했고, 그때와 달리 주방장이 일일이 음식을 설명하며 코스

로 내어 왔다. 다행히 음식 맛이 퍽 훌륭했기에 식사를 마칠 즈음엔 찝찝하던 마음

도 한결 나아진 다음이었다.

식당을 나온 다음엔 그는 또 말없이 어디론가 차를 운전했다. 반짝거리는 두 눈

이 선물 상자를 숨겨 놓은 어린아이 같아서, 굳이 어디로 가냐고 캐묻지는 않았다. 그

가 들뜨면서도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넘실거리는 페로몬에서도 그대로 전해졌

다.

“다 왔어요.”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강이었다. 강변에 차를 대고 강물에 비치는 야경

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 그와 두 번이나 와 봤고,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추

억 속 그곳.

“여기가 다시 오고 싶었어?”

평범한 데이트 코스로는 나쁘지 않긴 하지. 그런 생각으로 물었는데 정세진은 선

뜻 대답하는 대신 미묘하게 말꼬리를 늘어뜨렸다.

“뭐, 그것도 있고…….”

달칵,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내 쪽으로 손을 뻗은 그가 내 안전벨트까

지 풀어 준 뒤 애매하게 시선을 굴렸다.

“새로운 걸 할까 하다가, 우리가 가본 데를 가는 게 좋겠더라고요.”

“그래서 꽃을 사 오고?”

“항상 받기만 했으니까.”

서른 살이 된 남자가 이렇게 귀엽게 느껴져도 되나. 멋쩍게 웃는 얼굴은 내게 선물

한 은방울꽃만큼이나 하얗고 맑았다. 온순하고 선한 눈매가 지그시 내 옆얼굴을 바라

봤다.

“권이도 씨.”

언제부터인지, 그는 완전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쪽을 돌아

보자 그가 특유의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가로등 불빛이 높다란 콧대를 따라 길게 늘

어졌다.

“결혼하기 전에 약속해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약속?”

“응, 약속.”

장난스럽게 말한 그가 새끼손가락을 펼쳐 내밀었다. 혜율이와 약속할 때 하는 동작

은, 예전에 내가 장난삼아 그에게도 했던 것이었다. 픽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걸

자, 그는 손가락을 꼭 움켜쥔 채로 곧장 이야기를 꺼냈다.

“향수를 만들 거예요.”

딱히 특별한 것 없는 말이었다. 그는 향수 회사의 대표였고, 이제는 웬만한 자격증

을 다 취득한 조향사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웃으려는데,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이 나

를 단단히 옭아맸다.

“매년 하나씩, 우리 결혼기념일에 맞춰서 출시되게.”

“…….”

왜, 그 순간 긴장이 됐을까. 그의 감정이 전해진 건지, 아니면 그냥 나의 감정인 건

지. 어쩌면 그가 유달리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걸 다 선물로 줄게요.”

“……결혼기념일 선물로?”

“응, 우리가 가족이 된 기념으로.”

향수를 받는 게 처음도 아닌데. 나긋한 목소리가 건네는 말들이 이상하리만치 뇌리

에 각인됐다. 지금 이 순간이, 나란히 얽힌 새끼손가락이, 가만히 나를 향하는 그 시

선까지도 하나도 빠짐없이 선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겠더라고.”

그는 미안하단 얼굴로 웃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내가 긴장했단 사

실을 그 또한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느릿느릿 뒷말을 이을 땐 긴장을 한 사

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올해 나올 향수 이름은…… ‘Nouveau Depart’ 정도로 할까.”

Nouveau Depart.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어떤 향일지는 모르겠지

만, 그가 만든다면 분명 근사한 향기가 날 터다. ‘Sejin’에서 나온 모든 향수가 그렇

듯,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적인 향기가 말이다.

“그다음엔 ‘Deja vu’, ‘Petit a Petit’, ‘Raison d'etre’…….”

불어 특유의 발음은 정세진의 입에서 나오면 더 부드러운 감이 있었다. 외운 것처

럼 줄줄이 향수 이름을 읊은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엷은 미소를 띠었다. 말려 올

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만지고 싶었지만, 여전히 내 손을 놔주지 않아 불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해 놓은 걸 다 만들려면…… 대충 15년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속이 비칠 것처럼 투명한 눈동자

가 흔들림 없이 내 얼굴을 담았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가지런한 속눈썹

이 가볍게 팔랑였다.

“그쯤 되면 당신도 불안해하지 않겠지.”

“……내가.”

불안해하는 걸 어떻게 알고.

“어떻게 몰라요. 당신이 나를 느끼는 만큼, 나도 당신을 느끼는데.”

얽혔던 새끼손가락이 서서히 풀어졌다. 스르륵 흘러내린 손은 이번엔 가만히 내려

놨던 내 왼손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내 손을 들어 올린 그가 반지가 끼워진 약지

에 살짝 입술을 내리눌렀다.

“좋아해요.”

“…….”

“사랑해.”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고백은 그 어떤 절절한 감정보다 더 깊이 마음에 와닿았

다.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게, 그는 위로하는 것처럼 상냥한 목소리로 한마디

를 더 덧붙였다.

“이제 그 기억에서 벗어나야죠.”

“…….”

그제야, 그가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토록 걱정 어린 눈으로, 이렇게 따

사로운 목소리를 내면서. 내 손을 가져가 제 가슴팍에 댄 이유가 무엇인지.

“자.”

“…….”

두근, 두근,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이 내 것과 같았다. 조금 빠른 듯한 박동은 아

마 내가 느끼고 있는 긴장과 설렘으로 인한 것일 터다. 손바닥 너머로 전해지는 생명

의 증거는 이따금 간절히 염원하던 내 모든 바람이었다.

“난 지금 당신 곁에 살아 있고, 당분간은 결혼 준비하느라 우울해할 시간도 없는

데…….”

“…….”

“권이도 씨는 그럴 여유가 있나?”

조금쯤 타박하는 어투였다. 실제로 정세진은 억울하다는 듯 살짝 눈가를 찌푸렸

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 말 못 하는 내게 온화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기껏 한날한시에 죽을 수 있게 됐잖아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수명까지 맞춰 준다는 각인이 우리에게 기적을 선사

한 건 아닐까. 서로 다른 시간을 돌아, 마침내 조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번엔 그 어

떤 실수도 없이 서로에게 안주할 수 있도록.

“이제 무릎도 그만 꿇고.”

자꾸 그러다간 버릇이 되고 말 거라며, 그는 이미 몸에 밴 습관을 지적했다. 무릎

을 꿇는 것쯤은, 내게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그럴 때마다 내내 신경 쓰고 있었다

는 듯이.

“대답은?”

“……아.”

뒤늦게, 숨통이 트였다. 탄성처럼 내뱉은 한마디 다음엔 아득히 멀어졌던 현실감

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맞닿은 손에선 여전히 그의 체온이 느껴졌고, 나를 바라보

는 시선 역시 눈을 감았다 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랑해, 세진아.”

겨우겨우 내뱉은 말엔 버거울 정도로 벅찬 마음이 담기고 말았다. 그 한마디를 발음

하는 순간, 지금껏 쌓여 왔던 불안들이 눈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를 볼 때마

다 느끼던 초조함 역시 지금은 아주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해.”

아마 평생을 다 해도 이 마음을 다 표현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우리가 열다섯 번

의 결혼기념일을 겪은 다음에도 그를 향한 마음은 아주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테니.

“……그 대답을 말한 게 아닌데.”

그는 웃음을 흘리면서도 군말 없이 내게 손을 뻗었다. 살며시 내 뺨을 감싸고, 얼굴

을 가까이해 깃털처럼 부드럽게 입을 맞춘다. 보드라운 입맞춤이 끝난 다음

엔 또 한 번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순간에 괜찮아지지 않는 거 알아요. 나도, 약 먹으면서 꽤 오래 걸렸으니까.”

“…….”

“그래도 내가 항상 같이 있을게.”

“…….”

“가라고 해도 있을게요. 권이도 씨 옆에.”

그에게 모든 걸 해주고 싶었는데, 정작 내가 받고 있지 않나. 속죄하는 마음으로 잘

못을 빌던 내게 그는 과분할 만큼 포근한 애정을 돌려줬다. 내게 건네는 한마디 한마

디가, 그 어떤 꿈보다 달큼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우리…….”

“…….”

“그냥 행복하게만 결혼할까요.”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을 참으로 다정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자라면서 그렇게 많

은 상처를 받았는데, 꿋꿋이 피어나 이제는 직접 온실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바라는 약속인데.”

“…….”

“들어줄 수 있죠?”

약속하겠다는 말 대신 나 또한 그의 왼손을 가져와 반지에 입을 맞췄다. 어찌 보

면 초라할 수 있는 한강에서, 우리의 모든 기억을 지나 내가 사랑하는 너를 위해.

“……네가 바라는 결혼을 하고 싶었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겐 꽃과 향수를 선물하고 그에겐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을 남

겨 주고 싶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모습으로 아무런 걱정도 없이 즐거움만 가

득하게 말이다.

“행복하게 해줄게, 세진아.”

“…….”

“더는 불안하지 않게…… 네가 바라는 건 다 해줄게.”

어찌 보면 허황한 약속에도 그는 딴지를 걸지 않고 기분 좋게 웃었다. 내 입술

에 한 번 더 입을 맞추며 간지러운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기도 했다.

“항상 그러고 있어요.”

“…….”

“권이도 씨, 나는…….”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한마디는 내 마지막 불안을 녹여 내는 단 하나의 대답이었다. 네 덕에 나는 불안

하지 않다고. 이제는 정말 과거로부터 벗어났다고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제는 내

가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타이밍은 아닐까.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어.’

먼 길을 돌아 네가 잃어버린 나와의 추억. 그 기억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가

끔 그곳에 있을 너를 그리곤 했다. 그렇게 다다른 결말에서 네가 더 이상 아프지 않

길 바라며.

그 기억의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행복을 약속했다.

<그 기억의 끝에 외전1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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