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30화 (130/131)

외전1 24화. Pour Sejin(11)

나는 망설일 것 없이 고개를 숙여 배꼽 아래에 입을 맞췄다. 그가 아랫배를 집어넣

는 순간, 꼿꼿이 발기한 성기 역시 함께 움찔거렸다. 그게 또 놀라울 정도로 구미

를 당겨서, 앞니를 입술로 감싼 채 뿌리 부근을 머금었다.

“…….”

매끄러운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면서도 신음을 흘리진 않았는데, 얼핏 살펴

보니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혀를 내밀어 기둥을 길

게 핥자,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

왜 소리를 참을까.

유독 질색하는 체위는 있어도 웬만해선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사람이다. 처음에

만 살짝 꺼리지, 막상 시작하면 그다지 빼는 법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이 새빨

개진 채로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왜?”

“…….”

내가 묻는 말에 정세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재촉하듯 기둥에 입술을 문지르

자 남은 손으로도 얼굴을 가렸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아, 너무…….”

“…….”

“너무 하늘이 잘 보여서…….”

하늘? 그리 묻는 대신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봤다. 유리로 된 천장 너머로 구

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바깥이나 다름없는 그 풍경을 보는 순

간, 그가 왜 이런 반응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민망한데…….”

가슴을 건드릴 땐 아무렇지 않다가, 막상 바지까지 벗기고 보니 감상이 달라진 모양

이다. 사방이 풀과 꽃으로 가득한 온실, 그리고 유리 너머로 펼쳐진 정원. 푸르른 녹

음 속에 숨기엔 사위가 너무 탁 트인 공간이었으니까.

“……그럼 엎드릴래?”

마땅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냥 눈 가리고 아웅 수준에 불과한 임기응변이었

지. 정세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손가락 틈새로 황당하단 시선을 보내왔다.

“싫으면 이대로 하고.”

“……아뇨.”

그는 다급히 손을 내려 내 어깨를 살짝 밀어 냈다. 내가 그의 성기를 입에 넣으려

던 찰나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자, 또 한 번 질색하는 시선이 쏟아졌다. 아래

를 이렇게 예쁘게 세우고도 바깥이라는 사실 탓에 이성의 끈을 단단히 붙잡은 모양이

다.

말은 엎드리라고 했지만, 막상 그를 돌려세우고 보니 테이블에 기대어 선 상태가 되

고 말았다.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성기를 움켜쥐자 그가 어깨를 웅크린 채 파르르 떨

었다. 아까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이상하리만치 괴롭히고 있는 기분이었

다.

“이러면 억지로 하는 것 같은데…….”

“……흣.”

향긋한 목덜미를 깨물고 다른 손은 상의 손으로 밀어 넣었다. 갈비뼈를 덧그리고 차

근차근 올라가 아까 잔뜩 희롱하던 유두를 살짝 꼬집었다. 성기를 붙잡은 손은 선단

과 기둥을 어루만지며 그 보드라운 촉감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만, 흣…… 그만 만지고…….”

프리컴을 질질 흘릴 때부터 알았지만, 그는 얼마 만지지 않았음에도 금세 흥분했

다. 하반신을 내게 바짝 밀착한 채 본능적으로 비비적거리는 행동을 보고 알 수 있었

다. 나 또한 그를 벗기는 순간부터 흥분했던 참이기에, 성기를 꺼내 말랑한 엉덩이 사

이에 꾹꾹 문질러 댔다.

“……흐.”

전체적으로 마른 몸이지만, 근래에 살이 붙은 터라 유독 이 부위가 더 부드럽게 느

껴졌다. 아직 넣지 않았는데도, 이대로 문지르는 것만으로 사정할 수 있을 정도로. 물

론 그러기엔 너무 아쉬우니, 조금 더 진득한 행위를 즐길 예정이었지만.

“하아…….”

엉덩이골에서부터 찬찬히 내려온 곳엔 잔뜩 젖은 구멍이 느껴졌다. 밤새 내 것을 머

금고 있던 부위가 벌써부터 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분명 인내심

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입구에 귀두를 맞추자마자 열기가 훅 밀려들었다.

“……세진아.”

나는 사근사근 그의 이름을 속삭이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가 끙끙 앓는 소리

를 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왜, 흐…….”

신음도 대답도 아닌 목소리조차 내게는 불을 지피는 신호탄과 크게 다르지 않았

다. 그래서일까, 순간 이성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를 안은 팔에 힘이 들

어가고, 어디선가 뚝 끊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 잠까, 아흑……!”

푹, 나도 모르게 덜 열린 구멍에 성기를 욱여넣었다. 제대로 풀지 않은 터라 넣는 나

조차도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 상체를 세웠지만, 앞에 테이블

이 있는 탓에 도망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흐으…….”

다행히 아래는 흥건히 젖어 있었고, 귀두가 통과하자마자 미끄러지듯 깊숙이 성기

를 삽입할 수 있었다. 안에서부터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에 아랫배에서부터 미미한 쾌

감이 피어올랐다.

“읏…….”

좁은 내벽이 주는 쾌감은 수없이 많은 행위를 반복해도 늘 새롭기만 했다. 뜨겁

고, 축축하고, 이따금 움칠거릴 때면 그 희열을 참지 못하고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였

다. 얕은 숨을 토해 내며 그를 끌어안자, 그가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테이블에 상체

를 엎드렸다.

“그렇게, 흐…… 갑자기…….”

“……미안, 가만히 있을게.”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그의 귓가에 두어 번 입을 맞췄다. 쪽, 쪽, 입술을 움직여 가

며 맥이 뛰는 목덜미까지 위치를 옮기기도 했다. 그를 달래기 위해 페로몬을 쏟아붓

자, 그 또한 꿀에 절인 꽃처럼 달큼한 향기를 한가득 내보냈다.

“……하아.”

그냥 넣고만 있는데, 뱃속 가득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문지르

고, 손바닥으로 마른 상체를 하나하나 매만졌다. 왼손으로 움켜쥔 성기는 이미 한차

례 사정한 듯 잔뜩 젖은 상태였다.

“누가 누구보고 변태라는 건지…….”

“……흐으.”

항상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살짝 아픈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거칠게 하거

나 버거우다 싶을 만큼 깊이 삽입하면 하릴없이 신음을 터뜨리곤 했으니까. 이렇

게 말없이 갑자기 삽입하는 순간에도 정신없이 먼저 절정에 다다르는 경우가 꽤 잦았

다.

“아픈 게 좋아?”

“아니…… 흣, 누굴 변태로 알고…….”

그가 억울한 목소리로 항의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톡 튀어나온 유두를 손톱

으로 긁는 순간 허리를 튕기며 아래를 바짝 조이는 게 중요했지. 눈앞이 새하얘질 만

큼 강한 자극에 한 번 더 손톱으로 유두 끄트머리를 긁어냈다.

“……!”

그는 이번에도 흠칫 놀라 아랫배를 납작하게 집어넣었다. 뜨거운 내벽이 오물거리

며 안쪽에서부터 바짝 성기를 조여 왔다. 여전히 좁고 버거운 건 매한가지였으나, 아

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내가 했던 말 기억나?”

“…….”

그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눈가에 아롱아롱 맺힌 눈물은 비

단 통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관자놀이 부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이번엔 양손으

로 가슴을 꽈악 움켜쥐었다.

“잘하면…… 여기로만 갈 수도 있겠다고.”

“……그게 무, 흐, 으응!”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우고 조금 아프다시피 꼬집었다. 엄지와 검지로 비비적거

리며 손에서 굴리자, 그가 일순 자세를 무너뜨렸다. 아마 다리가 풀린 모양인데, 내

가 뒤에서 안고 있는 터라 바닥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아, 아흐…… 흐응, 으…….”

내가 손을 지분거릴 때마다 내벽이 경련하듯 성기에 밀착했다. 입구를 꽉 조였다

가 오므리는가 하면, 안쪽에서부터 밀어 냈다가 빨아들이기도 했다. 나는 움직이

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가 움찔거리며 가만히 있지 못한 탓이었다.

“그만, 흐, 아…… 싫, 싫어…….”

“……안 싫은 것 같은데.”

“이상한, 흡…….”

엎드리지 말라고 할 걸 그랬지. 손으로 만져도 이러는데, 한번 깨물거나 빨아 봤어

야 하건만. 그가 미치겠다는 듯이 뒤척거릴 때마다 빠듯하던 안쪽이 하릴없이 벌어졌

다. 내게 꼭 맞춘 것처럼 열린 몸이 외설스럽기 짝이 없었다.

“권이도, 제발, 권이도 씨…….”

“네, 정세진 씨.”

“……흐으.”

허리를 움직이진 않았다. 그가 안달을 내며 조르는 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당

장이라도 거칠게 처박고 싶었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부어오른 가슴을 꾹꾹 누르기

만 했다.

“미치겠……는데……. 흐…….”

“응…… 괜찮아.”

“안 괜찮, 흐, 으응…….”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가 손을 아래로 가져갔다. 움직임이 여의치 않으니, 아쉬

운 대로 제 성기를 붙잡고 흔들어 보려는 심사인 것 같았다. 그 또한 좋은 볼거리였으

나, 이대로 놔주기엔 어딘가 영 아쉬웠다.

“하아, 흐…… 왜…….”

나는 삽입했던 성기를 빼내고 그를 번쩍 들어 올려 아까처럼 테이블 위에 눕혔

다. 얌전히 몸을 늘어뜨린 정세진이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는 파

란 하늘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이성이 날아간 게 분명했다.

“빨리…… 흣, 얼른 다시…….”

“조르지 말래도.”

무릎에 걸쳐진 옷가지가 거슬려서 바지와 속옷을 완전히 벗겨 의자에 대충 던져 놓

았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자 그가 나를 끌어당기며 앓는 소리를 낸다. 미치겠

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므로. 곧장 좁은 구멍에 성기를 푹 밀어 넣었다.

“하으응……!”

“후…….”

다 풀린 입구는 아까와는 달리 기다렸다는 듯 뿌리 끝까지 부드럽게 나를 받아들였

다. 내벽을 긁으며 삽입을 마치자, 그가 내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 허벅지를 조였

다. 그러면서 테이블 상판을 손톱으로 긁기에, 양 손목을 한 손에 붙잡아 그의 머

리 위에 단단히 고정했다.

“잠, 잠깐, 아, 흐으, 흐……!”

그대로, 조금 전까지 양껏 희롱하던 가슴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아까보다 더 단

단해진 돌기는 깊이 빨아들일 때마다 단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가 폈다 하며 몸을 뒤척였지만, 역시나 내게는 어린아이가 저항하는 것과 다를 바 없

는 힘이었다.

“제발…… 흐윽.”

“여기로만, 하아…… 가봐, 세진아.”

입술을 떼어 내지 않고 사근사근 이야기했다. 그 숨결조차 자극이 되었는지, 그

가 움찔거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작게 욕지거리를 읊조리는 것도 같았는데, 타

액으로 질척거리는 소리 탓에 묻히고 말았다.

“……아, 흐으!”

그는 내가 왼쪽 가슴을 세게 빨아들이는 순간 파정했다. 동시에 아래를 확 조이

는 바람에 나 또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쾌감 속에 절정에 다다르고 말았다. 혀를 내

민 채로 고개를 들자, 유두 끄트머리에서부터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하아, 하아…….”

“…….”

아…… 씨발.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는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성이 뚝 끊어졌

다. 방금 절정에 다다랐다는 사실도, 아직 사정 중이라는 사실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

았다. 환락에 취한 채 흐트러진 얼굴과 흐드러지게 피어난 그의 페로몬만이 중요했

다.

“……아흐으!”

퍽! 거칠게 그의 배 속을 쳐올렸다. 붙잡았던 손목을 놓아주고 내게 매달리는 그

를 한 품에 덥석 끌어안았다. 지금까지 참아 온 설욕을 하듯 다짜고짜 속도를 높여 허

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 아흐, 흣! 으응……!”

“……하.”

그를 안으면 안을수록 늘 안달이 나는 기분이었다. 이 행복이 언제 깨질지 모른다

는 불안에, 그를 내 품에 가둔 지금조차 조금 더 구속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지

금 느껴지는 이 페로몬이, 뜨겁게 달아오른 온기가, 이 순간 그대로 박제된다면 좋

을 듯했다.

“흐, 권이도…… 흣…….”

“……아깐 여보라며, 응?”

그러나 그를 사랑해서 느끼는 충동들을,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걸 이

제는 알고 있다. 내 품에 있는 정세진을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그 불안마저 인내해

야 할 테니 말이다.

“거기…… 하, 좋아…….”

달큼하게 속삭이는 음성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안겨 줬다. 하릴없이 흘러

나오는 신음엔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지금은, 딱 그 정도로 충분했다.

***

그를 집요하게 괴롭힌 대가는 그날 저녁까지 치러야 했다. 정세진이 걷지 못해서

가 아니라, 잔뜩 예민해진 가슴 탓에 자꾸만 흠칫흠칫 미간을 좁혔기 때문이다. 티셔

츠가 스치면 따끔거리는지, 엉거주춤 어깨를 웅크린 채 손으로 앞섶을 늘어뜨리기

도 했다.

임시방편으로 밴드를 붙여 주려고 했지만, 그는 더 민망해진 얼굴로 내 손에서 밴드

를 가져갈 뿐이었다. 직접 붙여 주겠다는 말에는 온실에서 그랬듯 질색하는 눈초리

로 나를 바라봤다. 예전엔 불만이 있어도 말을 못 하더니, 이제는 표정만으로도 생각

하는 바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 거기서 차를 어떻게 마셔요.’

그가 스치듯 흘린 말은, 그날 밤 우리가 조명이 들어온 온실에서 벚꽃 차를 마시

는 계기가 됐다. 착잡한 눈으로 테이블을 응시하던 정세진은 막상 의자에 앉은 다음

엔 익숙하게 찻잔을 들고 맛과 향을 음미했다. 꽃 차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

만, 차를 마시는 정세진에겐 지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정세진은 그리 운을 뗀 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검지로 찻잔 손잡이

를 어루만지며 잠시 눈을 내리깔았을 뿐이다. 아무래도 심란해하는 것 같아서 무

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긴장할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

‘……우리 데이트할래요?’

‘데이트?’

‘그냥…… 평범하게.’

평범이라니. 그에게, 그리고 내게.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 또한 그렇

게 생각했는지 조금 멋쩍은 얼굴로 눈을 접어 웃었다.

‘벚꽃은 다 졌겠지만, 날씨는 좋아졌으니까.’

곧은 손가락이 찻물이 담긴 찻잔을 톡톡 두드렸다. 투명한 찻잔 속에는 하늘하늘

한 벚꽃잎이 물에 잠겨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는 그 꽃잎만큼이나 부드러운 어

조로 나긋나긋 은근하게 속삭였다.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권이도 씨는 몸만 오면 되는데…….’

‘…….’

‘어때요, 여보.’

당연히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거절할 생각조차 없었다. 정세진

이 그런 목소리로 제안하면 지옥 불구덩이에 뛰어들자는 말일지라도 고개를 끄덕이

고 말았을 테니.

다만 궁금한 건, 우리가 매일 갖던 만남과 그가 제안한 데이트가 어떻게 다른지 정

도.

“오전에 있는 내부 회의가 끝나면…….”

그렇게 월요일. 그와 약속한 데이트 날이 되었다. 그는 어젯밤 집으로 돌아갔고, 퇴

근길에 데리러 오겠다며 제대로 된 에스코트를 약속했다. 나는 그 없는 침대에서 한

참을 뒤척이다가, 아침이 밝자마자 그가 선물한 향수를 뿌리고 출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출시한 제품에 대한 반응입니다.”

간단한 일정 브리핑이 끝나고, 박 비서는 간단히 정리된 자료 몇 개를 건넸다. 대

충 그래프를 눈으로 훑자, 사무적인 목소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다행히 아직 확인되는 오류는 없습니다.”

과거 해신이 훔쳐 갔던 시스템은 몇 가지 하자를 보완해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고

작 애플리케이션 따위가 아니라 선호전자에서 선보이는 수많은 제품으로 말이다. 진

작 빈틈없이 검수했으니 웬만해선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근데 전무님, 그런 오류가 있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프로그램 쪽은 내 전문이 아니었지만 문제를 바로잡는 덴 내 공이 컸다. 엄밀히 따

지면 정 회장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일찍 보완하

진 못했겠지.

“뭐…… 운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남들이 보기엔 그냥 운 정도.

“그럼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몇 가지 사안을 더 전달한 뒤, 박 비서는 꾸벅 인사를 건네고 이사실을 빠져나갔

다. 잠시 후에 있을 회의만 끝나면 오전 중엔 예정된 일정이 없었다. 그마저도 형식적

인 것이었기에 드물게 한가한 월요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하던 핸드폰이 울린 건, 내가 회의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이었다. 익숙

한 번호를 보는 순간 나는 이사실을 빠져나가는 대신 곧장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

에선 조금 다급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무님, 접니다. 다름이 아니라…….

기다리던 연락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다지 달가운 내용은 아니었다. 말을 전하

는 상대조차 면목 없다는 듯 기죽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차오르는 탄식은 목구

멍 너머로 밀어 냈지만, 아깝단 생각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죽이지 말라니까.”

권이정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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