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22화. Pour Sejin(9)
마음을 다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를 눈앞에 둔 몇 달간, 나는 이보다 더 구차해
질 수 없을 만큼 많은 미련에 빠져 살았다. 끝내 접지 못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지체
했으니 최후의 순간에 발밑을 기는 것쯤은 별거 아니게 느껴졌다.
그를 서재에서 내보내고, 밤새 그에게 할 말을 정리했다. ‘Sejin’의 론칭을 진심으
로 축하하고, 제대로 그에게 고백하기 위해서. 무릎이라도 꿇고 잘못을 빌다 보면 일
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길지 모르니까.
반지는 일찌감치 한쪽에 빼두었다. 일할 땐 늘 빼고 있던 탓에 손가락엔 그 어떤 자
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정세진의 손가락도 깨끗해졌지. 과거의 흔적
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평소보다 훨씬 차림새도 신경 썼다. 알게 모르
게 내 얼굴을 좋아하는 그가, 이렇게라도 내게 혹한다면 좋을 듯했다. 이런 내 노력
이 통한 건지, 그는 나를 찬찬히 살펴보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얘기했다.
‘오늘 되게…… 신경 쓰셨네요.’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중요한 날’이라는 말을 듣고 멋쩍게 눈을 내리깔았
다.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우선은 식사부터 할 생각인 듯했다.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와의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분위기도 근사했고, 대화는 즐거웠
으며, 그 또한 내내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Sejin’이 가진 계획, 그리고 앞으로의 성
장 가능성. 그런 것들을 브리핑하는 얼굴은 능력 있는 대표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기획팀이…….’
뒤늦게 아쉬웠다. 론칭 행사에서 그의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찬
란하게 빛나는 그 순간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야 하건만.
‘괜히 욕심이 나서.’
마음 같아선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않고 내가 가지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
는 그가 아무 데도 갈 수 없도록 곁에 묶어 두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불면증
은 약으로 해결되지 않으니, 유일한 해결책인 나를 그가 갈망하길 바랐다.
‘무슨 꿈을 꾸는 겁니까?’
‘……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건넨, 소소한 잡담 정도. 으레 꿈으
로 꾸는 내용들은 현실성이라곤 전혀 없는 터무니없는 일들이곤 하니까. 그에게 돌아
올 대답 역시 별달리 영양가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한테 강간당하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누군가 찬물을 끼
얹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고…… 가끔 이유 없이 꾸더군요.’
왜 망각하고 있었을까. 그가 시집을 보고 울었던 그 순간을. 벼랑 끝에 내몰린 초조
함과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까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엔 많은 차이가 있다. 그에게 과거를 고백
할 상상을 수도 없이 했으면서, 정작 모든 걸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발밑이 무
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게 뒤덮
여 버리고 말았다.
‘권이도 씨뿐입니다. 처음부터 다.’
주치의가 그랬다. 그의 히트 사이클이 불규칙해진 건 내게서 영향을 받은 거라
고.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면역력이 없어서, 가까이 있는 상대를 따라 주기가 앞당겨
진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가……. 어젯밤엔 그 상대가 권이도 씨로 나오더군요.’
네 모든 문제가 나로 인해 시작됐다. 불면증의 해결책이 나인 줄 알았는데, 사실
은 그 원인이 나였을 뿐이었나 보다. 내가 남긴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서, 시간을 돌아
온 지금에도 안 좋은 영향만 미치고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거나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
다. 총을 맞았던 그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누군가 심장을 꽉 붙들고 터뜨릴 것처
럼 옥죄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고, 발끝에서부터 바닥으로 가라앉
는 듯했다.
‘……권이도 씨?’
내 오만함이 또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감히 그의 곁에 머물겠다고 생각하다
니. 그 입에서 나오는 이름조차 자괴감이 되었다.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울 게 아니
라, 나라는 사람을 완전히 지우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임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해야 할 말들이 끝도 없이 떠오르고, 아무렇지 않
은 척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
느 정도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한다. 결혼이 아닌 약혼을 한 이유도, 우리의 약혼 사실
을 알리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였으니까.
‘무의미한 약혼은 이제 끝내야겠죠.’
이 근사한 식사는 네가 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자리였다. 내 최초의 다짐
이, 마침내 실현되어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과정은 조금 틀어졌을지 몰라도, 그 결
과까지 틀어지면 안 될 노릇이니까.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 나가도 좋아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나는 마지막까지 그를 마주 보지 못했다. 우리의 약혼
이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을 거라고, 네 발목을 잡지 않을 거라고 변명하듯 덧붙였
을 뿐이다. 그가 주먹을 움켜쥐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조차 알은체를 할 수가 없었
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하나 이게 내 최선이었고, 더는 타협할 수 없
는 마지막 양심이었다. 멈출 수 있을 때 끝내는 편이, 포기하는 편이 그에게도 훨
씬 이로울 테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올라간 그를 두고, 내가 향한 곳은 늘 머물던 서재였
다. 불조차 켜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책상에 걸터앉아 멍하니 서랍만 응시했다. 총알
을 버리지 말 걸 그랬다고, 그 생각을 한 번 더 하면서. 이딴 선택밖에 하지 못하는 멍
청함을 계속해서 원망했다.
서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해결하지 못할 상황에 대한 무력감 비슷한 것. 내
가 그에게 억지로 각인했을 때, 그가 느끼던 절망 혹은 좌절.
조금만 지나면 그는 모든 짐을 챙겨 내 집을 떠날 터였다. 내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
으니,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할지도 모르지. 내가 처음부터 준비하던 이상
적인 이별이 이렇게까지 아플 줄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오늘 저를 도와주셨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엔 저도 권이도 씨 편을 들어 드릴
게요.’
그 꿈같은 약속을 들이밀며 붙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직 약속된 선물을 받
지 못했다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어젯밤엔 그 상대가 권이도 씨로 나오더군요.’
그러나 내가 남긴 상처는 그에게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깊은 흉터를 남겼다. 언
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언젠가 수면 위로 떠올라 이 관계를 망가뜨리
고 말 것이다. 사실을 고하지도 못하는 한심한 처지에선, 멍청하게 그 자리에 머무
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끼익, 서재 문이 열리는 순간엔 아주 잠시 환청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나치
게 그를 갈망해서 이제 하다 하다 헛것을 보는 것뿐이라고. 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
와 배신감 역시, 그저 내 착각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짐을 챙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봤고, 내가 입을 열자마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인사라
도 하러 왔냐는 질문엔 문을 닫은 뒤 한 발짝 내게 다가왔다.
‘……아뇨.’
‘…….’
‘도저히 납득이 안 돼서요.’
사위가 지나치게 어두웠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
로. 문틈으로 스며들던 빛조차 사라진 순간, 그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착각
이 들었다.
‘왜 이 약혼을 끝내겠다는 겁니까?’
이대로 어둠 속에 파묻혀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드물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
는 그를 보며, 속에 있는 모든 걸 끄집어내 보여 주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금방이라
도 깨져 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내 숨통을 바짝 옥죄고 있었다.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우습게도, 그 한마디는 열 가지 고백보다 달큼하게 들렸다. 내 귓가에 사근사근 속
삭이는 것처럼, 가라앉았던 기대감이 잔뜩 부풀기 시작했다.
‘당신을 선택해 달라고 애걸하고 싶다면서요.’
‘…….’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애걸을 해야지.’
나도 그러고 싶어, 세진아.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서, 바닥에 납작 엎
드려 애걸할 수 있다면 좋겠어.
‘나는 당신 때문에 내지도 않던 욕심을 냈어.’
낱낱이 고해진 진심이 마치 울음처럼 들렸다. 서러움과 분노, 미련으로 범벅된 감
정은 그의 심장 박동과 함께 온전히 전해졌다. 너를 버리는 게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
었지만, 그는 그마저도 듣지 않고 내게 따져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권이도 씨.’
양주를 두 병쯤 마셨다면 솔직히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그가 나를 위해 눈
감았던 사실을 이따위로 듣지 않아도 되었겠지.
‘왜.’
‘…….’
‘내가 당신 눈앞에서 죽을까 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되는 말들이 날카롭게 벼려져 연
달아 튀어나왔다.
‘아니면, 당신이 그런 나를 따라 죽을까 봐?’
내 두려움은 네 부재에서 왔기에 내가 너를 따라 죽는 건 단 한 번도 무섭지 않았
다. 오히려 그 안식이 달갑기까지 했으니, 지금 느끼는 공포 역시 그러한 이유는 아니
었다. 그냥 딱 하나, 네가 모든 걸 알아 버릴까 봐 겁이 나서 그랬지.
‘내가 뭘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는 백치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한 채 안일한 태도를 보였다. 내가 그
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안다는 것에, 그 또한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상할 것이
다. 여태껏 묵인하고 있던 부분들을, 이제는 모르는 척해 줄 생각이 없다고 내게 경고
하고 있었다.
‘이걸 설마, 다 우연이라고 부를 건 아니죠?’
내 손으로 만들어 낸 우연이었고, 결국 필연이 되지 못해 끊어 내야 할 운명이었
다. 미필적 고의나 다름없는 행동들로, 속죄라는 이름하에 그를 속인 결과가 이렇
게 돌아왔다.
‘……날 좋아하긴 합니까?’
그가 내뱉은 욕설보다, 그 의심 하나가 더 아팠다. 내 모든 삶이 너에게 맞춰
진 지 오래인데, 이제는 그조차 부정당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의미 있는 존재긴 해요?’
모든 부분을 의심당해도, 마음만은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이게 내 욕심이라 할지라
도, 네가 딱 하나 내 진심만은 알아주길 바랐다. 내 모든 행동이 악의는 아니었노
라. 그 모든 실수가 너를 망가뜨리려던 의도가 아니었다는 걸 말이다.
‘나한테 한 번이라도 솔직해진 적이 있어요?’
‘…….’
‘내가 바라는 걸 다 해준다면서, 내가 진짜 뭘 바라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고?’
‘…….’
‘나를 위한 행동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다 당신을 위한 일이잖아.’
‘…….’
‘다 자기만족이라고, 지금.’
그는 여태껏 보여 준 적 없는 모진 말투로 나를 몰아붙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정
곡이었고,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사실이었다. 그를 위한 것이라고 자위하던 행동들
이, 사실은 그가 요구한 적 없는 단순한 내 욕망에 불과했으니까.
‘내가 멍청했죠.’
‘…….’
‘우리가 고작 이런 관계였는지도 모르고.’
고작이라고 했다. 내가 쌓아 온, 우리가 쌓아 온 그 시간들을. 너무 귀하고 소중해
서 맘대로 건드리지도 못했던 그 순간들을.
‘……너는.’
화가 났던가, 아니면 억울했던가. 그가 느끼는 감정이 선명히 전해져서, 나조차 이
성이 흐려진 것 같기도 했다.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지.’
나는 매 순간순간이 지옥 같았다.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질까 봐, 하루도 맘 편
히 잠든 날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걸 기억하는 바람에, 우리의 마지막
이 어떻게 될지 항상 또렷이 그려야 했단 말이다.
‘……그럼 앞으로는 불안할 일 없으시겠네요.’
그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을 흘리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어둠에 익숙해
진 두 눈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똑똑히 보였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
는 보란 듯이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젠 내가 있는 날이 없을 텐데.’
아, 내가 마지막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내 손으로 선택했으니 괜찮을 거라
고, 버림받은 게 아니니 견뎌 낼 수 있다고. 바보처럼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죽을 일도 없겠지.’
그 말은 퍽 미묘하게 들렸다. 내 눈앞이 아닌 다른 곳에선 죽을 수도 있다는 듯
이. 마치, 일부러 내게 상처를 입히려는 것처럼.
엷은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본 정세진은, 그 언젠가처럼 익숙한 작별 인사까지 내
뱉었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
‘잘 지내봐요, 한번.’
나를 보고 웃던 정세진이 떠올랐다.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던 그 시선. 귀를 찢을 것
처럼 거센 발포음. 울컥 터져 나오던 새빨간 액체와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 박동, 품
에 안고 있어도 서서히 차가워지던 체온이, 그 숨결이 멈추는 순간 느꼈던 깊은 절망
까지도.
‘세진아.’
내가 놓아줄 때 갔어야지.
왜 내 손으로 또 널 망가뜨리게 해.
‘놓아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라고 했잖아.’
겁 없이 덤벼든 정세진은 마침내 나를 완전히 손에 쥔 다음에야 안도하는 듯했
다. 도망치지 않고 품에 안기는 너를, 내 손으로 뿌리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무리
였다. 아득히 멀어지는 이성 속에서, 거칠게 굴지 않는 것만이 내 마지막 인내였다.
그날, 우리는 두 번째 각인을 맺었다. 힘으로 내리누르지 않은, 온전히 너
와 나 두 사람이 맺은 각인이었다. 네가 잃어버린 기억, 그 기억의 끝에 무엇이 남을
지도 모른 채.
너를 위한 약혼은 딱 거기까지였다.
***
미래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바뀌지만, 또 웬만해선 바뀌지 않기도 한다. 경호 팀장
이 다시 그 여자를 만나게 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다시 각인하게 된 것처럼. 수없
이 많은 분기점을 지나며, 그렇게 다다른 결말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다.
그와 헤어진 3개월간 얼마나 괴로웠는지, 나는 거기까진 말해 주지 않았다. 내가 그
를 포기하는 동안 느낀 감정을, 그 또한 생생히 느끼고 있었을 테니까. 기형적인 각인
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이 맺은 각인으로. 그 모든 부분이 정세진에게 전해졌을 터였
다.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는 내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잠들지 않다가, 마지막에 그렇게 중얼거렸
다. 적당히 필요 없는 부분을 생략했음에도 입을 다물었을 땐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가 있었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받는 와중에 그의 입에선 또 한 번 가벼운 감상이 흘러
나왔다.
‘바보 같네요. 우리 둘 다.’
그러게, 정말 바보 같았지. 비록 또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같은 선택
을 반복하겠지만.
‘그래서 나랑 헤어지고 죽으려고 했어요?’
그 말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앞에서 참지 못하고 울었던 날, 내 입으로 모
든 걸 고백했으니. 그 사실을 알기에, 그 또한 픽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을 터다.
‘가끔 보면 무모하다니까…….’
모든 발판을 마련해 줬더니 내가 헤어 나갈 발판이 없더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늪
으로 빠져드는 중이었는데 주변엔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었다. 다시 네가 날 무서워
할까 봐, 패닉에 빠진 너를 볼 자신이 없어 눈앞에 나타나지조차 못했다.
어딘가 고장이 나도 단단히 고장 난 게 분명했다. 제대로 망가져서 다시는 고
칠 수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매일 밤 네가 쓰던 향수 속에서 잠을 청하
며, 내일은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기도 했다.
그래서 적당한 타이밍에 너를 떠나고 죽을 생각이었다. 내가 너를 포기할 땐 그 안
에 내 삶도 함께 포함돼 있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죽고 나면, 또 한 번 시간을 돌이
켜 너에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