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21화. Pour Sejin(8)
‘기대하고 있을게요. 정세진 씨가 나한테 줄 선물.’
그가 줄 선물을 끝으로 우리는 헤어질 테니, 결국엔 작별 선물을 기다리는 꼴이 아
닌가. 그가 자격증을 따는 그 날이, 우리의 약혼 생활이 끝나는 날일 텐데.
그에게 모든 과거를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 그가 날 미친 사람처럼 볼 가능성은 둘
째치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뒤 내게 보일 반응이 무서웠으니까. 아마 나를 용서한다
고 말하면서도, 끝끝내 나를 받아 주지는 못하겠지.
자기만족이고 자기방어였다. 마지막을 그리는 주제에 그와의 하루를 만끽하고, 그
러면서도 버림받는 게 두려워 그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거를 알고도 나
를 사랑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 또한 욕심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병적으로 해신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조금의 흠도 없이 완벽하
게, 다시는 정세진을 건드릴 수 없도록. 무능한 대가리가 경영하는 기업은 어차피 머
지않아 스스로 무너질 테니.
주요 임원들은 미리 매수해 놨다. 정세진의 성격상 함께 일하던 동료들을 걱정할 테
니, 직원들은 아무런 정리 해고 없이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사명을 변경하고 인수
를 끝내면 오래도록 준비한 숙제 하나를 끝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또 협상을 끝내야만 하는 상대가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하죠.’
멍청한 정 회장과 달리 그의 아내는 퍽 똑똑한 편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그
리 묻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세진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말라고 이야
기하자, 눈을 내리깐 채로 차분히 대답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 아이에겐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왜 그런 머저리와 결혼했을까. 나는 그의 두 눈에 정 회장과 같은 탐욕
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정민재와 꼭 닮은 얼굴이 이토록 담담한 표정을 지
을 수 있다니. 약간의 수치심과 이유 모를 체념. 그러한 감정이 담긴 표정은 언뜻 정
세진과 비슷하기까지 했다.
뒤늦게 알았는데, 으레 이 사회가 그렇듯 그와 정 회장 역시 계약과도 같은 결혼
을 했다고 한다. 집안 좋고 머리 좋은 사람이, 몰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뭐, 사실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그들이 정세진과 그의 재산
에 손대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었으니. 이 모든 과정에서, 정세진은 아주 작은 것 하
나 잃어서는 안 됐다.
−오늘 아침 정철호 해신금융 회장이 구속됐습니다. 정 회장은 549억여 원에 달하
는…….
그렇게 대망의 날. 이른 아침부터 정 회장이 구속됐단 소식이 들렸다. 정세진
도 이 소식을 들었을 텐데, 오전 중에 퇴근할 거라던 내 예상과 달리 그는 모든 업무
를 마친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예의 그 덤덤한 얼굴엔 이 모든 게 내 짓이라는 확
신이 담겨 있었다.
‘권이도 씨가 그런 겁니까?’
이유를 설명하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만큼 많았다. 우선 그들이 오랜 시간 너
를 학대했고, 끝내 정 회장의 잘못을 뒤집어씌우기까지 했다고. 네 뺨을 때리는 건 물
론, 하자품이라는 모욕적인 언사까지 구사했다고.
‘저를 위해 그러셨다는 겁니까?’
그러나 이 모든 건 결국 나 혼자만의 핑계였다. 그가 건네는 질문은, 예리하게 이러
한 허점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였냐고 물으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
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망했어야 할 기업입니다.’
사실은 그래, 이 또한 내 자기만족이겠지. 정 회장이 자료를 훔쳐 오라고 시켜
서, 그 망할 시스템 하나가 우리 관계를 파탄 냈었으니까. 제각기 다른 사정이 모
여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그 방아쇠가 정 회장에 손에 들려 있다고 판단했다.
‘……하.’
각오하지 않았나. 정세진이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나를 원망하고 탓하
는 것쯤은 이미 한참 전부터 대비하고 있었건만.
‘세진아.’
그런데 혹시 몰라 기대했다. 이번엔 그 가족들 대신 나를 선택해 주지 않을까. 그들
에게 가진 미련보다 나를 향한 마음이 조금 더 크지는 않을까.
‘너만은 내 편을 들어 주기로 했잖아.’
그가 내 집을 나간 뒤에,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수없이 많은 마지막을 상상했
다.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내 곁에서 영영 떠나 버리는 상상. 너 같은 건 필요 없
다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울부짖는 상상.
그러나 그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 중, 가장 나쁜 가정이 들어맞고 말았다.
‘권이도 씨 말이 맞아요.’
상처를 받은 것이다.
‘이런 건 가족이 아니죠.’
내가 한 짓에, 또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 제 상황에.
‘근데…… 그냥 모르는 척하지 그러셨어요.’
이 소중한 사람이, 비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정도로.
‘보통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듣고 싶어 하진 않거든요.’
내 방법이 또 잘못됐다. 그 사실은, 빌어먹을 각인이 전해 주는 감정이 아니더라
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토록 괴로운 감정이 전해지지 않았더라도, 이미 죽고 싶
을 만큼 짙은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들고 있었단 말이다.
그날 이후, 정세진은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내리는 비를 막아 주지 못한 게 내 패착
이었고, 그건 꽤 오랜 시간 죄책감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그 감기는 몸이 아닌 마음
의 병이었기에, 고작 약을 먹는다고 해서 낫는 종류가 아니었다.
‘흐…….’
그는 매일, 매일 악몽을 꾸는 듯했다. 그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럴 때면 손발
이 차게 식을 만큼 괴로워한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뜨면 마치 어
린아이처럼 내 품으로 파고드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는데, 해결법을 알 수가 없었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일상은 한 발
짝만 어긋나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만큼 위태로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내가 그
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점 정도.
그러다, 퇴근이 늦어졌던 날. 밤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 몇 번이나 불러도 대
답 없는 그를 찾아 욕실까지 들어갔던 날.
‘…….’
물속에 잠긴 정세진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곱게 감긴 두 눈
도, 물결을 따라 일렁이는 머리칼도,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고요하고 이질적이었
다. 그 풍경에 넋을 놓는 순간,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죽었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너를 놓치고 말았다고. 내게서 벗어나기 위
해 또 한 번 그런 선택을 내린 게 분명하다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안온한 표정
은, 나를 떠나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다행히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숨을 참고 있다
는 걸, 입술을 여는 순간에야 깨달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는 와중에, 귓가에 들
려오는 말은 아까 들었던 작별 인사 따위가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오지 그래요.’
조금 집요하게 괴롭혔단 자각은 있었다. 그가 살아 있단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서 그
에게 페로몬을 쏟으며 모든 숨결을 받아 마셨다. 그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아서, 일부
러 뒤에서 힘껏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그는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그런 말을 내뱉었다. 새하얀 도화지, 혹
은 하얀 꽃이라고 해야 하나.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생김새는 종종 더럽히고 싶은 욕
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은데, 이유 모를 가학심이 스멀스멀 고
개를 들 정도였다.
‘우리 각인할래요?’
알고 있었다. 불안으로 점철된 마음일지언정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그
를 붙잡아놓고 내게서 떨어질 수 없도록 단단히 묶어 놔야 한다는 사실도.
‘이제 나한테 남은 건 권이도 씨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맞이한 결말이 어떤 파국으로 치달을지 모르지 않았다. 궁지
에 몰려 내리는 선택만큼 자기 자신을 좀먹고 관계를 망가뜨리는 행동도 없었으니
까.
만약 우리가 각인하면, 내 기억이 너에게 전해질 텐데. 이미 내게 묶여 버린 뒤
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네가 얼마나 망가질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각인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달큼한 가정에 취해 모든 일을 그르치
기엔 내가 저질렀던 실수가 너무도 커다랬으니까. 언젠가 네가 우리의 관계를 후회한
다면, 그건 내게도 견디지 못할 상처가 될 테니.
‘……내 방에서 안 잡니까?’
당연히 우리 관계는 극도로 서먹해졌다. 그는 대놓고 나를 피했고, 매일 밤 지독
한 불면증으로 잠을 설치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내 페로몬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수준
이었기에, 방을 비워 주겠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권이도 씨가 신경 쓰실 부분이 아닙니다.’
그 말은 퍽 날카롭게 들렸다. 어조는 나긋하고 부드러웠으나 내게 선을 긋는 게 분
명했다. 내게서 완전히 벗어나겠다고, 서서히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
단 말이다.
‘내가…….’
‘…….’
‘내가 사과하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해야 할 사과도 많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잘못도 많았
다. 내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침묵한 이유들이, 정세진에게는 불안으로 작용할 게 분
명했으니까.
‘뭘 사과하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가 화를 낸다는 사실조차 기뻤다.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날것
의 감정은 그가 지금껏 드러내지 못한 내면의 일부였으니. 우리 사이를 부정하는 말
에는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게 내가 항의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약혼한 그때부터 저한텐 아무 선택권도 없었습니다. 권이도 씨가 주
는 걸 다 받으래서 받고 있었더니, 이제는 저한테 관계를 정의하라고 하시는군요.’
사람의 성정은 쉽게 변하지 않아서, 너에게 속죄하는 지금조차 나는 이기적으로 굴
고 있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중요한 선택을 네게 미루면서, 사실은 못 이기
는 척 안주할 준비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심에 병원으로 와.’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새로운 기회가 또 한 번 생겼
다는 건, 같은 과정을 또 한 번 겪어야 한다는 뜻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널 보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내가 맞이해야 할 마지막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권병욱 회장의 빈소는 서울선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입니다. 장례는 가
족장으로…….
회장님은 내 조부님이었고, 조금 괴팍하지만 좋은 할아버지였다. 병상에 누운 지
는 몇 년이나 지났지만, 정정하던 시절이 아직까지도 또렷했다. 산소 호흡기를 떼
어 내는 그 순간엔 이미 한 번 밟아 온 과정임에도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존엄사라고 하죠.’
예정된 죽음이었다. 합의된 이별이고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순리였다. 같은 날짜, 같
은 시간, 정세진과의 관계를 빼면 상황까지 똑같았다.
‘지금은 잠깐 일이 있어서 집에 들른 거고.’
과거의 오늘, 권이정이 내 집에 찾아왔었다. 이번엔 반복되지 않을 과거였지만, 그
럼에도 정세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는 멀쩡히 퇴근했고, 다정하
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내가 바라던 말을 해주었다.
‘같이…….’
‘…….’
‘같이 가죠.’
잠을 자지 못한 탓일까. 장례식장에서의 기억은 대체로 흐릿했다. 그와 대화
할 땐 술까지 마셨으니 말을 하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던 것 같다. 주절주절 내 다짐
을 늘어놓을 때는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이 그가 아닌 내게 타격을 입혔다.
‘올바른 선택을 할 것.’
그를 놓아줘야 했다.
‘일을 그르치지 말고, 실수하지 않을 것.’
고작 내 욕심 따위로 또 한 번 그를 가둬 놓는 짓 따위를 할 수는 없으니.
‘감정적인 행동 대신 이성적인 판단으로 움직일 것.’
내 마음은 버리고.
‘최초의 계획에서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
이 상황에 안주하겠다는 생각도 함께 버려야만 했다.
‘근데 그거 압니까?’
그래도 세진아. 나는 가끔 생각해. 내가 곁을 내어 주면 네가 거기에 드러누웠으
면 좋겠다고. 모든 걸 알게 된 후에, 뭐든지 할 수 있게 된 네가, 마지막에 선택하
는 게 나였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는 내게 수면제와 김 실장을 요구했고, 그건 곧 나를 떠나겠다는 통보와 다름없었
다. 그가 타인에게 의지한단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주제넘게 질투 따위
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진아.’
정신이 없긴 없던 모양이지.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또 억제제
를 먹는 걸 까먹다니. 그날 일어난 모든 일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의 입에 처넣
고 싶단 충동만큼은 생생히 기억났다.
‘……아뇨.’
‘…….’
‘실수하신 거 없습니다.’
그게 하얀 거짓말임을,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가 기꺼
이 눈감아 준다면 나는 감사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의 손등에 입을 맞
출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바랄 게 없었다.
‘다음 주가 론칭이죠?’
그는 항상 바빴고, 나는 매일 그의 퇴근을 기다렸다. 늦은 시간까지 현관 앞에 서 있
다가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식사를 거르고 서재로 돌아가는 일도 이젠 익숙했
다. 정 회장이 구속되고, 권이정도 처리했으니, 내가 그를 위해 할 일은 더 이상 남
아 있지 않았다.
‘그 주 주말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래요?’
떠나보낼 준비가 끝난 것이다. 이 미련 넘치는 관계의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었다.
‘우리가 아직 외식은 안 해봤잖아요.’
그의 론칭을 축하하는 날. 그날이 이 관계의 마지막이 될 터였다. 과거에도 해보
지 못한 둘만의 외식이,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가 될 예정이었다. 나는 우리
의 약혼이 끝났음을 알리고, 이제는 마음껏 떠나가도 된다고 너그러운 척 선택지
를 줄 예정이었다.
‘기대할게요, 정세진 대표님.’
그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준비하고, 좋은 기사만 나가도록 기자들을 매수해 놨
다. 그가 내미는 첫 발돋움이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길 바랐다. 주말이 되면 우리
는 헤어질 테니, 오늘만큼은 좋은 모습을 보여 줘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단 말이다.
‘저는 대표 정세진입니다.’
그러나 행사가 진행되는 문 앞에서, 나는 차마 그 너머에 있는 정세진을 보지 못했
다.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
어야만 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처음부터 그를 위한 회사였다. 회사 로고조차 그의 사인을 본떠 만들었을 정도
로. 아마 평생 모르겠지만, 그가 가지지 않았다면 평생 그를 추억하는 용도로 사용됐
을 거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 주기 위한, 그의 완벽한 자립을 위한 수단.
‘……이걸 바라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러게, 그게 내가 바라던 일이었는데.
인간의 감정은 모순투성이라고 했던가. 그에게 모든 걸 쥐여 주고 나니, 이제
는 그 모든 걸 빼앗아 다시 내 곁에 묶어 두고 싶었다. 그의 성공을 누구보다 바랐건
만, 그 모습을 보고 나면 놔줄 수 없으리란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내 모자란 이기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어서, 밤
이 늦은 시간까지 퇴근을 미룰 정도로. 그렇게 퇴근한 뒤엔 옷조차 갈아입지 못하
고 곧장 서재에 처박혀 총을 만질 정도로.
‘…….’
이대로 죽어 버리면 어떠려나. 그럼 다시 시간을 거슬러 너를 처음 만나던 그때
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번에 실패한 부분들을 바로잡고, 온전히 너를 내 품에 가
둘 방법이 생기진 않을까.
총알을 버린 게 이토록 한스러울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드는 우울감
은 내가 그 무엇도 결단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죽는 순간에 느꼈던 해방감이 자
꾸 떠올라서, 모든 걸 내려놓고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만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
‘…….’
우습게도, 그럴 때면 꼭 정세진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
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그 다정한 목소리로 질문을 건넨
다.
‘여기서 뭐 하세요?’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눈을 깜박이는 정세진을 보는 순간, 흔들리던 마음이 한쪽
으로 기울었다.
‘발이 찬데.’
내게 허락된 기적은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의 맨발에 슬리퍼를 신겨 주
는, 딱 그 정도 권리. 살아 있는 정세진을 만나 봤으니, 더 욕심을 냈다간 그마저도 잃
고 말겠지.
그래도 혹시, 딱 한 번만 매달려 볼 수는 없을까. 나를 선택해 달라고 애걸하면, 보
잘것없는 동정심으로나마 내 곁에 남아 주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