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20화. Pour Sejin(7)
‘……비 맞는 거 좋아해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그가 내게 다가오는 순간, 이미 통
해 버린 신호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정세
진을, 차마 내 손으로 내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앞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모든 걸 묻어 버리고 그와의 약혼 생활을 즐기고 싶
어졌으니까. 그깟 자료쯤은 내 손으로 넘겨주고, 그걸 빌미 삼아 그의 마음을 얻
을 수 있다면 좋을 듯했으니. 비록 해신은 망가진 시스템을 갖겠지만, 그로 인한 피해
는 정세진에게 미치지 못할 터였다.
‘다른 게 아니고, 놓고 온 자료가 있어서 오후에 비서가 잠깐 들를 겁니다. 괜찮으
면 정세진 씨가 좀 챙겨서 전달해 줘요.’
부정하진 않겠다. 일부러 시스템을 놓고 왔고, 그의 눈앞에서 미끼처럼 흔들었
다. 내가 아는 정 회장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도둑질을 시켰으리란 확신이 있
었다. 진작 약혼을 대가로 약속했던 자료이니 조금 더 뻔뻔하게 요구할 거란 생각
도 했었다.
‘권, 이도…….’
그의 두 번째 히트 사이클이 오던 날, 나는 예정보다 빨리 돌아와 그의 곁을 지켰
다. 그가 내게 의지하지 않는단 사실에 기분이 상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와 관
계를 맺기도 했다.
‘내가 널…….’
내가 널, 어디까지 욕심내도 될까. 너를 망치고 무너뜨렸는데, 이러면 안 된다
는 걸 알면서도 욕심이 치솟곤 한다. 아차 하는 사이 손을 뻗는 바람에 이성의 끈을 다
잡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게 왜, 필요했습니까?’
예상대로 정 회장은 그에게 자료를 훔쳐 오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그가 좋아하
는 책 사이에서 서류를 발견했을 때, 조금이지만 실망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다
만 화를 내는 대신 원본을 건네줬고, 이게 진정 그가 원하는 선물이길 간절히 바랐
다.
다만 예상치 못한 건, 내 생각보다 정세진이 훨씬 더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 정도.
‘……별로 가지고 싶지가 않아서요.’
멍청하게도, 그는 내가 선물한 면죄부를 제 손으로 내쳐 버렸다. 가지고 싶지 않았
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누가 봐도 맞은 얼굴로 괜찮은 척 애써 웃어 보였
다. 어린아이처럼 내 품에서 울던 주제에 다시 거리를 넓혔을 땐 여태껏 보지 못한 개
운한 표정이었다.
‘권이도 씨가 그랬잖아요. 갖고 싶은 걸 골라 보라고.’
그가 나를 배신하지 못했다는 점에선 희열이 일었다. 내 손으로 과거를 바꿨단 사실
에, 내가 그에게 우선순위가 되었단 부분이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
가 나와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을 땐,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이라는 걸 알면
서도 기분이 풀릴 정도였다.
‘고막에 천공이 생겼네요. 심각한 건 아니고, 관리만 잘하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바닥에서 넘어졌다는 말까지 믿어 줄 생각은 없었다. 생각
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했지. 그가 원한다고 해신을 그의 곁에 남겨 두면 안 되는 거였
는데. 조금 미움받을 걸 각오하더라도, 진작 치워 버렸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
으련만.
‘당분간은 좀 늦을 겁니다.’
일이 세 배로 늘어났다. 원래 하던 업무를 진행하며 해신을 무너뜨릴 계획도 세워
야 했다. 빠른 시일 내에 정 회장을 처리하고 그를 위한 사업 역시 완벽히 마무리할 생
각이었다. 수면 시간이 극도로 줄어들었지만, 그 역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찌 보면 화풀이나 다름없었다. 정 회장에 대한 화풀이가 아니라, 평화로운 일상
에 취해 마냥 기다리고 있던 내 안일함에 대한 화풀이. 그가 자료를 손에 쥐고 괴로워
하는 동안, 나는 그가 뿌려 준 향수 냄새에 홀려 달큼한 기분 따위를 느끼고 있었으니
까.
‘권이도입니다. 부탁할 부분이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김 실장을 설득해 정 회장의 정보를 얻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세진이 뺨을 맞
은 모습을 보고, 그 또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그는 나를 완전
히 믿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정세진에게는 안전한 상대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차갑게 굳은 내 얼굴을 보고 무언가 느낀 건지도 모르지.
‘요새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
정세진은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른 채 나를 걱정했다. 어리광을 부린 게 민망하다
는 듯, 멋쩍게 시선을 피하기도 했다. 정작 철없이 군 건, 늦는단 한마디에 꽃까지 사
서 달려온 나일 텐데. 늘 생각하지만,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게 굴지 않나 싶다.
‘권이도 씨가 저와의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간 한강에서 그는 왜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느냐며 의아함을 내비쳤
다. 입을 맞추고, 몸을 섞고, 그럼에도 선을 긋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하고 싶
은 말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중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그냥 내 욕심이죠.’
알고 있었다. 이게 내 이기심이라는걸. 그에게 제대로 거리를 두지도 못한 채, 약혼
자라는 관계에 안주하고 싶은 충동을 차마 거스르지 못했다. 그가 내 결혼 상대라
고 낙인찍고 싶다가도, 혹여나 모든 걸 그르칠까 봐 망설이게 되는 경우가 지나치
게 많았다.
‘불확실한 무언가에 투자하고 싶지 않거든요.’
혹여나 그가 나를 기억한다면 지금의 평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였다. 만약 내
가 한 짓을 알게 된다면, 그 체념 어린 얼굴로 다시 작별 인사를 고할지도 모르는 노릇
이었다.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금조차, 그가 내 잘못을 알지 못
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매 순간이 불안했다. 내게 기적이 일어나 두 번째 기회가 생겼으니, 실낱같
은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내겐 자격이 없다고 핑계를 대
고 있지만, 사실은 그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렵단 이유로 모든 걸 보여 주지 않는 것뿐
이었다.
‘해신 주가가 크게 떨어졌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딴생각이 들어서, 창립 기념식을 준비하면서도 해신을 무너뜨
릴 밑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주변에 압박을 넣어 자금줄을 끊거나, 윗선을 매수해 비
리를 터뜨리기 위한 준비를 마친 것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정 회장이 나를 찾아왔
지만, 내가 해줄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처신을 잘해야 할 텐데요. 이만큼 봐주는 것도 내 집에 있는 사람이 걱정할까 봐 그
런 거니까. 설마하니 회사 여건 좀 안 좋다고 전 본부장한테 연락하는 멍청한 짓
은 안 하시겠죠.’
아마 정세진은 본인의 퇴사 이후 해신의 재정 상태가 어떤지 잘 모르고 있을 터였
다.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어떤 식으로건 제 나름대로 걱정을 내비치겠
지. 어차피 무너질 해신이었으니, 쓸데없이 감정 낭비를 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하는 거 없는 정 회장이 딱 하나 잘하는 게 입조심이었
다. 정세진은 해신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듯했고, 그렇게 창립 기념식 날이 되었
다. 내 배우자로 참석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별다른 일이 있지 않는 한 나와
는 말을 섞을 일도 없을 터였다.
‘내빈 여러분들께서는…….’
역시나, 기념식은 재미없고 지루하게 진행됐다. 유일하게 재미있던 순간은 정세진
과 눈이 마주쳤던 그때 정도. 멍하니 있는 모습이 우스워 입꼬리를 올리자, 민망함으
로 물든 얼굴이 참으로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하게?’
잠시 쉬는 타이밍에, 누나가 내게 물은 말이었다. 장난 섞인 질문이었으나 그 속내
가 진심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누나는 말없이 있는 내게 가벼운 조
언까지 덧붙였다.
‘할 거면 얼른 해.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거야. 내 눈에 괜찮으면 다른 사람 눈에도 괜
찮아 보이거든.’
맞는 말이었다. 그는 더 이상 본부장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인사
를 나누고 싶어 했다. 그중 대부분은 사심 섞인 접촉이었고, 일부러 팔과 어깨를 만지
작거리는 경우 역시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알겠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약혼의 목적은 결혼이 아니
고, 나는 그에게 애정을 요구할 만큼 떳떳한 처지가 아니었으니. 그래서 적당히 화제
를 돌리려는 순간, 웬만해선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경호 팀장이었다.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
청했다.
−권이정 대표님이…….
미래를 알고 있다고 너무 자만한 탓이었을까. 모든 게 내 뜻대로 흘러간다고 한 치
의 의심도 없이 믿어 버린 탓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우선순위를 잘못 매긴 내 멍청함
이 문제였을까.
‘그래, 씨발. 처음부터 이랬으면…….’
정신없이 찾은 화장실에서 정세진은 그 지저분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뒤늦
게 전해지는 감정은 언젠가 나를 볼 때면 느끼던 공포감과 비슷했다. 패닉에 빠져 저
항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눈앞이 캄캄하게 물든 것까지는 기억난다.
‘이 미친, 여기가 어디라고 이게……!’
기본적으로 알파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닌다. 힘
이 센 건 물론이고, 자칫 잘못하면 튼튼한 남자라 할지라도 맨손으로 죽일 수 있었
다.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
다.
‘전무님, 거기서 더 하시면…….’
‘죽는다고?’
이 새낀 죽어도 쌀 텐데. 오히려 그쪽이 세상엔 더 이롭지 않으려나. 뼈와 가죽을 분
리해 개밥으로 던져 줘도, 그가 한 짓에 비해서는 약한 처우가 분명했으니 말이다.
‘……권이도 씨.’
만약 정세진이 날 부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권이정을 죽였을지도 모르겠
다. 실제로 주먹질 몇 번에 어금니가 나갔고,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보인다고 의사
가 이야기해 줬으니까. 누나는 내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어떤 과거
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할 터였다.
‘정세진 씨는 내가 집으로 데려가죠.’
그를 호텔 방에 눕혀 놓고, 그의 가족들에겐 일방적으로 그를 찾지 말라 통보했
다. 감히 누구 하나 딴지를 거는 사람은 없었으나 우연찮게 정 회장이 중얼거리는 말
은 들을 수 있었다. 듣기에 몹시 거슬리는, 그러한 표현 하나를 말이다.
‘하자품을 주워 와서…….’
하자라니. 딱 하나 잘하는 게 입조심인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하는 무능
력한 인간이었나 보다. 암만 듣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그따위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
뱉을 줄이야.
‘기업의 총수라는 분이 편견 어린 말씀을 하시는군요.’
기분이 좋지 못했다. 정세진에게 좋은 기억만 남기려고 했는데, 벌써 두 번이나 쓰
레기 같은 경험을 시키고 말았다. 아차 하는 사이 통제 밖으로 벗어난 상황은 미처 해
소하지 못한 분노로 쌓였다.
‘사람한테 쓸 표현이 아닐 텐데요. 그쪽 따님한테 아무도 하자품이라고 하지 않
는 것처럼.’
‘…….’
정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먼 곳에 있는 제 딸
을 살피고는 이를 악문 채 나를 노려봤다.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수치스러워하
는 얼굴엔 아픈 손가락을 향한 걱정도 담겨 있었다.
‘장애를 하자라고 생각하시면 유감입니다.’
해신금융 막내딸은 말을 못 하지만, 정 회장은 그 어느 곳에서도 그걸 하자라고 표
현하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장애는 하자가 아니었고, 그건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 오
메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하자품이라고 칭한다면, 그건 성격에 문제가 있
는 정민재 쪽이 가깝지 않을까.
‘화장실은…… 일부러 따라간 게 아니었습니다.’
정세진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지, 그런 것들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가 왜 자신
감 없는 태도를 보이는지, 어째서 변명 한마디 못 하고 모든 걸 제 잘못으로 돌리는
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로 자꾸만 포기하려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까지도.
‘화를 내는 것도 권리의 일종이거든요.’
이미 너무 지쳐 버린 것이다. 제 손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에, 그리고 의지할 곳 하
나 없는 그 공허함에. 무기력한 게 아니라 무력한 거였고, 무심한 게 아니라 체념
해 버린 거였다. 넘지 못할 벽을 계속해서 맞닥뜨리다 보면, 넘을 수 있는 벽을 만나
도 제자리에 주저앉기 마련이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질 수 있고, 가고 싶
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불가능한 일 따위 없도록, 내가 내 손으로 그
렇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으니.
다행히 정세진은 향수 공방에 다니는 걸 무척 좋아했다. 여러 향료 냄새를 잔뜩 묻
힌 채, 생기 넘치는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는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해가 잘 드
는 3층에 공부 방을 만들어 주자, 내가 퇴근하기 전까진 그곳에서 성실히 숙제를 한
단 사실도 알고 있었다.
‘……잠을 못 잤습니까?’
근데 왜 잠을 못 잘까. 물질적인 부분은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정신적인 부분은 어떻
게 해결해 줘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나마 내 페로몬이 효과가 있으니, 그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내 침대에서 자요.’
오랜만에 그가 깊은 잠에 빠졌던 날, 나는 새벽에 방으로 돌아와 밤새 그의 얼굴
을 지켜봤다. 곤히 잠든 정세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몇 번
이나 속으로 감사했다. 건드리는 것조차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손조차 대지 못
한 채 눈으로 그의 얼굴을 덧그렸다.
언젠가 모든 발판이 마련되면 나는 미련 없이 너를 떠나보내야 했다. 너를 붙잡
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나 다름없었으니. 그걸 알면서
도 양심 없이 욕심이 난단 사실을, 아마 너는 평생 모를 터였다.
‘받기만 하면 죄송하니까, 원하는 걸 하나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향수 회사에 다니라는 말에 정세진은 미안한 얼굴로 그리 이야기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다 괜찮다고, 장난스레 몸도 괜찮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내가 그에
게 뭘 요구할 줄 알고, 참으로 용감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정세진 씨 페로몬을 닮은 향수를 가지고 싶습니다.’
가지고 싶은 건 분명히 있었다. 지난 우리의 추억, 그리고 너라는 사람. 다만 그 모
든 걸 요구할 수 없으니, 거르고 걸러 남은 게 너의 향뿐이었지만. 네가 죽은 뒤에
도, 그 체취가 남은 옷가지 속에서 아늑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오래 걸릴 겁니다.’
‘오래 걸리면 오래 걸릴수록 좋죠.’
그는 마지못해 내 조건을 받아들였고, 나는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부탁을 들어
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니 향수를 만들어 주기 전까지
는 내 곁을 떠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억겁의 시간이 걸리길. 말도 안 되
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라게 됐다.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그의 첫 출근 날, 말끔히 차려입은 정세진은 누가 훔쳐 갈까 두려울 만큼 귀하게 느
껴졌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차림새였는데, 딱 하나 손가락이 비어 있단 사실
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와의 약혼반지가 사라진 그곳엔 옅은 반지 자국만이 보
일 듯 말 듯 남아 있었다.
‘세진아.’
‘…….’
‘그냥 집에 있을래?’
마치 천장 없는 우리에 가둬 둔 짐승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기분이었다. 날아
갈 걸 뻔히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발목
을 묶어 그 안에 가둬 두고 싶다가도, 가만히 고여 썩어 버릴 걸 알기에 놓아줄 수밖
에 없었다.
그는 회사 생활에 곧잘 적응했고, 직원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애초
에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한 직원들이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정세진 같은 상사가 있
다면 친해졌을 터였다. 기껏 건네준 카드로 직원들 식사나 사주고 있으니, 그런 대표
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안정되고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 날이 갈수록 그의 점점 컨디션은 좋아졌다. 이대
로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독립된 개체가 되어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 버릴 게 분명했
다.
하나 반대로 나는 점점, 점점 메말라 가는 중이었다. 혹여나 그가 사라지진 않을
까, 잠이 든 그의 손가락에 남몰래 약혼반지를 끼워 놓을 정도로. 텅 빈 집 안에서 그
의 퇴근을 기다리다가, 집이 너무 넓다는 느낌에 좁은 집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
할 정도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늘 그와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으니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