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19화. Pour Sejin(6)
내가 했던 게 사랑이라면 우리가 나눈 감정은 애정이었을까. 내가 그 사실을 조금
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이토록 구차한 마음을 느낄 이유는 없었을 텐데. 달 속에 있다
는 말처럼 몽롱한 현실에서 막연히 되돌릴 수 없는 후회를 원망할 필요가 없었으련
만.
‘…….’
시집을 덮은 뒤엔 또 한참 깊은 적막에 빠져들어야 했다.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총
을 손에 쥐고 한참 멍하니 돌아오지 않는 과거를 덧그렸다.
‘……그거.’
그래서 몰랐다. 정세진이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오리라고. 당혹으로 물든 얼굴을 하
고 내게 반사적으로 그런 질문을 건넬 거라고.
‘진짜예요?’
가짜라고 해주는 게 좋을까. 뻔한 거짓말을 눈앞에 두고도 나는 굳이 그에게 사실
을 고했다. 이 총이 진짜고, 총알은 다 버렸다고. 막상 말을 내뱉은 뒤엔 불안한 마음
을 참지 못하고 총을 서랍에 처박고 잠가 버려야 했지만.
‘……맨발?’
‘아, 슬리퍼가 없길래.’
내가 입혀 준 옷을 그대로 입고, 그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추위도 많
이 타는 사람이 왜 맨날 이러고 돌아다니는지. 일전에 보았던 모습이 아른아른 눈앞
에 겹쳐 보였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그는 화들짝 놀라 거칠게 내 손을 뿌
리치고 말았다.
‘…….’
‘…….’
익숙한 감각이었다. 나를 거부하는, 나를 두려워하는 정세진. 공포에 질린 얼굴
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얼어붙어 버리는 그 모습까지.
‘아, 그게…….’
과거를 그리워하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인지 알게 됐다. 너와의 시간이 돌아
오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게 마지막 체념이건만.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 이렇게 한심
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죄송합니다.’
심장을 뚝 떼어 내면 이런 기분일까. 얼음물을 머리 위에서 붓는다면 이와 비슷
한 감각이 느껴질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총 따위를 보며 다짐하지 않더라도, 그 작
은 행동을 보는 순간 느슨하던 마음이 바짝 조여들기 시작했다.
‘정말 권이도 씨가 무서운 건 아닙니다.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너는 모르겠지만 그 감정은 나를 향한 두려움이 맞았다. 실탄이 장전된 총이라
는 걸 알았을 때도, 그토록 강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으니까. 다만 이상
한 건, 그 모든 걸 기억할 리 없는 네가 그런 얼굴을 해 보였다는 것 정도.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변명하지 않는 것. 제 잘못을 간결히 사과하고 굳이 주제넘게 무언가 묻지 않는 것.
처음엔 편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자꾸만 걸림돌이 되었다. 내게 바라는 게 아무것
도 없어서, 그에게 뭘 해주면 좋을지 제대로 가늠이 되질 않았다. 가치 판단은 개인
의 바람을 기준으로 할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자동차 몇 대와 같잖은 협박
이 전부였다.
‘일주일.’
‘…….’
‘그 안에 정세진 씨가 진짜 갖고 싶은 걸 골라 오면 차 키는 다시 생각해 보죠.’
다행히 똑똑한 정세진은 나와 사전에 협의했던 조건을 잊지 않았다. 내가 바라
는 걸 말하기 전까진 주는 걸 다 받으라던 그 막무가내식 조건을 말이다. 다만 너무 똑
똑한 바람에 ‘생각해 보겠다.’라는 말장난을 정확히 간파해 버리고 말았지만.
‘난 정세진 씨를 감금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은 나 자신에게 하는 경고와도 다를 바 없었다. 얌전히 집에 머무는 그를 보
며 나 또한 안도하고 있었으니까. 친히 밖으로 나가는 길을 터주면서도 혹여나 떠나
진 않을까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니.
‘개인 경호를 맡기고 싶은데.’
그래서 경호원을 고용하기로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의 안전
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서.
‘개인이라면…….’
무슨 조건을 내밀어도 묵묵부답이던 경호 팀장은 내가 회사가 아닌 개인을 위해 일
하라고 하자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곧장 거절하지 않은 걸 보면 이번엔 유의
미한 조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경호보단 수행원에 가깝다고, 좌천이라고 생각해
도 좋다는 말엔 또 의외의 질문이 되돌아왔다.
‘지난번에 점심을 안 드셨다던 그분입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지. 그와 조건을 협상하던 중에 갑자기 자리를 떠버렸었다. 무
슨 말을 해도 ‘예’, ‘아니오’만 하던 경호 팀장이 호기심을 내비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감시인지 경호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예리한 질문이었다. 아마 내 대답 여하에 따라 그의 태도도 크게 달라지겠지. 경호
를 빙자한 감시라. 순간 망설인 건 사실이지만, 내가 가진 의무는 오로지 그를 보호하
는 것뿐이었다.
‘하나뿐인 약혼자를 감시할 필요는 없지.’
‘…….’
그는 약혼자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경호하란 말을 듣
고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이 나오기까진 한참이 걸렸지만, 나는 그가 궁금해서라
도 이 일을 받아들일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부서진 핸드폰은 박 비서를 시켜 새것으로 사두었다. 번호를 바꿀 생각까진 없었는
데. 이른 시간부터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깨진 액정을 통
해 나타난 이름은 나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상대였으니.
「정민재」
구질구질하지 않나.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토록 열렬한 감정이라
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의 마음을 얻어 낼 생각을 했어야지.
물론 번호를 바꾼 게 비단 정민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
에 정세진이 연관되지 않길 바랐고, 해신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으
면 했다. 그래서 남몰래 그들과의 연결 수단을 끊어 놓고, 딱 한 사람 김 실장에게
만 미리 연락한 것이다.
‘……번호를 바꾸신 겁니까?’
앞으로 이쪽으로 연락하라는 말에 김 실장은 딱 그렇게만 되물었다. 그마저도 답
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고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에 불과했다. 그 후엔 알겠다는 말
과 함께 입을 다물었으니 여러모로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정세진은 과연 화를 낼까. 아니, 설령 화를 낸다고 해도 나쁘
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편해질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것도 없었다.
−정세진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전화 너머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일순 처음 눈을 떴던 날로 돌아간 기분이었
다. 그래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뒤이어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단 한 번도 제 쪽에서 먼저 연락한 적 없는 사람이다. 히트 사이클이 온 와중에도 아
무도 없는 온실에서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만큼. 그런데 친히 연락해 올 일이 뭐가 있느
냔 말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이태성이라는 분이 핸드폰을 가져다줬습니다.
다행히 그에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저 경호원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인
데, 그를 회유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다만, 그 마지막 질문을 들은 뒤
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지만.
−지금 걱정하시는 겁니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서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네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냐
는 듯 의아함이 가득 담긴 질문이었지. 내가 냉랭히 대할 땐 아무렇지 않게 걱정 끼쳐
서 미안하단 표현을 썼으면서. 진짜 염려하는 기색을 내비치니 한발 물러날 준비
를 하고 있었다.
‘걱정하는 거 맞습니다.’
이게 걱정이라는 걸 나 또한 너무 늦게 알아 버리고 말았다. 시도 때도 없이 사과하
는 버릇도, 지나치게 남을 배려하는 태도도, 모질게 굴지 못하는 여린 심성까지 걱정
이 돼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담담히 흔들리던 정세진이, 한순간
에 툭 꺾여 버릴까 봐 매 순간이 불안했다.
처음 만난 고용인에게 제 우산을 내어 줄 만큼 다정한 사람이다. 제 시간을 쪼개 불
편한 약혼자의 식사 상대를 자처하고, 부담스럽다고 여기던 경호원과 나란히 앉아 차
를 마시기까지 한다.
제 친절엔 이유가 없는데 타인의 친절엔 왜 이유를 찾는지 모르겠다. 친절이라 부르
기도 민망한 것들을, 살면서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다는 것처럼.
퇴근 후엔 웬일로 정세진이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목욕을 한다고 했
으니 아마 일찍이 잠자리에 들려는 건 아닐까 싶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방을 찾
아간 건, 이대로 하루를 보내기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가 씻느라 소리를 못 들어서…….’
그는 생각보다 빨리 문을 열었고, 그다지 졸린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그
가 걸치고 있는 옷이 가운 하나였다는 것 정도.
‘……권이도 씨?’
말간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가지런히 올라간 속눈썹이 습기를 머금어 촉촉했
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똑 떨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느다란 탄성이 흘러
나왔다.
‘아.’
하얀 피부가 유독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가나 뺨, 그리고 모양 좋은 입술
까지. 막 씻고 나와 달뜬 얼굴이 아랫배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방금 씻고 나왔습니까?’
‘…….’
잘 여며진 가운 틈새가 이토록 자극적으로 다가올 줄 몰랐다. 그 살결이 얼마나 부
드러운지 알기에 당장 손을 뻗어 양껏 어루만지고 싶었다. 향긋하게 풍기는 꽃향기
는 분명 페로몬이 아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체취처럼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그런 건 사실 잘 들리지 않았다. 발간 입술을 맛보
고 싶다는 욕망과 당장이라도 저 가운 아래에 이를 박아 넣고 싶다는 충동이 번갈
아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페로몬을 풀었다가, 그의 한마디를 듣
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뒤늦게, 불안감에 휩싸인 두 눈이 보였다. 그게 알파를 향한 공포인지, 아니면 다
른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전해지는 감정으로 짐작건대, 긴장
한 것과 별개로 그 역시 내게 반응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진짜 일을 치르기 전에, 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목까지 차오
른 욕구를 참을 길이 없어서, 하릴없이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들끓는 열기를 진정시
켰다. 그렇게 곧장 내 방으로 돌아온 다음엔 전해지는 감정을 온 피부로 적나라하
게 느껴야만 했다.
‘……하.’
이럴 땐 꼭, 덜 풀린 각인이 쓸데없는 짓을 하곤 한다. 그가 느끼는 기분이 선명
히 전해져서 나 또한 이성의 끈이 아득히 멀어졌다.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는 몰라
도, 머릿속이 아득해질 만큼 흥분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정세진을 만지지 못하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괴로운 일이었
다. 그를 욕심내지 말자고 다짐해 놓고, 또 그를 떠올리며 잠을 설칠 정도로. 물론 고
작 그깟 이유로 내 목적을 거스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내 최초의 다짐은 정세진을 향한 위협을 모두 없애는 것이었다. 그가 상처받지 않도
록, 애초에 나쁜 일에 연루될 가능성을 모두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본부장 자
리를 내려놓게 하고, 내 집으로 데려와 필요한 부분을 채워 준 거였다.
‘이젠 본부장도 아닌걸요.’
그러나 이 또한 정세진의 역할을 하나 빼앗는 행위라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 미
처 생각지 못한 부분인데, 본부장을 과분한 자리라고 일컫던 그가 나름대로 자기 일
에 애정을 품고 있던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야 세간에 능력 있는 사람이란 평
가를 받았을 리가 없지.
게다가 그를 해신과 떨어뜨려 놓는다고 해서, 정세진이 정 회장에게서 등을 돌릴 리
가 없었다. 이전 삶에서도 그는 본인이 버림받은 다음에야 모든 걸 포기하고 마음
을 접지 않았던가. 정민재를 끝내 내치지 못하는 것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깨뜨
릴 수 없어서였을 게 분명했다.
‘지금 선호그룹의 주축이 어느 계열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내가 그 울타리를 부수는 것도 월권은 아닐까.
‘선호그룹이 와해되면 가장 먼저 각축장이 되는 건 선호물산입니다. 권력층이 분리
된 후에는 선호전자가 근간 사업이 될 거고, 그럼 명실상부 부회장은 최고 책임자
인 내가 되겠죠.’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그가 완
전히 모든 걸 가질 수 있도록. 만약 그가 원한다면, 해신을 무너뜨리는 대신 예쁘
게 고쳐 그의 손에 쥐여 줘도 나쁘지 않을 테니.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 회장이 내
게 이를 드러내지 않아야겠지만.
‘향수라기보단, 향 같은 거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릴 땐 조향사가 되고 싶어
서…….’
그를 위한 선택지는 무수히 많이 준비돼 있었다. 그게 어린 시절의 철없는 꿈이
라 할지라도, 내게는 그 발판을 마련해 줄 능력이 있었다.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장
래 희망을 이야기해도, 어떻게든 실현해 줄 생각이 있었단 말이다.
천운이라고 해야 할지. 과거에 경호 팀장이 만나던 여자가 조향사였다. 박 비서에
게 그를 섭외하라 일러둔 뒤, 개인적으로 향수 사업을 구축해 그에게 안겨 주기로 했
다. 만약 거절당하면 무용지물이 되겠지만, 그 정도 손해는 그를 잃는 것에 비하면 아
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정세진은 조금 더 편하게 3층 서재를 드나들었
고, 저녁이 되면 그날 읽은 책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늘어놨다. 평화롭고 소소
한 일상은, 양심 없이 영원을 바랄 만큼 달큼한 것이었다.
‘세진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러한 일상이 무척이나 위태롭단 사실을 깨달았
다. 그의 건강 검진을 위해 심 교수를 부르던 날, 온실에서 이유 없이 눈물을 쏟는 그
를 발견하는 순간.
‘너 왜 울어.’
‘…….’
하늘이 무너지면 이런 기분이 들까. 모든 게 완벽하리라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
서 금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안기자마자 눈물을 멈췄지만, 나는 오랜 시
간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닿는 온기가, 그 소중한 감각이, 눈 깜박할 새
에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아끼시는 책인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그는 조그만 시집 한 권을 내밀며 책을 망가뜨려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널리
고 널린 책 따위는 구겨져도 괜찮았지만, 그가 내민 책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시집이
라는 건 괜찮지 않았다.
‘…….’
그의 불어 실력을 테스트했던, 내가 그의 글씨를 따라 썼던 그 시집이었다. 자꾸
만 눈에 밟히는 게 힘들어 2층 서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 버린 그 책이기도 했
다. 불어로 된 서정시가 잔뜩 쓰여 있었지만, 눈물을 흘릴 만큼 감성적인 내용은 아니
었던 걸로 기억한다.
‘정세진 씨, 혹시…….’
뒷말은 끝내 내뱉지 못했다. 혹시 너도 나를 기억하냐는, 그 미련 넘치는 질문을. 만
약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내 모든 계획이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무모한 확인이었
으니까.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해선, 응당 그에 걸맞은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했
다.
사람의 감정이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걸 정세진을 만나고 느꼈다. 그를 놓아줘야 한
다는 걸 알면서도 내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아 틈만 나면 욕심을 부리기 바빴다. 그와
의 추억을 돌려받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정작 그 실마리가 보이자마자 두려워지
고 말았다.
혹시 네가 모든 걸 기억한다면 그 기억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그게 나를 향한 원망
이라면 나는 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 모든 순간을 새로이 그려 넣
을 테니, 부디 네 안에는 좋은 기억만 남아 있길.
‘조만간 본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출장 가기 전날, 정세진은 지난 삶과 마찬가지로 본가에 불려 갔다. 하룻밤
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건, 이미 한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머
물 곳이, 본가가 아닌 그 좁아터진 오피스텔이라는 사실도.
비를 맞지 않았으면 했다. 그 집에 머물건, 아니면 내 집으로 돌아오건. 그가 괴로움
을 씻어 내릴 상황이 일어나지 않아서, 내가 헛걸음한 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권이도?’
그러나 그는 어두운 하늘 아래 우산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를 위해 준비해 놨
던 옷을 입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표정을 한 채로. 나와 딱 세 발
짝 떨어진 곳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때도 너는 이런 기분으로 비를 맞았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세상에 홀로 남은 것
처럼 외로운 기분을 느끼면서.
‘조금 늦었네요.’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올 걸 그랬지, 세진아. 그랬으면 네가 감기에 걸리는 일도 없었
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