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18화. Pour Sejin(5)
‘…….’
천천히,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좁은 틈새로 보이는 정세진은 눈가
가 시큰거릴 만큼 그리운 것이었다. 혹여나 이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진 않을
까, 눈조차 깜박이지 못한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 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꽃잎을 닮은 예복이었다. 결 좋은 머리를 반쯤 넘기고, 올
곧은 눈으로 그가 나를 바라봤다. 그토록 그리던 한 사람이, 그리 멀지 않은 문 앞
에 서 있었다.
정말, 정세진이었다. 살아 숨 쉬는, 삶을 포기하지 않은 정세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그에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빛이 스며드는 문틈 새, 내
가 간절히 염원하던 그에게로. 여위고 시들어 생기를 잃어 갔던, 내 집에 갇혀 있
던 바로 그 정세진에게.
‘……정세진 씨?’
이토록 순수한 기쁨을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모든 장면은 그래, 잘 만들어 놓은 환
상과도 같았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기분이 들떠서, 언젠가 불쾌했던 그 향수 냄새
마저 달짝지근하게 느껴졌다.
‘권이도입니다.’
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습관이 들어 버린 흔해 빠진 미소를 머금었다. 실물
이 훨씬 잘생겼다는 아부를 하며, 내가 내민 손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따사로
운 온기가 깃털처럼 내려앉는 순간, 질식할 것처럼 거센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들
기 시작했다.
‘정세진입니다.’
‘…….’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더라. 다시 눈을 뜬 날부터 지금까지 그를 몇 번이나 곱씹
었는지 모른다. 그 단정한 눈매가 나를 향했으면 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기사 사진조
차 닳고 닳을 정도로 봐왔었다. 지금의 현실을 반쯤 꿈속이라 여기면서도, 제발 깨어
나지 않길 바라고 또 염원했었단 말이다.
‘……확실히.’
꿈이 아니었다. 눈앞의 정세진은 고작 꿈 따위가 가질 수 없는 선명한 온기를 지니
고 있었다. 손에 세게 쥔다고 해서 부서지지 않았고, 힘을 푼다고 해서 모래처
럼 손 틈새로 빠져나가지도 않았다.
‘실제로 보는 게 낫군요.’
눈물을 흘리는 것도 습관이 되던가. 조금만 방심해도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미련
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햇살이 지나치게 강해서, 아니면 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
가 짙은 향수를 일으켜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해 놓고 정작 손을 잡
은 건 몇 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 바람에.
약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그 손을 다잡으며 내 마음을 함께 다잡았다. 보잘것없
는 욕심을 최대한 억누르고, 이게 오로지 허울뿐인 과정임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
겼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 주는 반지 역시, 결실이 아닌 수단임을 결코 망각해서
는 안 됐다.
그는 내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고, 본부장이라는 직급엔 아무런 미련도 보이지 않았
다. 도리어 당황한 건 정 회장이었는데, 비리를 뒤집어쓸 상대가 사라지니 아쉬운 기
분이 든 게 분명했다. 이어진 식사는 빙판 위를 걷듯 아슬아슬했으나, 내 사심을 섞
은 산책만큼은 성공적인 마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일은 권이도 씨 집에서 뵙겠네요.’
너와 나 사이에 다시 내일이 생겼다. 내일뿐만 아니라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
매일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다. 굳이 다음을 약속하지 않아도, 귀하디귀한 일상을 함께
할 구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기적과도 같은 지금은 가장 꿈 같은 순간을 지나자마자 현실이라는 확신이 되었
다. 비록 여전히 잠이 드는 건 꺼려졌지만, 하루아침에 깨져 버리진 않으리란 희망 정
도는 생겼다. 그건, 정세진을 내 집에 데려오기 위해 그를 데리러 가는 길 역시 마찬
가지였다.
‘맨몸으로 와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를 위한 의식주는 이미 모두 마련된 상태였다. 옷 사이즈는 당연히 알고 있었
고, 드레스룸을 그에게 어울릴 만한 물건으로 채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고용인에
겐 감히 정세진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일러뒀으니, 나보다 더 극진한 대접을 받으
며 내 집에 머무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차는 정세진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주차장
에 차를 대고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거슬리는 얼굴 하나를 발
견하고 말았다. 역시나,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정민재였다.
‘그거야 그 새끼가…….’
그딴 알파 새끼 다음엔 그냥 그 새끼인가. 앞뒤 상황을 듣지 않아도 내 얘기 중이라
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딱 한마디 만에 주변이 쥐 죽은 듯 조
용해졌으니까.
‘여기 계셨군요.’
나는 부러 정민재를 못 본 척 오로지 정세진에게만 말을 붙였다. 정장이 아닌 다
른 외출복은 또 새로웠기에 니트가 잘 어울린다는 심심한 감상도 함께 떠올랐다. 하
찮은 경계심을 잔뜩 내비치던 정민재는, 정세진이 하던 대로 툭 내뱉기 무섭게 모욕
이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이런 건 동생이 양보해야지.’
이 방법이 제일 좋았구나. 마냥 무르기만 한 줄 알았던 대처가 사실은 최선의 방법
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어진 정세진의 말까지 들은 뒤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조
차 마주치지 못했겠지.
‘형 갈게.’
항상 느끼지만, 다정한 만큼 무심한 사람이었다. 제가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
지 않으니 타인의 바람에도 보답해 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정확히는 그럴 만한 여유
가 없는 게 맞을 텐데, 그 유일한 배려의 대상이 정 회장이라는 사실은 또 아이러니했
다.
‘……제가 존댓말이 더 편하거든요.’
그는 변함없이 나를 어려워했고, 내가 보이는 너그러움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
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왜 이런 건 그토록 못 숨기는지. 내가 업무 전화를 하
는 동안 살살 내 눈치를 봤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습관적인 사과를 입
에 올렸을 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정세진 씨가 미안해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 지난 삶
에서의 모든 실수는 이번 삶에서의 내가 올바르게 다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
저, 내가 마련해 놓은 둥지에서 아늑히 머물기만 하면 되겠지.
주방장에게 그의 모든 입맛을 공유해 놓은 덕에 그와 함께한 식사는 퍽 성공적이었
다. 그 입 짧은 정세진이 한 공기를 모두 비웠으니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과라
고 할 수 있다.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집을 나서야 했지만, 부족함 없이 준비해 놓
았으니 그 또한 편안한 하루를 보내리라 생각했다.
‘…….’
그래, 설마하니 그토록 허전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단 말이다.
‘전무님?’
딱 내가 다시 회사로 향할 때까지는 괜찮았다. 잔잔한 호수 같던 마음은 크게 기뻐
하진 않을지언정 예전처럼 텅 빈 공허함에 빠져 있진 않았다. 그런데 반지를 빼고 사
무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루함에 점철된 감정이 낱낱이 전해졌다.
왜 기뻐하지 않을까. 필요한 건 모두 갖춰져 있을 텐데. 무작정 좋아하진 못하더라
도 막연히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괜찮으십니까?’
그날은 박 비서의 이상하단 시선을 받으며 늦은 시간에야 업무를 마무리했다. 집
에 있을 정세진에게 온 신경이 쏠리는 바람에 평소보다 능률이 훨씬 떨어진 탓이었
다.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초조함 때문에 오히려 딜레마에 빠
지고 말았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정세진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겠지. 늘 쥐 죽은 듯 조용
히 있던 사람이니 이번에도 제 주제를 고작 그 정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금 멋쩍은 기색으로 현관 앞까
지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
‘……다녀오셨어요?’
홈웨어를 입은 모습이 현실감 없었다. 차분히 내려온 머리도, 단정하고 유순한 눈
매도, 그 안에 담긴 엷은 색의 눈동자까지 전부 헛것처럼 느껴졌다.
‘왜.’
‘…….’
‘왜 나와 있습니까?’
질문을 건넨 다음에야 떠올렸다. 그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날에도, 정세진
이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는 것을. 그 섬세한 다정함을 대차게 까버린 게 다른 누구
도 아닌 나라는 것도.
‘굳이 마중을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 좋았지만, 굳이 번거롭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편한 대
로 하란 의미로 이야기했는데, 정세진은 도리어 불편하면 방에 있겠다고 정중히 양해
를 구했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했으나 그건 일종의 체념이나 다름없
었다.
‘불편한 건 아닙니다.’
각인은 나한테만 남았다는 걸, 그때 확신했다. 내가 두 번이나 불편하지 않다고 말
했음에도 그는 영 못 미덥단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을 가다듬었고.
‘그럼 마중 나와도 되겠네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더할 나위 없이 상냥했다. 만들어진 미소라는 걸 알고 있
는 지금조차 가슴 언저리가 기분 좋게 반응할 만큼. 아마 그는 내 감정을 느끼지 못
할 테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생 모르겠지만.
‘안 바쁘면 들어오지 그래요.’
그를 붙잡은 건 충동이었지만, 평화롭게 나눈 대화는 제법 값진 시간이 되었다. 처
음엔 사뭇 긴장 어린 표정을 짓던 정세진은 내가 샤워를 마치는 사이 한결 편안한 상
태가 되었다. 그게 내 페로몬 덕분이라는 걸, 과거의 기억으로 어렵지 않게 유추
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상냥한 사람이라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건조한 얼굴을 하고, 선
뜻 아침 식사를 하자며 여지로 느껴질 만한 친절을 베풀었다. 일상적인 질문엔 조곤
조곤 답을 해줬으면서, 정작 내가 무언가 쥐여 주려고 하자 곧장 계산적인 태도가 되
고 말았다.
‘아직 자녀 계획에 관해 듣지 못해서요.’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일전에 서재에서 들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임신 가능
성이 높지 않지만, 주기를 맞추면 괜찮을 거라면서. 성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얼
굴을 하고, 오메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노라 담담히 선포한다.
‘아이를 좋아합니까?’
아마 그에게 자식이 있다면 그는 그 누구보다 좋은 아빠가 될 터였다. 제가 받지 못
한 사랑을 조건 없이 베풀고 바람직한 안식처이자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줄 게 분
명했다. 혜율이를 대하던 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부모가 될지는 자명한 일이었
다.
‘정세진 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는 아직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은 없군요.’
그러나 그런 정세진과 달리, 나는 이미 한 번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이었다. 그의 임
신 사실을 알자마자 무작정 붙잡아 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으니 말이다. 감히 생명
의 축복을 바라기엔 지나치게 양심 없는 소망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정원에 온실이 있습니다.’
그러니 너와 나 사이에 다시 아이가 생길 리가. 이 약혼의 끝이 결혼일 리도 없는
데, 이와 같은 주제는 여기서 끝이겠지.
‘……꽃 말씀입니까?’
그는 조건 없는 다정함에 기뻐할 만큼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학대당한 짐승처
럼 움츠리고 있는 상대에게 갑작스러운 친절이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
지 않았다.
‘조건이 없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정 회장을 대하듯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움찔할 만한 사무
적인 말투로 이 약혼이 계약의 일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그에게 원하는 걸 안
겨 주기 위해선, 본인이 을이길 바라는 정세진을 잠시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말 나온 김에, 가볍게 차부터 시작하죠.’
이렇게 하나둘 가지다 보면 너한테도 욕심이라는 게 생기겠지. 가져 본 적 없는 여
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면 억지로 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그만
일 테니까.
그 후로 며칠간,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을 이어 갔다. 그는 약속대로 나와 아침 식사
를 함께했고,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찍 퇴근해 저녁을 함께했다. 식사를 마치
고 내 방에서 담소를 나눌 때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구차한 생각까
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찰나에 불과할 만큼 짧은 행운이라는 걸 알고 있다. 눈앞에 있
는 그를 보면 욕심이 샘솟았지만, 이 약혼은 그를 손에 쥐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
다. 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였고, 아차 하는 사이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
는 공든 탑이었단 말이다.
그래서 약혼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그가 언제든 제 발로 나를 떠날 수 있도
록. 혹여나 내가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 버리지 않도록.
약혼반지는 출근길에 오르면 곧장 빼버렸다. 그가 잠이 든 다음엔 서재로 향했
고, 그곳에서 하염없이 총을 매만지며 내 최초의 다짐을 바로잡았다. 불쑥불쑥 이대
로 안주하고 싶단 생각이 들 때마다, 눈앞에서 죽었던 정세진을 잊지 않기 위해 나 스
스로를 채찍질했다.
가지려고 하면 안 된다.
그를 손에 쥐고 휘두르려고 해도 안 됐다.
그가 보여 주는 애정에 목이 말라서, 갈증을 해소하겠다고 그를 쥐어짜도 안 될 노
릇이었다.
물론 제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이따금 샘솟는 충동까지 모두 억누를 수
는 없었다.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는 정세진을 볼 때마다 이대로 가둬 두고 싶단 생각
이 스멀스멀 엄습했다. 스스로 목줄을 차고 집 안에 머무르는데, 구태여 내 손으로 내
몰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애써 자위했다.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릅니다.’
내 집에 들어온 지 일주일쯤. 정세진의 히트 사이클이 예정돼 있었다. 그는 갑작스
레 주기가 돌아왔다고 했지만, 일기 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리는 날이라 기억할 수 있
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개인 번호까지 알려 줬는데, 정작 연락
해 온 건 정세진이 아닌 고용인 중 한 명이었다.
‘……또 점심을 걸렀다고?’
경호 팀장에게 온갖 회유로 복직을 권하던 중이었다. 지난번엔 아쉽게 인재를 놓쳤
으나, 이번엔 늦기 전에 내 선에서 수습할 생각이었다. 역시나 그는 쉽사리 설득되
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내게는 더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얘기는 다음에 하지.’
‘…….’
황당해하는 경호 팀장을 두고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정세진이 점심을 거르
고 온실에 있다는 건, 그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한 번 온실
에 직접 식사를 차려 준 뒤엔 그 부담스러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반드시 끼니를 챙
기는 걸 알고 있었다.
‘김 실장님……?’
역시나, 정세진은 온실 안에 쓰러져 있었다. 테이블 밑에 기어들어 간 채로 이
미 한 번 언급한 적 있는 사람을 입에 올리기까지 했다. 이 망할 각인이, 왜 이럴 때
는 그의 상황을 알려 주지 않는지. 기형적으로 맺은 연결 고리는 끝내 이 정도가 한계
인 모양이었다.
‘……권이도 씨.’
못된 습관을 또 찾았다.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이토록 애달픈 목소리를 내면 나더
러 어떡하라고. 오로지 성욕만이 남아 있어야 할 발정기에 왜 본능적인 두려움이 함
께 섞여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랐죠.’
그때,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그가 내게 연락하지 않았단 사실이 대체 왜 그렇
게 서운했을까. 고작 그깟 짧은 시간을 함께해 놓고 내게 의지하길 바라는 게 더 우스
운 일이건만.
‘세진아.’
‘…….’
‘충동질하지 마.’
하루를 꼬박 그를 끌어안고 페로몬을 쏟아부었다. 당장이라도 그와 몸을 섞고 싶었
지만, 한계까지 끌어올린 인내심으로 간신히 버텨 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기분
에 혀를 섞으면서도 그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내가 손대지 않았음에도 그는 하반신을 비비적거리며 두어 번 사정했다. 앞이고 뒤
고 죄 젖어 있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힐 땐 이성의 끈이 뚝 끊기는 것 같은 기분
이 들 정도였다.
때아닌 수음을 이 나이에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흉터 하나 없이 새하얀 나신은 짙
게 풍기는 페로몬만큼이나 자극적인 것이었다. 이미 그 온기가 주는 쾌감을 알아 버
린 이상, 맨정신으로 버텨 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정을 두 번 했고, 몸을 세 번이나 씻었다. 가까스로 욕정을 내리누른 뒤엔 늘 그랬
듯 서재로 가 습관처럼 서랍 속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총알이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
한 흉기는 그의 죽음을 떠올리는 데 아주 좋은 방아쇠가 되었다.
‘…….’
욕심내지 말아야지. 주제 파악을 할 건 네가 아니라 나일 테니까. 까딱 잘못했다
간 또 한 번 내 손으로 모든 걸 망칠지도 모르는데.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한참을 잡념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잔뜩 복잡했던 머
릿속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딱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그를 따라 죽었을 때
의 그 감각. 마치 자유를 되찾은 듯한 그 해방감.
그리고 그 없는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환희까지.
‘……정세진.’
너는 돌아왔는데 너와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걸 그르쳐 놨던 주제에 이제
는 추억까지 돌려받고 싶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기쁘다가도, 우리
가 함께했던 시간까지 사라졌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두려움과 함께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그가 내게 손을 뻗
는 순간, 아무렇지 않게 그를 안아 줄 수 있던 그때를 말이다. 그에게 모르는 척 불어
를 배우고, 다정히 입을 맞췄던 테이블은 이제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책이 빼곡한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중에서 작은 시집
을 하나 꺼내 들고 페이지를 펼쳐 기억나는 모든 부분을 채워 넣었다. 정세진이 두서
없이 적어 넣었던, 예의 그 반듯한 글씨가 채웠던 공간들을.
「사랑하는 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