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17화. Pour Sejin(4)
죽음 이후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망상에 빠
지기엔 지나치게 여유 없는 삶을 살았고, 허황된 미래를 가정하기엔 현실을 사는 것
만으로도 바빴으니까. 그런 낭만적인 상상 따위를 할 바에야 더 가치 있게 시간을 보
내는 방법이 무궁하게 많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곁으로 가진 못해도 그가 없는 세상에서 도망칠 수 있으리
라고. 이게 내 삶의 마지막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그러나 눈을 떴을 땐, 커튼 너머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가슴을 관통하는 통증
은 느껴지지 않았고,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만 또렷이 전해졌다. 몸을 일으키지도, 그
렇다고 눈을 깜박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
다.
‘……하.’
죽는 것마저 실패하고 말았구나.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도, 끝내 그 없
는 세상으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안식을 찾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해서, 그 괴로운 기
억 속에서 다시 괴로운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뭐,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한 번 시도한 죽음을 또 한 번 시도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
으니까. 긴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났다면 다시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 역시 그리 어렵
지 않을 테니.
‘…….’
하지만 다시 눈을 감는 순간,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 불쑥 엄습했다. 마
치 한 몸처럼 연결된 누군가의 존재감.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감정과 사소한 기분이.
‘이게 대체…….’
정세진이 느껴졌다. 그와 각인한 이후,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가 어딘가에 살아 있
다고 누군가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그건, 찰나의 순간 중독될 정도로 강한 유혹이었다. 이 모든 게 신기루라 할지라
도 차마 포기할 수 없는 달큼한 감각이기도 했다. 그저 꿈이라 치부하고 깨어 버리기
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어 가고 싶은 환몽이었단 말이다.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침실을 벗어났다. 슬리퍼를 신을 정신도 없었고, 날짜를 확
인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마지막에 봤던 장소로 가봐
야 할 것 같아서. 거의 뛰듯이 복도를 가로질러 나무로 된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혔
다.
‘…….’
바닥에 깔린 카펫엔 그 어떤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
던 권총 역시, 나무로 짠 프레임에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
간 것처럼.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 하하…….’
만약 죽음을 앞두고 보여 준 환상이라면 잔인하지 않나 싶다. 하나 머리가 잘못되
는 바람에 빠진 망상이라면 나는 기쁘게 그 망상 속에서 평생을 살 자신도 있었다. 그
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한다면, 그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온 집 안을 쥐잡듯이 뒤졌다. 그 사용하던 3층 방부터, 1층에 있는 주방까
지. 고용인이 희한한 눈을 하고 나를 봤지만, 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여유가 부족
했다.
‘……하, 씨발.’
그러나 정세진은 내 집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살
았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물건을 내 허락 없이 버릴 리가 없는데, 증
발이라도 한 것처럼 온 집 안이 깨끗했다.
그제야 나는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을 찾았다. 어떤 방법으로건 그의 존재를 확인하
고 싶었으니까. 머리가 고장 나 그의 존재를 느끼는 거라면 적어도 내가 미쳤다는 확
신 정도는 필요했다.
‘…….’
그렇게 확인한 핸드폰엔 놀랍게도 예상치 못한 날짜가 나타나 있었다. 그가 죽
은 12월이 아닌, 우리가 결혼도 하지 않은 3월의 어느 날. 3개월 후의 미래가 아니
라, 9개월을 거스른 과거의 날짜가 말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총은 가슴에 쐈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잘못된 모양이다. 물
론 가장 미쳤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을 포기할 수 없
단 점이지만.
나는 한참이나 달력을 들여다보다가 익숙한 열한 자리 숫자를 입력했다. 그의 모
든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서, 번호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통화 버
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대자, 뚜르르 단조로운 신호음이 들려왔다.
‘…….’
그 당시 내 기분이 어땠더라. 긴장이 되면서도 두려웠던 것 같다. 그가 아닌 다른 사
람이 전화를 받을까 봐. 이 번호의 주인이 세상에 없다고, 그리 말하며 현실을 직시시
킬까 봐. 손끝이 차갑게 식을 만큼 바짝 긴장해서 명치 언저리가 옥죄기까지 했다.
−……네.
그러나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짧은 음절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것이었
다. 예의 그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은 늘 그랬듯 동요 없는 어투로 차분히 뒷말을 이
었다.
−정세진입니다.
바라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다. 감히,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못한 소망이 실재
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여보세요?
‘…….’
−말씀하세요. 안 들리십니까?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면 탄식이 나왔을 터였다. 눈가에 뜨뜻하게 열이 오르고, 순
간적으로 목구멍이 탁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밀
려드는 바람에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두어 번 비슷한 말을 반복한 뒤 의아한 기색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 잘
못 걸린 전화거나 스팸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전화가 끊기는 순간엔 나도 모르
게 그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세진아. 그 부름을 억누른 뒤엔 뒤늦게 흘러나온 탄성만
큼은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아…….’
만약 신이 있다면 이 순간만큼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까 싶다. 바닥에 납
작 엎드린 채로 발등에 입을 맞추고 평생을 내다 바칠 자신이 있었다. 고작 그의 목소
리 하나 들었을 뿐인데, 다 잃어버렸던 감각이 서서히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떤 정신으로 출근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정장을 차려입고, 또 본
능적으로 차고에서 기다리는 차에 올랐다. 지난 일정과 인터넷 뉴스 따위를 훑어
본 뒤엔 마지막 확인 작업으로 박 비서에게 질문까지 건넸다.
‘시스템 개발 말씀입니까? 거의 완성돼서 최종 검수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뒤이은 질문에 ‘경호 팀장의 사직서는 아직 수료 전이다.’라
는 대답까지도. 담담히 말을 마친 박 비서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오늘 있을 일정의 변
화까지 알렸다.
‘오전에 있던 미팅이 취소됐습니다.’
‘…….’
기시감, 고작 그딴 단어로 이 상황을 나타내도 될까. 취소 사유는 상대방의 갑작스
러운 수술 때문이었고, 옮겨진 날짜 역시 지나치게 익숙했다. 그걸로 모자라, 사무실
에 도착한 뒤에 박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전한 불청객의 소식까지.
‘……해신금융 정철호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계절은 막 봄으로 접어드는 중이었고, 모든 순간은 과거의 하루와 일치했다. 날짜
까지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게 오늘이라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
다.
그리고 이러한 짐작은 정 회장이 초조한 얼굴로 내뱉는 말을 듣는 순간 확신으로 바
뀌었다.
‘제휴 맺을 은행을 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모든 순간의 시초였다. 그와 결혼하게 된, 그리고 그를 죽음까지 내몰게 된, 우리
의 관계가 파탄 나게 된, 그 모든 시초.
‘저희 기업의 오메가를 드리겠습니다.’
신이 있다면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했던가. 내게는 그 신이 곧 정세진이니, 앞으
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도록 염원하던 순간이기
에 실천으로 옮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설령 이게 한순간에 사라질 꿈이래도, 썩
은 동아줄이라고 해도 잡아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휴는 맺을 수 없지만, 시스템과 투자금을 주도록 하죠.’
결혼은 약혼으로 바꾸고, 계약서는 작성하지 않은 채 구두로 남겨 뒀다. 정 회장
이 내민 조건을 살짝 바꾸는가 하면, 탐탁지 않아 하는 그에게 은근한 협박까지 강행
했다. 나를 신뢰하지 않는 거냐며 해신의 비리를 언급하자, 그는 사색이 된 얼굴
로 양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정세진 본부장이라면 진작부터 관심이 있었으니까.’
‘……그, 그러십니까?’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니까. 정세진이 이 사람과 조금만 닮았어도 그토록 어렵다 여
기지 않았을 거다. 그를 붙잡을 방법이 셀 수 없이 많았을 테니, 관계가 그렇게 한계
로 내몰리는 일도 없었겠지.
‘갑자기 결혼 소식을 알리는 것보단 천천히 진행하는 게 자연스럽겠죠. 이의는 없
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 회장은 생각보다 더 멍청했고, 딱 내가 아는 만큼 간절했다. 조금만 너그럽게 대
해 주는 척하자 뭐든 좋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탐욕으로 번들
거리는 두 눈은 몹시 불쾌했으나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면 견딜 만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정 회장님.’
목적은 딱 하나, 그에게 향하는 모든 위협을 없애는 것이었다. 썩어 빠진 집에서 그
를 빼 온 뒤에 원하는 걸 모두 안겨 주고 내 잘못을 바로잡을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다
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엔 첫 단추를 바르게 끼울 수 있기를 바랐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꿈결 같은 환상은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암암리에 그와
의 약혼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도무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
간부터는, 더 간절한 기분으로 실패 없는 미래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가족들에겐 이 모든 게 퍼포먼스임을 알리고,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 2층 끝에 있
는 방을 죄 뜯어고쳤다. 그가 머물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을 만들면서, 그를 해칠 수 있
는 모든 요소를 병적으로 제거했다. 두 번의 실수를 용납할 수 없으니, 그중엔 당연
히 권이정의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정이를 부르지 않겠다고?’
약혼식에 참석시키지 않겠다는 말에 가족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를 말
리지는 못했다. 모든 게 완벽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단호하게 덧붙인 한마디 때문이
었다. 권이정의 존재 자체가 리스크라는 걸, 누구 하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웬일로 괜찮은 선물이라고 했지. 그 뚫린 입으로 잘도 그런 말을 지껄였다. 내 눈으
로 봤던 흔적, 그리고 보지 못한 과정.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당장 내 손으로 죽여
도 시원찮을 놈이었다.
그러나 뼈아픈 후회로 깨달은 건, 모든 과정이 철두철미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
이었다. 조금 더 완벽히, 흠잡을 곳 없이 추진하기 위해선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 인내
할 필요도 있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할 생각이
었다.
딱 하나 치우지 못한 건, 죽음의 수단이 되었던 새카만 총이었다. 서재에 놓인 테이
블은 진작 치웠으나, 직접적인 흉기만큼은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다. 물건이 아까워
서가 아니라, 자칫 그의 죽음을 망각할까 봐 두려워졌기 때문에.
‘잘 지내요, 권이도 씨.’
이게 속죄의 기회라면 그 마지막을 잊어버려서는 안 됐다. 내 다짐의 상징마저 치
워 버리고 나면 언젠가 최초의 목적이 흔들리고 마리란 불안감이 생겼다. 사람
은 늘 안주를 원하기에 과거의 기억은 언젠가 지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총이 아닌 총알을 버린 것이다. 방아쇠를 당긴다고 한들 그 사람에게 아무
런 해도 입히지 못하게. 실수로라도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서랍 깊숙한 곳에 집어넣
어 단단히 잠그기까지 하면서.
‘말씀하신 대로 생화로 준비하라 일러뒀습니다.’
대기실은 전부 꽃으로 채웠고, 그를 위해 은방울꽃으로 된 꽃다발까지 준비했
다. 생화가 만연하기엔 이른 계절이었으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
았다. 내 다시 찾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노력쯤은 차라리 기껍기까지 했다.
약혼식 당일, 나는 이른 새벽부터 정세진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 밤새 한숨도 자
지 못했지만,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다만 거슬리는 건, 요 며칠 전해지
는 정세진의 기분 정도.
‘……모르는 사람이랑 약혼하는 게 좋진 않겠지.’
사실은 이렇게 긴장하고 있었구나. 그걸 너무 늦게 알게 됐다. 착잡하고 심란한 마
음이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그 감정엔 이따금 말로 표현하
지 못할 괴로움도 있기에, 그의 정신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각인이 왜 풀리지 않았는지, 나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그저 기형적인 형태로 맺
은 연결 고리가 내게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대략적으로 추측할 뿐. 혹은 이 모
든 게 지독한 꿈이라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막연히 생각할 뿐.
‘대기실엔 정세진 씨 비서 외에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중요한 날이니만큼 쓰잘머리 없는 가족들은 진작 격리시켰다. 늘 치기 어린 질투
를 드러내던 그의 동생이, 이런 날 정세진의 속을 뒤집어 놓을 건 뻔한 일이었으니
까. 기껏 권이정까지 오지 못하게 해둔 만큼, 가뜩이나 복잡할 그의 기분을 굳이 해
칠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됐다. 정세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
아 그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까지 완벽했다. 그 성정만큼이나 고상한 취향이, 이다
지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남은 건 딱 하나, 그를 잘 알고 있는 조력자 정도.
‘김 실장님.’
나는 정세진의 대기실 근처를 머물다가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마자 상대방을 불
러 세웠다.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멈칫했던 상대가 뒤이은 말을 듣고는 더 당황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잠깐 나 좀 보죠.’
‘……저 말씀입니까?’
김 실장은 그리 되물으면서도 묵묵히 나를 따라왔다. 잔뜩 경계하는 표정 같기도 했
는데, 그 모습이 싫지 않으면서도 배알이 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무슨 관계
길래 정세진을 이렇게까지 아끼는지.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줄 만큼 헌신적으로 군
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부탁이 있는데, 김 실장님께서 좀 들어줬으면 합니다.’
그를 불러낸 이유는 별거 없었다. 정세진에게 대략적인 식순을 알려 주고, 분명 쫄
쫄 굶고 있을 그에게 간단한 먹거리를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분명 좋
은 카드가 될 김 실장에게 대충 눈도장을 찍어 두기 위해.
‘이건 내 개인 번호니까 무슨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하면 됩니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약혼 상대에 대한 예의
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김 실장은 내 생각보다 더 똑똑하고 딱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경계심
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고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닮기 마련인데, 그가 진정 모시
고 있는 윗사람은 정 회장이 아닌 정세진인 모양이었다.
‘아뇨, 그냥 약혼 상대에 대한 예의는 아닙니다.’
전부 솔직할 필요는 없어도 모든 걸 숨길 필요까지는 없을 듯했다. 거르고 남길 사
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처음 후계 수업을 받을 때부터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관심이 있거든요. 정세진 씨한테.’
‘…….’
김 실장은 그게 대체 너한테 왜 있냐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
었는데, 그 생각이 똑똑히 전해지니 우스운 일이다. 잠시 말없이 있던 그는 이내 재
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내게 내밀었다.
‘혹시 본부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해가 빨라서 좋군요.’
예나 지금이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상대였다. 뭐, 아쉽게도 그쪽이 모시는 본부장
은 오늘 이후로 ‘본부장’이 아니게 되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 또한 정세진을 지키
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그의 최측근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무님, 이제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원 장식과 테이블 구조, 그리고 그에게 끼워 줄 반지까지. 모든 부분을 꼼꼼히 살
폈더니 대기는 생각보다 꽤 길어졌다. 사실,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식일 필요는 없는
데. 모든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야겠단 생각에 욕심을 부린 결과가 이거였다.
‘준비되셨으면…….’
직원을 시켜 약혼식의 시작을 알리고, 정세진을 맞이하기 위해 정원 한가운데에
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넥타이를 매만지며 바라본 장지문은 결혼식 날 보았던 것
과 정확히 일치했다. 같은 장소지만 다른 순간. 그리고 그때와는 달라야 할 너
와 내 첫 만남.
문득 궁금했다. 너는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느끼는 만큼, 너 또한 내 감
정을 느끼고 있진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