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22화 (122/131)

외전1 16화. Pour Sejin(3)

뱃속이 간지러울 만큼 상냥한 물음이었다.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손바닥에 얼굴

을 기대자, 정세진이 소곤소곤 속삭였다.

“비를 좋아한다던 사람이…… 정작 비가 오자마자 기분이 엉망이길래.”

가끔은 그와 각인했단 사실이 안타깝게 여겨질 때가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그대

로 들키는 바람에 도무지 괜찮은 척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한때 헤어져 있

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속내를 들켰을 터였다.

“왜, 누가 또 일을 못 해요?”

“……아니.”

픽, 바람 빠지듯 웃음을 흘렸다. 그 또한 장난이었는지 무어라 더 묻지 않고 손을 미

끄러뜨렸다. 턱을 따라 내려간 손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얼굴에서 떨어졌다.

집으로 향하는 길엔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듯 빗소리마저 듣기 좋았다. 조수석에 앉

은 정세진이 특유의 나긋한 말씨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비 오

는 날 어떤 냄새가 나고, 그걸 어떻게 향수로 만들 건지. 보잘것없는 눅눅한 공기조

차 그의 입에서 나오니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래서 다음 시즌엔…….”

아마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술이 들어가면 평소보다 살짝 말이 많아지는 경향

이 있다. 말꼬리는 길게 늘어나고 목소리는 한층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꿈을 꾸듯 감

미로운 음성은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들으면 유독 간지럽게 다가왔다.

“장마 시즌에 맞춰서 출시하려고요.”

“괜찮은 계획이네.”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굳이 깨뜨릴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

지 않을 생각이었다. 널 팔아넘긴 남자가 사실은 친척이 아닌 부모를 죽인 살인범

에 불과하다고. 정 회장이 그를 교도소에 집어넣어서, 내가 오늘 그 사람을 만나고 왔

다고 말이다.

다 아문 상처를 헤집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다. 다행히 각인은 이런 자잘한 생각

까지 공유해 주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내 음습한 마음까지 다 들켰을 테지.

목적지는 익숙하게 정세진의 집이었다. 하도 내 집처럼 드나들었더니 이제는 그 또

한 자고 갈 생각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직접 매준 넥타이

니 직접 풀어 달라며 장난스레 몸을 기대 왔을 뿐이다.

“그래서…… 얘기 안 해줄 거예요?”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땐, 품에 안겨 있던 그가 넌지시 물어 왔다. 내심 찔렸지만 아

무렇지 않은 척 흘긋 그를 내려다봤다. “뭘?” 그렇게 되묻자 정세진이 아무렇지 않

은 투로 대꾸한다.

“오늘 있었던 일을?”

내 기분이, 그렇게까지 안 좋았던 모양이다.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여태껏 신

경을 쓰고 있을 정도로. 이럴 줄 알았으면 딴생각 못 하게 욕실에서 체력을 다 빼놓

을 걸 그랬지.

“그냥.”

“…….”

“보고 싶어서 그랬어.”

그리 대답하며 드러난 이마에 살짝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는 간지럽다는 듯 눈가

를 찌푸리며 헛웃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리 불안은 개한테만 있는 줄 알았는데.”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참 나…….”

내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따질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가만

히 입을 다물고 잠시간 나와 시선을 맞췄을 뿐. 꾸물꾸물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내 입

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오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소리 없이 떨어진 입술이 감질나기 짝이 없었다. 조금 더 깊은 입맞춤을 나누고 싶

었으나 그가 말을 시작하는 바람에 그냥 얌전히 뒷말을 기다렸다. 그는 조심조

심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가 아직 당신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구나…….”

“…….”

“이 사람이 기분이 나쁜데, 그 이유가 짐작조차 안 갈 만큼 아는 게 없구나.”

그 이유가 짐작이 가면, 그건 점쟁이를 해도 될 정도인데.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에 대뜸 한마디가 더 흘러나왔다.

“권이도 씨는 나에 대해 다 알잖아요.”

“…….”

뭘 알고 하나 싶을 만큼 절묘한 말이었다. 하나 그냥 타이밍이 맞았을 뿐인지, 그

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눈꺼풀이 깜박일 때마다 몽롱한 눈동자가 예쁘

게 드러났다.

“그러니까 권이도 씨 얘기를 해줄래요.”

그 제안은 차마 거절하지 못할 만큼 상냥했다. 협박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원도 아

니었는데, 담담한 요구가 이다지 마음에 와닿을 줄이야.

“그렇게 많은 걸 물어봤는데, 정작 중요한 걸 안 물어봤더라고.”

그가 내게 무언가 물어본 건 비단 지금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했

던 그 날에도, 내가 그에게 청혼했던 생일에도, 그는 조곤조곤 이런저런 것들을 물

어 왔다. 그가 모르는, 나만이 아는 지난날들. 홀로 짐작했을 게 분명한 그가 없

는 내 시간들을.

“내가 죽은 뒤에 어떻게 했어요?”

“…….”

내 말문을 막을 사람은 아마 정세진밖에 없지 않을까. 나를 이렇게 당황하

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전부일 터였다.

“권이도 씨가 그랬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라고. 근

데…… 내가 당신 눈앞에서 죽었으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게 미안하다는 듯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면

서 내 뺨을 살며시 감싸 왔고, 또 한 번 가만히 입술을 마주 댔다. 맞닿은 입술이 사근

사근 부드럽게 움직였다.

“궁금하기보다 걱정이 돼서요.”

“…….”

“나를 다시 만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조

금씩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기뻤을까, 아니면 무서웠을까.”

두 번의 삶을 함께하면서 미처 전하지 못한 순간들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 어

쩌면 평생, 그에겐 전할 생각 없던 시간들을, 정세진은 지금 묻고 있었다.

“뭐…… 얘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퍽 너그러운 제안이었으나 사실은 빈말임을 알고 있다. 내가 지금 말하지 않으면 그

는 하염없이 자신이 모르는 과거를 짐작해 볼 터였다. 그럼에도 다시 묻는 일은 없

을 테니, 어쩌면 이건 내게도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다.

“……네가 죽은 뒤에.”

그는 적당히 취해 있었고, 나 또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전해지는 페로몬

은 무척이나 상냥했으며 나를 보는 시선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온화했다. 그래서 그

가 보여 주는 온기를 따라, 그간 덮어 놨던 기억들이 하릴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

정세진이 죽고 며칠간,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재에 틀어박혔다. 해야 할 일

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그 무엇도 돌아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잔잔

한 침묵 속에,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지나온 날들을 반추하는 것뿐이었다.

장례는 치르지 못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이미 숨

이 끊어진 너를 품에서 놓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누군가 쉴 새 없이 다녀가는 동안에

도,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순간이 흐리게 지워졌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그 생각을 끝도 없이 했다. 살면서 후회할 만한 실수

를 한 경험이 드문데 그 최초의 잘못이 모든 걸 망치고 말았다. 잘못을 바로잡을 방법

은 기적밖에 없건만, 그 기적조차 바라지도 못할 만큼 깊은 절망에 잠식되고 말았다.

‘……잘 지내봐요, 한번.’

너는 내 눈앞에서 죽었고, 숨이 멎는 순간엔 우리의 각인마저 끊겼다. 짙은 피 냄새

가 네 페로몬을 뒤덮어서 너를 기억할 흔적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존재의 부

재를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 생명이 스러지는 순간만큼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

다.

믿고 싶지 않았다. 네가 진짜 나를 떠났다는 사실을.

카펫에 남은 핏자국조차 지우지 못했다. 그 끔찍한 흔적이 네가 살아 있던 증거 같

아서, 마지막에 쥐고 있던 총에서조차 네 온기를 찾았다. 그 모든 걸 모아 봤자 네

가 되지는 않는데, 등신처럼 그 무엇도 놔버릴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권이도. 너 이번 일 수습하려면…….’

그 말을 누가 했더라. 아마 누나가 아니었나 싶다. 무어라 더 이야기하는 목소리

가 들렸지만, 내게는 말이 아닌 단순한 잡음에 불과했다. 머릿속이 웅웅거리며 울리

는 바람에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내 손으로 모든 걸 망쳤다. 늘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들이 사실은 마지막

의 마지막 여지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다시는 되살리지 못할 불꽃이, 모

든 걸 태운 뒤에 나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 놓고 말았다.

화가 났던가. 그게 아니면 절망스러웠던가.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서 미

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누구든 그냥 탓할 상대가 필요해서 이미 감옥

에 갇힌 권이정이라도 내 손으로 끄집어내고 싶었다. 종국에는 욕지기가 솟구치는 바

람에 숨도 쉬지 못한 채 목 언저리를 움켜쥐어야만 했다.

그러나 화를 낸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 있는 모든 물건을 부순다고 해

서 정세진이 내 곁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바쳐도, 돌이

킬 수 없는 일이 세상에 존재했다.

처음엔 시집을 찾았고, 그다음엔 하염없이 그의 흔적을 덧그렸다. 그 반듯한 글씨

를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속이 문드러지는 기분이 들 땐 하릴없이 눈을 감았다. 그

럴 때면 그의 얼굴이 지독히 떠올라서 가시를 삼킨 것처럼 내장을 다 뜯어내고 싶었

다.

그래서 참다 참다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긴 것이다. 계속 서재에 있다간, 네 죽음

에 뒤덮여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아니, 애초에 벗어날 생각이 없었기에 발걸

음을 돌려 계단을 오른 거였지만.

‘…….’

3층 끝자락. 웬만해선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다섯 손가

락 안에 꼽힐 만큼 드물게 찾았던 장소.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초라했다. 구석에 놓인 캐리

어, 그리고 책 몇 권. 계절이 세 번 바뀌는 사이 사용했다기엔 지나치게 가짓수가 적

은 옷가지. 지난 몇 달간 사용하지 않은 방이라는 걸 감안해도 이렇게까지 생활감

이 없는 건 말이 안 된다.

‘딱히 갈 데가 없어서요.’

어쩌면 단 한 순간도 이곳에 정착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짐을 늘리지 않

은 것도,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던 건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가지려고 들지 않

은 건, 그 모든 게 미련이 되리란 확신이 있어서였을 테고.

‘감사한 일이죠. 저한테는 과분한 자리니까.’

욕지거리가 나왔다. 이곳에서 네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 것 같아서. 제게는 과분

한 자리니까 그냥 머물러야 한다고. 더 많은 공간을 바라는 건 그저 사치일 뿐이라

고 여겼겠지.

‘권이도 씨 페로몬이 수면제보다 낫더라고요.’

정신을 차렸을 땐 방에 있는 옷을 모두 챙기고 있었다. 네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

은 물건을 품에 안고 아주 오랜만에 내 방으로 돌아갔다. 새카맣게 번진 핏자국 대

신 미미하게 남은 페로몬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네가 죽은 흔적이 아니라, 살아 있었

다는 흔적 속에 하루를 보내고 싶어졌다.

‘오빠한테 꽃 냄새 나.’

새하얀 꽃잎에 가득 둘러싸이면 이러할까. 향긋하고 포근한 향기는 그 무엇보다 정

세진을 닮아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잠깐 그의 품에 안겨 있단 착각

이 들 정도로.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든 페로몬이, 그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 말

도 안 되는 희망이 생길 만큼.

그러나 모든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 마련이다. 정세진이라는 사람을 박

제할 수 없듯이, 그가 남긴 흔적 역시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

지던 그 순간처럼, 유일한 위안이었던 페로몬조차 영구히 지속되지 않았다.

‘정세진입니다.’

그런데 왜, 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지는 걸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

를 떠나던 그 순간까지. 원래는 흐릿했던 장면들이 그려 놓은 것처럼 선명했다. 그

의 생각에 매몰된 채 매일을 보냈더니, 사소한 한마디조차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세진아. 내가 무슨 짓을 해야 너를 되찾을 수 있을까.

이제 와 속죄한들 네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매 순간순간 그와

의 과거를 되새겨 봤자, 그 어떤 속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기억

을 되짚어 내 모든 행동을 반성해도, 이미 떠나 버린 네게는 결코 닿지 않을 터였다.

‘임신하셨네요.’

하나 그 사실을 알리지 말았다면 달랐을까.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그때 각인하지 않았다면 기회가 있었을까.

‘그렇게 씹질이 좋으면 말로 했어야지.’

그딴 말을 내뱉기 전에.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거든.’

그따위 도발을 하지 않았다면.

‘다리를 못 벌리면 입이라도 잘 벌려야지.’

그렇다면 지금처럼 최악의 결말이 되진 않았을 텐데.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 볼래요.’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울지 마, 세진아.’

뒤죽박죽 섞인 기억은 테이프를 감은 것처럼 서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뺨

을 때리지 말고 품을 내어 줄걸. 비 내리는 하늘 아래 그를 더 면밀히 살펴볼걸. 바라

는 거 없는 그에게 모든 걸 쥐여 주고 오만함 대신 자상함으로 그라는 사람을 붙잡

아 볼걸.

‘오빠도 밥 혼자 먹는 거 싫어한대.’

‘제 방엔 욕조가 없거든요.’

‘불편하시면 내일부턴 방에 있겠습니다.’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 끝도 없이 떠오르고, 너를 상처 입힌 말들이 다시금 돌아

와 나를 난도질했다. 내 손으로 만들어 낸 그의 모든 환경이, 미미하게 가 있던 균열

들이 조금씩 그를 좀먹어 끝내 집어삼키고 말았다.

‘너 이러다 죽어.’

글쎄,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딱히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살

아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이런 식이면…….’

그다음 말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선호를 줄 수 없다고,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

다. 전부 포기하기엔 아깝지 않냐는 질문 역시 내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복도를 가로질러 서재로 향했다. 언젠가 정세진

도 이 길을 걸었을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꾸만 온몸이 한쪽으로 기울었

지만, 겨우겨우 중심을 잡고 핏자국이 남은 카펫 위로 걸어갔다.

‘…….’

총은, 여전히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집안에서 무슨 수를 썼는지, 경찰은 내게 아무

런 책임도 물지 않았다. 제대로 된 유가족조차 없는 그의 죽음은 돈과 권력으로 묻기

에 아주 좋은 마지막이었다.

네가 이 사실을 알면 조금은 억울하지 않을까. 정말 죗값을 받는 건 정세진 하나뿐

이라는 생각에 총구를 눈앞에 두고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러다 죽는다고 말할 거

면 총부터 뺏었어야지. 전부 포기한 것처럼 보이던 정세진이 마지막에 포기

한 게 제 삶이었는데.

망설이진 않았는데,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엔 나를 보고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래서 웃었구나. 막연한 깨달음도 함께였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나를 뒤덮은 건, 다

른 무엇도 아닌 해방감과 현실감이었으니까.

‘잘 지내요, 권이도 씨.’

그는 정말 이 세상을 떠났고, 더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는 내 곁으

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대에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고작 소유욕 따위가 아니었다. 물

론 그 지저분한 감정을 연심이라 일컫기엔 그에게 너무 실례일 테지만.

‘저는 정말 바라는 게 없습니다.’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네 모든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으면 했다. 다시 처음부

터 시작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걸 오로지 나 하나만 기억하길 바랐다. 내가 너를 아프

게 했다면, 내 멍청한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길. 그리고 이번엔 같은 잘못을 반복하

지 않길.

멈췄던 시간이 흐르듯,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조

차 없어서, 여태껏 드러내지 못한 미련의 한 줄기였다. 내 실수에 대한 후회도, 그

를 잃은 것에 대한 절망도 아닌, 온전히 이미 사라져 버린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 비슷

한 것.

‘저희 기업의 오메가를 드리겠습니다.’

아, 장례를 치러 줄 걸 그랬다. 너를 애도하진 못해도 마지막까지 혼자 보내면 안 되

는 거였는데. 미련조차 욕심임을 또 한 번 간과하고 말다니.

‘죽으려고?’

‘……아뇨.’

‘…….’

‘자려고 먹은 건데.’

죽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질없었다.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이 잠잠해

진 다음엔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안식 속에 고요히 파묻혔으니까. 마치 깊은 잠에 빠

져드는 것처럼,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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