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21화 (121/131)

외전1 15화. Pour Sejin(2)

사람의 형질은 부모로부터 유전되고, 태어난 순간 정해져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다. 우성이면 우성일수록 특이 형질을 낳을 가능성이 커지는 데 반해, 베타와 베타 사

이에선 절대 알파와 오메가가 나올 수 없었다.

이 단순한 논리는 내가 정세진의 부모를 알아보기로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는 우성 오메가였고, 자연스레 그의 부모 역시 알파와 오메가였을 테니까. 특이 형질

이 고위층에 밀집돼 있는 사회에서, 그의 어린 시절이 찢어지게 가난할 이유가 대

체 뭐란 말인가.

−여보세요?

“응, 세진아.”

오후가 지날 즈음, 정세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의 이름이 뜨자마자 반갑

게 전화를 받았지만, 그 용건은 그다지 달가운 종류가 아니었다.

−새로 온 직원들 환영회 때문에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얼마 전 ‘Sejin’의 신입 사원을 뽑았다고 했던가. 그의 손으로 직접 뽑은 직원들이었

고, 당연히 조만간 환영회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쓸데없이 친화력 좋은 직원들은 젊

은 대표와의 술자리를 지나치게 좋아했으니.

“술은?”

−……조금?

말해 놓고도 멋쩍은지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는 술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

이, 어느 순간부터 적당히 취하는 즐거움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알아서 잘 조절하

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지만, 그에게 엉겨 붙던 직원들만큼은 신경 쓰였다.

“그 대리 옆에 못 앉게 해.”

−누구…… 아, 박 대리?

그 사람이 박 씨였나. 우리가 헤어졌던 시절, 회식 자리에서 정세진의 품에 안겼

던 그 덩치 큰 직원. 회사에 뼈를 묻건 말건 내 알 바 아니었고, 정세진에게 딱 붙어 있

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요새 내 옆에 안 앉네. 술버릇도 좀 고친 것 같고.

“다행이네.”

당연히 고쳐야지. 그날 구태여 화장실까지 따라가 말을 건 이유가 뭔데.

‘헉, 전무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별건 아니고.’

전화를 하는 척 화장실로 향했을 때, 직원은 세면대 앞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취

한 척 수작을 부리던 건 아니었는지, 세수를 하고도 제법 취기가 오른 얼굴이었다. 그

래서 방법을 바꿔 제법 온건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더랬다.

‘내가 잘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자리가 머니까 영 불편해서요.’

‘……잘해 보고 싶은 사람이요?’

‘네, 잘해 보고 싶은 사람.’

만약 정세진이 들었다면 질색하며 진저리를 쳤을 화제였다. 그 당시 우리 관계를 떠

올리면 확실히 월권이 분명한 행동이었다. 하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와의 거리

를 좁힐 방법이 없었다.

‘누군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죠?’

척 보기에도 가십거리를 좋아하게 생긴 직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빨개진 얼굴로 고

개를 끄덕였었다. 나름대로 의리랄 게 있었는지 술자리로 돌아온 뒤엔 모르는 척 나

와 자리를 바꾸기까지 했다. 물론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 이후에도 몇 번이나 비

슷한 실수를 반복했지만 말이다.

−설마 해서 묻는데, 권이도 씨가 박 대리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죠?

“설마.”

조만간 뭐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거리더

니, 다행히 어느 순간부터는 자리를 아예 멀리 앉는 모양이다.

“그래서 얼마나 늦는데?”

−그냥 평소랑 비슷하게…….

늘 그랬듯 1차만 하고 나올 거라며, 정세진은 가게 이름과 대략적인 시간을 알려 줬

다. 장소는 항상 가곤 하는 소고깃집이었고 평소처럼 그리 늦게 끝나진 않았다. 내

가 얌전히 알겠다고 답하자, 정세진이 의아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웬일로 온다고 안 해요?

‘Sejin’의 회식 자리에 내가 참여하는 건 언제부턴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

다. 처음엔 조금 꺼리는 것 같던 정세진도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굳이 나를 말

리지 않았다. 아마 직원들이 불편해하지 않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어진 모양이다.

“나도 오늘은 들를 데가 있어서.”

평소라면 아쉬울 일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그의 회식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일하

는 중엔 시간을 낼 수 없고, 퇴근 후엔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언제 시간

을 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적절한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갈게.”

나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무심코 옆에 놓아둔 메모지를 바라봤다. XX교도소. 정세진

의 ‘먼 친척’이라던 남자가 있는 곳이었다.

***

날이 어두워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맑은 날이 계속되더니 그 설욕을 하

듯 거센 장대비가 쏟아진 것이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와

이퍼조차 그 빗방울을 모두 닦아 내지 못했다.

시간은 어느덧 회식이 파할 때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늦진 않을 텐데, 아슬아

슬하게 딱 맞춰 도착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퇴근 시간이 지난 덕에 도로엔 오고 가

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멀거니 흠뻑 젖은 도로를 응시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

리가 운전을 하는 내내 시끄럽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사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음

에도 머릿속에 떠오른 잡생각이 그 모든 것들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용건은 10분 내로 끝내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 전, 앞서 들른 교도소는 정세진을 데리고 있던 남자가 수감된 곳이었다. 사전

에 예약하지 않은 면회는 엄격히 제한되나,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는 법이었

다. 나는 정확히 10분 만에 투명한 창 하나를 놓고 남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20년 전에 그쪽이 데리고 있던 아이에 관해 물을 게 있는데.’

‘…….’

남자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하얗게 센 머리는 반쯤 벗겨졌

고, 눈 밑이 퀭한 얼굴은 시체처럼 검게 죽어 있었다. 외모만 보면 그가 저지른 범죄

가 마약 복용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그쪽이 해신금융 회장한테 그 애를 팔았다지.’

‘……아, 정 회장.’

발음은 질질 새는데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크릴판 너머

로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조금 전까지 멍하니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상

태를 살피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자, 그가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며 이죽거렸다.

‘왜, 너도 그 오메가가 탐나서?’

드러난 앞니는 잇몸이 다 내려앉아 누렇게 변해 있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모습

이었는데, 이어진 뒷말이야말로 듣기에 더 거슬렸다.

‘씨팔, 그때 그 애새끼를 팔아먹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다시 흐느끼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

를 들썩이더니, 별안간 수갑 찬 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기도 했다. 이내, 마이크를 통

해 전해진 음성은 과거의 자신을 향한 후회가 가득했다.

‘술값 한번 벌어 보겠다고 그걸…….’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자를 찾아간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정신

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냥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즈음, 남자의 입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여우 같은 년이 문제야. 지랑 꼭 닮은 애새끼로 나를 홀려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알았다. 남자가 말하는 여자가 정세진의 모친이라는 것을. 정세

진이 말하길, 남자는 늘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고 했으니.

생각을 고쳐먹는 건 금방이었다. 나는 우선 차분히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두

서없이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집중해서 들으면 알아듣지 못할 것도 없

었다.

‘낸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러니까 애초에 왜 그 알파 새끼랑 결혼을 하냐

고, 응?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처음엔 혼잣말처럼 떠들던 남자는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대

놓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전혀 개의

치 않았다. 마치 오랜만에 대화할 상대가 생겨서 신난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 계집애를 스무 살에 만났거든.’

그렇게, 인내심 있게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러했다.

젊은 시절, 그는 한 여자를 좋아했으나 형질 차이를 이기지 못해 헤어지고 말았

다. 여자는 곧장 다른 알파와 결혼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정세진이라는 것이다. 여

기까진 그래, 흔한 신파라고 칠 수 있지만 그다음부터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다.

‘그래서 그 집에 불을 질렀어.’

‘…….’

뒤늦게, 나는 남자의 죄목을 떠올렸다. 방화로 인한 살인. 그가 무기징역을 선고받

은 이유였다.

‘둘 다 뒈졌지. 애새끼는 내가 데려왔고.’

박 비서가 가져다준 자료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남자가 불을 질러 정세진

의 부모가 사망했고, 사건은 사고로 위장돼 수면 아래에 묻혔다고. 갓난아이의 유골

을 끝내 찾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가족이 모두 죽은 걸로 처리돼 있었다.

‘인생은 말이지, 결국엔 다 운이라 이거야. 그렇게 허술하게 불을 질렀는데 날 찾

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씨팔, 그게 말이 돼?’

운이 아니라 돈이라고 해야 맞았다. 부부의 재산을 탐낸 이들이 범인을 잡기보다 유

산 상속에 급급해한 결과였으니까.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해야 할지. 아니, 이 또한 운

이라면 운이긴 했다.

‘그래서 그 어린 걸, 응? 내가 먹이고 입혀서 몇 년을 키웠는지 알아?’

‘…….’

‘7년이야. 자그마치 딱 7년.’

두 살. 정세진이 납치된 나이였다.

‘근데 그걸…….’

이후에 이어진 말로 나는 그가 정세진을 팔아넘기고도 몇 번이나 정 회장을 찾아갔

단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정 회장은 정세진을 돌려주긴커녕 묻혔던 방화 사건

을 끌어올려 남자를 교도소에 수용시켰다. 멍청하게, 주제도 모르고 덤벼든 결과였

다.

‘남자 새끼가 오메가만 아니었어도 진작 갖다 버리는 건데 하필 그년을 닮아

서…….’

그가 내비친 감정을 감히 후회라고 불러도 될까. 우습게도 그 말을 하는 남자에게

선 약간의 미련이 느껴졌다. 제가 가지지 못한 오메가를 향한, 지저분하고 광적인 집

착 말이다. 그 대상은 아마, 정세진이 아닌 그와 닮았다던 모친이겠지.

‘그깟 형질이 뭐라고 그딴 알파랑…….’

경찰은 이 사건을 특이 형질을 노린 범죄라고 종결시켰다. 세간에 범죄 소식이 알려

지지 않은 건, 정 회장이 뒷얘기가 나오지 않게 모든 걸 돈으로 묻은 덕이었다. 그 무

능력한 인간이, 딱 하나 도움 되는 일을 해놓았다.

‘그래서…… 넌 뭔데? 기자야?’

나는 남자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처럼 안 보인다

고 중얼거리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어딜 가냐며 소리쳤다. 뒤에서 버럭버럭 고함치

는 소리가 들렸지만, 원하는 정보를 얻었으니 더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교도소 밖으로 나온 순간부턴 내내 더러운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기분

이 계속 하락세를 그려서, 나중엔 차창에 맺히는 빗방울마저 거슬릴 정도였다. 짜증

스럽게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가 짧게 혀를 차며 속을 억누르길 반복했다.

‘버릴 수가 없었어. 씨발…… 너무 닮아서…….’

남자의 감정은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형태였다. 그 비루한 사고를 생각하면 여자

와 헤어진 이유 역시 딱히 형질 탓은 아닐 게 분명했다. 아니, 애초에 ‘헤어졌다’라

는 전제조차 그의 주장일 뿐이니, 그 또한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닐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 보잘것없는 남자는 정세진의 부모를 죽이고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괜

찮은 집안에서 태어나 무난한 삶을 살 수 있던 사람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떠밀어 버

린 것이다. 당연히 비난해 마땅한 일이었는데, 정작 그 혐오는 오로지 남자에게만 향

하지 않았다.

“…….”

그래, 내가 감히 누굴 비난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 질 낮은 집착과 미련을 아직까

지도 버리지 못했는데.

‘나 아니었으면 뒈졌을 놈이야. 친척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서…….’

정세진에게 제대로 된 친인척이 없단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안도

였다. 그에게 아무런 보금자리도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를 붙잡을 구실을 하

나 더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불쾌감이 일었다.

그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내가 망가뜨린 과거

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모든 발판을 마련해 주고 떠날 생각이었단 말이다. 그런

데 그 개만도 못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

한참 생각에 잠긴 와중에 저 멀리 ‘Sejin’의 회식 장소가 보였다. 아직 회식이 끝나

지 않았는지, 정세진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

산을 챙기자, 그제야 입구에서 우르르 직원들이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표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늘 고생하셨어요!”

북적거리는 말소리가 빗소리에 뒤덮였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굳이 노력하지 않아

도 한눈에 정세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직원들 틈에 섞여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이 내리는 빗속에서도 유독 선명히 다가왔다.

“다들 내일은 천천히 출근해도 됩니다.”

회식 자리가 싫으면서도 좋은 건, 그와 함께하는 밤이 조금 여유로워지기 때문이

다. 결국 저녁 시간대를 놓치니 조삼모사나 다름없었지만, 야심한 시간대를 공유하

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으니. 주말이 아니면 조심스럽게 구는 정세진이, 이럴 때는 적

극적으로 나서곤 했으니까.

“2차 갈 사람?”

“오늘도 노래방 가요?”

“역시 비 올 땐 노래방이지!”

나는 제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 모든 풍경을 방관했다. 2차를 가기로 한 무리가 식

당 앞을 떠나고, 뒤이어 불콰하게 취한 이들이 택시를 타고 떠날 때까지. 정세진

이 김 실장에게 무어라 지시한 뒤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우산을 건네받는 모습까지

도.

“…….”

“…….”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는 것처럼. 단 한 순간도 헤매지 않고 나를 바라본 그가 우산을 들고 느릿느릿 내 쪽으

로 걸어왔다.

가슴 언저리가 뻐근하게 옥죄였다. 언제부턴가 정세진을 보면 느껴지는 기분 좋

은 설렘이었다. 두근, 두근, 달음박질하는 심장이 내 것인지 아니면 그의 것인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도 내가 매준 넥타이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차림이었

다. 아침과 똑같이 단정한 정장을 입고, 늘 그랬듯이 올곧은 걸음으로 내게 다가온

다. 감질날 만큼 느리게, 가까이 다가온 그가 대뜸 건넨 말은 이거였다.

“비 맞는 거 좋아해요?”

“…….”

그 언젠가를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모양 좋은 입술

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때는 그 수려한 눈매 역시 곱게 휘어

졌다.

“앞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입술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엷은 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순간, 나

도 모르게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답이라는 것처럼, 그가 한 발

짝 더 내 쪽으로 다가왔다.

“…….”

그의 손에 들린 우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동시에 그는 내 우산 밑으로 들어

와 살짝 허리춤을 붙잡았다. 실로 느린 속도였으나, 내게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찰나

의 순간처럼 여겨졌다.

“…….”

“…….”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숙이자, 그가 발뒤꿈치를 살

짝 들어 올렸다. 토독, 톡, 우산을 때리는 빗줄기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입술이 맞닿는 순간엔 나빴던 기분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분명 술을 마셨을 텐

데, 그에게선 오로지 향긋한 페로몬만 느껴졌다. 비를 맞은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

듯, 화사한 꽃향기가 내 온몸을 감싸 왔다.

그는 한동안 입을 맞추고 있다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입술을 떼어 냈다. 아쉬

움을 가득 담고 그를 내려다보자, 왼손을 들어 내 뺨을 살짝 어루만진다. 조심조심 엄

지로 눈가를 문지른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제 기분 좀 좋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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