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20화 (120/131)

외전1 14화. Pour Sejin(1)

“…….”

번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

왔다. 전체적으로 하얀 색감의 인테리어, 그리 높지 않은 천장과 포근한 침구. 그리

고 품을 파고드는 따듯한 온기까지.

고개를 살짝 숙이자, 보드라운 머리칼이 턱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코끝을 스치

는 샴푸 냄새엔 희미한 꽃향기 역시 섞여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 속눈썹이 길

게 드리우고,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가느다란 비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그제야, 나는 야트막한 숨결을 삼키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서서히 의식

이 돌아온 그곳엔 곤히 잠든 누군가와 나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

아 있던 잠기운은 그가 비비적거리며 내 품을 파고드는 것으로 지워졌다.

“…….”

정세진이었다. 나와 결혼했던, 그리고 나와 약혼했던 정세진. 아무 미련 없이 나

를 떠났다가 긴 시간을 돌아 다시 내 앞에 나타난 나의 연인.

“아…….”

목까지 차오른 탄식엔 감히 이름도 붙이지 못할 벅찬 마음이 가득했다. 그 감정

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꼭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

다. 조금 버겁다시피 팔에 힘을 주자 그가 움찔거리며 끄응 앓는 소리를 낸다.

“으…… 더 못한다니까…….”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마저 달큼하게 들렸다. 깨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

는 순간 다시 재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꿈이고, 이제는 지난 과거라는 사실

에, 놀라울 만큼 안도감이 들었다.

“세진아.”

“으응.”

그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한 움직임이었으나 그에게 온 신경

이 쏠린 터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그제야 정

세진이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잠기운 가득한 두 눈에 일순 알 만하다는 빛이 스쳤다. 올곧게 나를 향하는 두 눈

은 꿈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퍽 따사로운 것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듯 체념 어린 감

정 대신 약간의 걱정과 애정이 들여다보였다.

“……또 악몽 꿨어요?”

대답은 굳이 필요 없었다. 그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자세를 편안하게 고쳤

다. “애도 아니고.” 그러한 중얼거림 역시 굳이 알은체할 필요 없었다. 내 품에서 벗어

나는 대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그가 등 언저리를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쉬이…….”

조심스러운 손길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했다. 등 언저리를 살살 어루만지다가 다

시 자라는 것처럼 토닥토닥 다독인다. 정작 다시 잠이 든 건 본인이었지만, 불안하

던 마음은 한결 진정됐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내 눈앞에서 죽었던 정세진은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더는 내게 이별을 고하지

도, 내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도 않는다. 그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

실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

‘그래.’

‘…….’

‘그렇게 결혼하자.’

그에게 청혼한 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우리는 매일같이 함께 잠

이 들었고 같은 침대에서 눈을 떠 비슷한 하루를 반복했다. 근래 들어 최상의 컨디션

을 유지하는 정세진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더없이 다정한 얼굴로 웃곤 했다.

그는 더 이상 수면제를 먹지 않았고, 상담은 여전히 일주일에 2회씩 받고 있다. 요

새는 일과 결혼 준비로 바빠서 한 번으로 줄일까도 고민 중이라고 한다. 불면증이 나

은 건 내 덕분이라고 말하지만, 이제는 내가 없어도 곤히 잘 잘 수 있다는 사실을 알

고 있었다.

내가 바라고 염원하던 결과였다. 더는 아프지 않은, 모든 걸 기억하고도 내 곁에 남

은 정세진. 절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와의 기적 같은 미래.

다만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언젠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불안해졌다는 것 정도.

“상담이라도 받아 볼래요?”

출근을 앞둔 시간, 정세진은 넥타이를 매다 말고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침대에 걸

터앉아 그쪽을 바라보자 거울 너머로 가만히 시선을 맞춰 왔다.

“계속 잠을 못 자는 것 같길래.”

걱정 어린 눈빛이 마냥 기분 좋았다.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음

에도 귓가에 또렷하게 감겼다. 말씨가 곱고 부드러운 덕에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

해졌다.

“내가 다니는 병원 의사가 괜찮거든요.”

아마 그는 내내 아침에 있었던 일을 곱씹은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난 내가 하염없

이 그를 끌어안고 있던 그 순간을. 비몽사몽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속으로 많은 생각

을 한 게 분명했다.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 정도면 잘 자는 편이야.”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대답하자, 그가 눈썹을 삐쭉 치켜올렸다. 벌어진 입술 틈에

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되물음이 튀어나왔다.

“그게?”

“예전보다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하루에 채 네 시간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그를 잃

었던 날로 돌아가는 듯해서,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드는 게 몹시 겁이 났기 때문이

다. 지금은 아주 가끔 악몽을 꿀 뿐이니, 그때와 비하면 훨씬 낫지 않나.

“으음…….”

그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

다. 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뒤

에서 끌어안듯 손을 뻗자 그가 힐끔 내 쪽을 돌아본다.

“내가 불면증으로 당신 걱정을 들을 줄이야.”

반쯤 매다 만 넥타이를 느릿느릿 풀어 내렸다. 이대로 다 벗기면 좋으련만, 아쉽게

도 여유를 부리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그래서 언젠가 그가 해줬던 것처럼 얌전히 그

의 목에 넥타이를 매줬다.

“……이 옷에 엘드리지 노트는 과한데.”

“조금 과해도 돼.”

“이건 또 어디서 배웠어요?”

“원래 한 번 보고 잘 배워서요.”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따라 하자 정세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남들 앞에

서 보이는 사무적인 미소가 아닌, 정말 기분 좋을 때만 나오는 상냥한 미소였다. 그

냥 떨어지기 아쉬워 귀 아래쪽에 쪽 입을 맞추자, 그가 간지럽다는 듯이 목을 움츠린

다.

“넥타이핀은?”

“아, 거기 골라 놨어요.”

“내가 선물한 건 어쩌고.”

“그건 평소에 너무 과하다니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무난한 디자인의 은색 넥타이핀을 집었다. 촉감이 부드러운 회

밤색 정장에 그럭저럭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나쁘지 않은 센스였으나, 아쉬

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평소에 하라고 사준 건데.”

정세진의 생일은 4월이었기 때문에 나는 생일 선물로 그의 탄생석이 박힌 액세서

리를 선물했다. 넥타이핀과 커프스, 그리고 손목시계가 그것이었다. 반지와 향수

도 있긴 했지만, 그건 ‘생일 선물’은 아니었으니 제외하고.

“평상시에 다이아를 어떻게 하고 다녀.”

하나 정세진은 선물 받은 다음 날 딱 한 번 사용한 후 받은 물건을 고스란히 보관

해 놓기만 했다. 평소엔 너무 튄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정말 튀는 건 액세서리가 아

닌 그냥 본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대신 반지랑 향수는 항상 쓰잖아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협탁에 놓인 향수병을 가져왔다. 올 4월에 G사에

서 출시된 은방울꽃 향수였다. 매해 새로운 패키지가 출시되기에, 내가 다 써버린 향

수를 대신해 그에게 선물한 참이었다.

향수를 손등에 뿌리는 행동이 우아하기 짝이 없었다. 특유의 나긋한 몸짓은 어린 시

절 과한 억압으로 배운 것이었으나, 간혹 감탄이 나올 만큼 잘 어울렸다. 손등을 살

짝 대고 있다가 잔향을 맡아 보는 동작까지도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권이도 씨도 뿌릴래요?”

내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내 왼손을 가져가 향수를 뿌려 줬다. 약지에는 한

때 끼고 다니던 약혼반지 대신, 얼마 전 그에게 청혼하며 새로 맞춘 반지가 끼워져 있

었다. 그 또한 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가 유일하게 몸에 지니고 다니는 다이아

몬드였다.

“이제 이 향이 사라질 때까진 네 생각을 하겠네.”

그를 놓아주는 대신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그대로 목덜미에 코를 비비적거리

자 그가 기억력도 좋다며 가느다란 웃음을 흘린다. 살랑이며 흘러나온 페로몬이 마음

에 들어서 페로몬샘이 있는 부분을 슬쩍 앞니로 깨물기도 했다.

“자국 내면 안 돼요.”

“안 내.”

이제 와 말리기엔 이미 옷깃 너머에 어젯밤 남긴 열꽃이 잔뜩 피어 있지 않나. 그

리 생각하면서도 나는 순순히 그에게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안심한 얼굴로 내 손

을 만지작거렸다.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기분 좋게 울렸다. 지금의 나처럼 그 또한 설레고 있

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유의 향긋한 페로몬에 묽은 향수 냄새가 섞이는 바람

에, 한 품 가득 꽃다발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전에 중요한 미팅 있어?”

“없을…… 왜요?”

무심코 대답하려던 그는 이내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하여튼 눈치만 빨라서

는. 내 질문이 무얼 의도하는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물론 알아차린 것과 거부할 수 있

는 건 다른 문제이므로, 별반 개의치 않고 목덜미를 따라 입술을 문질렀다.

“아니, 넥타이까지 매줬으면서…….”

“위에는 안 건드릴게.”

매끄러운 살결은 간혹 한입 베어 물면 달큼한 향기가 날 것 같았다. 실제로 그와 비

슷한 냄새가 났으니 틀린 생각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던 그

가 나를 밀어 내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잠까…… 읍.”

그러나 그는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갸름한 턱을 붙

잡고 입술을 맞물렸기 때문이었다.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싸 안자 그가 내 가슴팍

에 양손을 올렸다.

“…….”

유독 발간 입술은 그 촉감마저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곤 했다. 보들보들하고 말랑

한 것이, 그저 대고만 있어도 성감을 잔뜩 고조시켰다. 거부하지 않고 입술을 벌리

는 데엔, 하릴없이 그 입 안을 파고드는 수밖에 없었다.

“……으응.”

그는 간지러운 비음을 흘리며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언제 뒤로 뺐냐는 듯 적극적

인 움직임이었다. 여린 점막을 쓸고 느릿느릿 혀를 문지르자, 그가 파르르 속눈썹

을 떨었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입을 맞추면 눈부터 감는 정세진과 달리, 그 무방비한 모습

을 구경하는 게 퍽 재밌었으니까. 선이 곱고 수려한 눈매는 눈을 감고 있을 때면 특히

나 더 유약하게 보였다.

“…….”

“…….”

쪽, 입술이 떨어졌다. 그는 달뜬 숨을 몰아쉬며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색소

가 엷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고, 특유의 담백한 얼굴엔 나만이 볼 수 있는 욕구

가 떠올랐다.

“세진아.”

괜히 치근덕거리며 그에게 두어 번 더 입술을 문질렀다. 눈가를 움찔거리면서

도, 그는 고개를 돌리거나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내 양팔 안에 갇힌 채로, 말하라

는 듯이 시선을 맞췄을 뿐이다.

“아직 시간 좀 남았는데…….”

“……흣.”

그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 넣자 반쯤 일어선 아랫도리가 느껴졌다. 일부러 꾸

욱 눌렀음에도 눈가를 찌푸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쯤 됐으면, 그 또

한 저항할 의지를 모두 잃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입으로 해줄까.”

“…….”

역시나 은근히 묻는 말에 그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길게 숨을 몰아쉬며 눈

을 내리깔았을 뿐이다. 괜히 마른침을 삼킨 그가 슬그머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

다.

“……그럼 한 번만.”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잠시간 그의 입술에 머무른 뒤 아무 거리낌 없이 제자리

에 무릎을 꿇었다. 곧장 자세를 낮추는 나를 보며 그가 복잡한 얼굴로 눈가를 찌푸렸

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정작 흘러나온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

다.

“습관이…….”

작은 중얼거림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부푼 바지춤에 뺨을 가져다 대는 순간, 완

전히 발기한 아랫도리가 중요했지. 그가 내 얼굴에 발정한다는 사실이, 새삼 이토

록 감사할 수가 없었다.

***

가볍게 시작한 행위는 그가 진짜 늦을지도 모른다며 나를 밀어 낼 때까지 이어졌

다. 입으로 한 번 빼준 게 실수였는지, 이성을 되찾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아쉬

움이 잔뜩 남는 일이었으나, 지난밤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가 날 짐승 새끼라며 욕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그는 회사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 말만 남기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그러다 운전석

에 앉은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주변을 살핀 뒤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어린아이 달

래듯 뺨을 어루만지고는 바람 빠지듯 푸스스 웃어 보이기도 했다.

‘갔다 올게요.’

조심히 다녀오라는 인사도 좋았지만, 그 말은 마치 내게 돌아오겠다는 의미처럼 들

렸다. 아주 잠시뿐일지언정, 뿌리 깊은 불안감이 깨끗이 씻겨 나갈 정도로. 물론 그

가 내 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엔 또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초조함이 엄습하고 말았지

만.

단언컨대, 우리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결혼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

이었고, 이제는 모두가 공공연하게 우리 사이를 알고 있었다. 반지를 낀 그 순간부터

는 알음알음 결혼할 거라는 소문도 퍼져 나간 참이었다.

다만 내 오랜 강박은 정세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나왔다. 눈을 감았다

가 뜨면 그가 사라질 것 같아서, 미래를 약속한 지금에도 이따금 두려워지고 마는 것

이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영위하다가도 불쑥 부정적인 생각이 파고들 때가 있었

다.

그럴 때면 나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정세진을 만나러 가곤 했다. 조금 무리해서라

도 미팅을 잡는다거나, 정 바빠 보이면 프로젝트를 새로 진행한다거나 하는 식이었

다. 손해를 감수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했기에 ‘Sejin’에 이득이 되는 프로그램을 짜

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곤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건 하늘이 도운 기회나 다름

없었으니까. 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른 채, 갑작스레 안겨진 기적이 한순간에 사

라질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이제 와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그때

는 또 한 번 같은 기적을 바라고 모든 걸 내려놓을 수밖에.

“전무님, 말씀하신 자료입니다.”

한창 오전 업무를 보던 중, 이사실로 들어온 박 비서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펜

을 내려놓고 종이를 받아들자, 사무적인 목소리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일전에 지

시한, 정세진의 친부모와 그를 정 회장에게 팔아넘긴 남자와 관련된 자료라고.

‘나 어릴 때 얘기 들을래요?’

그의 생일날, 그는 조곤조곤 작은 목소리로 제 과거를 이야기해 줬다. 어린 시절

에 누구와 살았는지, 어쩌다 정 회장을 만났는지, 그리고 어떤 학창 시절을 겪었는

지 따위의 이야기를. 나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그 가난하고 부족한 과거에 대해서.

‘벌써 20년도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해요.’

지금 머무는 오피스텔 화장실보다 작은 방에 웬 남자와 둘이 살았다고 했다. 형질까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하는 걸 들어 보면 베타인 것 같았다고. 정 회장의 말로

는 먼 친척이라던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자신을 떠맡은 모양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입버릇처럼 그랬거든요. 너 같은 오메가는 언젠가 팔아먹고 말 거라고.’

그 말을 하는 정세진은 담담했으나, 정작 듣는 나만큼은 욕지거리를 삼킬 수밖에 없

었다. 오메가를 팔아먹겠다니. 권이정 같은 놈들이나 할 법한 지저분한 생각이 아닌

가. 물론 실제로 그런 식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나 또한 익히 알고 있

었다.

‘다행인 일이죠. 그렇게 팔아넘긴 게 나 하나 먹여 살릴 능력이 충분한 집안이었으

니까.’

왜 그렇게 바라는 게 없는지, 왜 포기하는 데 익숙한지, 그런 것들을 뒤늦게 알게 됐

다. 애초에 가져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욕심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거겠지. 그래

서 늘 체념 어린 태도로 그 무엇도 가지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 자료 어디까지 믿어도 되지?”

“전부 사실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나는 눈가를 찌푸린 채 손에 든 자료를 꼼꼼히 살펴봤다. 안타깝게도 정세진이 들려

준 이야기엔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가 ‘먼 친척’이라고 칭한 남자는, 그

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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