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13화. Orgueil Et Prejuges(13)
특이 형질의 각인은 서로를 평생 서로에게 종속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구속이었
다. 혹자는 로맨틱한 행위라고 일컬을지 몰라도, 내게는 이보다 더 추잡한 방식은 없
었다. 영혼과 영혼을 묶는, 보다 이기적이고 강압적인 방법. 기억과 감정은 물
론 그 수명까지 맺어지는 비현실적인 약속.
억지로 그를 각인시킨 후, 그는 전원이 꺼지듯 곧장 정신을 잃었다. 집으로 데려
와 주치의를 부르자, 다행히 깊이 잠든 것뿐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주치의는 멍으
로 가득한 손목을 보고 흠칫했으나 현명하게 말없이 묵묵히 주사를 놓을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한 건, 끝없이 CCTV를 돌려 보는 것이었다. 권이정이 집으로 들어오
는 모습, 밖으로 나온 정세진과 마주치는 그 장면,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과 문이 닫히
는 그 순간까지.
방 안엔 CCTV가 없었으니, 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다. 다만 정
세진의 온몸 가득 남은 흔적과 어렴풋이 풍기던 페로몬으로 대충 짐작할 뿐. 그리
고 권이정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밀려드는 데자뷔를 느끼고 반쯤 확신할 뿐.
“…….”
권이정이 이야기한 선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정세진이 맞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정
세진을 다뤘을지, 그런 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닫힌 문 너머에서 얼마
나 괴로웠는지, 그 지독한 감정들도 선명히 전해졌다.
마치 온 피부를 난도질당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서 눈알
이 터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먹먹한 귓가에 심장이 펄떡거리는 소리만 들려
서, 금방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권이정은 이미 구속 수사에 들어갔
고, 그를 집어넣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으니까. 완벽히 모아 놓은 증거가 그
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사지 멀쩡한 권이정을 내 눈앞에 데려다 놓을 수가 없었다.
법의 처벌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깟 징역살이를 좀 한다고 해
서 이미 벌어진 일들이 없었던 셈 쳐지는 건 아니었다. 내 손으로, 직접 잡아 족치
지 않는 이상 부글거리는 속이 가라앉을 리도 없었다.
이틀을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 살았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단 사실에 화를 내다
가 곤히 잠든 정세진을 보며 초조해하길 반복했다. 매 순간 그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
리다가도 각인할 당시의 감정만 떠올리면 숨이 턱턱 막히곤 했다.
그러다, 머리가 식은 뒤에야 아차 싶었다. 내가 그에게 한 짓은 결국 권이정과 별
반 다르지 않을 텐데. 이미 다친 사람의 상처를 후벼파는, 개새끼 같은 짓을 정세진에
게 하지 않았나.
한 번 극에 달했던 감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성적
인 사고는 여전히 불가능했지만, 원인 모를 위기감이 나를 나락으로 계속 내몰았
다. 그에게 잘못을 빌어야 할지, 그게 아니라면 도망치지 말라고 겁박을 해야 할
지. 미친 사람처럼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끝없이 저울질을 해댔다.
“환자분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다만 상태가…….”
그러나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
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절할 것처럼 공황에 빠져 버린 정세진을 발견했기 때
문이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숨조차 쉬지 못하는 모습은, 굳이 각인으로 전해지
는 공포가 아니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혼합시다.’
무서웠다. 그래, 정말 완전히 나를 떠나 버릴까 봐.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
망쳐서 이제는 영영 찾지도 못하게 되어 버릴까 봐.
겁박? 그런 건 다 개소리였다. 관계의 주도권은 이미 넘어간 지 오래고, 나는 몇 번
이고 돌아왔던 기회를 내 발로 차버린 병신새끼에 불과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잘
못을 빌 수 있다면, 그조차 축복임을 너무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그래서 경호원을 붙였다. 보호라는 명목하에 낮 동안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 내
가 그의 곁에 머물 수 없으니, 최소한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라도 알았으면 해서.
“경호 팀장 말씀입니까?”
고르고 골라 적당한 사람을 찾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렸다. 진작 일을 관둔 경호 팀
장을 부르려고 했으나 결혼 준비로 바쁘다는 소식만이 돌아왔다. 내 표정을 보고 어
떤 심각성을 느꼈는지, 박 비서가 신변이 확실한 경호원 셋 정도를 집 안에 배치해 놨
다.
“낮에 잠깐 주방에 내려오셨습니다.”
“식사를 절반 정도 남기셔서…….”
“오늘은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방에만 계셨습니다.”
“이렇게 계속 굶다가는…….”
만개한 꽃처럼 아름답던 오메가가 말라 버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던 정세진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방 밖으로 한 발
짝도 나오지 않았다. 물과 음식을 거부한 채 하염없이 시간을 죽이다가, 의사가 찾아
가면 또 고분고분 수액을 맞고 잠에 빠져들길 반복했다.
죽은 사람 같았다. 안에 담긴 모든 게 사라지고, 남은 껍데기를 주워다 방에 가둬 놓
은 것처럼. 이따금 전해지던 감정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 후엔 불안감에 휩싸
여 방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문 앞을 서성여야만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목숨만 살려 놓으면, 그렇다면 회생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비
록 지금은 시름시름 앓고 있지만, 수억을 들여서라도 살릴 수 있다면 살려 낼 테
니. 상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낫기 마련인데,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다시 예전처
럼 피어나지 않을까.
“해신이 내놓은 시스템에서 사고가 터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해신이 훔쳐 간 프로그램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다. 같은 실수
를 두 번 반복한 이상 그들에게 미래가 있을 리 없었다. 대거 탈주한 고객들의 항의
가 쉴 새 없이 빗발치고, 주가는 하루아침에 가히 바닥이라 표현해도 좋을 만큼 곤두
박질쳤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놓은 정 회장의 비리를 풀었다. 때마침 화풀
이할 상대가 필요했던 데다, 또 때마침 그를 엿 먹이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으니
까. 저항할 새도 없이 정 회장이 잡혀갔고, 해신의 영광은 그런 식으로 침몰했다.
“미안, 내가 오해했어.”
누나는 내가 이룬 성과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모든 게 예정대로 착착 진행
되니 아마 아무런 문제 없이 왕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순순히 부
사장직을 내려놓고, 또 더는 정세진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겠지.
‘권이도 씨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 나는 점점, 점점 미쳐 가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모든 걸 잃는 꿈을 꿨고, 눈
을 뜨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에 절망해야 했다. 그가 머물던 방, 내게 불어
를 알려 주던 서재, 하물며 식사를 하던 주방까지 찾아가며 정세진의 흔적을 덧그렸
다.
각인으로 넘어온 기억은 그저 데자뷔를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 온전한 형태가 전해
지는 게 아니라 그 당시 느꼈던 기분만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입을 맞추던 순간에 그가 어떤 떨림을 느꼈는지 따위를.
‘현실 감각이, 없다는…….’
엇갈린 줄 알았던 마음이 사실은 마주 보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어 버린 지금에서
야 깨달았다. 그가 아팠던 이유가 비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그를 억지로 각인시킨 덕
분에야 알 수 있었다.
“세진아.”
나는 매일, 밤이 깊은 틈을 타 정세진을 찾아갔다. 사위가 어둠으로 물드는 순간
은 내가 유일하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잠들어 있지 않았지만 자비
롭게도 내가 그의 곁에 머무는 걸 허락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무릎을 꿇으라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영원히 눈앞에서 꺼지라는 말만 아
니라면, 그가 하라는 대로 네발로 길 자신도 있었다. 내 오만한 과거를 지울 수 있다
면 죽는시늉을 해서라도 상황을 바꾸고 싶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안정되는 듯했다. 여전히 나
를 보면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따금 전해지던 지독한 우울감이 서서히 사라진 것이
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한 상태와도 같았지만, 그 빈 곳을 채워 줄 자신이 있으
니 괜찮았다.
그래, 괜찮아야만 했다. 불안하지만 그리 생각하고 싶었다. 계절이 바뀌는 만
큼 그 또한 변화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단 말이다.
“몸살기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상함을 느낀 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정세진
의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진 것이다. 그뿐만이었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으련
만, 존재감 없던 그의 페로몬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도무지 좋은 징조로는 보이지 않았다. 페로몬샘이 기형이라던 사람이, 갑자기 페로
몬을 분출하게 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각인 이후 어렴풋이 흘러나오긴 했지만, 요새
는 단물에 푹 절였다가 꺼낸 것만 같았다.
“……페로몬이 느껴진다고요?”
그런데 심 교수는 내 말을 듣고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그와 각인했단 사
실을 알리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조금 머뭇거리는 기
색으로 뜸을 들이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렇게 이야기했다.
“임신일 가능성이…… 있겠네요.”
그 말을 듣고 어땠더라. 염치없게도, 조금 기뻤던 것 같다. 우리 사이에 결실이 생겼
단 사실이 아니라, 아이가 생기면 너와의 연결 고리가 하나 더 는다는 사실에. 각인이
라는 수단으로도 너를 가지지 못한 주제에, 고작 그딴 희망을 내걸며 안도감을 느꼈
었다.
심 교수는 그 가늘어진 팔에서 피를 세 병이나 뽑아 갔다.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김
에 이런저런 검사를 함께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날도 나는 밤이 되자마자 정세진
을 찾아갔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혼잣말을 들어 줘야만 했다.
“지금보다 영양 상태가 좋아져야 해요.”
역시나 정세진은 임신한 게 맞았다. 그게 누구의 아이인지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페
로몬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화사한 꽃향기에 가까웠던 페로몬이 지금은 비를 맞
은 것처럼 습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본능이라고 해야 할지. 나와의 결실이라
는 사실을 사무치게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안정기에 들어서려면 멀었기 때문에…….”
유산기가 살짝 있고, 이대로라면 낳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몸무게가 너무 줄어
든 데다 면역력도 썩 좋지 못한 탓이었다. 꾸준히 페로몬 샤워를 해줘야 한다는 말
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중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본인에게도 임신 사실은 알릴 예정입니다.”
“…….”
순간, 망설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우선은 숨
기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고개를 젓지 못한 건, 마지막 남은 양심이 발목
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라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너는 이 소식을 듣고 무슨 반응을 보일까. 기뻐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일말의 감
정 정도는 내비쳤으면 했다. 그게 설령 부정적인 마음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죽
어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그날 밤은 해가 지는 순간부터 유독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퇴근이 조금 늦어졌
고, 집에 도착했을 땐 이유 모를 불안함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계단을 올라 2층
에 다다르는 순간에도, 뒷덜미가 싸하게 식는 듯한 기분을 도무지 떨쳐 낼 수가 없었
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정세진의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대체로 조용
한 편이었으니 아마 내 것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평소라면 곧장 내 방으로 가 정세진
을 봤을 텐데, 정신을 차렸을 땐 홀린 듯 서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2층 복도 끝, 내가 일을 할 때면 들르는 서재. 그에게 불어를 배우고, 우리가 처음 입
을 맞췄던 장소.
‘가정이 생기면 안전을 추구하게 되거든.’
왜 그때, 누나의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반쯤 열린 문이 왜 그리 이상했는지, 끼
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왜 그렇게 크게 들렸는지. 터질 것처럼 뛰던 심장이 왜 그 순간
만큼은 소리 없이 조용했는지.
“…….”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서재 불을 켜고 한 걸음 들어서자, 그
가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환하게 밝아진 조명 아래, 테이블에 걸터앉은 누군가
가.
“……정세진?”
정세진이 있었다. 우리가 나란히 앉았던 그 소파 앞 테이블에, 손에는 절대 건드리
지도 않을 것 같던 위험한 물건을 든 채로. 몇 달간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던 얼
굴 위로 찰나에 가까운 엷은 미소가 스쳤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그는 다 쉬어 빠진 목소리로 내게 잔인한 안녕을 고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런 것들을 이해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머릿속
이 새하얗게 변하는 바람에,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지내봐요, 한번.”
그의 입가에 조금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 고운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순
간, 그제야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귓가
를 시끄럽게 울리고, 등줄기를 따라 불쾌한 감각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안 돼…….”
가까스로 입을 벌렸지만, 나오는 건 숨결보다 못한 조그만 애원 하나였다. 지그
시 두 눈을 감은 그가 가슴께에 묵직한 총구를 들이미는 모습이 보였다. 근래엔 무언
가 제대로 들지도 못하던 사람이,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그곳에 손가락
을 걸고 있었다.
‘너도 치우는 게 좋을 거야. 그 집에 누굴 들일 생각이라면.’
그 짧은 찰나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는지 모르겠다. 왜 그 말을 듣지 않
았을까. 그럴 리 없다고 왜 그렇게 자신했을까. 그 많은 경고를 무시한 채로, 절대 지
지 않으리라고 확신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모든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든 걸 바
로 잡았을 터였다. 기회가 한 번만 더 주어진다면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
다. 물론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모든 게 이뤄지진 않는 법이었다.
“정세진!”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찢어질 것처럼 커다란 발포음이 들렸다. 얼어붙은 것처럼 굳
어 있던 몸은 그제야 정세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르륵 무너지는 몸을 한가
득 끌어안자, 데일 것처럼 뜨거운 피가 울컥 쏟아져 내렸다.
“안 돼, 안 돼…….”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지독한 악몽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나 싶다. 지
금껏 저지른 죗값을 치르는 거라면 그 대가가 이 사람의 목숨이 되어선 안 됐다.
“세진아…….”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고용인들이 서재로 몰려왔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소
리,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뛰어가는 소리, 웅성거리는 말소리와 서서히 끊어
지는 그 숨소리까지. 귓가를 울리는 모든 소리 가운데 마지막에 들었던 말만이 계속
해서 들러붙었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면 성공이었다. 하나 나는 네게 그 정도의 의욕조차 없었음
을 알고 있다. 마지막을 알리던 그 후련한 얼굴이, 이제는 정말 편안해진 미소가, 그
에겐 지금껏 가지지 못한 평화나 다름없었으니.
“안 돼, 제발…….”
이미 재로 바스러지기 시작한 불꽃을 다시 되살리는 방법은 없었다. 더는 타오를 만
한 것조차 남지 않아서, 따뜻했던 온기가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눈가에 맺혔
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사이, 내가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
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총을 치울 필요는 없어.’
내 오만과 편견이 너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