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18화 (118/131)

외전1 12화. Orgueil Et Prejuges(12)

무슨 정신으로 몸을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온 집 안을 미친 사람처럼 뒤지다가 끝

내 그 어디에도 정세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용인을 쥐잡듯이 잡았다. 벌벌 떨

며 눈치를 살피던 그들은 뒤늦게 권이정의 방문 후 정세진이 김 실장과 함께 떠났다

고 실토했다.

“연락하지 말라고 하셔서…….”

욕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세진이 뭘 하건 연락하

지 말라고, 그리 통보한 건 나였으니까. 그를 감시하지도, 그렇다고 챙겨 주지도 말라

고. 최소한의 의식주만 챙기라고 사전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그 상황을 정말 이해하는 건 달랐다. 최소한의 융통성

이 있었다면 내 집에서 나간 순간 연락을 해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장례를 치

르는 중이라고 해도, 그래, 내가 아무리 그를 방치하고 있었다고 해도.

“…….”

아니, 어떤 핑계를 대도 내 탓이라는 걸 알기에 이토록 눈이 뒤집히는 거겠지만.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후…….

곧장 김 실장에게 연락했으나, 그는 몇 번을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음

이 중간에 끊기는 걸로 봐선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게 분명했다. 나중에 뒷감당을 대

체 어떻게 하겠다고. 내 집에서 정세진을 데려가 놓고 참으로 간 큰 행동이 아닐 수 없

었다.

‘아마…… 그날 제가 돌아간 뒤에 오피스텔 앞에서 비를 맞으신 것 같습니다.’

그냥,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조금 과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왜인지 그곳

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갈 수 있는 장소는 극히 한정돼 있으니 거기가 아

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운전석에 올랐던 것 같다.

정신없이 핸들을 꺾는 와중에 도로에선 몇 번이나 사고가 날 뻔했다. 신호는 제대

로 보지도 않았고 커브를 돌 때도 브레이크를 밟는 경우는 드물었다. 경찰에게 잡히

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걸 천운이라고 해

야 할지.

오피스텔 주소를 미리 알아 놓길 잘했다. 한 기업의 도련님이 살기엔 모자란 곳이었

고, 보안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차를 아무렇게나 세워 두고 시동도 끄지 않

은 채 차에서 내렸음에도, 그 누구도 나를 말리지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타이밍 좋게 입구에서 사람이 나온 덕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

다. 유리문을 부수지 않은 게 최대한의 인내였고, 문 앞에 다다라 현관문을 세 번

쯤 두드린 게 그를 향한 마지막 배려였다.

물론 끝내 여의치 않았기에 결국엔 문고리를 부순 뒤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말이

다.

“…….”

집 안엔 딱히 인기척이랄 게 없었다. 거실이 넓은 오피스텔에는 인테리어를 위한 최

소한의 가구만 놓여 있었다. 사람이 살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입구에 놓

인 신발은 정세진의 것이 분명했다.

고작 이딴 집으로 도망쳤을 줄이야. 별로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기에 좋아 보이

는 공간도 아닌 것을.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 이따위 거라면 정 회장이 그에게 정

말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았다는 뜻이 됐다.

천천히 내부를 가로질러 열려 있는 방문으로 다가갔다. 방은 이 외에도 몇 개

가 더 있었지만, 홀린 듯 그가 있을 만한 공간으로 다가갔다. 방문께에 다다라 안

을 들여다봤을 때는, 침대 위에 둥글게 말린 이불 뭉치를 발견하고 탄식이 흘러나왔

다.

“……정세진.”

대답은 필요 없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와중에도 야트막한 숨소리가 지나치게 익숙

했으니. 상황에 맞지 않게 평온한 숨소리를 듣는 순간, 놀라우리만치 분노가 사그라

들었다.

“이 집을…… 아직도 남겨 놨을 줄이야.”

오늘이 지나면 여기부터 처분해 버릴 생각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이곳으로 도망치

는 모양인데, 더는 이런 공간은 사치일 테니까.

“그때도 여기로 왔던 건가…….”

쓸데없이 감기에 걸렸던 날 홀로 이곳에서 밤을 지새운 게 분명했다. 미리 알았다

면 그러지 못하게 했을 거라고.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작은 흐느낌이 귓가를 파고들

었다.

“……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란 소리였으나 내게는 그 안에 섞인 울음까지 똑

똑히 전해졌다. 나는 망설일 것 없이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덮고 있던 이

불을 확 걷어 내자, 내도록 찾던 정세진이 가물가물 나를 바라봤다.

“…….”

“…….”

머리에 피가 쏠리면 이러할까.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눈앞이 새빨갛게 물드는 기

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서 간신히 다잡은 이성이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기

도 했다.

“어떤 새끼가 이랬어.”

누가 봐도, 맞은 얼굴이었다. 눈가는 다 짓무르고 뺨 언저리는 볼품없이 부어 있

다. 하얀 얼굴이 얼룩덜룩 멍으로 뒤덮여서, 순간적으로 헛걸 본다는 생각까지 들 정

도였다.

역시나 그는 내 손이 닿자마자 반사적으로 얼굴을 휙 돌렸다. 상처가 아파서 나

온 반응이었으나 갸름한 턱이 손을 빠져나가는 감각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

나 그 무엇보다, 뒤이어 느껴진 페로몬이 내 이성과 사고를 마비시켰다.

“……권이정?”

유독 존재감이 옅은 페로몬은 다른 누구도 아닌 권이정의 것이었다. 내 입에

서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정세진이 티 나게 눈을 움찔거렸다. 손을 침대에 짚고 그

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했으나,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대뜸 질문이 던져졌다.

“왜 오셨어요?”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나를 바라봤다. 시간을 느리게 감

은 것처럼 모든 행동이 지나치게 더디고 어설펐다. 속눈썹을 파르르 떤 그가 정말 의

아하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는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자신을 찾으러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

다고.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이내 미간을 좁힌 채로 고개를 푹 숙

여 보였다.

“멋대로 나온 건 죄송합니다.”

그냥 보기에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잠에 취한 건지, 그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에 취한 건지. 술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도 움직임은 만취한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

았다. 비틀비틀 침대 아래에 내려오는 순간,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크게 휘청

일 정도로.

“……아.”

덥석, 팔을 붙잡았다. 꽤나 억센 손길이었지만, 정세진은 몸을 바로 하지도 못

한 채 잠깐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쪽으로 몸을 기대고는 또 한 번 꾸벅 고

개를 숙였다.

“아…… 감사합니다.”

가슴께에 닿는 손이 어린아이의 것처럼 연약했다. 고작 그 며칠 사이에 더 마른 건

지, 손에 쥐었던 팔뚝 역시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밀

어 낸 채 걸음을 돌렸고, 비틀비틀 위태로운 모습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돌아온 건, 내가 협탁에서 익숙한 약통을 발견했을 즈음이었다. 졸피뎀. 그 이

름을 보는 순간 그가 보인 이상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남들은 한 알씩 먹

는 걸, 아마 한 통 다 들이부은 모양인지. 약통엔 더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죽으려고?”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곤 한다. 이곳에 왜 왔냐는 질문을 듣자마

자 놀라울 정도로 이성이 되돌아왔다. 지금은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으니 일

단 집으로 데려가는 게 우선이었다.

“……아뇨.”

“…….”

“자려고 먹은 건데.”

정세진은 그 말을 하면서도 두 번이나 몸을 비틀거렸다. 저 또한 안 되겠다 싶었는

지, 문고리를 붙잡은 채 고개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건네 온 질문은 또 무

척 황당한 것이었지만.

“안 가세요?”

“뭐?”

그는 아까부터 내내 나를 오면 안 될 곳에 온 사람처럼 취급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

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마치 자신이 떠나가면 내가 순순히 놓아줄 거라고 생각

한 것처럼.

“정세진.”

그러게, 사실은 그랬어야 했는데. 친히 열어 놓은 우리였으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이미 한 번 도망치길 바란 적이 있으니 그를 놓아주

는 게 내게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다.

“내가…… 그게 누구 짓이냐고 물은 것 같은데.”

그러나 그건, 내가 이런 모습을 보기 전의 얘기였다. 이따위 몰골이 되어, 이딴 약이

나 먹으면서, 아차 하는 사이 죽어 버릴 것처럼 굴길 바란 게 아니란 말이다.

“……누가 이랬는지 아시잖아요.”

생각이 자꾸만 뚝뚝 끊겼다. 정세진이 하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제대로 이해되질 않

았다. 온갖 학대의 흔적을 달고 있는 주제에, 그는 권이정과 잤다는 개소리를 아무렇

지 않게 지껄였다. 옷깃을 걷어 손목을 보여 줄 때는, 내가 남겨 놨던 자국과 별반 다

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어차피 이걸 바라셨을 텐데…….”

“정세진 씨.”

잠을…… 너무 오랫동안 못 잔 모양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서 부자연스럽

게 가슴께를 부풀리며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모르나 본데, 우리 아직 서류상으로 부부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단 얘

기예요.”

이 또한 말도 안 되는 억설이라는 걸 알고 있다. 고작 그런 서류 쪼가리는 시작할 때

부터 이미 허울뿐이었거늘. 우리가 입을 맞추던 그때조차, 이 관계가 부부였던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럼 이혼하면 되지.”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엔 내 모든 게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진작 잊어버

린 줄 알았던 위기감이 발목을 덥석 붙잡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진짜 부부도 아니

었다고, 그리 말하는 정세진이 눈 깜박할 새에 내 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네가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이혼이라니. 감히 나를 떠나갈 자격이 네 손에 들어 있을 리가 없는데. 이 관계를 마

무리할 수 있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오로지 나여야만 했다. 이혼이라는, 그 관계의 종

말을 나타내는 단어가. 설령 별거 아닌 말이라고 한들 네 입에서 나오면 안 된단 말이

다.

“주제 파악을 똑바로 해야지.”

“…….”

그는 내 말을 듣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으로 살

짝 미간을 찌푸렸을 뿐이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

했다는 듯이.

“짐 챙겨요. 다시 내 집으로 갈 거니까.”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약통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조금만 더 대화를 이어 갔다

간 이 자리에서 무슨 짓이건 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우선, 저 사람을 병

원에 데리고 가서 링거라도 맞힐 생각이었다. 약 기운을 빼낸 뒤에 조금이라도 사람

다운 몰골이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듯했다.

“……부족하면 한 번 더 하겠습니다.”

“…….”

하나 정세진은 나를 미치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벽을 짚지 않으면 제

대로 서지도 못하는 몸을 하고, 예의 그 느릿한 어투로 담담히 이야기한 것이다.

“어차피 자주 붙어먹자고 했고…….”

‘웬일로 괜찮은 선물을 준비했던데?’

그 새끼를, 거기서 죽일 걸 그랬다. 감히 선물 운운하던 입을 찢어 버려도 시원찮았

을 텐데. 다 꺼져 가던 불씨에 기름을 들이부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분노

가 일었다.

“권이도 씨가 만족할 때까지 할게요.”

뒤이은 말만큼은 쓸데없이 결연하게 느껴졌다. 그 빌어먹을 놈과 자더라도 내게

서 떠나겠다고, 나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침내 선언한 것이다. 이제는 정말 지쳤다

는 듯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그는 흐릿한 얼굴로 내게 마지막을 고했다.

“그러니까 이혼합시다.”

나는 3일을 넘게 못 잤고, 아직까지도 러트 사이클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았

다. 배 속에선 페로몬이 계속 뒤엉키는데 가까스로 유지하던 이성마저 한순간에 휘발

되고 말았다. 머리가 핑 도는 것처럼 시야가 암전됐다 밝아지길 반복했다.

“세진아.”

“…….”

“왜 사람을 미치게 해.”

속에서 무언가 터진다면 이러할까. 진작 갈 곳을 잃은 분노는 온전히 눈앞에 있

는 정세진을 향해 쏟아졌다. 지독한 배신감이 물밀듯 밀려들어서, 사고가 제대로 이

어지지조차 않았다.

“아윽……!”

장면은 뜨문뜨문 의식을 잃은 것처럼 끊겼다. 정세진을 억지로 침대로 끌

고 온 것, 힘으로 그를 내리누른 채 온 페로몬을 쏟아부은 것, 향긋하게 피어오른 그

의 페로몬에 저열한 우월감이 고개를 들었던 것까지.

“그렇게 씹질이 좋으면 말로 했어야지.”

결국 내 손에 들어올 거면서. 그래,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갈망하고 바라고 있으

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런 자각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무너뜨리고 싶었

고, 망가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발

정 난 개새끼처럼 그를 내리누르면서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배신감을 해소할 방

법이 없었다.

“권이정이 박아 줬을 때도 이랬어?”

내내 아무렇지 않던 정세진은 그 말을 들었을 땐 모욕이라도 당한 표정이 되었

다.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다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짓씹듯 내뱉은 것이다.

“그랬으면 어쩌려고.”

“…….”

“내가 그쪽 형이랑 붙어먹으면서 질질 쌌으면.”

“…….”

“그럼 더럽…… 하윽!”

나를 도발하려는 말인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그가 권이정과 관계를 맺었단 사실

이 아니라, 그 일을 내게 설명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내 조가비처럼 입

을 다물고 있더니,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말조차 변명이 아닌 공격이었다.

“너 따위를 믿지 말 걸 그랬지.”

정 회장과 다르다고, 그리 생각하면 안 됐다. 그에게 경계를 풀었어도 안 됐고, 곁

을 내어 주고 입을 맞춰서도 안 됐다. 그깟 가족들을 위해서는 서럽게 울어 주는 사람

이 내게는 단 한 번도 아쉬움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세진아.”

진작, 내게 말이라도 한 번 해보지. 사과가 아니라 변명을, 예의 차린 인사가 아니

라 마음이 담긴 한마디를. 혹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 대신 내 마음을 바란다

는 거짓말 따위라도.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온전히 가지지 못할 거라면 적어도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계속 손아

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든다면 아예 힘조차 쓰지 못하게 팔다리를 부러뜨려 놓아도 모

자랐다.

“……!”

여린 목덜미를 콱 깨무는 순간엔 정세진의 페로몬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단물

을 빼먹듯 그의 체취를 들이마시자, 속에서부터 무언가 엮이는 기분이 들었다. 어지

러울 정도로 짙은 꽃향기가 내 온몸 구석구석 밀려드는 듯했다.

“아, 악……!”

그는 잔뜩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온몸을 버둥거렸다. 하나 내

게는 개미 한 마리가 무는 것보다 못한 저항이었다. 기본적으로 알파의 완력은 성

인 남성을 훨씬 웃돌았고, 지금의 정세진은 어린아이보다 못한 나약한 존재였으니.

“흐윽……!”

그때, 만족감이 들었던가. 그게 아니면 이토록 별거 아니라는 사실에 허무해졌던

가. 억지로 나를 각인시키고 그를 품에 안은 채로, 왜 모든 걸 내 손으로 망쳤다는 좌

절감이 물밀듯 밀려들었을까.

“…….”

정세진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가 지니고 있던 기억, 지금 느끼는 기분, 그런 것들

이 파도처럼 페로몬과 함께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범람한 강렬한 감각이 내 목덜미

를 붙잡은 채 생명을 빼앗는 것만 같았다.

그의 감정은 깊은 수렁과도 같았다. 깊이를 가늠하지 못할 만큼 끝없는 어둠 속

에, 빛이라곤 단 한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런 수렁. 실수로 한 발짝 들여놓는 순

간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빠져 죽어야만 하는 그런 늪 같은 공간.

“……아으윽.”

숨이 막히도록 짙은 우울감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손가

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만큼 무력해서, 저항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얌전히 끝을 기

다려야 했다. 머리가 고장 난 것처럼 사고가 이어지질 않는 바람에, 그 끝에 떠오

른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권이도 씨를 배신하려던 게 아닙니다.’

나를 좋아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내게 열었던 마음의 문은 어느새 완전

히 닫혀 버린 뒤였다. 너덜너덜하게 헤진 감정은, 내가 그에게 느꼈던 배신감과는 비

교조차 할 수 없는 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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