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17화 (117/131)

외전1 11화. Orgueil Et Prejuges(11)

그는 왜 나를 떠나지 않는 걸까. 내가 손수 내보내길 기다리는 거라면, 이대로 기

약 없이 그를 가둬 두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모순되게도 나는 정세진이 제 발로 이곳을 떠나길 바랐다. 내가 진짜 미쳐 버리

기 전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쫓아내지 못하

는 건 내 욕심이었으니, 정말 그를 가둬 두기 전에 벗어나는 게 그에게도 좋을 터였

다.

물론, 정말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침내 약속된 날이 도래했다.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회장님

의 임종을 지켜봤고 장례는 친인척만 모여 조촐하게 치를 예정이었다. 예정된 죽음이

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기에 가족들의 분위기는 썩 좋지 못했다.

딱 한 명, 권이정만 빼고.

“거 늙은이 늦게도 뒈지네.”

잠시 빈소를 떠나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줄줄이 놓인 화관과 근조기를 지나 화장실

에 다다르자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억양만 듣더라도 권이정이었다.

“명줄 한 번 긴 노인네라니까.”

전화를 하는 모양인지, 권이정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암

만 근처에 아무도 없다고 한들, 불까지 붙인 채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뻔뻔하기 짝

이 없었다.

누나가 뭐랬더라. 왜 혼자 그따위로 큰 건지 모르겠다고 했던가. 분명 같은 교육

을 받고 자랐는데, 결과물이 이토록 잘못되다니 신기할 노릇이다.

“내가 그 양반 오래 살 줄 알았지. 꼭 지랄 맞은 사람들이 오래 살거든.”

그 논리대로라면 가장 오래 살아야 할 건 본인인 것 같은데.

권이정이 할아버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를 알고 있다. 진작 그의 무능함을 알

아본 조부님께서 그에게 모든 의사 결정권을 빼앗고 경영권을 넘기지 않겠다고 선언

한 탓이겠지. 그나마 손주 새끼랍시고 딱 하나 쥐여 준 게 바로 명성호텔이었다.

“어, 상황 봐서 적당히 나갈 테니까 오메가나 하나 준비해 놓고…….”

지저분한 지시를 내리던 권이정이 퍼뜩 내 쪽을 돌아봤다.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차

렸는지, 그의 표정이 삽시간에 불쾌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대충 전화를 마무리하

고 내 쪽을 보며 대뜸 내뱉었다.

“뭘 꼬라보고 있어.”

이런 곳에서 마주치길 바란 게 아니건만. 불쾌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인데 말이

다. 얼굴을 구기며 담배 연기를 뻑뻑 내뱉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자연스레 비소

가 흘러나왔다.

“내가 선물을 하나 준비했거든.”

“뭐?”

권이정을 처리할 준비는 순조로웠다. 그간 피해자들에게 수집한 증거는 이제 충분

했고, 믿을 만한 변호사를 매수해 자료 역시 다 만들어 놓은 참이다. 정확히 3일 뒤

에 터뜨리기로 되어 있었으니 권이정에겐 도망갈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궁금해? 궁금하면 미리 주고.”

그러니 이건, 단순히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유독 신경줄이 간당간당한 날이

라 저 뻔뻔한 낯짝이 무너지는 꼴을 구경하고 싶어서. 제 미래를 미리 알게 된 후에 얼

마나 꽁지 빠져라 도망을 갈지 그런 것들도 궁금했고.

“뭐야…… 또 무슨 개수작인데?”

“개수작이라니.”

권이정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갑작스럽게 선물을 준다고 하니 당황

스러울 법도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이런 식으로 말을 섞는 일

조차 드물었으니까. 간혹 기자들 앞에서 사이 좋은 형제를 연기할 때가 아니라면 말

이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씨발, 그게 뭔…….”

권이정의 얼굴이 볼품없이 일그러졌다. 말을 하는 나조차도 속에서 영 안 받는 말이

기도 했다. 자꾸만 넘어오는 담배 연기가 짜증스러워서, 더 대화를 길게 끌고 싶지 않

아졌다.

“궁금하면 내 집에 가서…….”

그러나 내 집에 가서 받아오라고 말하려는 순간, 문득 스치듯 보았던 정세진이 떠올

랐다. 상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집에 들렀다가 식사를 마치고 나온 정세진과 마주치

던 그 순간이.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는 동안에도 못이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멍

하니 서 있던 그 모습이 말이다.

“야, 말을 마저 해. 집에 가서 뭐?”

“…….”

뭐, 상관없나. 어차피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을 텐데. 박 비서를 통해 연락

해 놓고, 정 거슬리면 CCTV를 확인하면 될 테니.

“……집에 연락해 놓을 테니까 가서 받아 오든가.”

생각을 길게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요 며칠 잠을 잘 자지 못한 데다, 계속 향냄새

를 맡았더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거기다 권이정이 피우는 담배 냄새까지. 여러 가

지 경우의 수를 가정하기엔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 있어 봤자 심심할 텐데……. 안 그래도 먼저 갈 생각이었던 것 같기

도 하고.”

게다가, 있어 봤자 별로 도움도 안 되니까.

장례식이 끝나면 어차피 사회적으로 매장될 놈이었다. 회장님이 주던 상징성이 사

라진 뒤에 권이정까지 잡혀가면 선호는 피치 못하게 잠시 주춤할 터였다. 물론 그 이

후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런 것들도 누나와 이야기를 마친 뒤였다.

“안 받을 거면 계속 거기서 담배나 피우든가.”

“…….”

권이정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구둣발

로 끄트머리를 짓밟고 흘긋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를 꼭 닮은 온화한 외모였으나 드

러나는 표정만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네 집으로 가면 되는 거지?”

딱히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권이정이 그렇게 물어 왔다. 멍청하긴. 형질

이 열성이라고 해서 지능까지 열등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

자 권이정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재수 없는 새끼.”

그는 부러 내 어깨를 툭 치고 나를 지나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담배 냄새가 묻

는 건 찝찝했기에 쯧 혀를 차며 어깨를 털어 냈다. 권이정이 버린 담배를 보며 인상

을 찌푸리는 사이 그가 사라진 쪽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이도야.”

고개를 돌리자, 검은 옷을 입은 누나가 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담배꽁초를 보

고 인상을 찌푸린 누나는 한숨을 삼키며 복도 반대쪽을 턱짓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

누나와 향한 곳은 빈소 바깥에 있는 식당이었다. 혜율이를 품에 안고 있던 매형

은 나와 누나를 보고 안쪽에 있는 휴게실로 자리를 피해 줬다. 혜율이는 이미 매형

의 품에서 곤히 잠든 상태였다.

“뭐 마실래?”

“여기 마실 게 뭐가 있다고.”

“왜, 음료수도 있고 나름대로 술도 있는데.”

그러면서 가리킨 건 벽 쪽에 있는 냉장고였다. 생전 즐기지 않는 소주와 맥주가 종

류별로 늘어서 있었다. 누나도 딱히 진심으로 권한 건 아니었는지 금세 관심을 끄

고 조금 전까지 매형이 앉아 있던 식탁에 앉았다.

“앉아. 얘기 길어질 테니까.”

누나가 무슨 말을 할지, 그런 건 대충 예상이 갔다. 아마 도난당한 시스템이라든

가, 혹은 아직 데리고 있는 해신의 오메가와 관련된 이야기겠지. 그게 아니라면 장례

식이 끝난 뒤 기업에 생길 일에 관해서일 수도 있었다.

하나 내 예상과 달리 그 입에선 웬 생뚱맞은 화제가 나왔다.

“할아버지가 주신 총,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어?”

서재 벽면에 장식된 검은 총 한 자루. 우리 삼 남매 중에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제 나 뿐이었다. 권이정은 할아버지가 다시 빼앗아 갔고, 누나는 스스로 반납했으

니 말이다.

“아직 가지고 있지. 갑자기 그건 왜?”

“뭐…… 그냥.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까 너도 슬슬 치우지 않을까 해서.”

“치울 생각 없어.”

그건 내 각오이자 다짐의 상징이었다. 잘 작동할진 모르겠으나 아직도 실탄이 장전

돼 있었고, 이따금 일이 지칠 때면 잠시간 시선을 주곤 했다. 처음엔 ‘회장님이 주

신 물건’이라는 생각에 장식했으나, 지금은 그러한 의미는 퇴색된 상태였다.

“그래?”

누나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고는 알 만하다는 듯 푸스스 바

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하긴, 나도 젊을 땐 그랬지.”

“지금은 나이 든 것처럼 얘기하네.”

“가정이 생기면 안전을 추구하게 되거든.”

실제로 누나가 총을 치운 건 매형과 결혼한 다음이었다. 혜율이를 낳은 뒤엔 진

작 치워 버리길 잘했다고 개운한 표정을 짓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너도 치우는 게 좋을 거야. 그 집에 누굴 들일 생각이라면.”

“…….”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나는 말없이 가볍게 코웃음을 흘렸다. 그가 누굴 말하

는 건지, 그런 건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으므로.

“……들이긴 누굴 들인다고.”

글쎄, 내 집에 있는 사람은 총을 가지고 놀 아홉 살짜리는 아닌데. 오히려 겁을 먹

고 있었으니 굳이 치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애초에 내게 불어를 알려 준 뒤로는 서재

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그 얘기 하려고 불렀어?”

“설마. 피차 시간 아깝게.”

픽 웃은 누나가 자세를 바로 했다. 본능적으로 이다음에 나올 말이 본론이라는 사실

을 알 수 있었다. 목과 어깨를 반듯이 편 누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 사람 짓이지? 시스템 도난당한 거.”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도 아니었을 거다. 그러

니 내가 입을 열 새도 없이 뒷말을 덧붙였겠지.

“권이도. 내가 너한테 경영권을 넘기기로 한 건 네가 그만큼 능력 있는 전무라서

야.”

누나는 재단 쪽 일에 집중하고 싶어 했고, 나는 선호그룹 그 자체를 가지고 싶어 했

다. 누가 같은 핏줄 아니랄까 봐, 비슷한 권력욕을 가지고 그 방향성만 달랐다. 다행

히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누나가 재단을 온전히 소유하는 대신, 적당한 타이밍에 부

사장직을 내려놓기로 약속돼 있었다.

“이따위로 공과 사 구분 못 하면 나도 그냥은 못 넘어가.”

차갑게 식은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는 가족 간의 사담이었다

면, 지금은 상사로서 내게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태도

는 딱히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아니었다.

“손해를 완전히 메우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우선 급한 불은 다 껐어. 누나가 뭘 걱

정하는지는 아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 없이 굴 사람으로 보였다면 유감이네.”

“여태 아니었으니까 하는 말이지.”

결국, 지금은 그래 보인다는 뜻이었다. 통찰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정세진

의 처분만 빼놓으면 흠잡을 데 없는 처리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사업은 타이밍이야.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망치면, 그럼 그 손해를 감당할 수 있

을 것 같아?”

누나의 말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시스템은 이제 완전히 해신의 소유가 됐고, 돌

이키기엔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정세진을 집에 데리고 있는 것도 내게는 전혀 득

이 될 게 없는 일이었다.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설득하든

가 해. 그게 아니면 우리가 했던 계약도 없었던 일이 될 테니까.”

경고성 짙은 한마디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지금 내 대답 여하에 따라 누나가 취

할 행동 역시 달라질 터였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대도 선호그룹을 손에 쥘 자신

이 있었지만,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해신은 조만간 망할 거야.”

나직이 이야기하자 누나가 눈썹을 찌푸렸다. 마저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하기

도 했다. 나는 얼마 전 김 실장에 받은 자료를 떠올리며 여유롭게 입매를 당겼다.

“정철호 회장을 비롯한 윗대가리들이 저지른 비리가 터질 예정이거든.”

‘앞서 약속드린 자료입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김 실장은 내뱉은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내가 정세진

을 무사히 빼 오자마자 내게 약속된 자료를 가져다줬으니 말이다. 시스템 건이 터

진 뒤엔 연락할 일이 없었지만, 이미 받을 건 다 받았으니 괜찮았다.

“그리고 그 무너진 해신을 인수하는 건 선호가 되겠지.”

“해신을 인수하겠다고?”

“내가 처음부터 이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제야 누나는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의아한 눈빛이

었는데, 나는 그가 무어라 더 묻기 전에 대화를 마무리했다. 공과 사 구분을 잘하

고 있다는 의미로, 더는 이와 관련된 주제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그러니까 총을 치울 필요는 없어.”

***

잠든 혜율이가 깨어날 즈음엔 집으로 보낸 박 비서에게 연락이 왔다. 권이정이 한

발 빨리 집을 찾았다가 현재는 벌써 돌아가 버렸단 소식이었다. 성격도 급하지. 그 잠

깐새를 못 참고 발걸음을 돌린 모양이었다.

박 비서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굳이 듣는 대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선호가 무

너지는 정도가 아니면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말도 함께였다. 기업의 총

수가 세상을 떠났으니, 며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 후 삼일장을 치르는 내내 나는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빈소를 지켰다. 조문

객은 없었지만 화환은 끝도 없이 들어왔고, 당연히 권이정처럼 자리를 비울 수도 없

었다. 딱히 피곤한 건 아니었으나 신경이 곤두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권이정은 발인을 할 즈음에야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그를 보며 혀

를 찼고 아버지 역시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듯했다. 이상한 건, 권이정이 나를 보

고 기분 좋은 얼굴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웬일로 괜찮은 선물을 준비했던데?”

미치지 않고서야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을 제대로 전달

받았다면 생글거리며 웃는 게 아니라 욕지거리를 뇌까렸어야 했다. 아니, 애초

에 박 비서는 그에게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튼 다시 봤다니까.”

무어라 따져 묻고 싶었으나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였

고,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해야 할 상황이었다. 권이정이 무슨 개수작을 부려 봤

자, 저 자신감은 길게 가지 않을 테니. 지끈거리는 머리로 굳이 깊이 생각할 필요

는 없었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절차가 끝났을 땐, 뒤늦게 주기가 돌아왔음을 깨달아야 했다. 정신

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슬슬 러트 사이클이 찾아올 때였다. 급히 늘 챙겨 다니는 억

제제를 복용했지만 타이밍을 놓친 터라 약효가 바로 돌지는 않았다.

당연히 집으로 가는 길은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잠을 자지 못한 몸은 지나치

게 지쳤는데, 마구잡이로 날뛰는 페로몬이 배 속에서 뒤엉켰다. 정세진이 그랬듯 성

욕에 눈이 먼 건 아니었으나, 오감이 예민해지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참 불쾌한 것이

었다.

“도착했습니다, 전무님.”

집으로 올라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숙면을 취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심

신 미약 상태로 무슨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으니.

혹여나 정세진을 마주치면, 폭력적으로 굴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히 그리 생각하

며 집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

느낌이 이상했다. 늘 그랬듯 변함없는 풍경이었는데, 이상하리만치 집 안이 고요하

게 느껴졌다. 높은 천장도, 그리고 유독 넓게 느껴지는 내부도. 찬물을 끼얹은 것처

럼 갑작스럽게 한기가 밀려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2층을 지나 평소엔 잘 찾지 않

는 3층에 다다를 때까지, 정체 모를 불안감이 계속해서 휘몰아쳤다. 그럴 리 없다

고, 아닐 거라고 되뇌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조차 없었다.

3층 복도 끝, 가장 오가기 불편한 구석진 방. 웬만해선 거들떠보지 않고, 내 손으

로 방문을 여는 경우는 더더욱 드문 그곳.

문고리를 붙잡는 순간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끝이 덜덜 떨

리는 초조함은 살면서 몇 번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잠겨 있지 않은 문이 벌컥 열리

고, 깔끔히 정돈된 침대와 위화감이 들 만큼 생활감 없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

정세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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