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10화. Orgueil Et Prejuges(10)
“처음부터 해신이 받을 자료라고 들어서…….”
짝, 뺨을 때리는 순간엔 본능적으로 손에 힘이 풀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데, 정작 고개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고 말았다. 뱃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아서, 지금 느끼는 분노를 표출할 방법도 찾을 수 없었
다.
“내가 미쳤다고 남한테 그런 서류를 넘겨주나?”
배신감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이 더러운 기분을 분노라고 해
도 될까. 커다란 바윗덩이를 삼킨 것처럼, 무언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
았다.
“내가 변명할 가치도 없는 사람인가 보죠.”
“…….”
덜컹 흔들리는 두 눈이 나를 향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다. 내게 버림받는다는 두려
움도 아니었고, 고작 제 실수를 향한 낭패감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차 싶은 표정
을 보는 순간, 밟고 있는 바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바라는 게 없다더니…….”
사실은, 이 사람을 꽤 믿고 있던 모양이다. 미묘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내게 마음
을 연 게 분명하다고. 이따금 보여 주는 상냥한 미소가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이라고 말
이다.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나 내리는 빗속에서 울던 정세진은 지금 내 눈앞에선 그 어떤 아쉬움도 내비치
지 않았다. 남보다 못한 가족에겐 그토록 상처를 받아 놓고 나와의 관계가 조각나
는 순간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사과는 제가 저지른 도둑질에 대한 것이
었지, 내가 느낀 배신감에 대한 사죄는 아니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자만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절대 해를 끼치지 못하리라고. 그래서 내가 방심한 사
이 끝내 이 사달을 만들어 낸 모양이다. 처음부터 계약에 불과한 결혼이었는데, 그 사
실을 간과해 버리는 바람에.
“정세진 씨.”
“…….”
“이 일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를 지나쳐 서재를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
는 나를 붙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는 이 관계에 아무런 미련
도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
만약 고용인이 내 집에 있는 물건을 훔쳤다면 어떨까. 아마 그 즉시 해고한 뒤 집에
서 내보내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다시는 내 집에 돌아올 수 없게, 더는 한 발짝도 들
이지 못하게 말이다. 혹여나 그로 인한 손해가 크다면 법적인 조치 역시 염두에 두었
을 테고.
그러나 나는 정세진을 내쫓지도, 그렇다고 고소하지도 못한 채 집에 데리고 있었
다. 우연히 마주치면 못 본 척 스쳐 지나가면서, 마치 투명 인간을 대하듯 눈에 보이
지 않는다는 양 행동했다.
알고 있었다. 그를 무시할 게 아니라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걸. 이혼 서류에 도장
을 찍고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도.
이번 일이 미친 손해는 감히 돈으로 환산하는 걸로도 부족했다. 해신에겐 결정적
인 이득이 아니겠지만, 선호에겐 치명적인 손해였다. 정 회장이 바라던 게 고작 이 정
도일 리 없으니, 결국엔 나를 엿 먹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게 분명했다.
고소는 어렵지 않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져 내 것임을 밝
힐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개발 과정을 증거 삼아 설치된 CCTV까지 잘 활용한다
면 결국 승리를 거머쥐는 쪽은 내가 될 것이다.
하나 그러지 못한 이유는 이런저런 잡생각이 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우선, 정
세진은 집안에서 버림받았고 이미 세간에 탈세범으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만약 해신
을 고소한다면 이번에도 그 책임은 온전히 그에게 돌아가리라.
이토록 오갈 데 없는 처지인 그가 내 집에서 쫓겨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순간
에 비루한 형편이 되어 보잘것없는 삶을 연명하겠지. 가장 나은 선택지는 그나마 징
역살이 정도.
동정심이었다.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동정심. 가여운 오메가를 딱하게 여겨
서 그의 처분을 조금 유예해 놓았을 뿐.
“…….”
아니, 결국엔 다 핑계였지만.
“……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술을 마셔서인지, 그게 아니면 잠을 못 자서인지. 생각
을 조금만 길게 하면 뒷덜미가 빳빳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쓸데없는 변명을 덕지덕지 붙여 봤자 그 어떤 이유도 타
당한 핑계가 되어 주진 않는다. 애초에 고작 동정심 따위에 휘둘릴 만큼 사리 분별
을 못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내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집에서,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해서. 이대
로 뚝 끊어 버린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이 될까 봐.
미련이었다. 더 정확히는 욕심이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미루면서 눈앞의 불을 끄기에만 급급했다. 고용인들에게 그
의 소식을 절대 전하지 말라고 일러 놓고 정작 나는 그와 이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
다. 그를 직면할 자신이 없어 귀가 시간을 늦추다가도, 그가 내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는 사실에 안도하길 반복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구질구질한 감정이었다. 제정신으로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단 생
각에 평소에는 즐기지 않던 술까지 마셨다. 구차한 모습을 보이는 건 딱 질색이건
만, 취기가 오르는 기분은 또 나쁘지 않았다.
늦은 새벽, 집으로 돌아왔을 땐 늘 그랬듯 무거운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2층으
로 향하는 길은 크게 어둡지 않았지만, 취기가 오르는 탓에 평소보다 느린 걸음을 옮
겨야 했다.
정세진은…… 아마 지금쯤 자고 있겠지. 불면증이 있다고 했지만, 그건 이미 한
참 전에 나은 것 같았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
“…….”
눈이 마주쳤다. 멍하니 나를 응시하는 얼굴은 그 며칠 사이 조금 여윈 것처럼 보였
다. 원래도 갸름하던 턱이 살집 없이 도드라져서, 그 아래 이어지는 목덜미가 가녀리
게 보일 정도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봤다. 반듯하게 펴진 어깨, 품
이 한참 남는 허리, 그리고 우뚝 선 다리를 지나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까지.
“…….”
발이 시릴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신발을 신겨 주고 싶었지만, 그 역
시 안 될 일이었다. 애초에 3층에 콕 틀어박힌 그가 내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으니까.
“……이젠 헛것도.”
그래서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하필 흰옷을 입고 있던 터라 지나치게 현실감 없
는 모습이었다. 술김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그리 생각하며 지나치는 나를 그
가 붙잡기 전까지는.
“권이도 씨.”
“…….”
작은 목소리였지만,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뿌옇던 시야가 단숨에 또렷해지고, 안
개가 꼈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개었다.
서재에서의 일이 있고,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치면 죄인
이 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내가 모르는 척 지나가면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기도 했
다.
그러니까, 이렇게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게 무척 오랜만이라는 뜻이다.
“아니, 그게…….”
정작 나를 붙잡은 건 본인이면서, 도리어 그쪽에서 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그냥 평소처럼 모르는 척 지나가면 됐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발이 떨어지질 않았
다.
“……변명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정세진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날, 내가 가장 듣고 싶었
던 말. 조금만 더 빨리 말했더라면 엇갈리지 않을 수 있었던 그 변명들을.
“저는 그냥,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대단하네요.”
타이밍이 이렇게 무섭다. 당시엔 이 한마디를 바랐던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났다
고 이토록 아무 감정도 안 드는 걸 보면. 그가 느릿느릿 하는 말들에, 설득이 되기보
단 머리가 차갑게 식는 걸 보면.
“며칠간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게 고작 그따위 변명인가 보죠.”
“…….”
실망스러운 기분과 함께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를 보자마자 느꼈던 당황스러
움이 지금은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다.
“이제 와서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 그 잠깐 사이에 무서워졌나 보지. 갈 곳 없는 처지임을 깨닫고 바짓가랑이라
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기회를 줬었잖아, 세진아.”
진작 지나간 일이 아닌가. 그 후로 며칠간 방에 틀어박혀 이런 생각만 했었나 보
다. 머리를 굴려야만 나오는 변명이라면 내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굳이 들
을 가치가 없었다.
“……잠, 권이도 씨!”
우습게도, 팔을 붙잡히는 순간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보
다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길은 지나치게 유약했
으나 그 간절한 목소리만큼은 무엇보다 강렬했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
“하라는 대로…… 권이도 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등신처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흔들렸다. 모르는 척 뿌리치고 갔어야 했
는데, 눈앞에 있는 정세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는 말
이, 마치 나를 놓치기 싫다는 바람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한 번만…….”
“……뭐든지 하겠다고?”
우스운 일이지. 그는 이미 한 번 나와의 관계를 포기했는데.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
이 살길을 찾기 위해 한 번 매달려 볼 뿐이건만.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 볼래요.”
“…….”
“용서를 구할 거면 그 정도는 해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입버릇처럼 죄송하단 말을 하는 것과 실제로 무릎을 꿇
는 건 달랐으니까. 자존심이 상해 화를 내면 거보라는 듯이 무시할 준비가 되어 있었
다.
“…….”
그러나 그는 내 손을 꼭 붙잡은 채 무릎을 꿇었다. 붙잡은 손 위에 이마를 가져
다 댄 채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
“권이도 씨를 배신하려던 게 아닙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울고 있진 않았지만 적어도 겁을 먹은 것 같다
는 생각은 들었다. 손끝에 닿는 체온은 지나치게 차가웠고, 그건 정세진이 꽤 오래 나
를 기다리고 있었단 사실을 알려 줬다.
“제 생각이 짧아서…….”
“압니다. 그러려던 게 아닌 거.”
왜 모르겠는가. 그가 나를 엿 먹이기 위해 그랬을 리가 없다는걸. 비단 나뿐만이 아
니라,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지금 나
를 올려다보는 저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쪽은 배신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
“…….”
그러니 내가 바란 건, 그 행동에 대한 사과나 죄책감 따위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나 할 법한 싸구려 변명이 아니라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용서를 구하
기 위한 애원이 아닌, 그래, 내 마음을 돌리기 위한 애걸 같은 것들.
“정세진 씨 머릿속엔 딱 두 개밖에 없었겠죠. 정 회장, 그리고 해신그룹.”
“…….”
“거기에 나는 없고.”
이 작은 머리통 안에 끝내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 네가 날 배신했단 사실이 아니
라, 내가 너한테 고작 그딴 존재였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졌다. 내가 제공한 울타리
가 지나치게 비좁아서, 너 하나를 가두지 못했다는 점이 화가 났다.
“……그래, 거기에 나는 없고.”
나는 너한테 몰두해 있었는데, 그 마음 한 조각을 갖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내
가 바란 게 마음이었다는 걸, 다 늦어 버린 지금에서야 깨닫고 말았다. 내내 나를 괴
롭히기만 했던 갈증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해소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세진아.”
타이밍이 무섭다는 말을 했던가. 내가 조금만 빨리 깨달았다면 지금의 상황이 조금
은 달랐을까. 네가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한 게, 내가 널 고작 가지고 싶은 물건 정도
로 여겨서 그랬던 걸까.
본능적으로 그의 뺨과 귓가를 어루만졌다. 다 가신 줄 알았던 술기운이 다시 오르
는 바람에 그의 체온을 느끼는 순간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내가 끝내 가지지 못한 오
메가는 고작 이딴 페로몬엔 홀린 듯 내 손에 얼굴을 문질렀다.
“정세진.”
“…….”
구음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머금지 못할 거란 사실을, 나 또한 잘 알
고 있었다. 그럴 기분조차 들지 않았지만, 동시에 비이상적인 욕구라는 걸 알면서
도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네가 과연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내 손으로는 결코 내치지 못할 텐데, 이딴 취
급을 받고도 내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 들까. 그 머릿속에 나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어
떤 식으로라도 나를 각인시키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이 들었다.
“입 똑바로 벌려.”
과정은 엉망이고 실력은 볼품없었다.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해댔고 눈가에선 이미 눈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런 전조 없이 목구멍을 꿰뚫는 순간엔 그조차 견디지 못하
고 앞니를 세우기도 했다.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
“흐…….”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한참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울진 못했지만, 어깨
가 들썩이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덜덜 떠는 모습은, 어떤 의미
에선 내게 희열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다리를 못 벌리면 입이라도 잘 벌려야지.”
이런 짓이라도 해야 나를 위해 울어 주나 보다. 우리 관계가 끝날 땐 아무런 미련
도 보이지 않더니, 이런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그라고 한들 상처를 받는 모양이었다.
“이런 재주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건지…….”
부러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더 성의 없이 머리채를 끌고 왔다. 억울한 눈으로 나
를 바라보던 정세진은 정작 얌전히 굴라는 말을 듣고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파들파
들 떨리는 손으로 내 허벅지를 짚으려다가, 그마저도 여의찮아 주먹을 꾹 움켜쥐기
만 했다.
“흐웁…….”
언젠가 이 입에 넣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그게 이런 상황이길 바라진 않았
던 것 같다. 누가 봐도 서투른 실력으로 목을 조일 때마다 짙은 사정감과 함께 이루 표
현할 수 없는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하.”
그는 이따금 구역질을 하면서도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찾겠다는 듯이 입을 벌렸
다. 입꼬리 옆쪽이 빨갛게 찢어졌는데, 눈물인지 타액인지 모를 것들이 그 옆을 따
라 흘러내렸다. 진작 흐리멍덩하게 변한 눈동자는 간간이 정신을 잃은 것처럼 아득
히 멀어지길 반복했다.
마침내, 나는 목구멍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그러고도 만족하지 못한 채 한참을 머
물다가, 그가 내 모든 흔적을 삼킨 다음에야 천천히 성기를 빼내었다. 유독 빨갛게 변
한 입술에서 정체 모를 액체가 귀두 끄트머리를 따라 길게 늘어졌다.
“콜록, 콜록…….”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러웠다. 잠깐이나마 들던 만족감 역시 밭은 숨
을 토해 내는 모습을 보자 사라지고 말았다. 미처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로, 그는 내가 방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이성적이고 생산적
인 방법을 선호했다. 괜한 욕지거리를 내뱉어 봤자 해결되는 건 없고, 홧김에 폭력
을 휘둘러 봤자 뒤처리만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세진에게 했던 짓은 화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를 각인하고 싶
다는 생각에 상처입혀 놓고 저열한 우월감에 취해 그 행위에 몰두해 버리고 말았
다.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알면서도 나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시
험하고 싶은 마음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
살면서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린 적이 없는데, 도통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었
다. 주방장에게 부드럽고 차가운 음식을 준비하라 이르면서도 정작 정세진과 마주치
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는 듯, 예의 그 무미건조한 눈으로 멀리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고에 장애가 생긴 기분이었다. 처음엔 배신감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이제는 그
를 가지지 못하는 것에 따른 원망으로 바뀌었다. 그 원망이 집착과 소유욕이 되는 바
람에 그를 망가뜨려서라도 가져야겠단 충동이 불쑥 고개를 들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