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9화. Orgueil Et Prejuges(9)
김 실장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유능한 비서였다. 정세진을 빼내기 위해서 매수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어디에 어떻게 구속되어 있는지, 그런 것들을 면밀
히 챙겨 내게 알린 것이다. 원래라면 더 오래 걸렸을 일을 그 덕분에 딱 하루 만에 끝
낼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당일에 빼내는 건 불가능했는데, 최소한의 조서를 꾸린 뒤에야 뒤
탈 없는 수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렴 어떤가 싶었으나, 이왕 하는 거 완벽
히 끝내자는 생각에 그러기로 했다. 그래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도 날이 밝을 때까
지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나는 밤새 별거 아닌 서류를 검토하며 의미 없이 시간을 죽였다. 이 넓은 집에 고
작 정세진 하나 없을 뿐인데, 이상하리만치 잠이 오지 않았다. 이미 다 완성된 시스템
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괜히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까지 만지작거렸다.
‘감사한 일이죠. 저한테는 과분한 자리니까.’
그 과분한 자리에서 내려온 소감은 어떨까. 누명을 쓰고 사직한 경호 팀장처
럼 그 또한 본인 몫이 아닌 실수로 머물던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 부조리함에 억울해
할지, 아니면 남보다 못한 가족에게 화를 낼지. 어느 쪽이건 정세진에게는 어울리
지 않았다.
뭐, 기회라면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를 지탱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이상, 남
은 건 온전히 내게 속하는 것뿐이었다. 제아무리 담담한 사람이라고 한들 이런 일에
는 충격을 받을 테니, 그 여린 틈새를 파고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나는 박 비서에게 정세진을 얌전히 집에 데려다 놓으라
고 명령했다. 직접 데리러 가고 싶었으나 오전에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는 바람에 어
쩔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찾아갔다간 이래저래 이목을 끌고 말 터였다.
밤부터 내린 비는 그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미팅이 시작될 즈음
엔 온 하늘이 새카맣게 변해서, 해가 뜬 건지 뜨지 않은 건지조차 헷갈릴 정도였
다. 이번 장마는 꽤 지독하겠다고,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김 실장과 나눴던 대화가 떠
올랐다.
‘본가에 갔던 날 비를 맞았다던데, 왜 그랬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냥 충동적으로 물은 것이었다. 그가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 게 아무래도 영 이상
했으니까. 비서라는 사람이 옆에서 우산도 안 씌워 주고 뭘 했는지, 그런 것들을 확인
하기 위해서.
‘…….’
김 실장은 내 말을 듣고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비를…….’ 그렇게 중얼거리다
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기도 했다.
‘원래 비 맞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건 또 몰랐는데. 그런 청승맞은 취미가 있었단 말인가.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
는지, 그는 조금 변명하는 투로 설명을 보탰다.
‘어릴 때부터 내키면 정원에서 비를 맞으셨는데, 그럴 때면 꼭 감기에 걸리셨습니
다.’
그리 말하면서 짓는 표정은 썩 낯설지 않았다. 누나와 매형이 혜율이와 관련된 고민
을 얘기할 때, 한탄을 하면서도 내비치던 애정과 관심 같은 것. 바늘 하나 안 들어
갈 것처럼 무뚝뚝한 얼굴을 해서는 눈빛만큼은 정세진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아마…… 그날 제가 돌아간 뒤에 오피스텔 앞에서 비를 맞으신 것 같습니다.’
김 실장은 그날 정세진이 본가가 아닌 오피스텔에서 하루 묵었다는 사실까지 이
어 털어놓았다. 정작 말을 꺼내 놓고는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
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오피스텔이라면, 정세진 명의로 있던 그 집인가. 이번에 재산 압류가 들어가면 처
분되겠지만, 만약 그러지 않아도 그 집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터였다.
‘비를 아무 때나 막 맞습니까?’
‘아뇨, 주로 걱정거리가 있을 때만…….’
매사 거뜬히 해내는 사람이 걱정할 게 대체 뭐가 있다고. 그렇다면 그날도 걱정거리
가 있었다는 얘긴데, 본가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비를 맞았단 말인가.
“……전무님?”
퍼뜩,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개를 돌려 창밖에서 시선을 떼어 내자, 나를 부른 이사
가 살살 눈치를 살폈다. 그는 직원들과 나를 번갈아 본 뒤 흠흠 목을 가다듬고 이야기
했다.
“회의 진행할까요?”
창문 바깥엔 여전히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시간이 지난다
고 해서 쉬이 그치지는 않을 듯했다. 지금쯤이면 정세진도 집으로 돌아왔겠지. 그 생
각을 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
의아한 시선들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임원들을 다 모아 놓고 정작 나는 자리에
서 일어난 탓이었다. 이 자리가 제법 중요한 미팅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입 밖으
로 나오는 말이 이따위였다.
“회의는 다음에 하죠.”
“예?”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화들짝 되물었다. 반사적으로 혀를 차자, 괜히 기가 죽은 시
선들도 뒤따랐다. 나는 벗어 놨던 재킷을 챙기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
집으로 향하는 내내 드물게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잘만 하고 다니던 넥타이가 갑갑
할 정도였고, 약지에 낀 결혼반지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건, 중간에 걸
려 온 박 비서의 전화 한 통으로 더욱 심화되고 말았다.
−해신그룹 차남이랑 잠깐 다툼이 있었습니다.
정세진을 집에 데려다줬다고 말한 그는 지하 주차장에서 정민재를 만나 나눈 대화
의 일부를 전달했다. 삼류 드라마보다 못한 내용이었고, 의외로 정세진은 깔끔하
고 단호한 대처를 보여 줬다. 가족들에게 완전히 정을 뗀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마
음 한편엔 미미한 찝찝함이 남았다.
‘술도 못하면서 와인은 왜 그렇게 마셨어.’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온 전화에도 무르게만 반응하던 사람이다. 단순히 마음이 약해
서라기보단 지금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거
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척 형과 가족으로 선을 그으면서, 끝내 지키려고 했던 부분
이 있었을 거란 말이다.
그런 정세진이 정민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단다. 늘 바라 왔던 상황이 내게는 좋
지 못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무언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때는 더는 도망
칠 곳도 없이 벼랑 끝까지 내몰린 경우가 많았으니까.
“차 세워.”
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차고를 통해 나오는 것보
다는 이쪽이 훨씬 빠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설마 아니겠거니 싶다가도, 내리
는 비를 보고 있으면 본 적도 없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곤 했으니까.
그래, 바로 지금 정원에 서 있는 저 모습처럼.
“…….”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가 귓가를 괴롭혔다. 우산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린 빗방울
은 정원에 심어진 풀 위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회색으로 뒤덮인 하늘 아래, 유독 채도
가 낮은 풍경 속에서 어제와 같은 옷을 입은 정세진이 보였다.
이렇게 청승맞은 취미가 있는 줄 몰랐다니까. 진작 알았다면 그날도 비를 맞지 못하
도록 오피스텔 앞으로 데리러 갈 걸 그랬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절대 밟지 않았을 젖은 흙을 밟으며, 그 단정
한 뒷모습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채로 금방
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서 있는 정세진에게로 말이다.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때도 잔뜩 고생해 놓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싶었다. 김 실장의 말에 의하
면 어린 시절부터 이래 왔다니 쉬이 고쳐질 버릇이 아니긴 했다. 느리게 돌아온 시선
이 비에 흠뻑 젖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는 어제부터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나직이 입
에 올렸다.
“정세진.”
“…….”
흐린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죽은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그가 그제야 나를 인지
하고 눈을 깜박였다. 뺨 위로 흐르는 빗줄기가 눈물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명치
가 바짝 옥죄는 것만 같았다.
“왜 이러고 있습니까?”
“……아.”
느리게 흘러나온 탄성은 마치 뒤늦게 터진 숨결 같기도 했다. 내내 멈춰 있던 시간
이 그제야 흐르는 것처럼. 비틀거리는 몸뚱이가 지나치게 차가웠다.
“몸이 찬데…….”
내가 오지 않았다면 퇴근할 때까지 이러고 있었을 셈인가. 언제부터 비를 맞았는지
는 모르겠으나, 파리해진 얼굴만 봐도 잠깐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여
름과 가까워진 계절에 이렇게 몸이 식을 정도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이 났을 게 분
명했다.
“기껏 빼 왔는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속이 뒤집혀 진창이 되는 기분이었다. 품에 정세진을 안고 있는데도 만족감이라
곤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대로 그를 가질 수 있게 됐는데, 무너져 가
는 모습을 보니 또 화가 났다.
“왜…….”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억울함
도, 분노도 아닌 무언가. 배신감이라기엔 더 새카맣고 건조한 원초적인 괴로움.
“……왜 데리고 나오셨어요?”
그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좌절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에 홀로 내던
져진 것처럼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안에 매몰되고 있었다.
“나도…… 남편이 잡혀가면 좀 곤란해서.”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시선이 옮겨 가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버거운 감정을 마주하는 바람에 비에 젖은 모든 부분을 꼼꼼히 살펴봐야
만 했다.
“뭐, 이게 명목상의 이유고.”
젖은 머리칼이 오늘처럼 가련했던 적이 없었다. 동그란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으면
서도 제대로 된 위로를 건넬 줄 모른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당황스러웠다.
“너한테 그럴 깜냥이 없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아.”
그래서 그냥 내가 느낀 바를 이야기했다. 결혼식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봐온 정세
진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몇 번이나 지적하고 싶었던 못된 버릇까지
도.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버릇은 고쳐야지.”
그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반듯한 앞니로 입술을 꾹 깨물고는 예
의 그 수려한 눈매를 인정사정없이 찌푸렸다. 비를 머금은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
을 땐,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흐느낌이 입술 틈새로 비어져 나왔다.
“흑…….”
우산을 씌워 주지 말 걸 그랬지. 그랬다면 눈물을 참겠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모
습을 보지 않았을 텐데. 내리는 빗줄기에 숨은 채로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을 숨
길 수 있었을 텐데.
“흐윽…….”
누군가 우는 모습이 이토록 안쓰럽게 느껴질 줄 몰랐다. 습관처럼 휘어지던 두 눈
이 얼마나 많은 설움을 담고 있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흡.”
“…….”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를 품에 안는 것뿐이었다.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기울이
고, 차갑게 식어 버린 몸을 꽉 끌어안았다. 차마 나를 마주 안지도 못한 정세진은 이
미 터져 버린 울음을 참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흐윽.”
너무 가여우면 이런 기분이 들기도 하는구나.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쥐고 숨
을 쉴 때마다 배 속을 난도질하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부렸던 여유가 부질없게 느껴
질 정도로, 한순간에 초조해지고 말았다. 억눌린 울음이 울컥 새어 나올 때마다 딱 미
쳐 버릴 것만 같았다.
“울지 마, 세진아.”
그는 한참이나 내리는 비처럼 끝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그럼에도 끝내 속 시원
히 울지 못했고, 또 끝내 나를 마주 안지도 못했다. 그저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다
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따금 어깨를 떨었을 뿐.
그래서 몰랐다. 이토록 처량하게 우는 사람이 내게서 중요한 자료를 훔쳐 갔으리라
고. 그가 미처 입을 열지 못한 이유에 나를 향한 죄책감도 담겨 있다는 사실을. 등신
같게도, 내가 그의 전부가 되었노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
돌이켜 보면 이상한 부분은 많았다. 정 회장에게서 오던 연락이 뚝 끊겼고, 유일
한 연결 고리였던 정세진을 아무렇지 않게 포기했다. 본가에 다녀온 그가 시름시
름 앓는가 하면 나를 볼 때면 의미 모를 죄책감을 문득 비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무심코 지나친 위화감이 뒤늦게 커다란 폭풍이 되어 돌아왔다. 몇 년을 기획
한 시스템을 한순간에 도둑맞고, 신제품 출시 일정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숫자로 환
산하지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손해가 나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되기도 전에 덜
컥 비상부터 걸렸다.
“……죄송합니다.”
그 최초의 날갯짓을 일으킨 장본인은 아무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사과만 내뱉었
다. 서재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눈을 마주치긴커녕 얼굴을 볼 수
조차 없었다.
“죄송하다고…….”
픽, 헛웃음이 나왔다. 그에게 들은 사과가 벌써 몇 번째더라. 남의 잘못을 사과하
지 말라고 했더니 이제는 사과를 하기 위해 본인의 잘못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지
금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언제 그랬습니까.”
선호에서 선보이기로 했던 시스템을 해신이 먼저 선보였다. 도장을 찍듯 똑같이 빼
다 박았기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시스템이었다. 다 무너져 가
는 해신이 그런 대단한 기술력을 가졌을 리가 없으니, 출처는 당연히 선호였다.
“권이도 씨가 출장 갔을 때…….”
“…….”
“그때 전달했습니다.”
화가 나는 걸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서재에 놓고 왔던 그 자료, 내가 CCTV
를 돌려 볼 때도 멀쩡했던 그 자료가 고작 사흘 사이에 정세진의 손에 들어간 것이
다. 정작 서류는 제자리에 돌려놓은 걸 보면 계획된 도둑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죄송합니다.”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가 다시 새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고자 입
을 열었다가 차마 나오는 말이 없어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무겁게 내리누른 침묵
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데, 반대로 나오는 건 자꾸 웃음뿐이었다.
“……하.”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이럴 때일수록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침착하게 상황
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
지 따위를.
“정세진 씨.”
흠칫, 어깨가 떨리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래, 아마 자의로 한 행동은 아
닐 것이다. 진작 말하지 않았던가. 그럴 만한 용기도 욕심도 깜냥도 없는 사람이라
고. 그렇게 가져다 바친 자료의 결과가 꼬리 자르기였으니 그 또한 후회하고 있을지
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그때는 나랑 아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최대한 천천히 머릿속에서 말을 골랐다. 내 손에서 떨어진 서류가 어지러이 바닥
에 흐트러졌다. 팔랑, 날아간 서류를 눈으로 좇으면서 나는 최대한 너그러운 목소리
로 입을 열었다.
“왜 그동안 안 말했습니까?”
우리가 섞은 건 비단 몸뿐만은 아니었는데, 그 안에 조잡한 불순물이 섞여 있었
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를 속이고 배신한 뒤에 이제는 외면까지 하려고 드는 게 분명
했다. 완전히 방심했단 사실에 배신감이 드는 한편, 내가 배신감을 느꼈다는 사실
엔 또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시간이, 정세진 씨한테도 짧지 않았을 텐데…….”
“…….”
“나한테 한마디만 했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겠지.”
우습게도 그 말들은 내게도 타격을 입혔다. 진작 사실을 고했다면 그의 실수
를 한 번은 넘어가 줬을 거라고 고백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수습할 시간을 벌
기 위함이라고 핑계를 붙여 봤자, 내가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하
나였다.
“정세진.”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그에게 고작 그 정도 가치였다는걸. 한순간에 끊겨 버
린 그 가족들보다 내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는 사실을.
“난 지금 변명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
이유가 있었으면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혹은 그저 협박을 당했을 뿐이라
고. 너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었다며 딱 한마디만 하길 바랐다. 얼추 그럴싸한 핑계
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모르는 척 호구 새끼처럼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협박이라도 당했어요?”
나조차 놀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비굴해질 수 있을 줄이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
아야 할 상황임에도 분노가 아닌 실망감이 들었다.
“……협박 같은 거 안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예의 그 담
담함을 가장한 얼굴은 며칠 전 빗속에서 울던 모습과는 지나치게 달랐다. 나와의 관
계가 뚝 끊길 걸 알면서도 무표정한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제 손으로 훔친 거예요.”
인정해야 했다. 내가 너에게 고작 그 정도 가치였다는걸. 내게 미움받지 않기 위
해 너는 사소한 변명 한마디 꾸며 내지 못한다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