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8화. Orgueil Et Prejuges(8)
기본적으로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개 남에게 숙이는 걸 껄끄러워하기 마련
이다. 비록 무너져 가는 대기업이라고 한들, 해신의 정 회장조차 내 앞에서 목을 빳빳
이 세우고 있지 않았던가. 피치 못하게 굽혀야 할 일이 있으면 은연중에 수치스러워
하는 기색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정세진은 제가 가진 것에 비해 과하게 굽히는 태도를 보였다. 제게 주어
진 기회를 활용할 줄 몰랐고, 충분히 해도 되는 요구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흐
르는 강물처럼 무던히 흘러가는 주제에, 그 무던한 모습조차 자기방어의 수단처럼 보
일 정도였다.
자존심…… 아니, 자존감이 낮다고 해야 하나. 관리를 잘 받은 꽃처럼 유순한 외모
로 언제 뿌리 뽑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듯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고상하게 자
랐어야 하는데, 내리는 비를 피할 그늘조차 가지지 못했다는 듯 굴 때가 있다.
그건 내게만 그러는 걸까, 아니면 남들에게도 그러는 걸까.
‘오늘 내 방에서 잘래요?’
반쯤 도박처럼 건넨 말에 정세진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쪽에서 은근
슬쩍 페로몬을 흘리긴 했지만, 그 반응은 페로몬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 좋은 머리칼
을 살금살금 어루만지자,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자고 가, 세진아.’
그날, 나는 그와 배설이 아닌 진짜 관계를 맺었다. 그에게선 아무 페로몬도 느껴지
지 않았지만, 러트가 온 것처럼 이성이 날아가긴 매한가지였다. 흉터 하나 없이 새하
얀 나신은 가녀린 골격이 아니었음에도 유독 약하게 느껴졌다.
‘세진아.’
그는 내게 간절히 매달리면서도 이름이 불릴 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쾌
감 때문이 아니라는 건, 굳게 닫힌 입술만 봐도 알았다. 별거 아닌 그런 사소한 부름
조차 정세진이라는 사람을 뒤흔드는 열쇠가 된 게 분명했다.
‘아, 거기…… 흣…….’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둘만 남은 기분이었다. 평소엔 무뚝뚝하게 굴던 사람이 조금
만 깊이 삽입해도 미치겠다는 듯 품으로 파고들었으니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느낀
다 했더니, 다음 날 보았을 땐 입 안이 온통 헐어 있었다. 다음엔 손가락이라도 물
려 놔야지, 그런 생각으로 혀를 차던 기억이 있다.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나는 정세진을 보며 몇 가지를 확신했다. 그가 나를 싫
어하진 않는다는 것, 쾌감 어린 섹스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결코 사랑받고 자란 사람
은 아니라는 것과 그 때문에 자꾸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
깨닫는 순간,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안정됐다. 그에게 결핍된 게 애정이라면 나
는 그 애정을 빌미 삼아 정세진을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여유를 잃지 않고, 가까운 거
리에서 그를 살피면서, 오로지 나만을 바라게 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단 말이다.
난생처음 느끼는 욕구를 해결할 방법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우선은 그를 얻
어 낸 뒤에, 완벽히 손에 쥐면 이 불안감도 눈 녹듯 사라지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
상한 연인을 가장한 채로, 그가 안심할 만한 관계로 서서히 바꿔 갔다.
어떤 날은 양주를 마셨고, 어떤 날은 정원을 산책했으며, 또 어떤 날은 온종일 침대
를 뒹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음식을 선호하는지, 최근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무
슨 꽃을 좋아하는지도 물어봤다.
‘은방울꽃을 좋아해요?’
‘네, 그게 향이 좋아서 향수로도 많이 쓰이는 꽃이거든요. 종종 부케로도 쓰는
데…….’
그는 입맛과 후각이 섬세하고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 예민
한 심성을 억누르기 위해 최대한 모든 일에 달관하는 태도를 보이는 게 분명했다. 따
사로운 색채를 좋아하고, 크게 위기 없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몇 번의 대화
를 나눈 뒤에 알게 됐다.
‘권이도 씨 페로몬이 수면제보다 낫더라고요.’
박 비서가 조사해 온 자료로는 알지 못했을 내용들이었다. 관계가 변하지 않았다
면 평생 모르고 넘어갔을 소소한 부분들. 남들은 모르는 정세진을 알게 됐다는 사실
에 배부른 충족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찰나에 가까운 성취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하지 못할 기갈이 되고 말았
다. 분명 관계는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손에 넣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
다. 정세진이 내게 마음을 여는 건 분명한데, 절대 끼어들 수 없는 틈새가 우리 사이
에 분명 존재했다.
원할 때 입을 맞추는,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
다 보면 말없이 눈이 맞는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 말간 뺨과 귓불 따위를 만지작
거리다가,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조차 이제는 어렵지 않았다.
‘아뇨, 필요한 건 딱히 없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도 짐을 늘리지 않을까. 내가 주는 물건을 받으려고 하지 않
고 원하는 걸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없을 때면 방에만 틀어박혀서 가
만히 숨을 죽인 채 존재감 없이 지낼 필요가 없는데도.
‘나는 그쪽을 감금한 게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정세진은 말없이 웃었다. 정곡을 찔린 표정이었으나 어
찌 보면 상처받은 표정이기도 했다. 움찔 달싹였던 입술은 이내 자조 어린 목소리
로 이야기했다.
‘딱히 갈 데가 없어서요.’
안심해 마지않을 말이었는데, 내게는 그게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얘기처럼 들렸
다. 그의 거처가 내 집이 아니었다면 ‘갈 데’의 범위에 이곳도 포함되지 않을 것만 같
아서. 아직도 이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로 비바람이 불면 그대로 쓸려 내려갈 사람
처럼 말이다.
‘내일부터 다시 회사에 복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6월 말, 일기 예보에서 장마 소식이 들릴 무렵. 정세진의 길고 길었던 휴가
가 끝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방에 머물던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내
게 그 사실을 알렸다.
‘며칠은 좀 늦을 수도 있겠어요.’
공백기를 채우려면 열심히 해야겠다고, 그가 이제는 많이 편안해진 말투로 이야기
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본부장으로 일하는 게 마음에 드냐고 물었었
다. 별 이유는 아니었고, 근래엔 습관적으로 그의 취향을 묻곤 했으니까.
정세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전혀 감사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감사한 일이죠. 저한테는 과분한 자리니까.’
나는 네 마음에 드냐고 물은 건데, 퍽 미묘한 대답이지 않나. 그 말이 진심인지는 모
르겠고, 제게 주어진 상황에 만족해야 한다고 되새기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러고 보면 정세진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웬만해선 제 의견을 내는 법이 없었
고 늘 정석에 가까운 완벽한 대답을 내놓았다. 정 회장의 말대로, 어린 시절부터 ‘뛰
어난 교육’을 받지 않은 이상 불가능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가 출근하는 날 아침. 정세진은 출근 준비를 마친 뒤 나를 배웅해 줬다. 근래 들
어 생긴 버릇인데, 마치 집 지키는 개처럼 현관 앞까지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가 하
는 인사는 퍽 마음에 들었으나, 그의 차림이 홈웨어가 아닌 정장이라는 점은 마음
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별다른 대답 없이 천천히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뺨 언저리를 감싼 뒤 은근
히 귓가를 어루만지자 그의 입가에도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입맞춤
은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엔 아쉬움이 남을 정도였다.
“다녀올게요.”
“…….”
평범한 부부가 된 기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를 붙잡으려고 했던 이유 따위는 떠
오르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었고, 손끝에 남은 온기
가 나를 간지럽혔다.
‘보고 괜찮으면 그냥 살지 그래. 보니까 사람이 괜찮던데.’
그러게, 굳이 이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해신은 서서히 무너질 거고 그
렇게 되면 갈 곳 잃은 정세진을 거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본부장인 이상 여파
가 오겠지만, 그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개발 중이던 시스템이 거의 완성 단계라고 합니다. 안정성 검수만 끝내면 시중
에 내놓을 수 있을 겁니다.”
회사로 가는 차에서 박 비서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중요한 소식을 브리핑했다. 시스
템이 완성되면 신제품 출시에 박차를 가할 테니, 남은 건 예정된 일정에 따라 일이 진
행되는 것뿐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라면 큰 장애물 없이 높은 성과를 얻
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오후엔 부사장님과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장소는?”
“의선당입니다. 한 시로 예약해 두었습니다.”
나직이 침음하며 태블릿 PC로 시선을 돌렸다. 의선당이라. 생각해 보면 의선당이
야말로 정세진이 좋아할 만한 식당이었다. 한식 위주의 식단에 자극적이지 않은 요리
들로 가득했으니. 실제로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면 대개 의선당으로 약속 장소를 잡
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주말쯤에 예약 하나만 더 해놓지. 코스는 적당히 골라도 되는데 맵거나 밀가루 있
는 음식은 빼고.”
“시간대는 저녁으로 괜찮으십니까?”
박 비서는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담담히 일정을 확인했다. 여섯 시 정도로 잡아 두라
고 말하자, 주방장에게 전달하겠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역시 눈치 빠른 사람답
게 누구와 갈 건지 묻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글쎄…… 요새 외식을 통 못하긴 했네요.’
세간에 부부다운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됐으니 시간을 내 외출을 하는 것도 나쁘
지 않을 듯했다. 겸사겸사 맛있는 음식을 먹여 두면 기분 좋은 얼굴로 제 취향 따위
를 늘어놓을지도 모르니까. 물질적인 건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었으나 이 정도 성의
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이따금 망설임을 내비치는 건 어차피 시간
이 지남에 따라 해결될 문제가 분명했다. 멍청한 정 회장보다 내 곁이 훨씬 아늑할 테
니, 언젠간 정세진도 경계를 허물고 안주하는 순간이 오겠지.
일전에 느꼈던 위기감은 단순히 기우에 불과했다. 그는 순조롭게 내 손에 들어왔
고,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원하는 만큼 그를 취할 수 있었다. 이따금 안달이 나
는 것도, 그저 아직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지 않을까.
회사에 도착한 뒤엔 잡다한 생각을 떨쳐 낸 채 오전에 처리해야 할 업무들에 집중했
다. 평소와 크게 다를 건 없었고, 유달리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그 좋던 컨디션이 깨진 건, 얌전히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010−XXXX−XXXX」
모르는 번호였다. 그럼에도 무시하지 못한 건, 그게 업무용 핸드폰이 아닌 개인 핸
드폰이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제외하면 정세진만 아는 번호였고, 그마저도 웬만해
선 울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
뒤통수가 이상하리만치 싸했다. 분명 쓰잘머리 없는 스팸 전화일 텐데, 한 번 시야
에 걸리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잉, 지잉, 계속해서 울리던 핸드폰은 어느 순간
을 기점으로 뚝 하고 끊겨 버렸다.
그제야 나는 핸드폰을 들어 부재중 기록을 확인했다. 액정에 나타난 열한 자리 숫자
는 모르는 번호임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 번호를 어디서 봤더라.
그리 생각하는 순간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정세진 본부장님 비서인 김성호 실장입니다.」
이름은 처음이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림자처
럼 늘 정세진의 뒤를 따라다니던 남자.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 자연스럽게 그 입에
서 흘러나왔던 ‘김 실장’이라는 비서.
“별 수작을…….”
정 회장이 여기까지 손을 뻗었나.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다 하다 개인 번호
까지 알아내다니 슬슬 진짜로 치워 버려야겠다는 귀찮음도 함께였다. 그러나 뒤이
어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나는 잠시간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굳어 버리고 말았다.
「본부장님께서 공금 횡령 및 탈세 혐의로 구속되셨습니다.」
***
결혼 전, 박 비서가 정세진에 대해 조사해 올 때 당연히 그중엔 개인 재산과 관련
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가지고 있는 오피스텔과 자동차 목록, 그리고 주식을 비롯
한 여러 소득까지. 그다지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고, 더 깊이 파고든다고 해서 먼지
가 나올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549억 횡령’ 해신그룹 본부장 구속 송치」
「잇따른 탈세 의혹...정 회장 “기업과 무관한 일”」
그런 정세진이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되어 잡혀갔다. 수갑을 찬 사진이 실시간으
로 올라왔고, 기업 비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끝도 없이 쏟아졌다. 누가 봐
도 퍼포먼스에 불과한 연행은 애초에 작정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쇼였다.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돼서 죄송합니다.”
연락이 닿자마자 사무실로 찾아온 김 실장은 밑도 끝도 없이 허리를 숙이며 이야기
를 꺼냈다. 기사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제 선에선 불가능했다고. 당장 생각나는 사람
이 나밖에 없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다면서. 동아줄이라도 잡는 양 간절
한 음성으로 나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 줬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본부장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왜 아니겠는가. 그럴 만한 야망과 용기가 있었다면 애초에 내가 속을 끓일 만한 일
도 없었을 텐데.
정세진이 공금 횡령? 차라리 내 집에서 도둑질을 하지. 베갯머리송사를 속삭이
며 건물이라도 달라고 비는 게 그로서도 훨씬 안전하고 편했으련만.
“김 실장이라고 했죠.”
“예, 맞습니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걸 내가 아는 것과 김 실장이 내게 이야기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김 실장
은 해신의 사람이었고, 그가 찾아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그쪽 회장이어야 했으니
까. 내가 정 회장의 연락을 무시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구태여 나를 찾아온 이유
가 무엇일지는 뻔했다.
“정세진 씨가 그런 게 아니면 해신의 누군가는 그랬다는 얘기군요.”
가여운 해신의 오메가가 제 아비가 저지른 일을 떠맡게 된 것이다. 웬일로 조용하
다 싶더니만 이런 식으로 함께 버릴 생각을 했었나 보다. 그토록 귀한 패인 양 내밀었
던 주제에, 제대로 활용할 수 없으니 내다 버리는 게 분명했다.
“……부탁드립니다.”
김 실장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한마디를 보탰다.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새카
만 정수리만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정작 아버지라는 사람은 제 아들을 화살받이로 내
세웠건만. 이쪽은 무슨 관계길래 이토록 절실하단 말인가.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겠습니다.”
한낱 비서 주제에 뭘 해주겠다고,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결연하기 짝이 없었다. 도
와줄 사람을 고른 안목은 높이 사고 싶었으나, 그 간절한 행태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
았다.
“글쎄……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
그의 부탁과 무관하게 정세진은 빼 올 생각이었다. 설령 정말 본인이 한 짓이라
고 해도 이런 식으로 징역살이를 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죗값은 본부장 자리에서 내
려온 뒤 내 집에 머물며 치러도 되는 게 아닌가. 이미 잡혀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
터 박 비서를 통해 다리를 놓으라고 일러둔 참이었다.
“김 실장님도 아실 텐데요. 내가 계약에 그다지 협조적인 편이 아니라는걸.”
그러나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도 없었다. 진정 유능한 비서라
면 나를 움직이게 할 조건 정도는 가지고 왔을 게 분명했다. 그 많고 많은 사람 중 나
를 찾아왔다는 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대략적으로는 짐작하고 있다는 거겠지.
“뭘 해줄 수 있습니까, 그쪽이 나한테.”
“뭐든지 해드리겠습니다.”
현명하게도 김 실장은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망설여
도 내쫓을 생각이었는데, 올곧게 나를 향하는 시선에 흔들림은 없었다. 내가 뭘 요구
할 줄 알고, 곤란해하는 낯도 아니었다.
“뭐든지라…….”
어떻게 할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꼬리를 자를 생각이었다
면 응당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어차피 무너져 내릴 기업이었으니 그 시
기를 앞당긴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정 회장을 배신하는 일도?”
김 실장은 그 질문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주 천천히 눈
을 내리깔았을 뿐이다. 꾹 움켜쥔 주먹을 가늘게 떨면서, 그가 느릿느릿 꺼낸 이야기
는 이거였다.
“지금까지 회장님이 저지른 비리와 관련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어가 낚였다. 그와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