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7화. Orgueil Et Prejuges(7)
흘긋, 정세진을 내려다봤다. 그는 어쩐지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중이었
다. 저무는 노을이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려, 담갈색 눈동자에 아롱아롱 맺혔다.
“……그래?”
“응!”
웃는 게 예쁘다니. 웃는 모습이라면 셀 수 없이 많이 봐왔는데. 객관적으로 수려
한 외모임은 분명하나 그 눈 높은 혜율이가 새삼 감탄할 정도는 아니건만.
“그래, 삼촌도 다음에 볼게.”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정세진은 그제
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대로 나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마치 제 역할
이 끝났다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그를 붙잡고 말았다.
“저녁이나 먹죠.”
***
혜율이가 말하는 정세진은 내가 아는 것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꽃을 좋아하
는 건 알았지만 관련된 지식까지 많다는 건 몰랐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알았지
만 그 안에서 책을 읽는지는 몰랐다. 나와의 식사는 그렇게 불편해했으면서 혼자 밥
을 먹는 걸 싫어한단 사실도 의외였다.
‘오빠한테 꽃 냄새 나.’
혜율이가 그 말을 한 다음 날, 정세진은 세 번째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밥을 먹으
러 내려오지 않기에 설마 싶은 생각으로 그의 방을 찾아갔다가 알게 됐다. 또 한 번 몸
을 섞을 생각은 없었으나, 그 요령 없는 한마디에 이성이 아득히 멀어졌다.
‘……나랑 자요.’
아무것도 안 줘도 된다는 말은 굉장히 묘하게 들렸다. 나라는 사람을 원하는 것 같
기도 했고 그저 성욕 해소 도구가 필요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도 같은 말을 했을까. 그 가정을 떠올리자마자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일부러 건조한 행위를 이어 갔다. 페로몬을 많이 흘리지도 않았고, 뒤를 풀
어 주는 것도 의무적으로 해치웠다. 시작할 땐 시위하듯 엎드리려고 하던 정세진
은 정작 관계를 맺는 중에는 내게 울면서 매달리기 바빴다.
섹스 습관이 못돼 먹은 사람이었다. 어디서 모자란 것들이랑 뒹굴었는지 준비 과정
에 의문을 표하는 것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칭얼거리며 안겨 오는 몸짓은 어설프
기 짝이 없는데, 정작 아래를 조이는 행동만큼은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짜증이 있는 대로 솟았다. 내게 비비적거릴 때면 희열감이 들다가, 나
한테만 이러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분명 몸을 섞
고 있음에도 해소되지 않은 갈증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차라리 내게 무언가 바란다면 좋을 텐데. 그럼 그걸 빌미로 개운하게 그를 취
할 수 있을 테니. 내게 바라는 게 고작 성욕 해소라면, 그건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해갈
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니까.
‘말씀하신 통화 기록입니다.’
그와의 두 번째 섹스 이후 나는 곧장 정세진의 주변을 조사했다. 그가 누구와 연락
하는지, 혹시 수상한 움직임은 없는지, 그런 것들을 긁어모아 꼼꼼히 확인했다. 언
뜻 그를 의심하는 듯한 행동들은 사실은 내 손에 쥐기 전에 가시가 있는지 확인하
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정철호 회장과는 따로 연락하지 않는 듯합니다.’
예상 밖에도 결과는 그 누구보다 깨끗했다. 그나마 업무 전화는 몇 통 하는 것 같은
데, 휴가를 받은 이후엔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물론 정민재까지 없
은 없을 거라는 말이다.
‘잠을 못 잤나 보군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나는 금세 그를 향한 태도를 바꿨다. 조금 더 살갑게 말을 붙
이고, 사소한 건강 상태도 확인했다. 내가 보이는 관심에 얼떨떨해하던 정세진은 마
지 못해 제게 불면증이 있다는 사실까지 고백했다. 나와의 섹스 후엔 늘 기절하듯 잠
이 들더니. 평소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불어를 잘한다고 했던가요?’
그렇게 물었던 건, 반쯤 충동이었다. 불어라면 이미 웬만큼 다 알고 있지만, 그런 구
실이라도 있어야 정세진이 경계를 좀 풀 것 같아서. 다만 예상하지 못한 건, 서재 벽
면에 걸려 있던 물건 하나.
“저 총…… 장식 맞죠?”
식사를 마친 뒤 나란히 서재에 도착했을 때였다. 머뭇거리며 입을 연 정세진이 벽
에 걸린 총을 보며 물었다. 가짜이길 바라고 물은 듯했으나, 내게 그를 안심시킬 의
무 따위는 없었다.
“아뇨.”
“…….”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입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총이었다. 누나는 가정이 생기면서 치
워 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잘 보이는 곳에 총을 장식해 놨다. 내가 내 집에 내 다짐
을 걸어 놓겠다는데, 그걸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건 정 회장한테 말할 겁니까?”
그가 말하지 못하리란 사실은 지금껏 봐온 그의 성정만 봐도 알았다. 역시나 정세진
은 우리 대화를 막 전하진 않는다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별거 아닌 대답이었는데, ‘우
리’라는 표현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휴가 낸 이후로 아무와도 연락을 안 하던데.”
나는 사소한 변덕으로 그에게 통화 기록을 뽑아 봤음을 이야기했다. 어떤 반응이 나
올지 궁금해서 그런 건데, 정세진은 입을 꾹 다물 뿐 별다른 불쾌함을 내비치지 않았
다. 화를 내진 않아도 인상은 찌푸릴 줄 알았건만, 퍽 오묘한 표정이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어쨌든 이미 저지른 일이었고, 그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아서 아
무 말도 안 하는 걸 텐데.
“이거 읽어 봐요.”
책장에서 이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
다. 향수의 기원이라는, 불어로 된 책이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정세진은 한 타이
밍 늦게 유창한 발음으로 제목을 읽었다.
“발음이 좋네.”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왔다던가.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투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
다. 반대로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테스트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
면서 고분고분 대답은 하고 있으니 괜히 더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거기 앉아서 내가 가리키는 거 해석해 봐요.”
그는 순순히 시집과 볼펜을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겨 문
장 하나를 가리키자, 또박또박 옆쪽에 해석을 적는다. 글씨를 잘 쓰네. 가벼운 감
상 대신 이번엔 두 번째 시를 펼쳐 가리켰다.
“이거랑 이거, 이것도.”
“…….”
불어를 잘한다고 해놓고, 반쯤 틀린 해석이 채워졌다. 그것도 아예 다른 의미
인 건 아니었고 단어만 가지고 직역한 느낌이었다. 아마 어차피 모를 거라는 생각
에 대충 적어 넣은 건 아니었을까.
“내가 못 알아본다고 막 적으면 곤란한데.”
“…….”
글씨를 적던 손이 멈칫했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다섯 번째 시를 펼쳤
다. 사랑에 빠진 기분을 여러 방면으로 써놓은 서정시. 완독하지 않은 책은 책장에 꽂
아 놓지 않기에 이 시집 역시 진작 끝까지 읽은 터였다.
“이거, 적어 봐요.”
또박또박 쓰인 글씨는 역시나 제대로 된 의미는 아니었다. 잠깐 미간을 좁혔던 그
는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돌렸다. 퍽 가까운 거리에서 그
와 내 시선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
“…….”
가지런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
려했다. 유독 눈동자 색이 엷은 탓에, 새카만 동공이 또렷하게 보였다.
“……무슨 뜻입니까?”
늘 느끼지만, 그의 시선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좋게 말하면 고요하다는 뜻이
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하다는 뜻이다. 하나 또 다르게 말해 보면, 작은 돌멩이 하나에
도 큰 파문이 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현실 감각이, 없다는…….”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버석하니 갈라졌다. 나를 보는 시선도, 그 말을 하는 목소
리도, 심지어 마음까지 흔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음에도 가
까이 있는 얼굴은 더 이상 멀어지지 않았다.
“아, 현실감.”
그럴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분위기에 취했다고 변명을 해야 할까. 몸
을 섞었을 때도 존재감 없던 불씨가 고작 시선이 얽히는 순간에 화르륵 타올랐다. 스
르륵 눈꺼풀이 감기는 것도, 그리고 서서히 숨결이 가까워지는 것도. 목이 타는 것처
럼 갈증이 일어서, 입술이 닿는 순간엔 그 언젠가처럼 찌릿한 감각이 들었다.
“…….”
“…….”
어쩌면 처음부터, 그에게 욕정 했던 모양이다. 그게 성애건, 아니면 단순한 성욕이
건. 비이상적인 욕구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 부정하고 있었지만, 끝내 받아
들일 수밖에 없겠다고. 보잘것없는 오메가라 생각했던 사람을 내가 가져야겠다고 말
이다.
페로몬 따위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분명 나와 다를 바 없는 샴푸 냄새만으로
도 아랫배가 바짝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몸을 섞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
을 그 입술 틈새를 파고들면서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내 옷깃을 그러쥐는 손길, 혀와 혀가 닿는 감촉, 그리고 목을 움츠리며 흘리
는 신음까지.
“흐…….”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입 안을 탐해 볼 걸 그랬지. 그 안에 성기를 처넣을 생
각은 했으면서 왜 혀를 넣을 생각은 못 했는지 모르겠다. 여린 점막을 건드리며 숨결
을 주고받는 동안 정세진은 입맞춤을 처음 하는 사람처럼 목덜미를 뻣뻣하게 굳히
고 있었다.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을 땐, 어깨를 움찔하며 놀란 것 같기도 했다. 색색 들
리는 숨소리가 달뜬 열기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 뜨거운 분위기가 식기 전에, 지
금의 행위를 반복할 구실 하나쯤은 만들어 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어를,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대책 없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갖다 붙였다. 아마, 그냥 말했어도 정세진
은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망설이다가도 마지못해 받아들였겠지. 그와 내 위
치가 바뀌지 않는 이상, 선택권은 항상 내 손에 쥐어져 있을 테니.
“일 때문에 필요해졌는데, 선생을 고용할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래도 우선, 최대한 사근사근 그를 설득했다. 그를 볼 때마다 느꼈던 불쾌함이 지
금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역시나 그는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단 말로 거절
했고, 도르륵 눈을 굴리며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만 더 다가가면 입술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가 반사적으로 뒤로 도망
치다가 더는 도망칠 곳도 없이 소파에 반쯤 누워 버린 탓이었다. 나는 굳이 거리를 넓
히지 않은 채로 가만히 그런 정세진을 내려다봤다.
“정세진 씨.”
“…….”
“나랑 섹스도 하고 방금은 키스까지 했으면서. 불어 하나 가르쳐 주는 건 못 합니
까?”
눈언저리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동자가 마구 떨리는 게, 아마 이성적인 판
단이 불가능한가 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원인 모를 욕
구가 충족되는 기분이 들었다.
***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아 느끼는 무력감은 나와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태어나서
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한 적이 없었다. 가지고 싶은 물
건은 돈으로 사면 그만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은 애초에 만들지 않으면 그만이
었으니.
당연히 나는 정세진과의 사이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성의를 보이면 손
에 쥘 수 있고, 또 조금만 노력하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매일 함께하
는 아침 식사와 그에게 배우는 불어가 적당한 계기가 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
다.
“오늘은 내 방에서 하죠.”
불어를 가르쳐 달라고 제안한 뒤, 그는 순순히 나와 저녁 시간을 함께했다. 장소
는 2층 끝자락에 있는 서재였고, 수업을 마칠 때면 정세진은 늘 잠에 취한 얼굴
로 내 방을 나섰다. 불면증이 있다고 했으면서, 미처 붙잡지도 못할 만큼 나른한 얼굴
이었다.
“졸려 보이는군요.”
오늘도 그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물가물 눈을 깜박였다. 흐리멍덩하게 변한 눈
동자가 얄팍한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드러나길 반복했다. 이내 고개를 털어 낸 그
가 예의 그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졸린 건 아닙니다.”
“요새는 잘 잡니까?”
“네, 뭐…….”
민망해 보이는 낯이었다. 잠을 잘 자는 게 멋쩍다는 듯이. 딱히 그를 부끄럽게 할 생
각은 없었으나 요 며칠 아쉬운 기분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지나치게 피곤해 보이
는 바람에 뭔가 해볼 새도 없이 그냥 방으로 보내 줘야만 했으니까.
“그래요. 오늘 배울 건 뭡니까?”
고작 이딴 불어를 배우고자 그에게 이 시간대를 얻어 낸 게 아니었다. 읽고 쓰는 법
이 필요했다면 시간을 할애할 필요 없이 책을 보며 배우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기초
가 부족하진 않았고, 그냥 수작을 부릴 기회가 조금 필요했을 뿐이다.
“항상 느끼는데…… 되게 빨리 배우시네요.”
정세진은 놀라울 정도로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리라
고 생각조차 못 하는 듯했다. 똑똑한 사람이, 이런 데에는 영 눈치가 없으니. 나로
선 다행인 일이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
담담히 말하는 순간엔 픽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얼떨떨해 보이는 정세진의 표정
이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사실 불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하면, 그럼 이 사
람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뭐, 잘 가르치는 선생 덕도 좀 있고.”
아무 생각 없이 괜한 립서비스를 건넸다. 물론 전부 빈말은 아니었고, 실제로 그
는 선생으로서의 자질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이 시간을 위해 미리 공부를 해온다
는 건, 그날그날 알려 주는 내용만 들어도 알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영광이죠.”
그런데 정세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눈을 내리깔
고 살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얇게 쌍꺼풀진 눈매가 곱게 휘어지는 순간, 머릿속
에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웃는 게 엄청 예뻐.’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그는 늘 습관적인 미소를 머금었고 타인을 대
할 때면 언제나 상냥한 낯을 유지했다. 단순히 눈을 접으며 웃는 정도는 대수롭지 않
게 넘길 수 있었단 말이다.
“…….”
그런데 지금만큼은 그가 지어 보이는 표정이 하나하나 뇌리에 남았다. 눈을 감는 것
조차 아쉬워서 멍하니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 할 정도로. 그러다 문득 나도 모르
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릴 만큼.
“……정말이네.”
정말 웃는 게 예쁘네.
감정을 자각하는 계기는 간혹 아주 보잘것없곤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 속에
서 갑작스럽게 위기감이 드는 순간. 당연히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오만이 어쩌
면 놓칠 수도 있겠다는 불안으로 바뀌는 그 찰나.
어떻게든 그를 흔들고 싶다는 생각에 굳이 하지 않을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총
이 정말로 진짜가 맞고, 그건 곧 내 각오나 다름없다고. 정세진은 드물게 무섭단 말
을 입에 올렸으나,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오로지 총이었다.
“아,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언뜻 자상한 것 같은 태도가 사실은 속이 바싹 말라붙은 건조함이라는 걸 안다. 나
를 싫어하지 않는 것조차 사실은 무관심의 일면일 뿐임을 모르지 않았다. 내 집에
서 나와 입을 맞추면서도, 무엇 하나 바라지 않는 사람이니. 그 욕심 없는 태도가 이
해되지 않았다.
“정말 나한테 바라는 게 없습니까?”
차라리 바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생각을 한 번 더 하게 됐다. 그에게 뚜렷
한 목적이 있다면 기꺼이 들어준 뒤 우위에 서고 싶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
는 말이, 내 마음도 바라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려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이 관계
가 어떻게 변화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권이도 씨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담담히 고개를 숙인 채로 걱
정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을 뿐이다. 차마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그 모습에, 난생처
음 위기감이 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