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12화 (112/131)

외전1 6화. Orgueil Et Prejuges(6)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세진은 운전을 잘했다. 차 키를 건네받고 곤란한 표정을 짓

던 그는 정작 차에 올라탄 뒤에는 능숙하게 좌석과 백미러를 조정했다. 허리를 곧

게 세우고 핸들을 돌리는 모습에는 평소의 침착한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

차가 한강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텅 빈 도로를 응시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했

다. 충동적으로 받아들인 거지만, 그가 내게 드라이브를 제안한 이유가 분명 있을 테

니까. 대충 짐작건대 아마 정 회장에게 무언가 협상을 해오라는 명령을 들은 게 아닐

까.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정세진은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차가 정

말 좋다는 심심한 감상만이 그와 내 사이에 오고 간 대화의 전부였다. 드물게 기호

를 드러낸 게 신기해 가지라고 해봤는데, 영 난처한 얼굴로 예의 차린 대답을 내놓았

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여겼으련만, 그 말을 하는 정세진은 정말 진

심처럼 보였다. 딱히 고마워 보이진 않아도 내게 무언가 받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

다. 그 담담한 얼굴 너머에 부담감이 서리는 듯해서, 한참 그를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

다.

“내가 웬만하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데.”

저 작은 머리통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나를 왜 한강까지 데려온 건지, 바라는 거 없이 건조한 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무

엇인지, 그런 주제에 왜 그렇게 눈치를 보고, 왜 이따금 미묘한 체념 따위를 내비치

는 건지.

“그쪽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

살면서 이렇게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박 비서도 무뚝뚝

한 인상이었으나 적어도 그에겐 ‘상사니까 맞춰 주고, 일이니까 돈 벌려면 해야 한

다.’ 정도의 의지는 보였다. 그런데 정세진은 간혹 텅 빈 껍데기처럼 아무 목적 없

이 움직일 때가 있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느리게 돌아온 시선이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 곤란함, 난처함, 부담감을 비롯한 긴

장 따위의 것들. 그와 결혼한 이후로 늘 마주하던 감정들은 단순히 ‘어려운 상

대’를 대하는 것에서 오는 압박과는 조금 달랐다.

“……바라는 거라면.”

“그쪽 성격상, 여기까지 오자고 했으면 하려는 얘기가 있었겠지.”

그래서 의미 없이 하는 행동에 의미를 찾게 됐다. 도무지 그의 행동 원리가 이해되

지 않아서 머리를 반으로 갈라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구까지 생겼다. 정작 나

는 이유 없이 그를 따라와 놓고 그에겐 이유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랑 데이트나 하자고 부르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 말을 하는 순간엔 짧게나마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

런 거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물론 저 미지근한 반

응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겠지만.

“정 회장이 그쪽한테 협상이라도 시켰습니까?”

“…….”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 곧은 콧대

가 매끄럽게 이어졌다. 굳게 다물린 입술이 생각보다 붉다는 걸, 흐릿한 가로등 불

빛 아래에서야 알게 됐다.

“저는…….”

“…….”

“저는 정말 바라는 게 없습니다.”

한없이 나약한 생명체를 괴롭힌 기분이었다. 살면서 죄책감 같은 걸 가져 본 적

이 없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죄송합니다.”

“…….”

그 사과는 일종의 애원처럼 들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그냥 내버려 두라

고. 잠잠히 가라앉은 호수에 제발 돌을 던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정말 죄송합니다.”

이상한 부분은 많았다.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면서 자존심 상한 기색도 보이지 않

는다. 변명 한마디 없이 눈을 내리깔면서 쓸데없는 의심에 억울함조차 내비치지 않았

다.

“보통…… 아들은 아빠를 많이 닮던데.”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서 정 회장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이

마에 흘러내린 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말이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들이 결코 아부

는 아니었고, 내게 맞춰 주는 행동들이 결코 욕심에서 비롯되진 않았다.

“그쪽은 정말 친아들이 아니군요.”

부족한 거 없이 자랐을 도련님이 왜 이렇게 컸을까. 정민재는 제 아비를 똑 닮았던

데 혈연이 이어지지 않았다고 이렇게나 다른 게 가능키나 할까.

“그만 돌아가죠.”

그에게 품었던 경계심이 하릴없이 허물어졌다. 정확히는 그럴 가치가 없어졌다

는 게 옳았다. 아무 힘도 없는 상대에게 날을 세우는 것만큼 무의미하고 귀찮은 일

도 없었으니.

***

그와 찾았던 한강이 어땠는지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강물에 비친 야경

도, 가로등이 늘어진 풍경도, 내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기억에 남

은 건 딱 두 개.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던 눈빛과 자조 어린 미소 정도.

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바라는 게 없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심경의 변화

까진 아니었으나, 그를 의식하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 정도는 들었다. 마침 이리저

리 흔들리는 게 화가 나던 참이니 조금 힘을 빼고 상대한들 문제는 없을 것이다.

계절은 서서히 바뀌어 어느덧 봄을 지나는 중이었다. 시스템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

됐고, 여전히 정 회장에겐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듣기로는 암암리에 무언가 개

발하고 있다는데 그래 봤자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에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다.

그사이 정세진과 내 사이엔 사소한 변화가 생겼다. 우선 그가 나와의 아침 식사

를 더 이상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그의 행동반경을 조금 더 늘려 줬고, 그럼

에도 정세진은 고마운 기색 없이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쳤다는 것.

‘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로는 고맙다고 하면서 그 인사엔 껄끄러움이 묻어났다. 내가 잘해 주면 잘해 줄수

록, 정세진의 표정은 점점 어색해지기만 했다. 호의를 거부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

나. 아니, ‘호의’라 칭하기에도 애매한 것들을 그는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몰랐는데, 사실은 꽤 까다로운 성미였나 보다. 그게 아니면 불편함을 즐기는 변태

적인 성향이 있거나. 그런데 왜, 내가 아닌 타인의 호의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

는 건지.

“들어가십시오, 전무님.”

창립 기념식 준비를 앞두고 조금 일찍 퇴근한 주말 오후였다.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

네준 나는 정세진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는 말에 괜한 만족감을 느끼며 방으로 향했

었다. 그러다 별안간 걸음을 멈췄고, 2층 계단 앞에 서서 가만히 아래쪽을 내려다봤

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내가 퇴근했다는 사실은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

원은 산책하면서 왜 욕조는 쓰지 않냐고, 그런 것들을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1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용조용 단정한 걸음걸이는 이 집

에서 딱 한 명, 정세진밖에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1층을 바라보자, 아래쪽에서부

터 그가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그는 품에 출처 모를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내리깐 두 눈엔 기분 좋은 빛

을 띤 채로, 늘 굳게 닫혀 있던 입매는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풀려 있다. 내게

는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그런 편안한 표정이 이상하리만치 뇌리에 각인됐다.

곱상한 생김새라는 생각은 진작부터 했었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엷은 얼굴은 다

른 사람들보다 유독 현실감 없는 편이었다. 눈썹이나 눈매가 단정하고 곧아서 조금

만 웃어도 상냥한 이미지를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면 진작 그래야 했던 게 아닌가. 나와 처음 만났

을 때, 혹은 결혼식이 진행될 때,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오늘 아침 식사를 할 때만이

라도. 만들어 낸 것처럼 학습된 미소가 아니라, 이토록 생기 있는 표정을 지었다면 좋

았으련만.

“언제 들어오셨어요?”

그러나 그 보기 좋은 얼굴은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

다. 눈 깜박할 새에 일어난 변화가 어이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배신감이 들 정도였

다. “방금.” 그렇게 대답하며 꽃다발을 내려다보자, 정세진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 좀 드릴까요?”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반으로 나눠 자연스레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내가 받지 않

고 미간을 좁히자 멋쩍은 얼굴로 덧붙이기도 했다.

“선물로.”

“……선물?”

단어 선택이 묘하지 않나. 우리가 꽃 따위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닐 텐데.

“권이도 씨 정원에서 나온 거니까 선물이라기엔 뭐하지만…….”

내 되물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가 느릿느릿 핑계를 덧붙였다. 그러면서 애

써 지어 보인 눈웃음은 조금 전에 보았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예쁘잖아요.”

“…….”

왜 이렇게 마음에 안 들지. 예전이었다면 별 수작을 다 부린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

금은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의 행동에 아

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놀라울 정도로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누가 줬습니까?”

“정원사분께서 주시더라고요.”

장미와 작약인가. 고작 이딴 꽃 쪼가리는 기쁘게 받으면서. 욕조를 써도 된다는 말

엔 왜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이 또한 결국 내 정원에서 나온 건

데, 주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부담이 없어진 건지.

“고용인들이랑 사이가 좋군요.”

짜증이 나는 한편, 이유를 찾을 수 없어서 답답한 기분도 들었다. 누구 맘대로 꽃

을 꺾어 줬나 싶다가도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그럴 만하다 싶기도 했다. 앞서 말

하지 않았던가. 기호를 드러내는 게 신기한 사람이라고.

“꽃을 좋아해요?”

“네, 뭐……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 페로몬만큼이나 고상한 취미였다. 향긋하게 풍기는 꽃 내음은 히트 사이클

이 올 때면 정세진에게 풍기던 페로몬과 비슷했다. 좋아해서 닮은 건지, 아니면 닮아

서 좋아하는 건지. 어느 쪽이건 퍽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든다.

“조만간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이 열릴 겁니다.”

정세진은 갑작스러운 말에도 별다른 의아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옷을 내 쪽

에서 준비하겠다는 건, 결국 너를 또 액세서리처럼 쓰겠다는 말인데. 그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지, 아무렴 어떠냐는 듯 감흥 없이 웃기만 한다.

“그럼 저는 이만…….”

3층으로 올라가는 걸음은 집으로 들어올 때와 달리 조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그

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도망치듯 멀어지는 뒷모습

이, 마음에 영 들지 않았다.

***

정세진이 결혼식에서 입었던 옷은 전문 디자이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코디해 놓

은 것이었다. 그의 체형과 피부색 따위를 고려한 복장이었기에 평소에 입고 다니

는 흔한 정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연히 평소보다 훨씬 눈에 띄었고, 내가 보기에

도 썩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창립 기념식 역시 전적으로 정세진에게 맞춘 복장이 준비됐다. 반쯤 넘

긴 머리 스타일, 평소보다 밝은색의 정장, 각인이 새겨진 구두와 독특한 브로치, 하다

못해 커프스 하나까지도.

재미없고 뻔한 기념식의 유일한 볼거리였다. 그는 늘 그랬듯 학습된 미소를 지었으

나 잘 꾸며 놓은 덕분에 그마저도 봐줄 만했다. 사전에 해둔 당부를 잊지 않았는

지, 내 옆에 고분고분 붙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예쁘게 입었어?”

다만, 권이정이 추파를 던지는 순간엔 짜증이 확 밀려들었다. 정작 그 말을 들은 정

세진이 과찬이라며 웃는 바람에 더 그러했다. ‘벗기기 좋은 옷’이라는 말에도 개의

치 않는 걸 보니, 그 백치 같은 반응에 심사가 뒤틀렸다.

“진짜 아깝다니까.”

권이정은 정세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몇 번이나 입맛을 다셨다. 옆에 있던 누나

가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키득거리기만 했다. 아마 내 정

세진이 파트너가 아니었다면 무슨 꾀를 써서라도 호텔 방으로 끌고 갔겠지.

식순이 끝난 뒤에도 정세진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비슷한 태도를 유지했다. 자

상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따금 정말 사이좋은 부부라도 된 양 나와 눈을 맞추고 웃었

다.

비록, 정 회장과 마주친 순간만큼은 그 포커페이스가 깨지고 말았지만.

“조만간 연락하실 일이 있을 겁니다, 전무님.”

정민재가 새빨개진 얼굴로 자리를 피하는 것까진 괜찮았다. 새삼 정세진과는 안 어

울리는 가족들이라는 생각을 할 즈음, 정 회장의 마지막 말을 듣고 그가 표정을 굳혔

다.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지.’ 그리 떠올랐던 생각은 창백해진 얼굴을 보는 순간 깨

끗이 사라졌다.

그는 집으로 향하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드물게 담담함을 잃은 표정만

이 그가 보여 준 반응의 전부였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마주쳤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처럼 상체를 확 수그렸다.

“차 세워.”

아주 잠깐,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던 것 같다. 피가 나도록 섹스한 다음에도 아픈 티

를 눈곱만큼도 내지 않던 사람이다. 그런데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순

간, 명치가 옥죄듯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멀미라도 해요?”

“…….”

멀미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아픈 건지, 괴로운 건지, 아니면 피

곤한 건지, 그런 것들을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도드라진 목울대를 꿀꺽 움직이

곤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듣기 싫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멍청한 사람은 아닌데, 가끔 지나치게 모자란 습관이 들어 있다. 부려지는 것보

다 부리는 게 익숙해야 할 직급에, 죄송하단 말이 입에 붙을 이유가 뭐가 있다

고. 정 회장은 그를 사랑으로 키웠다고 자부하던데, 그 집에 사는 20년간 이토록 납

작 엎드리는 방법을 배웠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그는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자는 말까지도 거절했다. 전혀 괜찮지 않

은 얼굴로 괜찮다고 이야기하며 달갑지 않은 사과를 한 번 더 덧붙였을 뿐이다. 고용

인이 준 장미는 좋다고 받아 놓고, 내가 주는 호의는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행동이 방어인지, 아니면 경계인지. 나는 거기까지 알진 못했다. 다만 고집을 부

리는 자세가 안쓰러워 보였고,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옆모습이 가녀리다고 여겨졌

을 뿐.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주먹을 꾹 움켜쥔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

워 보였다.

***

몸이 안 좋은 게 사실이었는지, 정세진은 기념식 이후 장기 휴가에 들어갔다. 그렇

다고 딱히 병원에 다닌 건 아니었고, 그저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이따금 정원을 산책

하길 반복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일상이었으나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

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던 중 혜율이가 찾아오기로 했다. 늘 3층에 있는 수련을 보러 오곤 하는데, 이

번엔 꽤 오랜만에 오는 것이었다. 워낙 낯을 가리는 녀석이니 서재에 숨어 있진 않을

까. 그리 생각하며 퇴근한 집엔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여름에 피는 꽃인데…….”

정원에 쭈그리고 앉은 정세진과 그를 보며 눈을 빛내는 혜율이가 보였다. 정세진

이 화단에 핀 꽃을 보며 설명을 이어 가자,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호기심이 떠올랐

다. 그가 어린아이에게 친절한, 그런 모습은 의외가 아니었는데. 딱 하나 혜율이의 반

응만큼은 의외였다.

“오빠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혜율이는 유독 타인에게 경계심을 보였다. 웬만해선 곁을 내

어 주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 앞에선 입조차 열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봐온 권이정

조차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오늘 처음 본 정세진에겐 퍽 친근한 호칭을 사용했

다.

“오빠?”

그래, 저 얼굴이 아저씨는 아니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상

에 삼촌이 나밖에 없는 줄 아는 혜율이로선 아마 최선의 호칭이었을 거다.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지, 혜율아.”

혜율이를 번쩍 안아 들고 조심스레 머리를 넘겨 줬다. 잘 놀고 있었냐고 묻자, 정세

진의 시선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그와의 하루가 퍽 즐거웠는지, 혜율이는 잔뜩 들

뜬 목소리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놨다.

“오빠랑 그림 구경하고, 과자도 먹고, 꽃 이름도 들었어.”

“재미있었겠네.”

“으응, 그리고 오빠가…….”

단풍잎처럼 작은 손이 제 입가를 가렸다. 귓가에 바짝 들이민 입술에선 더할 나

위 없이 은밀한 속삭임이 전해졌다.

“웃는 게 엄청 예뻐. 삼촌도 보여 달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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