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5화. Orgueil Et Prejuges(5)
한 번의 섹스는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리가 한 건 배설에 가까웠으
니 그가 이제 와 새삼 나를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그 또한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
을 테니, 그냥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앉아요.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실례하겠습니다.”
대답은 담담히 해놓고 의자에 앉는 자세는 엉거주춤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걷
는 데는 지장이 없나 본데 앉기엔 몸이 안 좋긴 안 좋은가 보다. 의사가 필요한지 물으
려다가 알아서 할 거란 생각에 그냥 관두기로 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는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생긴 대로 식사 예절까
지 깍듯한 정세진은 무언가 씹는 소리조차 없이 조용조용 음식을 비워 갔다. 이따
금 내 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그 또한 용건이 있어서는 아닌 듯했다.
사실 나는 그가 하룻밤을 대가로 무언가 요구할 줄 알았다. 몸을 섞었다고 친근하
게 굴거나, 혹은 살갑게 말을 붙일 거라 생각했단 말이다.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는 태
도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요.”
“……예?”
먼저 말하지 않는다면 내 쪽에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무언가 원하는 걸 쥐여 줘
야 내가 한 행위에 당위성이 생기는 기분이었으니까.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
도록 이 건은 여기서 끝낼 생각이기도 했다.
“돈이든 뭐든, 하나 정돈 들어주죠.”
“…….”
그는 왜인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가,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작은 깨달음이었다.
“아.”
굳었던 얼굴이 살짝 누그러졌다. 바람 빠지듯 흘러나온 웃음은 약간의 자조와 허무
함을 담고 있었다.
“……화대처럼 말씀하시네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이토록 적나라한 단
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비난이나 수치가 담기지 않은, 오롯하게 정중하고 친
절한 말투로 말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뭘 바라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정신이 없었을 뿐이
고, 이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주셔도 괜찮습
니다.”
그제야, 나는 그동안 그에게 느낀 불쾌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가시가 걸린 것처
럼 거슬리던 감각, 그리고 습관처럼 나오던 사과에 자꾸만 샘솟았던 짜증 같은 것.
‘죄송합니다.’
바라는 게 없는 순종을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행동하면
서, 정작 그 얌전한 행동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언뜻 내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
력하는 것 같다가도 적극적으로 내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학대를 당한 짐승과 비슷했다. 내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혹
은 그 안위를 헤집어 놓을까 봐. 얼어붙은 강물 위를 걷듯 매사에 조심하면서, 근근
이 숨 쉴 구멍을 찾는 유기견처럼 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모진 말을 했지만,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잔혹하게 군 기억은 없었
다. 게다가 아무리 돌이켜 봐도 그가 나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야욕
도 아니고, 그렇다고 두려움도 아니라면. 그 행동의 원천은 대체 어디서 시작한단 말
인가.
“정 바라는 게 있다면…… 욕조에 몸이나 좀 담그고 싶군요.”
“……욕조?”
그는 엷은 미소를 띤 채 부드러운 어투로 이야기했다. 내가 되묻는 말에 어깨를 으
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덧붙이기도 했다.
“제 방엔 욕조가 없거든요.”
“…….”
고작 욕조 따위는 이 집에 몇 개나 있는데. 그중에 당연히 제 몫은 없다고 확신하
는 모양이다. 그의 행동반경을 제한한 건 나였지만, 그 미묘한 체념이 이런 식으로 낯
설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이면 좋겠어요.”
지나가듯 흘러나온 한마디는 너스레를 떨듯 가벼웠다. 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이 되려는 게 아니라면 저 바람이 진심은 아닐 것이다. 하나 그 말인즉 저 말이 진심이
라면 그토록 별거 아닌 자유가 그의 유일한 바람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고용인한테 말해 놓죠.”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두 눈이 내 의도를 가늠하려는 듯했다. 유독 색소가 엷은 눈동
자에 자그마한 이채가 떠올랐다.
“하늘은 못 보겠지만.”
하룻밤의 대가는 아니었다. 고작 이깟 친절을 베푼 뒤 찝찝함을 털어 내려는 수작질
도 아니었다. 그냥, 이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서. 애초에 안 된다고 하는 게 심술일 정
도로 별거 아닌 일이라.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정세진은 눈을 내리깐 채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말로
는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정말 기꺼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가까스로 숨
을 돌렸다는 듯 안도하고 있었을 뿐.
이어진 식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감기에 왜 걸렸냐고 묻자, 그는 망설
이는 기색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비를 맞았다고 말이다.
정세진은 스물아홉이었고, 늘 경호원과 개인 비서가 따라다녔다. 이동 시엔 기사
가 운전을 했으니 비를 맞으려고 해도 맞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칠칠치 못하게 뭐 하
는 짓인가 싶었는데, 이어지는 뒷말을 듣고 표정이 확 구겨지고 말았다.
“걱정시켜 드렸다면…….”
걱정이라니. 이 못마땅함과 거북함을 포장하기엔 지나치게 미화된 단어였다. 내
가 그를 신경 쓴 것과 별개로 지금 느끼는 기분은 그런 쓰잘머리 없는 감정 낭비가 아
니었다.
“내 집에서 빌빌거리고 다니는 게 싫었을 뿐입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
럼.”
물론 그렇다고 한들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유치한 핑계라
고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아무
런 사과도 하지 않았고, 나는 덩그러니 그를 남겨 둔 채 주방을 빠져나왔다.
***
원치 않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만큼 내키지 않는 일이 또 있을까. 고용인을 시켜 목
욕물을 받아 주게 한 뒤로 나는 미묘하게 정세진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
한 것들이었는데, 여전히 방과 주방만 오가는 행동이 신경 쓰이는가 하면 변함없
이 건조한 태도가 불만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내 사이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늘 아침 식사를 함께했지
만,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시간을 맞췄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다른 이유는 아니었
고, 몸 상태가 언제쯤 괜찮아질지 넌지시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는 속없이 매일 그런 인사를 건넸다. 그다지 살가운 투는 아니었는데, 그 인사
가 썩 나쁘지 않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처음엔 조금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
만, 그의 걸음걸이가 멀쩡해질 즈음에는 나 또한 익숙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 목소리가 유독 부드러웠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평범하게 말하는 것 같으
면서도 쉬이 따라 할 수 없는 나긋나긋한 어조였으니.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음성
은 고작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도 귓가에 감겨들었다.
‘정 회장한테 오던 연락이 뚝 끊겼습니다.’
정 회장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내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더는 의미 없단 생각
에 포기한 건지, 그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그의 행동에 별다른 영향력
은 없을지언정 지나치게 조용한 태도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보통 이럴 때면 말
도 안 되는 뒷공작을 부리는 경우가 많으니, 내 쪽에서 알아봐야 할 것 같긴 했다.
−어, 여보세요?
그렇게 평범한 하루가 반복되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했을 즈음, 누나
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용건 없이 살갑게 통화할 성격은 아니었기에 나는 엘
리베이터에 오르는 대신 그 앞에 멈춰 섰다.
−이도야. 통화 괜찮지?
어린 시절엔 늘 영어만 썼기에 누나와 내 말투는 보통 사람들과는 악센트가 조금 달
랐다. 그냥 들으면 이상하지 않은데, 이따금 그게 확 느껴질 때가 있었다. 최근엔 유
독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보니, 새삼 더 낯설게 다가왔다.
“얘기해. 이제 막 퇴근하던 참이야.”
−잘됐네. 다른 게 아니고…….
누나의 용건은 우리가 준비하고 있던 권이정의 소송에 관해서였다. 몇 년 전부터 자
료를 모으던 것인데, 기업의 해충 같은 녀석을 뿌리 뽑기 위해 그가 저지른 범죄 따위
를 조사하고 있었다. 다행히 누나와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회장님이 돌아가시는 대
로 일을 치르기로 계획한 참이었다.
−그 자식이 또 사고를 쳤어. 그거 묻느라고 기업에서 손해 본 것만 생각하면…….
세상에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권이정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살인만 하
지 않았을 뿐이지, 기업에서 덮은 폭행 전과만 벌써 열 손가락을 넘어갔다. 강간은 물
론이거니와 마약에까지 손댄단 소문이 들려서 집안에서도 골칫덩이가 따로 없었다.
−대체 왜 혼자 그따위로 큰 건지 모르겠다.
“그걸 알았으면 이렇게 안 됐겠지.”
악인은 꼭 불행한 환경에서만 나오지 않으니 그 성장 과정을 되짚은들 아무 의미
도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열등감에 찌들었던 권이정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
은 채 제 모자람에 매몰되어 버렸다. 둘째임에도 불구하고 진즉 후계 싸움에서 밀려
난 걸 보면 그 무능력함을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선호카드 건으로도 할 얘기 있으니까 조만간 시간 좀 내고.
기업에서의 의사 결정권은 부회장인 어머니를 제외하면 나와 누나가 비등비등하
게 가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부사장인 누나 쪽 입김이 조금 더 크게 작용했
다. 내가 해신을 인수하고 나면 위세가 조금 바뀌겠지만, 그즈음에는 이미 누나는 부
사장이 아닐 것이다.
−혹시 해서 묻는데, 해신이랑 제휴 맺을 거 아니지?
“설마, 내가 미쳤다고.”
픽, 웃음이 나왔다. 머리에 총이라도 맞지 않는 이상 망해 가는 그룹과 손을 잡을 일
은 없었다. 누나도 딱히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닌지 금세 질문을 다른 쪽으로 바꿨다.
−이혼은 언제쯤 하게?
“글쎄…….”
그러게, 언제가 가장 좋은 타이밍일까.
“아직 멀었어. 짧게 보고 정할 문제 아니야.”
이 결혼은 영원한 사랑의 서약이 아니었다.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였으니 쓰임
새를 다 하면 팽하는 게 맞았다. 홀로 정해 놓은 시기는 해신이 완전히 무너진 다음으
로, 부부라는 명목하에 후처리를 간섭한 뒤 모든 일이 끝나면 내칠 생각이었다.
−보고 괜찮으면 그냥 살지 그래. 보니까 사람이 괜찮던데.
“…….”
그 말은 조금 의외였다. 두 사람의 접점이 거의 없다는 건 둘째치고, 누나는 웬만하
면 누군가를 높이 사지 않는 사람이었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그 말에 도무지 부정
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단 점이지만.
“……주제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긴 하지.”
−평가가 박하네.
“데리고 있기 편하단 뜻이야.”
나이가 어느 정도 차면 미혼이라는 점이 때때로 불편할 때가 있다. 감히 하자가 있
다고 의심할 사람은 없었으나 계속 들어오는 혼사를 거절하는 게 기업 관계에 좋
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건 사실이었다. 실제로 정세진과 결혼을 하는 순간, 귀찮은 일
은 반의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 걱정할 건 그 자식 문제긴 하고.
“그래서 처리하려고 하잖아.”
모든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으로 미뤄 두었다. 큰일이 하나 터진 뒤 잇따
라 작은 일을 터뜨려야 자연스럽게 묻어갈 수 있을 테니. 그토록 고대하는 날을 위
해 가족의 죽음을 가늠해야 한다니, 그 타이밍을 만들어 내는 입장에선 속이 쓰릴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알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거.”
권병욱 회장이 매스컴에서 모습을 감춘 것도 벌써 몇 년째였다. 병상에 누웠다는 찌
라시가 계속해서 돌았지만, 대역이라도 세워 가며 소문을 잠재우던 참이다. 물
론 이 역시 정도라는 게 있으니 창립 기념식이 끝나는 즉시 일을 치러야 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버티는 데까지 버텨 봐야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누나가…….”
누나가 먼저 상황을 보라고, 그리고 부사장직을 내려놓으면 될 것 같다고. 그리 말
하려던 순간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허공에서 다른 누군가와 시선
이 마주쳤다. 왜 여태껏 몰랐나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정세진이 나를 바라보
고 있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나는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지하로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띵, 소
리와 함께 열렸다. 도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아서. 한숨을 내쉰 다음
에야 목소리가 나왔다.
“안 탑니까?”
정세진은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뒤에도 무어라 오고 가는 대화는 없었다. 엿들은 게 아니라고 변명할 줄 알았건
만, 꾹 닫힌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 회장한테 가서 말할 생각입니까?”
그래서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걸 알면서도 굳이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다. 만
약 모르는 척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저어 보라고. 그러나 한 타
이밍 늦게 고개를 숙인 정세진은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아뇨.”
“…….”
“그런 가족사를 함부로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전화를, 조금 더 신경 써서 할 걸 그랬지. 그가 통화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봐놓고
도 반대가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들었다는 얘기군요.”
참 요령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얼마나 들었는지는 숨길 수 있었
을 텐데, 구태여 ‘가족사’라고 칭하는 의도가 뻔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예정이라
는 걸 알게 되었다고, 넌지시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라고 한 얘기 아닙니다.”
그냥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조부님의 죽음에 슬퍼할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닌
데, 좀 더 뚜렷한 미래를 그렸다는 사실만으로 감회가 남달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
시면 권이정을 처리해야 했고, 그 이후엔 정세진과의 이혼도 염두에 둬야 했다. 수없
이 많은 마지막을, 방금 통화를 통해 새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권이도 씨.”
그가 입을 연 건,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완전히 내린 다음이었다. 그 이름을 발음하
는 목소리가 퍽 낯설어서, 여태 모르고 있던 사실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별
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새삼 놀라운 기분이 드는 깨달음 하나가.
“같이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올래요?”
처음으로 그쪽에서 먼저 나를 부른 것이다.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도 처음이었
고, 무언가 제안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히트 사이클에 이성을 잃지 않은 채로, 그리
고 죄송하다며 저자세로 나오지 않은 채로. 특유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우
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잠깐 차를 대고 쉴 수 있는 곳이 있거든요.”
“…….”
“강물에 야경이 비치는 모습이 예뻐서, 아마 권이도 씨가 보기에도 나쁘지 않을 겁
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몇 번이나 아침을 먹으면서도 이 거리에서 눈을 맞
추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조금 아래에 있
는 두 눈이 지그시 나를 올려다봤다.
늘 고요한 눈동자가 호수처럼 잔잔했다. 반듯한 이마 아래 곧은 눈썹은 유순한 모양
으로 내려가 있었다. 언젠가 그를 고고하다고 여기던 그때처럼, 그가 지어 보이는 표
정들이 이상하리만치 기억에 남았다.
한강…… 그런 건 관심도 없는데. 강물에 비치는 야경 따위를 예쁘다고 생각할 성
격도 못 되건만. 입술을 달싹인들 거절의 말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지금의 분위기
를 깨고 싶지 않다는 자그마한 욕심이 피어올랐다.
“운전 잘합니까?”
“……예?”
그래서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그에게 물은 것이다. 내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
지 정세진은 조금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은 평소의 그 무
기력한 미소보다는 훨씬 보기 좋았다.
“운전을 그쪽이 하면 생각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