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110화 (110/131)

외전1 4화. Orgueil Et Prejuges(4)

공항에서 집까지, 평소엔 멀다고 생각하지 않던 길이 유독 멀게만 느껴지는 날이었다. 습관적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정작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박 비서가 변경된 스케줄을 읊는 것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정도였다.

그래서 차고에 도착했을 때, 나는 직접 뒷좌석 문을 열고 집으로 향했다. 괜히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짧게 숨을 토해 내며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내게, 고용인은 정세진이 아직 출근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단 사실을 알렸다.

“……불러올까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대신 그를 지나쳐 계단으로 향했다.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평소라면 슬슬 1층에 내려와 식사를 할 시간이긴 했다. 아직도 아픈 건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늦잠을 잘 뿐인지. 어느 쪽이건 눈으로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2층에 도착해 문 앞에 서는 순간,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어렴풋이 전해진 거였는데, 문고리를 붙잡자마자 익숙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화사하고 향긋한 페로몬은 이미 한 번 느껴 본 적 있는 것이었다.

느릿느릿 방문을 열었다. 달칵, 열린 문틈으로 역시나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자욱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는 내게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실장님……?”

아, 붙어먹은 게 그쪽인가.

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가웠다. 금방이라도 이성이 날아갈 것 같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엔 오히려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내가 쯧, 혀를 차는 소리에 정세진이 숨을 멈췄단 사실까지도 알 수 있었다.

“비서랑도 붙어먹나 보죠.”

“…….”

그는 내가 가까이 다가간 다음에야 이불 속에서 살며시 머리를 내밀었다. 지난번부터 느꼈는데, 가뜩이나 열이 나는 몸을 왜 그리 꽁꽁 싸매고 있는지 모르겠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나 발갛게 익은 눈가가 지난번에 보았던 얼굴과 비슷했다.

“감기에 걸렸다더니…….”

아픈 게 아니라 히트 사이클이었나 보다. 아니, 열 감기에 걸린 건 사실이었을 테니 어제저녁 무렵부터 앓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식사를 거르고 방에 틀어박힌 것도 이해는 갔다.

“……페로몬 갈무리도 못 합니까?”

“흣…… 그게 마음대로…….”

끙끙 앓는 목소리가 잔뜩 괴로워 보였다. 일부러 페로몬을 조금 풀자, 일그러졌던 얼굴이 몽롱하게 풀렸다. 평소엔 건조하기만 했던 시선이 지금은 열락에 취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으응…….”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간절히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도 특이 형질이었기에 주기가 돌아왔을 때 반대 형질의 페로몬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에게 페로몬을 부었고, 관찰하듯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페로몬 좀…… 제발…….”

눈이 마주치는 순간엔 아랫배가 뻐근하게 옥죄였다. 아니, ‘마주쳤다.’라는 건 오로지 내 생각일지도 몰랐다. 정세진은 그저 가물가물 깜박이며 허공을 응시했을 뿐이니까. 그가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폭 젖어 들었다.

내밀어진 손을 피하지 않은 건 그저 단순한 충동이었다. 그가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문지를 땐 이유 모를 만족감에 헛웃음이 나왔다.

“흐, 좋아…….”

그토록 귀신 보듯 나를 대해 놓고 지금은 안달 난 것처럼 도움을 구하고 있지 않나. 이불에 덮여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는 뻔했다. 그 난잡한 아랫도리 상황을 모르지 않기에 일종의 우월감까지도 들었다.

“꼬시는 게 아주 자연스럽군요.”

이런 식으로 몇 명이나 꼬셨을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졌다. 혀를 내어 손가락을 감싸는 행동은 대놓고 유혹하는 행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오므린 채 빨아들이는 감각엔 나 또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의 아래턱을 꾹 내리눌러야 했다.

“정세진.”

“흐으…….”

“나랑 자고 싶어?”

그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가락을 핥았다. 애써 이성적인 척 네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음을 이르면서도 화사하게 피어난 페로몬에 눈앞이 흐려졌다. 잘근잘근 내 손가락을 깨물어 대는 입 안은 지나치게 뜨겁고, 또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바라는 게 그냥 씹질인가…….”

나는 그를 임신시킬 생각은 없고, 그 역시 이 섹스를 통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도 손을 뻗은 거라면 어느 정도 장단에 맞춰 줄 의향은 있었다.

그래서 손을 거둬들이는 대신 버클을 풀고 그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반쯤 발기한 성기로 입술을 툭 건드리고 부러 심술스럽게 이야기했다.

“빨아 봐요. 잘 빨면 넣어 줄 테니까.”

“…….”

그렇게 졸라 대던 주제에 정세진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색색 밭은 숨결을 내뱉으며 느리게 눈을 깜박인 것이다. 그 와중에 잠깐 닿았던 입술이 지나치게 말랑해서, 도리어 내 쪽에서 갈증을 느끼고 말았다.

“얼른.”

하나 정작 입이 벌어지는 순간에는 왜인지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이성이 날아갔다고 한들 타인의 성기를 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나처럼 입에 처넣은 사람이 또 있었나.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뜨겁고 축축한 혀가 선단을 슬쩍 문질렀다.

“……흐웁!”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음에도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입에 억지로 욱여넣은 다음이었다. 기세 좋게 귀두를 머금을 땐 언제고, 그는 입 안이 가득 차자마자 제대로 숨을 쉬지조차 못했다.

“입으로 받아 본 적은 없나 보지.”

“……흡.”

반사적으로 고개를 빼는 행동은 그가 이 행위에 익숙지 않단 사실을 알려 줬다. 욱욱거리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그에 실낱같던 이성이 돌아오는 순간, 나는 내가 그 작은 머리통을 부서뜨릴 것처럼 붙잡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관두죠.”

씨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머리가 조금씩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유 모를 감정에 휘둘리는 것도 짜증스러운데, 고작 이딴 오메가 하나 때문에 이러고 있단 사실에도 열이 받았다. 히트 사이클이 오건 말건 그냥 무시하고 나가면 그만이건만. 어쩌자고 그 입에 다짜고짜 들이밀었는지 모르겠다.

“……아래로는, 흣…….”

“…….”

“넣을 수 있…….”

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기분이었다. 귓가에 이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불을 치우고 그를 침대에 내리누르면서도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불쾌함이 일었다.

“얼마나 대주고 다녔길래…….”

이따위로 꼬시는데 입으로 받아 본 적이 있을 리가. 열이면 열 위가 아닌 아래에 넣겠다고 달려들었겠지.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했다.

“정세진.”

그 부름은 일종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눈물로 젖은 두 눈이 나를 보는 것 같지 않아서.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이 알고 덤볐으면 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권…… 이도, 흣…….”

“알고도 이래, 지금?”

그런데 의외로 정세진은 똑똑히 내 이름을 불렀다.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팔을 뻗어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비비적거리며 품에 밀착하는 행동에 그 낯선 온기와 페로몬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뒤덮는 기분이었다.

“……잠, 깐.”

기계적으로 그를 뒤집고, 또 기계적으로 바지와 속옷을 벗겨 냈다. 자칫 잘못했다간 의미 없는 불순물이 섞일 것 같아서 부러 차갑게 등을 내리눌렀다. 그가 바라는 게 사사로운 포옹 따위는 아닐 테니, 다른 전희는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좁은 구멍에 억지로 박아 넣는 순간엔 나조차 압박감이 들었다. 덜 열린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 만큼 아래를 바짝 조여 왔다. 애액으로 흥건히 젖었음에도 이 정도니, 생으로 넣었다면 반조차 채 들어가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아, 아…… 아…….”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겨우겨우 모자란 숨을 토해 냈다. 끊어질 듯 신음을 흘리고 작살에 꿰뚫린 것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어깨를 꾹 누르며 허리를 튕기자 엉덩이 윗부분이 움푹 들어갔다.

“……아흑!”

“그렇게…… 넣어 달라고 조르더니.”

“아, 아흣, 흑, 아, 안 돼…….”

“힘을, 큿, 이렇게 주면…….”

“……아윽!”

“움직일 수가 없잖아.”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화사하게 퍼진 페로몬은 둘째치고 바짝 조여든 내벽이 여유를 부리지 못할 만큼 기분 좋았다. 뜨겁고, 좁고, 부드러워서, 그가 아파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이 자꾸만 이성을 앞섰다.

“아흐으……!”

요령 좋게, 정세진은 버거워하면서도 꾸역꾸역 페로몬을 분출했다. 그게 히트 사이클 때문이건, 아니면 의도한 행동이건. 금방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읏!”

그는 어느 순간,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아래를 바짝 조였다. 나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을 터뜨리자 힘이 들어갔던 구멍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워서 또 한 번 같은 부분을 크게 쳐올렸다.

“헉, 으, 흐윽, 아……!”

그가 느끼고 있다는 걸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부분을 툭툭 건드리면 내벽이 조여드는 정도부터가 달랐다.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뒤틀면서도 자지러지듯 내지르는 신음엔 넘칠 것 같은 희열이 가득했다.

“하윽……!”

행위의 몰입을 방해한 건 어디선가 들려온 진동 소리였다. 방해를 받았다는 생각에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베개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엔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정민재」

주제 파악 못 하는 어린 새끼가 이럴 때까지 방해를 하려 들었다. 망설일 것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정세진이 숨을 흡 들이마시는 게 느껴졌다. 그의 등 뒤에서 끌어안듯 상체를 숙인 탓에 쿵쿵 뛰는 심장 박동도 전해졌다.

−야, 정세진.

어떻게 할까. 그런 고민은 잠시였다.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정세진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것이다. 가여워 마땅한 그 몸짓을 보는 순간 속이 뒤틀리듯 반발심이 일었다.

−어디서 뭘 처하길래 출근도 안 하고…….

“……하응!”

푹, 거칠게 안쪽을 건드렸다. 간지럽게 터진 신음이 전화 너머로도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바람에 이번엔 조금 더 세게 아래를 푹푹 쳐올렸다.

“하읏, 흐…… 흐응……!”

−…….

왜, 집에 다녀오는 정도로는 동생을 달래지 못했나 보지. 누가 봐도 불순한 시선을 보내는 가족에게 차마 모진 말은 못 했을 게 분명했다. 나한테는 죄송하단 말밖에 못 하

는 정세진은, 자신을 좋아하는 동생의 앞에선 온갖 자상한 형 흉내를 내곤 했으니까.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저열한 과시욕이라며 혀를 내두른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포기를 모르고 덤비는 치기 어린 사내놈에겐 오르지 못할 나무임을 확실히 새겨 주

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는 그가 신음을 참지 못하게 일부러 입 안을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처음엔 그런 의도였다가, 나중엔 그 여린 점막을 취향껏 희롱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까 입 안에 넣

었을 때 그냥 빼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늦은 아쉬움이 들었다.

“하으, 흐, 우응…….”

−…….

정민재는 분한 숨을 터뜨리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우습게도, 얕은 숨소리엔 미미한 흥분감도 섞여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심사가 단단히 비틀리는 기분이 들

었다.

“어디서 뭘 처하는진 알았을 텐데.”

−…….

“더 들을 생각 없으면 끊어.”

그래서 정세진을 내리누른 채로 곧장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 보잘것없는 차남이 피 안 섞인 형을 떠올리며 자위라도 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들려주지 말고 감

춰 놓을 걸 그랬지. 괜한 후회도 함께였다.

“하으으……!”

혀를 누르는 손을 빼내자 정세진이 미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를 꾹 누른 채로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옷을 벗기지 않은 탓에 맨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중

간 즈음엔 손바닥으로 그 등허리를 쓸어내려 보기도 했다.

그는 보기보다 뼈대가 탄탄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마른 편이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살결이 부드러워서 혀로 핥아 보고 싶다는 충동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 아쉬움은 목

덜미를 깨무는 것으로 달랬지만, 정세진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쾌락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아흑, 흐읍, 더, 흐…….”

“……하, 씹.”

가히 짐승 같은 행위였다. 나는 그의 안에 총 세 번이 넘게 사정했고, 그는 중간부터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종국엔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정액이 흐르는 바

람에 희멀건 허벅지나 엉덩이 따위에 싸지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속궁합이 잘 맞는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미친놈처럼 박아 댔을 리가 없으니. 새하얀 시트에 온갖 체액과 함께 피

가 묻었다는 건, 모든 행위가 끝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

짐승 새끼처럼 굴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미 잠든 사람을 붙들고 게걸스럽게 구는 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의 페로몬에 취했거나, 혹은 잠시 정신이 나갔

거나. 어쨌든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고, 모든 행위가 끝난 건 하루가 꼬박 지난 다음이었다.

뒤처리는 해주지 않았다. 다정하게 몸을 닦아 줄 배려심도 없는 데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후희를 즐길 관계도 아니었다. 그를 방치하는 건 마음에 걸렸으나 이불을 덮어 주

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후엔 곧장 서재로 가 남은 일을 처리했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지만, 컨디션은 최상에 가까웠다. 몸 상태가 좋으니 기분까지 좋아져서 업무를 처리하는 속도 역시 평소

보다 훨씬 빨랐다.

급한 불을 껐을 땐 시간이 꽤 흐른 뒤였고, 박 비서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경호 팀장이 혐의없음으로 풀려났습니다.

뇌물 수수 누명을 쓴 경호 팀장이 드디어 풀려났단 소식이었다. 나는 복귀를 명령했지만, 그쪽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웬만해선 설득되지 않을 것 같단 말에는 사뭇 아쉬

운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무고하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는데, 손을 쓰는 게 늦는 바람에 좋은 인재를 놓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사직서 수료하고 퇴직금이나 챙겨 줘.”

−예, 전무님.

젊은 나이에 너무 높은 자리에 오른 탓이었다. 주변에서 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본인 몫이 아닌 실수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다. 가엾다면 가엾다고 할 수 있었

으나, 부조리한 일에는 늘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편이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어느덧 아침을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원래라면 정세진도 슬슬 1층으로 내려와 식사를 마쳤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라

면 그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스물아홉에 본부장이라…….”

사업 수완이 좋을 것 같더니, 실제로 틀리지 않았었나 보다. 그게 낙하산일지, 아니면 제 실력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세간의 평가만 듣더라도 그의 능력이 좋

은 건 사실이었다.

나는 출근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 정세진을 기다렸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몸 상태가 괜찮은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뒤늦게 못 걸을지

도 모른다는 짐작도 들었으나, 다행히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방으로 내려왔다.

“……아.”

나직이 흘러나온 탄성이 어색해 보였다. 눈만 돌려 그를 바라보자, 눈동자가 일순 크게 흔들렸다. 씻었는지 머리는 살짝 젖어 있었고 지금의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운 듯 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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