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3화. Orgueil Et Prejuges(3)
왜인지는 몰랐다. 애초에 깊이 고민하지 않은 데다 그 원인을 파악할 만큼 자주 직면하지도 못했으니까. 그저 점점 미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유를 추측하며 답답해했을 뿐.
그 와중에 그는 정작 나를 제외한 내 집의 모든 고용인과 친해졌다. 그의 방을 치우는 하우스키퍼, 요리를 맡은 주방장, 하다못해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까지. 그 많은 사람을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이따금 그를 향한 칭찬이 들려올 정도였다.
‘드물게 좋은 분이지.’
‘말도 마. 요새 일할 맛이 난다니까.’
‘까다로운 사람이면 어쩌나 했는데…….’
자연스레 그들은 정세진의 주변 환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보고가 올라왔기에 그 방에 장식품이 놓였다는 것과 식단이 조금씩 한식 위주로 변해 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딱히 문제 될 게 없으니 그냥 두긴 했지만, 퍽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 회장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그사이 정 회장에게 무수히 많은 연락이 왔다. 미리 계획한 대로, 나는 그 모든 연락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로선 한시 빨리 제휴를 맺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내게는 그의 바람을 들어줄 의무가 없었다. 최대한 여유를 부리다가 망조가 들어설 즈음 자연스럽게 인수하면 그만이었다.
뭐, 그러다 정 초조하면 그쪽에서 정세진을 통해서라도 연락을 취하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순간에 또 자리를 피하는 일도 사라질 테지.
“…….”
“…….”
일부러 좀 느지막이 늦장을 부리던 때였다. 평소라면 이미 일을 나갔을 시간이었지만, 나는 부러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 갔다. 출근 시간이 임박해서야 1층으로 내려온 정세진은 역시나 나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곧장 뒤를 도는 모습에 망설임은 없었다. 아마 밥을 굶고서라도 그냥 출근할 생각이었을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이 또 몹시 거슬려서 식기를 내려놓으며 나직이 이야기했다.
“그냥 앉죠.”
그 말에도 망설이던 정세진은 내가 명령하듯 한 번 더 채근한 다음에야 맞은편에 앉았다. 실례하겠다는 말이 왜 그리 우스웠는지. 암만 생각해도 전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굴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내가 아니라, 본인이 걸린 것처럼.
주방장이 내어 온 식사는 내 앞에 놓인 것과는 다른 메뉴였다. 몸에 밴 것처럼 감사 인사를 한 정세진은 본인이 인사를 했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했다. 그 사무적이던 주방장이 흐뭇한 얼굴로 웃는 건, 무려 몇 년 동안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
달그락,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역시나 그는 구태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생긴 것만큼이나 단정한 식사 예절로 묵묵히 쌀밥과 불고기 따위를 씹어 삼켰을 뿐이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이따금 가느다란 숨을 토해 내는 걸 보니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러다 체하고 말지. 딱히 괴롭힐 생각으로 부른 것도 아니고 죄 없는 사람을 못살게 굴 만큼 심술 맞은 취미도 없었다. 단순히 변덕을 부렸을 뿐인데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분위기가 안 좋았다.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나였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세진은 그제야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겨 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깨달은 건데, 이 거리에서 그를 마주 보는 게 처음이었다. 진작 익숙해졌어야 할 얼굴이 유독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나랑 마주칠 때마다 귀신 보듯 피할 필요 없습니다.”
“…….”
얇게 쌍꺼풀진 눈매가 느리게 깜박였다. 속눈썹이 유독 가지런해서 작은 움직임이 크게 도드라졌다.
“시위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시위라니. 그런 걸 할 입장도 되지 않건만. 당연히 나는 그가 시위하는 게 아니라며 발끈할 거라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아뇨.”
“…….”
“그렇게 안 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과가 쉽지.
비굴한 모습도 아니고, 사과로 대충 넘기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말 제 쪽에서 고치겠다고 겸허히 받아들였을 뿐. 내가 늘 바라 마지않던 태도건만 일순 불쾌함이 밀려들었다.
“근데 그게 기분이 나빠서.”
그래, 기분이 나빴다. 그가 날 피하는 것도, 그런 주제에 정작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것도. 잘 보여야 할 상대는 고용인이 아닌 나일 텐데, 왜 내가 잡아먹을 것처럼 군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느리게 흘러나온 사과는 이번에도 역시 성에 차지 않았다. 걸리는 거 하나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토록 귀에 거슬리기도 어려울 텐데 말이다.
“…….”
단언컨대 말문이 막히는 경험은 드물었다.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혀를 차는 경우도 처음이었다. 이 불만스러운 기분을 표출할 길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건 그를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전부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렇게 불유쾌한 식사를 함께해 놓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여상한 인사를 건넸다. 내 말에 결코 기분이 좋지 않았을 텐데, 성격이 좋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어이없는 기분을 감추지 못해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또 차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냥 등을 돌렸던 것 같다.
***
그 후로 며칠, 나는 의도적으로 정세진과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그는 꾸준히 느지막한 시간대에 내려왔고, 식탁에 앉은 나를 보고 늘 똑같은 망설임을 내비쳤다. 결국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긴 했으나 우리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녀오세요.’
그럼에도 그는 한결같이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내가 어느 타이밍에 일어나건 입에 든 음식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예의 그 차분한 시선이 그리 나쁘지 않아서, 의식적으로 피하던 것보단 이쪽이 낫단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그 후로는 정세진과 마주치는 빈도가 잦아졌다. 문제는 그럴 때면 그가 늘 통화를 하고 있단 점이었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삼류 드라마 같은 관계의 동생과 말이다.
‘어, 민재야.’
이미 유부남이 된 형에게 참으로 열렬한 구애였다. 그딴 알파 새끼와는 조만한 이혼할 거라고 라도 거의 매일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
‘너 목소리가…….’
그는 늘 취해 있었고, 높은 확률로 결혼 후 얼굴도 안 비치는 제 형에게 온갖 원망을 쏟아 냈다. 어리광 비슷한 투정, 혹은 갈 곳 잃은 질투와 분노 따위의 것들. 대개 거센 욕지거리가 동반됐지만 어쨌든 그건 나를 봐 달라는 발버둥이 분명했다.
‘술도 못하면서 와인은 왜 그렇게 마셨어.’
그럴 때면 정세진은 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르고 달래서 그를 잘 다독이고는, 굳이 ‘형’이라는 점을 언급해 동생을 단념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단호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무른 대처였는데, 누가 봐도 부담스러워하는 얼굴로 결국 전화는 다 사근사근 받아 준다는 점이 그러했다.
‘아버지 걱정하실 텐데 얼른…….’
그날도 그는 계단을 오르며 정민재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나와 딱 마주쳤고, 살갑게 웃고 있던 얼굴을 일순 일그러뜨렸다. 짧은 찰나였으나 누그러뜨렸던 음성 역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자리를 피해 줄 생각은 없었다. 딱히 통화를 엿듣고 싶진 않았지만 워낙 목소리가 큰 탓에 핸드폰 너머로 버럭버럭 외치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역시나 대부분 욕이었는데 이따금 미처 감추지 못한 설움이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
괘씸함…… 아니, 불쾌함과 혐오감이라고 해야 하나. 남이 가족에게 성애를 갖건 말건 관심 없었지만 그 대상이 이미 결혼한 내 계약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혹여나 말이 잘못 새어 나가면 피해를 보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제 파악 못 하고 설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민재야, 형이 지금 바빠서 나중에 연락할게.’
정세진은 다급히 통화를 끊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드물게 수치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별말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세진은 본가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했다. 동생의 투정을 더는 전화로 받아 주기 힘들어진 건지. 집에 얼굴 좀 비치라는 투정에 무르게 알겠다고 대답한 게 분명했다.
‘내가 출장 가기 전날이군요.’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일주일쯤 집을 비울 테니 그사이에 정답게 가족 놀이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다. 정 회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런 것도 조금 궁금했고 말이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겠네요.’
‘네, 뭐…… 그럴 것 같습니다.’
정세진은 조금 의아한 눈으로 그리 대답했다. 웬일로 말을 거냐는 듯한 표정이라서, 괜히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어졌다.
‘그쪽 동생도 볼 테고.’
‘…….’
역시 이쪽이 진짜 목적이었을까. 그 얘기를 하자마자 표정이 확 굳어졌다. 무슨 말을 들어도 무덤덤하던 주제에 유독 이 주제에만 과민 반응을 보였다. 그게 또, 유일한 역린처럼 느껴져서. 그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물을 하나 주죠. 사업 파트너한테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할 것 같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과시하듯 선물을 안겨 줬다.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었지만 정말 과분한 게 누구인지 보여 주고 싶단 생각은 있었으니까. 내키지 않는 얼굴로 와인을 받아 든 그는 이어진 뒷말을 듣고는 더더욱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딴 알파 새끼가 준 거라고 얘기해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이 비꼬듯 나갔다. 그 표현에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단 근래에 봐왔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발을 뻗는 행태는 내가 유구하게 좋아하지 않는 아랫것들의 실수였다.
“도착했습니다, 전무님.”
한참 생각에 잠긴 와중에 차는 공항에 도착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색이었다. 어제는 밤새 비가 내렸는데, 다행히 비행기가 연착될 일은 없을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옆자리에 앉은 박 비서는 드물게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뭘 묻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들고 있던 태블릿 PC가 진작 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동 내내 멍하니 있었으니, 그가 날 이상하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혹 어디 안 좋으시면…….”
괜찮단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이고 엄지로 눈 앞머리를 꾹 눌렀다. 시차 적응을 위해 밤을 새운 탓에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다. 비행 중 잠시 눈을 붙이고 남은 일은 그 뒤에 처리해야 할 듯했다.
“박 비서.”
“예.”
나는 박 비서를 부르며 들고 있던 물건을 정리했다. 지금 기분이 나쁜 이유는 단순히 컨디션이 안 좋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제, 밤이 늦었을 무렵부터 내내 심기가 불편하던 참이었으니.
“집에 연락해 놔. 정세진이 돌아오는 대로 보고하라고.”
어제 본가로 떠난 정세진은 결국 하루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가 오라고 했으니 어쩌면 일주일 내내 본가에서 지낼지도 모르겠다. 딱히 그 행동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으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고 말았다.
정민재를 만났겠지.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동생에게 또 자상한 형을 연기하며 어영부영 그의 투정을 받아 줄 터다. 결혼을 했는데도 매일 연락하던 놈이니 한 지붕 아래에 있는 이상 어떤 행동을 보일지는 뻔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친히 와인까지 안겨 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마침내 그의 특이 체질까지 이어져 기분을 차게 가라앉혔다.
억제제가 안 듣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와 한집에 살았던 동생은 히트 사이클이 온 형을 몇 번이나 마주쳤을까. 정민재는 베타였지만,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흥분에 젖은 얼굴이나 그 달뜬 호흡은, 누가 봐도 발정 난 오메가의 그것이었으니.
그에게 아무 관심 없는 나조차 혹할 정도였는데, 이미 배덕한 감정을 가진 정민재가 보기엔 어떻겠는가. 그 치기 어린 미숙한 놈이 욱하는 마음에 손을 뻗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전무님?”
“아.”
손에 쥐었던 서류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나는 짜증스러운 기분을 억누르며 구겨진 서류를 박 비서에게 넘겨줬다. 박 비서는 새 자료를 준비해 드리겠다고 말하며 슬슬 내리셔야 할 것 같다고 조심스레 나를 재촉했다.
“비행기에서 좀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대답은 필요 없었다. 기사가 열어 준 뒷좌석 문으로 내리며 또 한 번 밤새 곱씹던 잡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잠잠해지지 않는 기분에 괜히 표정을 굳히며 욕지거리를 꾹꾹 억눌러야만 했다.
그래서 비행기에 오른 뒤에야 깨달았다. 늘 사용하던 2층 서재에 선호전자 보안 시스템과 관련된 자료를 그대로 놓고 왔다는 사실을. 이번 출장엔 필요 없는 서류였으나,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였다.
***
정세진이 본가에서 돌아온 건 내가 미국으로 출발한 다음이라고 했다. 덜레스 공항에 도착한 뒤에야 고용인이 남긴 연락을 확인했고, 전화 너머로 정세진의 상태가 어떤지 대략적으로 전달 받았다.
−조금…… 아프신 것 같았습니다.
“아프다고?”
또 히트 사이클인가. 그리 생각했다가 곧장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증상을 들어 보니 열 감기였고 그를 지극히 아끼는 고용인들이 진작 죽과 가습기를 준비해 놓은 모양이었다. 미팅이 잡힌 터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우선 내 집으로 돌아왔단 사실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집에 있던 CCTV를 확인한 건, 대략 사흘 정도가 지난 뒤였다. 정세진은 아직도 아프다고 했고, 잘 먹던 식사까지 절반 정도를 먹으면 내려놓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회사에 나간다는 얘기에 지독한 워커홀릭이라고 혀를 찼던 기억이 있다.
노트북에 저장된 영상엔 그 지난 사흘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정세진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바로 어제 퇴근하는 모습까지. 방과 주방, 그리고 현관. 지극히 단조로운 행동반경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기계적인 부분이 있었다.
“감금당한 것 같네.”
방 안에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방으로 들어가면 도통 나오는 일이 없었다. 이따금 고용인이 약을 들고 찾아가면 그때 잠시 문간에 서서 얘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내 집에 들어온 후로 항상 이런 식이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방 안에도 CCTV를 달아 둘 걸 그랬다.
“…….”
탁, 노트북을 덮었다. 새삼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관음하는 변태적인 취미는 없었고, 그렇다고 죄 없는 사람을 감시할 마음도 없었다. 지켜보고 있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 모르는 척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사흘간, 나는 정말 CCTV를 확인하지 않았다. 고용인은 정세진의 감기가 다 나았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럼에도 여전히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저녁까지 거르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말엔 속이 잔뜩 뒤집히는 것처럼 명치가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예정보다 하루 빠르게 귀국길에 올랐다. 처리해야 할 일이 빨리 끝난 데다 도무지 다른 게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 비서는 그런 내 행동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묵묵히 당장 출발할 수 있는 비행기를 예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