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2화. Orgueil Et Prejuges(2)
아무리 피 안 섞인 가족이라고 한들 정세진은 아홉 살에 입양된 형이었다. 정민재는 네 살 무렵이었을 테니, 피가 섞이고 안 섞이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봐선 꽤 오래 좋아한 모양인데 남들 앞에 내비치기엔 좀 배덕한 관계이지 않나.
“하, 씨발.”
끝내 정민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때마침 뭘 느꼈는지, 정세진 역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낭패감이 서린 얼굴은 그럭저럭 봐줄 만했으나, 그 외에는 내게 아무런 감흥도 안겨 주지 못했다.
“그 재미없는 대화 더 할 겁니까?”
“…….”
상황에 맞지 않게 정세진은 그 말을 듣고도 웃었다. 픽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개운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알면서. 작은 변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멀지 않아 똑똑히 보였다.
“더 할 거여도 가죠.”
먼저 등을 돌리자, 그가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특유의 상냥한 음성이 자상한 형처럼 이야기했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로 하라면서. 말꼬리를 길게 늘인 뒤엔 제법 잔인한 한마디도 따라붙었다.
“형 갈게.”
그를 향한 평가가 조금 더 상향됐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에서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사람으로. 비록 그 평가는 나란히 차에 오른 뒤에 또 한 번 바뀌었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그는 제 동생의 발언을 변명하거나 무작정 변호하려고 들지 않았다. 고분고분 사과를 건네고 정중히 용서를 구했을 뿐이다. 내가 건네는 말들에 기분 나쁜 티를 내지도 않았고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한단 사실에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았다.
“해신금융 차남이 피 안 섞인 오메가를 좋아하건 말건,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죠.”
“…….”
아니, 그 말엔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던가.
“그 나이대에는 좋아하는 사람 일엔 눈이 돌아가곤 하니까.”
눈이 돌아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로선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뒤에선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그들이 날 어떻게 칭하건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찌라시가 돌면 좀 곤란하겠지만, 여태 아무런 소문도 나지 않은 걸 보면 알아서 잘 처신하는 모양이니까.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변명이 없어서 좋군요.”
그 말만큼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는 것만큼 딱 질색인 것도 없었다. 정세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앞으로 정세진이 머물게 될 곳은 3층 구석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화장실과 드레스룸까지 갖춰진 공간은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처였다. 그의 의식주를 다 제공해 주는 것만으로 내가 해야 할 도리는 다 지켰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정세진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고용인이 말하길, 불만스러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곳곳에 설치된 CCTV로 집 안이 사각지대 없이 관리된다는 말을 듣고도 제 방에도 설치됐냐는 사소한 질문조차 건네지 않았단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괜찮았다. 집에 들어온 다음 날, 쓸데없이 마중을 나왔던 일을 제외하면.
‘……왜 여기 있습니까?’
결혼 후 휴가를 낸 정세진과 달리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영 낯설어서 돌아오는 차에서 반지를 빼내고 귀가하던 참이었다. 중문 앞까지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황당해하는 나를 두고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숨 쉬듯 돌아온 사과가 왜 그렇게 별로였는지 모르겠다. 불편하면 내일부터 방에 있겠다는 말을 듣고는 이유 모를 찝찝함이 확 밀려들었다. 탓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짓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쪽이 진짜 내 배우자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한 거고.’
나는 내조를 잘하는 배우자를 데려온 게 아니라 계약에 따른 인질을 맡아 두고 있을 뿐이다. 이 오메가는 계약금이었고,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잘못을 시인했겠지.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인정이 빠른 점을 칭찬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내 말을 이해하긴 한 거냐고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게 좋을까. 내가 바라던 대로 존재감 없이 지내겠다는데, 아무 꿍꿍이 없는 얼굴이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 후로 나흘, 정세진은 정말 나를 마중하러 나오지 않았다. 조용히 방에 틀어박힌 채로 주방장이 차려 주는 음식만 시간 맞춰 받아먹을 뿐이다.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이, 집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마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 터진 건, 일기 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린 날이었다. 그만두겠다는 경호 팀장을 설득하지 못해서 사직서를 수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조용히 있던 정세진이 갑작스레 히트 사이클로 앓고 있다면서. 웬만한 일로는 연락하지 말라고 일러둔 탓에 고용인은 내가 일을 마치고 퇴근한 다음에야 그 소식을 알렸다.
처음엔 그게 뭔 대수겠거니 했다. 특이 형질인 이상 주기가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상식이 있는 오메가라면 소지하고 있는 억제제를 먹었을 거고, 만약 약이 없더라도 그에게 억제제를 가져다줄 고용인은 많았다.
“억제제를 안 먹는다고?”
그러나 방 안에 펼쳐진 풍경은 가히 가관이라고 표현할 만했다. 정세진은 이불 속에 틀어박혀 보이지 않았지만, 한가득 퍼진 페로몬만큼은 또렷이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짙은 꽃향기가, 그의 바람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화가 났다. 조금 경멸스러운 기분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조용히 지낸다 했더니, 적당한 때를 노렸을 뿐이었나 보다. 오메가 특유의 달큼한 페로몬은 짐승의 발정기처럼 추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에게 다가가 억지로 턱을 붙잡아 올리자, 나를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욕정에 뒤덮여 있었다.
“정세진.”
이성의 끈이 짧아져서 손아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도 페로몬이 없기에 의심하고 있던 참인데, 확실히 정세진은 우성이 맞았다. 아마 웬만한 알파였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덤벼들었을 거다. 넘실거리며 넘어오는 페로몬은 뇌가 마비될 것처럼 존재감이 짙었다.
“뭘 기대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해.”
“허억…….”
이런 식의 유혹엔 진저리가 났다. 어떻게든 엮여 보고자 일부러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지저분한 페로몬을 마구 뿌리며 보잘것없는 몸뚱이로 수작을 부리는 거겠지.
예상치 못한 건 우성인 나조차 그의 페로몬에 진심으로 동할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화풀이하듯 날카롭게 벼려진 페로몬을 쏟았으나,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조차 섹스를 조르는 것처럼 보였다.
“저, 식사는 어떻게…….”
“안 먹으면 억지로라도 먹여. 억제제는 의사 불러서 주사로 놓든가 하고.”
본능적인 촉이었다. 더 방 안에 머물렀다간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길 거란 예감. 분명 화가 나는데, 반대로 이성은 흐려져서 긴장의 끈을 늦추는 순간 의식이 아득히 멀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도망치듯 그의 방을 빠져나와 온몸에 남은 페로몬을 세 번도 넘게 씻어 냈다. 하나 향수를 뿌린 것처럼 짙게 남은 잔향은 단순히 물로 헹군다고 닦아지는 종류가 아니었다. 찬물을 한참 맞고도 진정이 되질 않아서 자꾸만 속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어야만 했다.
“아…… 씨발.”
러트가 온 기분이었다. 고작 그 별거 아닌 오메가 하나 때문에. 난생처음 느끼는 기분에 밑도 끝도 없이 짜증이 샘솟았다.
고용인이 말하길, 정세진은 끝내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치의를 불렀지만 주사로 투여한 억제제까지 거부 반응을 보이며 속을 게워 냈다고.
내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덩달아 뜬눈으로 밤을 새운 바로 다음 날이었다.
***
톡, 톡, 손가락으로 서류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출근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고, 이제 곧 고용인이 식사를 위해 나를 부를 터였다. 진작 처리했어야 할 서류가 눈앞에 놓여 있었지만, 정작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은 다른 무언가였다.
‘억제제가 안 듣는 체질이라고 합니다.’
억제제가 안 듣는 체질이라. 하자라면 하자일 수 있는 그 체질을 해신은 여태 감쪽같이 숨겨 왔다. 박 비서가 가져왔던 의료 기록에 위 내용이 없던 걸 보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어지간히 노력한 모양이었다.
정 회장이 무슨 생각으로 그 오메가를 보냈는지, 그런 건 불 보듯 뻔하기만 했다. 내가 그에게 넘어가 관계를 맺으면, 후계라는 이름의 연결 고리가 생기길 바란 것이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알파를 동하게 만들기 충분했고, 실제로 내 바람이 후계였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안았을 테니.
“…….”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숨을 헐떡이며 눈꺼풀을 떠는 모습은 지난밤 내가 잠들지 못한 이유였다. 그 단정한 얼굴이 온갖 욕구로 더럽혀진 순간은, 때아닌 수음을 하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오해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억제제를 안 먹은 이유가 체질 때문이라고 한들 그의 의도까지 내 예상과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정세진은 해신의 사람이었으니, 그의 바람 역시 정 회장의 것과 일치할 터였다.
똑똑.
한창 생각에 잠긴 와중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성의 없이 들어오라고 이야기하자, 누군가 조심스레 서재 문을 열었다.
“바쁘니까 용건만 하죠.”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고용인이거나, 아니면 박 비서거나. 이 집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은 딱 그 정도였다. 이상한 건, 평소라면 용건부터 이야기했을 상대가 한참 조용했다는 사실.
“무슨 일입니까.”
펜을 쥔 손으로 서류에 사인을 휘갈겼다. 내용은 한참 전에 정독했는데 쓸데없이 오래 살피고 있던 서류였다. 아무래도 오후엔 사무실에 나가야겠다고, 그리 생각할 즈음에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
서재를 찾아온 사람은 고용인도, 박 비서도 아니었다. 거슬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러운 음성은 어젯밤 나를 괴롭힌 그 오메가의 것이었다.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편안한 옷차림을 한 정세진이 보였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제 보았던 장면이 꿈이라고 생각될 만큼 정돈된 모습이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져서 반듯한 눈썹 따위가 시야에 들어왔다. 색소가 엷은 눈동자에 어제와 같은 열기는 없었고, 느릿느릿 깜박이는 두 눈이 나긋하기 짝이 없었다.
“괜찮으시면 잠깐 시간을…….”
“…….”
“……왜 그러십니까?”
찬찬히 그를 위에서 아래로 살펴봤다. 고작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히트 사이클이 왔던 모습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건, 그에게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씻었나 보군요.”
나는 그의 페로몬을 지우겠다고 세 번을 넘게 씻어야 했는데. 당사자인 그는 어떻게 이리 흔적 없이 모든 걸 두고 왔을까. 아직도 그 뜨겁던 열기가 피부에 남아 있건만,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다. 멋쩍게 눈가를 찌푸리는 모습조차 어제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네, 씻고 왔습니다.”
“얘기해요.”
다시금 존재감 없어진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얼굴은 한숨도 자지 못한 나와는 달리 평온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와중에,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던 그가 별안간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제는 여러모로 실례 많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당황스럽지는 않았고 그냥 의도가 무엇일지 궁금하긴 했다. 눈치 빠르게 내 기분이 상한 걸 알아차린 건지, 그게 아니면 내게 또 다른 협상을 시도하러 온 건지.
“원래는 주기가 일정해서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올 줄 몰랐습니다. 미리 대비해야 했는데 책임감 없게 굴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투는 아니었다. 정말 갑작스레 히트 사이클이 찾아왔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듯이. 어쩌면 내가 그를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그냥 그를 돌려보내려는 순간, 넌지시 운을 뗀 그의 입에서 가장 듣기 싫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라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기분이었다. 애써 그를 좋게 보려던 내게 갑작스레 현실을 자각시켜 주는 말이었다.
“병 같은 것도 따로 없고, 병원에서도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어차피 그 또한 정철호 회장의 자식인데. 바라는 거 없이 건조해 보이는 모습으로 결국엔 그가 바라는 것도 선호와의 연결 고리일 뿐이건만.
“그러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 있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냉랭히 말할 필요는 없었다. 몸이나 판다고 매도할 생각도 아니었고, 비루한 몸뚱이라고 모욕을 주려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말을 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져서 표정이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그건, 멋대로 기대감을 가진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었다. 굳이 원인을 그에게 돌리자면, 본인조차 부모에게 버려졌으면서 책임감 없이 아이를 낳겠노라 선언한 그 자체에 대한 비난이기도 했다. 결혼이야 둘 다 이지가 있는 어른들의 계약이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이에겐 아무런 선택권이 없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역시나 그는 이번에도 군말 없이 사과했다. 놀라운 건, 그리 말하는 얼굴에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감정이 스쳤단 사실이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초조함이었다. 더 정확히는 불안이었고. 내가 한 말에 불쾌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본인의 잘못된 선택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나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단순히 계획이 어그러져서 그러는 거라고, 어렴풋이 그리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눈 밖에 나길 바라진 않았을 테니까.
“안 나갑니까?”
그는 마지막으로 회사에 복귀한단 소식을 전하고 꾸벅 인사를 건넸다. 사과도 쉽고, 허리를 숙이는 것도 쉽고, 내 딱딱한 대꾸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것도 쉬웠다.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동들은 한 기업의 장남으로 자란 사람이라기엔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아.”
그를 붙잡은 건, 그냥 짜증스러운 기분에 한 행동이었다. 마침 문고리를 잡은 왼손이 보였고, 그 허전한 손가락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려서.
“반지, 까먹지 말고 하고 다녀요.”
“…….”
아이를 갖자고 말하는 주제에 반지도 없이 다니다니.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지 않나.
달싹이는 입술이 금방이라도 무어라 반박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이번에도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알겠다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나는 그제야 시선을 떼어 냈고, 우리 사이의 대화도 거기서 끝이었다.
***
해신과의 결혼은 내 생활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좋은 게 있다면 더는 귀찮은 혼사가 들어오지 않는단 점이었고, 나쁜 게 있다면 이따금 결혼반지를 보며 내비치는 호기심 정도였다. 물론 그 또한 무시하면 그만이었기에 굳이 손에 꼽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불편이었다.
그동안 정세진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 조용히 존재감을 죽였다. 가끔 집에 있다는 걸 까먹을 정도였기에 이따금 마주칠 때면 나조차 내심 놀랄 정도였다. 마음에 안 드는 건, 그 순간마다 정세진이 내게 보인 태도였다.
‘아, 죄송합니다.’
그는 매번 죄를 지은 사람처럼 습관적인 사과를 내뱉었다. 누군가 보면 내가 그를 학대하거나 괄시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후자는 틀리지 않을지 몰라도, 전자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물론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자리를 피하는 모습은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결혼 상대가 맞았다.
그런데 왜, 그 모습이 자꾸 못마땅했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작은 가시가 걸린 것처럼 거슬리던 감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무시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가 조심하면 조심할수록, 그와의 접점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나는 그 부재 속에서 정세진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