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1화 Orgueil Et Prejuges(1)
정철호 회장이 찾아온 건 겨울이 막 끝나 가는 시기였다. 한창 시스템 개발로 정신없던 와중이었고 회장님의 병세가 악화될 즈음이기도 했다. 하필 경호팀의 뇌물 건이 터지는 바람에, 젊은 팀장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사직서를 내민 타이밍이기도 했다.
“제휴 맺을 은행을 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약속 없이 찾아와 대뜸 초조한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한 기업의 회장이라는 사람이, 응당 갖춰야 할 품위 따위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목과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고, 무릎 위에서 주먹을 꾹 움켜쥔 채로. 애써 미소 지은 정 회장이 덧붙인 말은 이거였다.
“저희 기업의 오메가를 드리겠습니다.”
해신의 오메가라. 그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마음씨 좋은 정 회장’이 거둔 가여운 오메가이자 제 아들처럼 살뜰히 키워 차근차근 본부장 자리까지 오른 남자. 재에 드러나는 존재감은 희미하나 그 능력과 인성이 훌륭해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인재.
“제 아들이지만, 됨됨이가 된 녀석이라…….”
앞서 퍽 정 없이 말한 주제에, 그는 금세 그 오메가를 제 아들이라고 칭했다. 우성이고 배운 것도 많으니 내게 꼭 필요할 거라며. ‘그 오메가’가 남들과 어떻게 다른지, 얼마나 뛰어난 교육을 받았는지,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어필했다.
“가뜩이나 우성이 드문 세상인데…….”
그 도전 정신을 칭찬해 줘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주제도 모르고 찾아온 무모함을 탓해야 할까.
계속 들어오는 혼사에 지치던 참이다. 로맨틱한 결혼은 애초에 꿈도 꾸지 않았고,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계약할 생각도 없었다. 서류상으로 묶인 가족만큼 번거로운 것도 없는 데다, 정말 후계가 필요했다면 선택지가 꼭 해신일 필요도 없었으니.
“그러니 저희 해신을 선택해 주셨으면 합니다.”
긴장으로 물든 얼굴이 참으로 볼품없었다. 거기까지 말한 정 회장은 잠깐 말을 멈추고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가만히 다리를 꼰 채로 말없이 그가 하는 얘기를 듣는 중이었다.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톡톡 움직이자 그가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훌륭한 자제분을 두셨군요.”
내 감흥 없는 대꾸에도 정 회장의 얼굴엔 희망이 스쳤다. 이제 막 50이 되었던가. 주름진 눈매가 탐욕 어린 눈동자를 숨겨 주지는 못했다. 욕심 많고 무능한 사내라더니, 그 아들에 대한 기대 역시 자연스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별개로 갑자기 찾아오신 게 당황스럽긴 하네요. 마침 비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문전 박대를 했을 텐데…… 그럼 피차 곤란하지 않겠어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분 단위로 일정이 차 있는 마당에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을 맞이할 여유 따위 없었으니까. 마침 미팅이 하나 취소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앉아 있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뭐, 사과를 듣자는 건 아니고.”
나는 그리 대답하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드물게 여유로웠으나, 그 시간을 정 회장에게 할애할 생각은 없었다. 좀 더 가치 있게 사용할 방법이 셀 수 없이 많았으나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거였다.
“조건을 좀 더 자세히 들어 보죠.”
누군가 묻는다면 그저 변덕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충동이었고, 또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었다. 여차하면 팽할 수 있는 위치, 절대 갑을이 전복되지 않을 관계. 그의 말대로 드물디드문 우성 오메가를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궁금했으니까.
“저희 쪽에서 생각한 부분은…….”
정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절주절 계약 조건을 늘어놨다. 주로 해신이 선호를 얼마나 좋게 대우해 줄지, 그로 인해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인지. 혹 제휴가 불발되더라도 차차 좋은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빈말도 함께였다.
엄밀히 따져 이득은 아니었다. 다만 손해도 아니었는데, 그 모든 조건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내 쪽에서 잃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나를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부디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가끔 그런 촉이 올 때가 있다.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눈앞에 놓인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지금의 선택이 결코 자충수는 아니리라는 확신. 그리고 당장 내칠 필요가 없다면 우선은 거두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경험 어린 선택.
“조건은…… 차차 조율하도록 하고.”
잘하면 해신을 통으로 삼킬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그가 뭘 노리고 있건, 뜻대로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 말 잘 듣는 오메가 하나 정도는 혼사를 막을 용도로 데리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계약서를 작성해 보죠.”
“……!”
정 회장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그는 금방이라도 비명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나 뒤이어 흘러나온 말만큼은 또 마음에 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
한껏 들뜬 음성이 계약의 시작을 알렸다. 선호와 해신의 연결 고리가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생긴 것이다.
그래, 그게 모든 순간의 시초였다.
***
내가 해신에 보낸 계약서는 일종의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간절한지, 내가 휘두를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그런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 일방적으로 독소 조항을 몇 개나 끼워 넣었다. 당연히 반발이 있으리라고 예상했건만, 우습게도 그는 곧장 도장을 찍고 계약을 받아들였다.
나는 계약을 마치고, 우선 비서를 통해 해신의 재정 상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대로.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개판이었다. 금융 회사가 이래도 되는 건지. 그나마 잘 틀어막고 있는 지금조차 변수가 생기는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터였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지.”
뭐,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계획한 바를 이루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쪽 오메가와 서류 정리가 끝나면 차일피일 계약 이행을 미루며 물밑 작업을 할 예정이었으니.
“이쪽은 정세진 본부장에 대한 자료입니다.”
박 비서는 뒤이어 사진이 붙은 종이 몇 장도 내밀었다. 정 회장이 협상 조건으로 내민 오메가와 관련된 자료였다. 반 정도는 직접 조사해 온 것이었고, 반 정도는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상이었다.
“그럼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꾸벅 인사한 박 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사실을 빠져나갔다. 내 옆에서 오래 보좌한 만큼 적당히 치고 빠질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손에 든 자료를 찬찬히 살펴봤다.
“경영기획 본부장…….”
해신금융그룹 경영기획 본부장 정세진.
무너져 가는 해신을 간신히 지탱하는 윗대가리가 바로 이 젊은 남자였다. 나보다 세 살이 어렸고 학벌은 그럭저럭 평범했으며 지금껏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깨끗한 도련님이었다. 아마 으레 재벌들이 그렇듯 탄탄대로를 따라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크게 굴곡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안 닮았네.”
다른 건 둘째치고, 딱 처음 느끼는 감상이 그거였다. 입사 초기로 추정되는 증명사진은 정철호 회장과는 전혀 닮지 않은 생김새였다. 눈에 확 띄는 미인은 아닐지언정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곱상한 이목구비가 보기 드문 것임은 분명했다.
결혼 상대로 나쁘지 않겠다고, 그리 생각했었다. 나란히 섰을 때 볼품없는 수준도 아니고, 잘 꾸며 놓으면 남부럽지 않은 부부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만약 무언가 하자가 보인다면 그걸 빌미로 계약 조건을 조금 수정할 생각도 있었다.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바라는 게 있다면 사소한 것들이었다. 주제 파악을 잘했으면 좋겠고, 자신이 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우선은 한집에 살아야 했으니 가능하면 존재감 없이 머물러 주길 바랐다.
나는 서류를 갈무리해 책상 한구석에 몰아 뒀다. 서면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엔 한계가 있기에 남은 건 직접 얼굴을 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굳이 시간을 낼 생각은 없으니 결혼식 당일까지 만나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당사자는 이 결혼에 동의했을까. 잠깐 떠오른 의문은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그 정 회장이 키운 자식이니 외모는 몰라도 성격은 확실히 비슷하리라. 욕심 많은 사람이면 차라리 다루긴 쉬울 테니. 오히려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
결혼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집안에 통보를 마치자마자 나는 대대적으로 기사를 뿌리고 해신과의 결혼을 낙인찍었다. 고작 하루아침에 정세진이라는 오메가는 내 비밀스러운 연애 상대이자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로 탈바꿈돼 있었다.
앞선 계약대로 식 준비는 전부 선호의 몫이었다. 그가 입을 옷도, 결혼반지도, 식장 장식 하나하나까지 전부 최고여야만 했다. 어차피 퍼포먼스에 불과한 행위였으나, 이왕 할 거라면 뒷말이 나오지 않을 완벽한 연극이길 바랐다.
“사이즈가 마네킹이랑 비슷하시더라고요.”
앞서 모아 뒀던 정세진의 정보엔 반지 사이즈와 옷 사이즈가 추가됐다. 예복을 맡은 디자이너가 말하길, 이 정도면 따로 가봉을 해보지 않아도 웬만한 옷은 무난히 소화할 수 있을 거란다.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키도 꽤 큰 편이라고 전해 들었다.
결혼식 당일에는 예의상 그를 위한 스위트룸을 마련해 뒀다. 정확히는 의상을 세팅하기 위한 공간이었지만 결혼 상대를 향한 최소한의 예우는 지킨 셈이다. 정세진은 그곳에서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영빈관에 있는 대기실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전무님, 준비 끝나서 대기 중이라고 합니다.”
나는 여러 하객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식이 시작되기에 앞서 정세진이 있는 대기실을 찾아갔다. 가는 길목엔 정 회장과 그의 식구들도 마주쳤는데, 나를 보는 차남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그 또한 딱히 기억에 남는 요소는 아니었기에 모르는 척 스쳐 지나갔지만 말이다.
대기실 앞에는 경호원 두 명이 서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묵례를 건넨 이들이 장지문을 좌우로 열었다. 드르륵,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의자에 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
첫인상은 그랬다. 단정히 정리한 머리가 깔끔했고, 희게 드러난 목덜미가 곧았으며, 곧게 편 어깨가 결코 가녀리지만은 않았다.
방송으로, 혹은 신문으로, 앞서 찾아봤던 얼굴이 이런 종류의 것이었을까.
우습게도, 나는 그 정적인 풍경을 고고하다고 느꼈다. 매가리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 역시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언뜻 보이는 얼굴은 참으로 유순해서, 잘못 건드리면 뒷맛이 별로일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그는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우성이라더니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고, 지척에 다가가서야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겨 왔다. 뒤늦게 퍼뜩 고개를 든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느리게 두 눈을 깜박였다.
“…….”
색소가 엷은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사진이 안 받는 모양인지, 박 비서가 건네준 사진보단 이쪽이 낫지 않나 싶다. 선이 부드럽고 희멀건 얼굴은 세필 붓으로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그려 넣은 것과 비슷했다.
“정세진?”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찬찬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훑어봤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고, 아까 느꼈던 감상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내가 이 사람을 고고하게 느꼈다는 게,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뛰어난 교육을 받았다고 했던가. 그 움직임이 나긋나긋하고 우아했다. 다만 상냥히 미소 짓는 순간엔 갑작스러운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정세진입니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매가 불쾌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손을 내밀며 정중히 덧붙이는 목소리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냥 흔히 마주치는 그저 그런 기업인 중 하나였다. 사람 좋은 얼굴로, 최대한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 별달리 색다른 것도 없었고, 무엇 하나 뛰어난 부분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괜찮은 오메가라더니…….”
잠깐 생겼던 호기심이 눈 깜박할 사이 사라졌다. 이유 모를 실망감과 함께 감흥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 빼곤 봐줄 게 없군.”
무례한 말이었으나 정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웃음을 흘리며 손을 거둬들였을 뿐.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쉽게 상처받진 않는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뻔뻔한 대꾸까지 했다.
“다행이네요. 얼굴은 봐줄 만해서.”
“그마저도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서.”
높이 살 만한 부분은 표정 관리를 잘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대단치 않은 얼굴이 왜 그리 뇌리에 각인됐는지 모르겠다. 억지로 웃을 거면 차라리 무표정이 낫겠다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를 향한 평가가 조금 바뀌었다. 대기실에 있을 땐 인형처럼 넋을 놓고 있던 사람이 웨딩로드를 걸으면서는 정말 행복한 얼굴로 웃었으니까. 사업 수완이 좋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어떤 의미에선 절대 깨지지 않을 포커페이스였다.
손이 닿을 때 한 번, 그리고 입술이 닿을 때 또 한 번. 정전기가 오르듯 찌릿한 느낌과 함께 감질나는 감각이 섞여 들었다. 입을 맞춘 그대로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릴 때는 뻔뻔하다는 감상과는 달리 묘한 기분도 들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딱, 모양 좋은 액세서리를 달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앞서 이야기해 둔 대로 그는 팔짱을 빼지 않았고, 누군가 말을 걸 때면 눈치 빠르게 내게 가까이 밀착했다. 오메가라 그런지 다르다는, 모욕적일 수 있는 말에도 기껍다는 얼굴로 웃어 보이기만 했다.
“제가 저희 세진이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아주 살뜰히 키웠거든요. 이렇게 전무님한테 보내려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럽니다.”
“…….”
유일하게 표정이 바뀐 건 정 회장이 그리 말하는 순간이었다. 말없이 눈을 내리깐 얼굴은 자칫 슬픔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우리 기업의 오메가’ 따위로 칭하는 계부에게 뭐 얼마나 대단한 가족애가 있다고. 더 우스운 건, 그 얼굴을 잠시 가련하다고 느낀 나였지만.
“살다 살다 우리 동생 결혼하는 걸 다 보네?”
식구들과의 인사는 무난했으나 권이정을 마주친 순간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예의 그 실없는 얼굴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저급할 말들을 내뱉었다. 쓰다가 질리면 이야기하라느니, 늘어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느니. 줄줄이 이어지는 모욕 속에서도 정세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 짓도 해본 사람이 잘하는 거 알죠?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어쩌면 정 회장이 권이정 대신 나를 찾아온 건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세진을 쓸 생각이 없지만, 상대가 권이정이었다면 불구가 되도록 일을 치렀을 테니. 후계는 빨리 봤겠지만, 그 후계로 정 회장이 원하는 결말은 낳을 수 없었겠지.
뉘엿뉘엿 노을이 질 즈음 지루한 결혼식이 마무리됐다. 잠시 어머니를 뵙는 동안 정세진은 산책로 근처에서 나를 기다렸다. 어딜 가냐고 묻지도 않고 얌전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기다리라는 명령을 들은 개와도 비슷했다.
“……네가 아들이야?”
그런데 내가 돌아갔을 때 정세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밝게 염색한 뒤통수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해신그룹 차남이 분명했다. 이름이 정민재였던가. 그 불순하던 눈빛만큼이나 까칠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누가 오메가 아니랄까 봐 그딴 알파 새끼한테 혹해 가지고…….”
“민재야.”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민재를 불렀다. 정세진은 눈가를 가린 그대로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늘 있는 일이라는 양, 부러 ‘형’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몇 마디 듣지 않아도 상황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 건 나중에 가족들끼리 있을 때 얘기하자.”
이 집도 콩가루네. 삼류 드라마보다 못한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