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A La fin de La Memoire(4)
온전한 관계가 주는 안정감은 그 어떤 약물보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곤 한다. 내가 가진 만성적인 결핍은 대개 상실에서 오는 박탈감과 비슷했다. 원인이 해결됨과 동시에 자연스레 해소될 문제들이었단 말이다.
권이도와 만난 이후, 나는 수면제를 완전히 끊었다. 상담은 아직도 다니고 있지만, 횟수는 세 번에서 두 번으로 줄어들었다. 의사는 호전되는 속도가 현저히 빨라졌다며 조만간 그 외의 약도 끊어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정말 낫긴 낫는구나. 나는 내가 아픈 것도 몰랐는데 어느샌가 회복세에 들어서고 있었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만큼이나 우리의 연애 전선과 내 건강 역시 순조로웠다.
그리고 그건, 그가 선물해 내가 일군 회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Sejin, 연말 맞이 컬렉션 출시...선호와 손잡아」
「퍼퓸 코스메틱 브랜드 ‘Sejin’, 수익금 기부」
권이도와 헤어졌던 시기, ‘Sejin’에서 출시한 향수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선호의 힘일까, 평소보다 홍보 효과 역시 뛰어났다. 자연스레 만족할 만한 수익이 뒤따랐기에, 기껏 투자한 권이도에게 누를 끼칠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Sejin’은 봄 시즌을 맞이할 새로운 컬렉션을 내놓았다. 이번에도 역시 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이 끼어 있었고, 지난번과는 달리 모든 제품 개발에 내가 직접 참여했다. 그간 조향 실력이 많이 는 덕에 내 아이디어로만 구성된 제품도 몇 개 있었다.
“저희 ‘Sejin’의 세 번째 행사에 참여해 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하여,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해 가지게 된 론칭 행사. 그와 사귀게 된 이후로 처음 하는 행사이자, 앞으로 분기마다 치르게 될 이벤트의 이번 콘셉트는 다름 아닌 꽃이었다. 묵직한 향이 많던 지난 시즌과 달리, 이번엔 가볍고 잔잔한 향을 베이스로 하는 향수가 많았다.
“저는 ‘Sejin’의 대표 정세진입니다.”
내가 인사하자마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이르지만, 행사는 명성호텔 영빈관 야외 정원에 마련됐다. 향수마다 모티브로 삼은 생화를 한 송이씩 놓아둬서, 천연 향료로 얼마나 자연 그대로의 향기를 구현했는지 어필할 예정이었다.
“이 다섯 번째 제품은 수익의 일부를 미혼모를 비롯한 한부모 가정에게 기부하는 형태로…….”
벌써 세 번째 행사이기 때문일까, 마이크를 쥐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그리 떨리지 않았다. 늘 왠지 모를 긴장감이 명치를 옥죄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두근거리는 설렘이 더 커다랬다. 정체 모를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나서, 아침부터 내내 기분이 들떠 있었다.
‘이번엔 꼭 갈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는 나와 연인 사이가 된 권이도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나를 놓아줄 필요도, 우리의 관계를 끝낼 필요도 없이, 그저 직원들과 만들어 낸 결과를 축하해 주겠다고.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간단한 인사말을 마무리하고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돌려줬다. 초대장을 배부해 초청한 기업인이 반, 그리고 추첨을 통해 선정한 일반인이 반. 그중에 아직 권이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 오려나…….
이번만큼은 오겠다는 말을 반드시 지킬 터였다. 지난 두 번의 행사는 그냥 지나쳤지만 그때와는 관계도 다르고 상황도 달랐으니까.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공개하진 못해도 사업 파트너로서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겠지.
나는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손님들을 응대하며 눈으로는 권이도를 찾았다. 나름대로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누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누구 찾으세요?”
“……아.”
이희나였다. 기장이 짧은 코트에 회색 슬랙스를 입은 그는 하얗고 부들거리는 니트와 퍽 잘 어울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생글생글 웃은 이희나가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저도 향수 하나만 추천해 주세요.”
어차피 매번 내가 모든 제품을 선물하곤 하는데.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그를 데리고 향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꽃과 향수를 번갈아 시향하게 해주자 이희나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이건 향이 되게 세진 씨 같네요.”
자스민을 베이스로 한 가벼운 향수였다. 언뜻 장미 향이 나는가 하면 마지막에 남는 잔향은 코튼 계열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까 그 향수는 출시 안 하세요?”
“그 향수요?”
“왜, 작년에 세진 씨가 한창 만드시던 거요.”
“……아, 그거.”
작년이라는 말에 생각나는 향수가 있었다. 권이도와 헤어졌던 시기에 온종일 만들곤 했던 나무 냄새가 나는 향수. 이희나에게 조언까지 구했던 터라 그 또한 기억하고 있나 보다.
“그건 주인이 따로 있어서요.”
권이도에게 선물한 향수는 아직까지도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원래는 출시할 예정이었으나, 나는 조용히 그 제품을 묻어 두기로 했다. 그냥 사소한 이유였는데, 다른 이들이 그의 페로몬을 아는 게 싫어졌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독점욕이었을지언정, 내게 그 향수의 주인은 오로지 권이도뿐이었으니.
“맞다. 세진 씨, 조만간 시간 좀 내주세요.”
이희나는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문득 나를 올려다봤다. 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순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청첩장 드릴게요.”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이태성은 내게 티 한 번 내질 않았는데, 벌써 그럴 때가 된 모양이다. 퍽 놀라운 소식이었고, 듣는 나조차 기분이 좋아졌다.
“축하해요. 꼭 시간 낼게요.”
“세진 씨 덕분이죠.”
그는 자세한 건 나중에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걸음을 옮기기 전, 입구에 서 있던 이태성에게 남몰래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중에 또 은근슬쩍 놀려야겠네. 그리 생각한 내가 다른 손님들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
어디선가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또렷이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바라보자, 사람들 틈에서 새빨간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서서히 차오르던 기대감이 한순간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표정이 부드럽게 풀리고, 동시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설렘 역시 고스란히 전해졌다.
“…….”
“…….”
그는, 한 손에 장미꽃을 든 채 정갈한 걸음걸이로 내게 걸어왔다. 언제였더라. 약혼식 날 새하얀 꽃잎 위를 걸어오던 그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입가엔 엷은 미소를 띤 채로. 그저 올곧게 걷고 있을 뿐인데,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정세진 대표님.”
기품 있는 목소리가 부르는 이름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는 넌지시 장미꽃을 내밀며 시선을 맞춰 왔다. 두근, 두근,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이번 론칭도 축하드립니다.”
“……하하.”
어색한 웃음은 긴장을 푸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을 것 같은데. 그런 걸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기분이 들뜨고 있었다.
“꽃을…… 사 오실 줄은 몰랐는데.”
행사에서 꽃을 받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종종 축하의 의미로 꽃다발을 선물하곤 했다. 대부분 김 실장이 대신 옮겨 줬지만, 이 꽃만큼은 아마 끝날 때까지 내 품에 있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권이도 전무님.”
그는 내 말에 녹아내릴 것처럼 다정하게 웃었다. 꽃과 함께 스친 손가락이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졌다. 눈을 내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그가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으며 이야기했다.
“향수 설명 좀 해줄래요?”
갑작스럽게 등장한 권이도는 행사장 내부에 있던 사람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절반 정도는 말이라도 한 번 붙여 보기 위해 기회를 노렸고, 나머지 절반은 연예인 보듯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워낙 유명 인사인데다 그 외모가 뛰어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이도는 그 모든 사람을 무시한 채 오로지 내 옆에만 붙어 있었다. 내게 모든 제품의 소개를 듣고 그걸로 모자라 별 시답잖은 질문까지 건넸다. 향수를 섞어 뿌려도 되냐느니, 대표님이 추천하는 제품은 뭐냐느니. 그저 수작에 불과한 말들이었지만, 나는 기꺼이 대답해 줬다.
“대표님 고생하셨어요!”
“두 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모든 행사가 끝났을 때, 직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묵묵히 서 있는 권이도를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직원들의 적응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황당한 웃음을 흘리는 와중에 직원 하나가 퍼뜩 나를 불렀다.
“아, 맞다. 대표님!”
나는 물론 권이도 역시 그 직원을 돌아봤다. 우르르 몰려 있던 직원들이 저마다 수군수군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의아해하는 찰나, 그중 한 명이 들뜬 얼굴로 씩 미소를 지었다.
“생일 축하드려요!”
“……?”
생일? 그렇게 물을 시간은 없었다. 그 축하를 시작으로 줄줄이 다른 직원들까지 한마디씩 거든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내일 즐겁게 보내세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요!”
나는 무어라 대답하는 대신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던가. 까맣게 잊고 있던 생일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래서 곧장 반응하지 못했는데,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생일 아니세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언제 신이 났냐는 듯 다른 직원들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아뇨, 맞습니다. 내일 생일이에요.”
평소에도 그러긴 했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럴 때마다 해신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생각났다. 그 사람들도 나조차 까먹는 생일을 항상 기억하곤 했다.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에이,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들은 금세 기분 좋은 얼굴로 한 번씩 더 축하를 건넸다.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장난을 치다가 옆에 선 권이도를 보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직원이 자리를 떠났을 때, 권이도는 미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
나는 가느다란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그의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 있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자 권이도가 한술 더 떠 깍지를 껴왔다. 올곧게 나를 향하는 시선엔 길게 늘어진 노을이 부드럽게 스며 있었다.
“데려다줄 거죠?”
* * *
집으로 향하는 길은 늘 그랬든 권이도와 나 둘뿐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내 오피스텔로 향했고,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하늘이 어둑어둑하게 변해 있었다.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안, 이번엔 권이도가 먼저 내 손을 맞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날 한잔해야 되는데…….”
기분은 딱 취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즐겁게 마시는 술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아버린 터라 이럴 때면 이따금 회식이 그리웠다. 진상을 부리는 상사가 되고 싶진 않은데, 이러다가 매일 술자리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한잔할까?”
“술을?”
“전에 가져다 둔 와인 있을걸.”
권이도는 마치 제집처럼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몇 번 있던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럴 거면 그냥 같이 사는 게 낫지 않나. 문득 떠오른 생각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와인이 있었나?”
“아마 찬장에…….”
그가 내 집에 들르기 시작한 이후, 집에 이런저런 물건이 많아졌다. 원래는 가구조차 몇 개 없었는데 지금은 아예 권이도의 슈트 케이스가 몇 개씩 걸려 있을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여분 이불까지 생겼고, 그의 말대로 찬장엔 와인까지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 있었어요?”
“좀 됐지. 지난번에 선물로 들어온 거니까.”
몸체가 둥글게 빠진 레드와인은 일전에 그가 가져다 둔 것이라고 했다. 마침 좋은 술이 들어왔는데, 내가 지나가듯 궁금하다고 이야기했다면서. 나는 기억조차 안 나는데 수납까지 알아서 해놓은 모양이었다.
“한잔하고 자면 되겠네.”
그 말엔 나도 모르게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일랜드 식탁 건너편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야기했다.
“……자다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는 와인을 한 손에 쥔 그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른 손을 내 쪽으로 뻗은 그가 왼뺨을 부드럽게 감싼 채 상체를 기울였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입가에 쪽 입을 맞추고 멀어졌다.
“내일도 주말인 걸 알아야지, 세진아.”
“…….”
불쑥 위기감이 엄습하는 경고였다. 목소리는 우아하고 나직했지만, 나는 아직도 지난주의 일을 잊지 못했다. 눈물이 날 만큼 좋은 행위였음에도 다음 날 감당해야 할 여파가 너무도 커다랗긴 했다.
권이도가 와인 잔(이조차 나는 집에 있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두 개를 꺼내고, 오프너로 능숙하게 와인을 땄다. 스크루를 밀어 넣고 잡아당기는 동작이 왜 그리 섹시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쪼르륵, 와인 잔을 채운 그가 잔 하나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한 잔 받으셔야죠, 대표님.”
능구렁이 같게도, 정말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게 조금 우스워서 잔의 가느다란 부분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권이도 역시 와인 잔을 들어 내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 후, 우리는 도란도란 별거 아닌 일상 얘기를 하며 와인 한 병을 모두 비웠다. 중간부터는 식탁에 치즈가 놓였고, 그 역시 권이도가 미리 챙겨 둔 것이라고 했다. 이게 내 집인지, 아니면 그의 집인지. 이럴 거면 정말 살림을 합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 것 같다.
“졸려?”
“으응…….”
와인을 모두 비운 뒤엔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욕조에 몸을 담그게 해줬다. 그의 집에선 전부 고용인이 해주던 건데. 권이도가 직접 수발을 들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우리는 가벼운 손장난과 함께 샤워를 마쳤고, 나란히 가운만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권이도 씨.”
조명 하나 없는 방 안엔 어렴풋이 권이도의 얼굴이 보였다. 내게 팔베개를 해주고 등을 다독이던 그가 흘긋 나를 내려다봤다. 샤워를 하며 두 번쯤 사정한 탓에 노곤하니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내가 전에 알려 줬던 불어 기억나요?”
“불어?”
내가 묻는 말에 그가 나긋이 되물었다. 밤이라 그런가, 목소리가 지나치게 상냥했다. 지금 풍겨 오는 페로몬처럼 긴장이 잔뜩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달 속에 있다고…… 그랬던 거.”
우리가 처음 입을 맞췄던 날의 기억이었다. 그가 내 불어 실력을 알아보겠다고, 작은 시집을 해석시켰던 그때. 현실 감각이 없다는 말과 함께 부드럽게 입을 맞췄던 그날의 일 말이다.
“그거, 정신이 딴 데 팔렸다는 의미래요.”
생각보다 로맨틱한 뜻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아마 그때의 우리처럼 무언가의 홀렸다는 뜻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몽롱한 상태와는 조금 다르다고. 그리 말하기도 전에 권이도가 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너 취했어.”
입술이 깃털처럼 스쳤다. 간지러운 감각에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그의 말대로 취기가 오른 상태였고, 알딸딸한 정신이 몽롱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이야기했다.
“자기도 같이 마셨으면서.”
“또 자기라고 하네.”
“……이건 그 자기가 아니지.”
아무래도, 나를 놀리는 것 같다. 그 호칭을 누구보다 좋아하면서, 내가 맨정신엔 불러 주지 않으니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괜히, 사근사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기야.”
“…….”
그의 눈동자가 짙게 물들었다. 픽 웃는 걸 보니 그때처럼 이성이 날아갈 정도는 아닌가 보다. 하긴, 함께 씻으면서 그 또한 한 번은 사정했었지.
“내가 어릴 때 얘기 들을래요?”
술기운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냥 무작정 계속해서 떠들고 싶은 생각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스쳤지만, 그도 나도 멀어지진 않았다.
“응, 얘기해 줘.”
그는 일부러 입술을 더 가까이 가져다 대며 이야기했다. 각인으로 전해지지 못한 기억. 그리고 아마 내 입으로 말하지 않은 이상 평생 몰라야 할 내 어린 시절. 막연히 털어놓고 싶은 과거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홉 살 때…….”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두서없고 재미없는 내용이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이따금 나를 다독이며 차분히 귀를 기울였을 뿐. 나는 하염없이 내 과거를 늘어놨고, 그러다 어느 순간 스르륵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