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Retour des Saisons(12)
우리가 향한 곳은 마지막에 헤어졌던 레스토랑이었다. 고층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식당. 벽면이 온통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밤이면 야경이 아름다운 장소. 권이도와 내가 마지막 식사를 하고, 우리의 약혼이 끝났던 바로 그곳.
나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권이도와의 식사를 위해 이곳을 예약해 둔 참이었다. 그가 기념식에 참석해 나와 대화를 나누리라고 확신했었으니까. 설마하니 코빼기 하나 내비치지 않다가 주차장에서 그렇게 펑펑 울 줄은 몰랐지만.
“…….”
“…….”
식사를 하는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웨이터가 와인을 따라 줄 때도 조용했고, 주방장이 요리를 설명해 줄 때도 조용했다. 내가 묵묵히 음식을 먹는 동안, 권이도는 그저 식기를 움직이는 시늉만 할 뿐이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말끔한 얼굴이었으나 그 눈동자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주방장이 눈치 보던데.”
나는 그런 권이도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그가 모든 음식을 남긴 탓에 주방장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웨이터까지 돌려보낸 터라 아마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을 거다.
“조금이라도 먹어요. 저녁도 안 먹었을 사람이.”
“……입맛이 없어서.”
그렇게 울었는데 입맛이 있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게다가 여전히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고.
“…….”
나는 살짝 식기를 내려놓고 멀거니 창밖을 내다봤다. 창가 쪽 테이블은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아름답게 펼쳐진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은, 적어도 지난번에 왔을 때보단 아름다웠다.
“그럼…… 얘기를 좀 해볼래요.”
넌지시 권이도에게 이야기했다. 우리에겐 아직 할 말이 많았고, 그러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였으니. 홀을 통째로 비운 덕에 누군가 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권이도 씨한테 궁금한 게 많거든요.”
“…….”
“우리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권이도를 마주 보진 않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걸 알면서도 시선 한 점 건네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불빛을 눈으로 헤아리며 느릿느릿 이야기했을 뿐.
“어디서부터 얘기할까요. 우리가 헤어지고…… 아니, 이건 아까 했지.”
쯧,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나라고 정말 괜찮은 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이, 그리고 아까 남았던 감정이, 그에게서 전해진 긴장이 생각을 잔뜩 어지럽혔다.
“미안한데 나도 지금 머리가 복잡해서.”
내가 양해를 구할 때도, 권이도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권이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와 한 계약이 뭡니까?”
모든 일의 시초가 그거였다. 우리의 정략결혼. 해신과 선호 사이에 오간 내가 모르는 계약.
“제가 정말 아무것도 못 들었거든요.”
나는 모든 사실을 외면했기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른다. 이제 와서는 굳이 필요 없어진 부분들이었지만, 하나하나 되짚으며 내 감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모르고 넘어간 사실들부터 파악해야 했다.
“올 초에…….”
권이도는 느리게 운을 떼며 눈을 내리깔았다. 단정히 내리깔린 속눈썹이 아직도 눈물에 젖은 느낌이었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 회장이 나를 찾아왔어.”
권이도가 말하길, 아버지는 선호카드가 제휴 맺을 은행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라고 했다. 어디서 들린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과 무관하진 않았다고. 아버지는 본인 기업의 오메가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권이도는 그 협상을 받아들였단다.
“아마 나한테 필요한 게 후계라고 생각했나 본데, 나는 계속 들어오는 혼사를 막을 구실이 필요했어. 후계야…… 별로 급하지 않으니까.”
더 자잘한 조건이 있었을 텐데, 권이도는 거기까진 말해 주지 않았다. 내 생각에도 별로 알 필요 없는 내용이었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과정이었으니까.
“물론 정 회장이 내건 조건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고요?”
조건이 나쁘지 않다니. 누가 봐도 나쁜 조건이건만. 권이도가 얻는 건 고작 나 하나고, 아버지는 무수히 많은 이득을 취했을 텐데.
그런데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해신을 통으로 삼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거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설명이 더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그가 느릿느릿 덧붙였다.
“딱 봐도 운영은 불안한 데다, 윗대가리들 사업 수완도 별로인 것 같고, 거기다 정작 협상하러 온 정 회장까지 초조해 보이니까.”
“…….”
“제휴를 맺을 생각은 없었지만, 연결 고리를 만들어 놨다가 흡수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부부로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처음부터 해신을 잡아먹을 생각이었구나. 나는 아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던 권이도의 말이, 설마 어차피 해신을 흡수할 예정이었다는 말일 줄은 몰랐다. 아버지와 협상할 단계면, 아직 겉으로 망조가 드러나지도 않았을 텐데.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해신 정도면 내가 팽했을 때 뒤탈도 없으니까. 나로선 잃을 게 아무것도 없었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다른 대기업이면 모를까, 무너져 가는 기업을 어떻게 대하건 그건 권이도의 마음일 테니.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서 단물만 빼먹을 생각이었을 거다. 그러다 뭐, 이혼을 하더라도 그의 커리어엔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한 타이밍 늦게 그게 더 궁금한 건 없냐는 질문임을 깨달았다. 내가 물어보면 정말 다 알려 줄 생각인가. 어느덧 차분해진 눈동자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내가 빼간 자료가 불량이라는 건 언제 알았어요?”
당장 떠오르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분명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권이도를 보고 있으면 마구 떠올랐던 잡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듯했다. 다 때려치우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싶기도 했고. 그러나 아직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우리가 각인한 다음에 알았어.”
“…….”
“너를…… 내 집에 데려오고 나서.”
그는 고분고분 내 질문에 대답해 줬다. 우리가 각인한 다음이면 그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내가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바쁘게 다른 일에 집중하던 시기기도 했다.
“그때 해신이 무너졌거든.”
“…….”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한 말이 지금껏 들은 어떤 말보다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과거에도 해신이 무너졌었다는 건가. 그렇게 발버둥 쳤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가세를 바로잡지 못했다고.
“미완성인 보안 프로그램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어.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했다는 이유로 고객들이 대거 탈주했고…… 그 타이밍에 내가 정 회장의 비리를 뿌렸지.”
“…….”
“그렇게 망한 거야, 해신은.”
내가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의 집에 갇혀 있을 때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권이도가 차단한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갇힌 거였다.
“……그럼.”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엔 알았겠네요. 자료가 불량이라는걸.”
그가 내게 쥐여 줬던 자료. 선뜻 내밀었던 USB. 그 또한 해신을 망가뜨릴 열쇠였던 모양이다. 처음엔 불량인 줄 몰랐다고. 그리 말하던 권이도가 미심쩍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시스템이 완성품이었어도 너한테 줬을 거야.”
그러나 권이도는 더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담담한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자조 어린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선호를 달라고 해도 줬겠지.”
“…….”
제법 무서운 소리를 하지 않나. 이 사람이 하면 도무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데.
“또 궁금한 건?”
내 성격이 진짜 나쁘긴 나쁜가 보다. 그렇게 꾸준히 정신과 치료를 받는데, 어쩜 효과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 무표정한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길 바라는 걸 보면.
“……권이정이 그러던데.”
우습게도 권이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더 우스운 건, 다시 무너진 표정을 보고 곧장 후회한 나였지만 말이다. 조금 더 준비가 된 이후에 물어볼 걸 그랬나.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이도가 말한 선물이 이거였을 줄 몰랐다고.”
“…….”
“그 선물이…… 설마 나는 아닐 테니까.”
오해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어떻게 만들어진 오해인지는 몰랐다. 그가 왜 권이도의 집을 찾아왔는지, 나를 ‘선물’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사람한테 뭘 주려고 했던 거예요?”
그는 이번만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태껏 술술 이야기하던 주제에 눈까지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내, 입술을 달싹인 그가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소할 자료.”
자료? 그렇게 되묻자 권이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까득, 이 가는 소리도 들렸다.
“그 자식이 건드렸던 피해자들한테 모은 증거.”
어떤 피해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명성호텔 로비 구석진 곳에 있는 남자 화장실. ‘그런 용도’로 쓰인다던 장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나랑 얘기했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모았던 증거를 터뜨려서 매장시키기로. 기업 이미지는 잠깐 나빠지겠지만 그 자식이 설치고 다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가 불쾌해하고 있단 사실이 피부로 전해졌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권이경과 함께 권이정을 완전히 처리할 예정이었나 보다. 그 이유가 경영권인지, 아니면 범죄에 대한 응징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간과하고 있었어. 넌 방 안에 있을 테니까 마주칠 일 없을 줄 알았고. 상을 치르느라 정신도 없었던 데다가…….”
느릿느릿 말하던 권이도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내, 마른침을 삼켰는지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니, 그냥 다 변명이지.”
“…….”
미안하단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표정에 담긴 무수히 많은 죄책감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할 만큼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데.”
더 궁금한 부분은 없었다. 그를 심문할 생각이 아니니 무언가 더 묻기에도 애매했다. 그래서 권이정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른 사실을 입에 올렸다.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반응이 긍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굳이 묻지 않더라도 지금껏 봐온 권이도의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아빠가 될 자격이 없다고, 늘 생각하던 이유가 아마 그래서였겠지.
“누구 아이인지…… 그것도 알아요?”
그냥,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죽을 당시엔 궁금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 와 새삼 궁금해져서.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진실을 알고 나면 기분이 달라질까 봐.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존재가 기억으로라도 남길 바랐으니까.
“…….”
당연히 권이도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망설인 뒤에 눈을 꾹 감았다가 떴을 뿐이다. 짙은 눈동자에 자책감을 비롯한 후회가 스쳤다.
“……우리 애였어.”
“…….”
“너랑 내 아이.”
차분한 목소리가 주는 감정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울컥, 치솟은 게 안도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내게 전해지는 권이도의 감정 역시 내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음식은 이미 다 식어 버린 뒤였다. 마지막에 후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우리 둘 다 딱히 먹을 생각은 없었다. 고스란히 남은 음식이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그와 내 감정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밤새 고민했지만 아직까지도 순서가 애매했다. 나도 이런 게 처음이라서, 무수히 많은 망설임이 생겼다.
“……이거.”
그래서 우선, 테이블 구석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아까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 올려 둔 물건. 내가 집에서부터 챙겨 나와 내내 만지작거리던, 내 지난 몇 달을 담은 권이도에게 주기 위한 선물.
“선물이에요. 전에 약속한 거.”
권이도는 여전히 의아한 눈으로 상자를 바라봤다. 약속이라고 말했음에도 곧장 떠오르는 게 없나 보다. 나는 상자를 슥, 권이도 쪽으로 밀며 눈을 내리깔았다.
“향수 이름을…… 권이도 씨가 지어 줬으면 좋겠는데.”
종이로 된 포장지 속엔 내가 직접 만든 향수가 들어 있었다. 아직 샘플이라 디자인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내용물은 완성된 상태였다. 내 페로몬을 딴 향수를 만들어 달라던,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만, 정작 내가 만들어 온 향기는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당신 페로몬을 따서 만든 거거든요.”
“…….”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권이도와 떨어져 있는 내내, 나는 그를 떠올릴 때마다 향수를 만들었다. 온갖 향료를 조합해서 최대한 그의 페로몬을 비슷하게 흉내 냈다.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에 한 번 혹은 온종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조향 작업을 했었다.
“미안하게도, 내가 내 페로몬을 잘 못 느껴서.”
권이도를 그리워한 흔적이었다. 은연중에 그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후각이 무뎌진 와중에도 그의 페로몬은 잊어버릴 수 없었다.
“…….”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고도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향수를 받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밀어 내지도 않았다. 역시 그의 요구와 다른 물건은 좀 그랬을까. 그런 생각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정세진 씨 꽤 잔인한 사람이네요.”
헛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느리게 들어 올린 시선엔 서서히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발간 입술을 달싹이며 나직이 내뱉는 한마디도.
“파혼한 약혼자한텐 정세진 씨 페로몬을 추억할 기회도 안 주는 겁니까?”
“……그게 무슨.”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자, 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하늘이 아니라 권이도의 눈에서. 예의 그 수려한 눈매가 다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세진아.”
그는 물기 어린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기다란 속눈썹에 그렁그렁 눈물방울이 맺혔다. 처연하게 떨리는 입술이, 안쓰러울 정도로 가여운 목소리를 냈다.
“아직도 네 방을 못 치웠어.”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보다 훨씬 서글퍼 보였다.
“네 물건들이…… 나한테 그대로 남아 있어.”
내가 뭘 얼마나 놓고 왔더라. 아마 거의 모든 걸 버리고 왔었지. 그가 알아서 처분하리라고 믿으며, 추억을 곱씹는 것마저 그의 역할로 남겨 놨었다.
“근데 이런 걸 또 주면 어떡해.”
아…… 뭘 오해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향수를 끝으로, 내가 정말 자신을 떠나는 줄 알았나 보다. 모든 궁금증을 해소하고, 약속까지 지켰으니. 이제 정말 우리 헤어지자고.
“……권이도 씨.”
아마 처음부터 선택권은 내게 있었겠지.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온전히 내 역할이었으니까.
“손 좀 줘볼래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권이도는 군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의 손을 감싸 쥐자, 저 또한 꼭 붙잡기도 했다. 나는 그대로 시선을 내리깐 채 조용히 이야기했다.
“좋아해요.”
그가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해지는 페로몬마저 뚝 끊겨 버렸다. 곧은 손가락을 살짝 그러쥐자, 그가 손끝을 움찔거렸다.
“……우리 연애할래요?”
이 말을 사실은 꽤 오래 곱씹었다. 미처 용기 내지 못했을 뿐. 속으로는 몇 번이나 상상해 봤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권이도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런 걸 수도 없이 그려 봤다는 말이다.
“결혼도 해봤고, 약혼도 해봤으니까…….”
“…….”
“연애를 하면, 좋을 것 같거든요.”
아마, 나는 절대 권이도를 잊을 수는 없을 거다. 그가 보여 준 다정함, 그에게 느꼈던 온기, 난생처음 품어 본 감정들은 분명 진짜였으니까. 그를 지우는 것도,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것도, 완전히 외면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
“내 페로몬을 닮은 향수 대신에…… 내 페로몬을 느끼게 해줄 수는 있는데.”
이런 말로 위로가 될까. 그런 고민은 잠시였다. 이것저것 재다가 그를 더 울리게 되면 죄책감이 들 것 같았다. 평생 울 걸 오늘 다 운 것 같은데, 이쯤 달래 줘도 되지 않나.
“아니면 권이도 씨가 만드는 걸 도와줘도…….”
하나 거기까지 말한 나는 미처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주 잡고 있던 손을 그가 억세게 붙잡은 것이다. 이건 무슨 반응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왜 또 울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권이도가 잔뜩 숨을 죽인 채 울고 있었다. 드러난 입술은 꾹 깨문 채로, 다른 손으로는 나를 간절히 부여잡으면서. 대답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또 울음을 참지 못해 굳게 다물길 반복한다.
“그만 울어요.”
레스토랑을 모두 비운 게 다행이지. 어색하게 건넨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가 더 고개를 숙이고 말았으니. 아마 흐느끼며 울지 않는 게 그로선 최선이 아니었을까.
“…….”
그는 오랜 시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얼굴을 가린 손을 떼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주 잡은 손을 놔주지도 않았다. 그저 간간이 서러운 숨을 내뱉으며 벅차오른 감정을 표현했을 뿐.
그러다 가까스로 열린 입술에서 우는 것과 다름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가 잘할게.”
이토록 상투적인 한마디에 이렇게 진심 어린 감정이 담길 줄 몰랐다. 전혀 낭만적이지 못한 대답이었으니, 그걸로 이미 충분했다. 그래서 그냥, 가늘게 웃음을 흘리며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래요. 믿을게.”
우리가 헤어졌던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시기. 먼 길을 돌아 다시 똑같은 계절을 맞이했다. 봄이 오기 전까진 시린 추위가 이어지겠지만, 이번 겨울은 그다지 외롭지 않겠지.
그렇게 다시 돌아온 계절에서, 우리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