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99)화 (99/131)

99화. Retour des Saisons(10)

나한테 바라는 게 없다더니. 그 말이 정말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그런 하루를 보내 놓고 지금까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그렇다면 그는 정말 3주간 나를 보기만 하려던 걸까. 그리 생각하자마자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곧 3주가 끝날 텐데.”

갑작스레 던져진 화두에도 권이도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을 뿐. 이 미팅이 시작되고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이후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늘, 권이도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는 아직도 내게 미련을 품은 채였고, 간혹 보여 주는 행동은 한결같이 다정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글쎄…… 사업을 하나 더 할까.”

돌아온 대답은 분명 장난이었다. 권이도 역시 픽 웃음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그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이야기했다.

“약속한 게 있으니까 그 이후엔 찾아오면 안 되겠죠.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이 사람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내가 울며불며 쏟아 낸 말들을 들어 놓고, 나와 그런 밤을 보낸 주제에 결국에 한다는 말이 이거였다. 걱정이라니. 설마 내가 날 계속 귀찮게 할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하나.

“……권이도 씨 속을 모르겠어요.”

숨결처럼 목소리가 나왔다. 그에 권이도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명치가 바짝 조여드는 기분이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미안하다고 말은 하면서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하고, 매일 회사로 찾아오긴 하는데 그렇다고 나한테 만나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

“이러면 뭐가 달라집니까?”

그는 내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한데 달싹이는 입술엔 망설임이 가득했으니.

“용서를…….”

겨우 흘러나온 한마디가 끊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잠깐 말을 멈춘 권이도가 시선을 뚝 떨어뜨렸다.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저 사실을 고하듯 담담했다.

“구할 자격이 안 되니까.”

그의 얼굴에 자조적인 빛이 떠올랐다. 제게는 애걸할 자격조차 없다던, 바로 그때처럼.

“그걸 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서.”

“…….”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게 뭘 원하는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다고. 정말 중요한 건, 내가 그에게 뭘 원하는지일 테니. 그가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제자리에 멈춘 것도, 결국엔 내게 선택권을 쥐여 주기 위해서일 거다.

“……저한테 어려운 걸 정하라고 하시네요.”

그러나 이 또한 용기가 필요한 문제였다. 먼저는 용서가 필요했다면, 이번엔 관계를 이어 갈 확신이 필요했다. 과연 우리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확신하고 도전할 용기.

“내가 권이도 씨를 용서 못 하겠다고 하면, 그걸 받아들일 자신은 있어요?”

나직이 건넨 질문에 권이도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해 왔다. 그의 입술이 열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만약 3주가 끝났으니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면, 그럼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자신은 있고?”

말을 잇다 보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정확히는 정체 모를 불쾌함이 미미하게 피어올랐다. 고작 석 달 만에 숨이 막힌다고 찾아왔으면서. 이 3주로 대체 뭘 바꿔 보겠다고.

“내 앞에서 영영 사라질 거 아니잖아요.”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나왔다. 그런 내게 권이도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네가 그걸 원하면.”

“…….”

“그렇게 해야지.”

왜, 그 말에 기분이 상했을까. 모든 걸 포기한단 사실에 실망스러웠던 건지, 아니면 벌써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구는 게 짜증 났던 건지. 그게 아니면 남몰래 기대해 버린 나 자신이 황당해서 그랬는지.

“……그래요, 그럼.”

갑갑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그 또한 알아차렸을 텐데, 그는 여전히 내 쪽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 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이쯤 하죠.”

* * *

억지로 미련을 접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내가 그를 포기했을 때, 그 안엔 내 삶도 함께 포함돼 있었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날 준비를 했기에, 미련 없이 모든 걸 체념할 수 있었다. 만약 일말의 미련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토록 쉽게 나 자신을 내던지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과연 권이도는 어떨까.

그는 내게 모든 밑바탕을 마련해 줬고, 마지막으로 내게 자유까지 안겨 줬다. 내가 박탈이라고 여겼던 이별은 이제 와 생각하면 그 무엇보다 훌륭한 자립이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내 존재의 가치를 타인에게 찾지도 않는다. 전부 그가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그 또한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는 걸까.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권이도와 약속한 3주는 눈 깜박할 새에 흘렀다. 우리는 평소처럼 같은 시간에 미팅을 가졌고, 커피 한 잔을 놓은 채 형식적인 일 얘기를 나눴다. 내가 먼저 사담을 꺼내지 않으니, 권이도 역시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이게 마지막 미팅이네요.’

마지막 회의가 끝나고, 내가 그에게 한 말이었다. 그가 기약한 3주는 딱 행사 날까지였기에, 회사에서 만나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그에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일은 행사장에서 뵙겠어요.’

권이도와 약속한 3주. 그게 끝나면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줘야 할 물건도 있었고, 전해야 할 감정들도 있었다. 물론 그 전에 그에게 많은 것들을 물어야 했지만.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말에 권이도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단 사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는 것도. 그러나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가 버렸다.

“저희 ‘Sejin’의 행사에 참여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렇게 오늘, 고대하던 선호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이 론칭됐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행사장에 도착해 직접 관계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밤새 권이도에게 할 말을 정리하느라 잠을 설쳤지만, 컨디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저는 ‘Sejin’의 대표인 정세진입니다.”

론칭과 함께 열린 자선 행사는 초대장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당연히 지난번과는 달리 기업인보다 일반인 방문객이 더 많았다. 사전에 빵빵하게 홍보한 덕분일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방문해 신제품과 관련된 감상을 들려줬다.

“이번 재단과의 콜라보 제품은 수익금 일부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기부되는 형태로…….”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바쁘게 내부를 돌아다니며 여러 일을 처리했다. 방문객에게 제품을 소개해 주고, 몇몇 협력 업체 직원들과 간단한 안부 인사도 나눴다. 그러면서 면밀히 주변을 살폈으나, 안타깝게도 내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세진 씨, 이번 론칭도 축하드려요.”

중간에 마주친 이희나는 내게 인사를 건네고 이태성을 향해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그에 이태성이 억지로 표정을 굳힌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일찍 퇴근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자, 입꼬리가 움찔거렸던 것도 알고 있었다.

“대표님, 고생하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기념식이 모두 끝날 즈음,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라앉은 상태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는데, 일이 끝났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미 겨울과 가까워진 만큼 하늘에 밤이 찾아오는 속도 역시 무척이나 빨랐다.

“그래도 이제 진짜 한숨 돌렸네요. 물론 행사 기간 끝날 때까진 바쁘겠지만…….”

직원들은 저마다 시원섭섭한 얼굴로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준비는 길었는데 결과는 참 한순간이라느니. 3주가 이렇게 짧을 줄 몰랐다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들려왔다.

“대표님?”

“……아.”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나는 애써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자, 미리 챙겨 두었던 상자가 만져졌다.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내일은 천천히 출근해도 됩니다.”

원래라면 회식을 했겠지만, 여러 연유로 재단과의 협업이 모두 끝난 뒤에 하기로 했다. 바로 전 주에 회식을 한 데다, 기념식이 끝났다고 판매가 끝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며칠은 좀 긴장하고 있다가 또 모든 게 마무리되면 다시금 맛있는 걸 먹기로 약속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직원들을 모두 배웅하고 김 실장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네모난 상자를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행사 내내 울리지 않았던 핸드폰을 꾹 움켜쥔 채.

“집으로 모실까요?”

김 실장이 그렇게 물었을 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울컥 짜증이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이, 다 끝나 가는 하루가, 그리고 여전히 담담한 감정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뇨.”

권이도가 오지 않았다.

행사는 이미 끝났는데, 정작 권이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가 말한 3주는 분명 오늘까지고, 오늘이 지나면 그는 나를 찾아오지 않을 텐데.

왜 자꾸 제멋대로 군단 말인가. 여태 담당자라는 이름으로 잘만 나타나던 주제에 정작 중요한 날에는 코빼기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말부터 꺼내면 좋을지 정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시작조차 못 하게 되길 바라진 않았다.

‘내 앞에서 영영 사라질 거 아니잖아요.’

어쩌면 또 홀로 마지막을 기약한 건지도 몰랐다. 내게 약혼의 종결을 알렸던 그때처럼. 나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저 홀로 결론을 내려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기로. 내가, 그를 귀찮아하지 않도록.

“집 말고 다른 데로 가주세요.”

권이도를 만나야겠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3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이건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갈 곳을 잃고 말았다.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으니까.

“…….”

“…….”

눈이 마주쳤다. 주차장 한가운데서. 아니, 내가 타야 하는 내 차 앞에서. 무릎까지 오는 모직 코트를 입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한 사람과. 멀리서 보기에도 훤칠한 키에, 빚어 놓은 것처럼 완벽한 생김새의 남자와.

“……권이도?”

권이도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찬 바람이 부는 계절과 썩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땅거미가 지는 하늘 아래, 그 모습이 지나치게 현실감 없을 정도로.

내가 헛것을 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분명 현실이었다.

“행사 끝났나 보네요.”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가 아무 말 못 하고 있자, 뒤이어 작은 사과가 흘러나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아.”

나를 포기한 게 아니었구나. 그 사실엔 안도감이 들었다. 홀로 3주를 끝내고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그러한 사실에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마 우는 것도 습관이 되는 모양이지.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눈치 빠른 김 실장이 슬쩍 거리를 넓혔다. 딱 세 걸음 정도를 남겨 둔 거리. 그곳에서 나는 권이도에게 이야기했다.

“……벌써 두 번이에요. 권이도 씨가 내 론칭 행사에 안 온 거.”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두 번부터는 실수가 아니라고. 바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잠깐을 내어 줄 수 없었던 걸까. 사고가 난 날에도 회사에 찾아왔으면서, 왜 이런 공적인 행사는 꼭 빠지고 마는 건지.

“바쁘다는 핑계 대지 말고 변명이라도 해봐요.”

이런 서운함을 내비치려던 게 아닌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권이도의 기분이 지나치게 잠잠해서,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헛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권이도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볼 자신이 없어서.”

“뭐를?”

“세진이 너를.”

그는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나를? 그렇게 물을 필요는 없었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가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줬으니까.

“이제 정말…… 내가 필요 없어진 널 볼 수가 없어서.”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은 몇 번을 느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못 갔습니다, 그날.”

첫 론칭 행사가 있던 날, 권이도는 나를 위해 장미를 샀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행사장에 오지 않았고, 끝내 장미도 받지 못했다. 그날의 권이도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제 손으로 만들어 준 자유를, 두 눈으로 보기 힘들다고.

“……그럼 오늘은요?”

느리게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날은 그렇다고 쳐도, 오늘은 왜 오지 않았는지. 일이 생겨서 늦었다고 말했지만, 권이도 역시 그게 설득력 있는 변명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오늘은…….”

권이도는 앞서 대답했던 것보다 더 망설이는 듯했다. 표정이 워낙 차분해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는지, 그가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미련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

그게 무슨 미련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준비하고 있었던 건, 처음부터 딱 하나였으니까. 아무 기대 없는 표정으로 눈을 맞추고 있는 지금까지 말이다.

“……그래서 미련은 다 버렸어요?”

주머니 속에서 네모난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고, 요 며칠 사이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으니.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대답은, 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거의.”

“…….”

멍하니 권이도를 바라봤다. 전해져 오는 감정은 무척이나 담담했고, 그건 뒤이은 한마디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다 버렸어.”

방금까지 하던 생각이 하나도 빠짐없이 휘발됐다. 그를 보는 시선이 크게 흔들리고, 상자를 만지던 손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나오려던 말들이 죄 목구멍 너머로 사라지는 바람에, 말없이 입술을 달싹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거의라고 한 건가, 지금. 고작 3주 만에 나를 향한 미련을 거의 버렸다고. 이토록 차분한 감정으로, 이토록 평온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하.”

텅 비었던 머릿속이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억울함과 허무함, 배신감, 그리고 그에 대한 실망과 민망함 같은 것들.

“다행이네요. 거의 다 버려서.”

나는 그에게 할 말을 준비했는데, 그는 나와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코가 시릴 만큼 추운 계절을 앞둔 시기. 그와 이별해야 했던 과거의 계절에서, 또다시 나를 놓아주겠다고 말이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대체 뭘 기대한 걸까.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절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건만. 권이도는 이미 나를 포기했는데, 나는 그를 붙잡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잘 가요.”

“…….”

“이제 다신 볼 일 없겠죠.”

그렇게 말하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그를 지나쳐 영영 그와 헤어질 생각이었다. 그에게 주기 위해 챙겨 온 물건은, 그냥 대충 버리든가 하고. 미처 버리지 못한 감정은 시간이 지워 주길 바라면서.

“…….”

그러나 나는 권이도를 지나치지 못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허공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무표정한 얼굴에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

“…….”

시간이 멈춘 기분이었다. 비도 오지 않는 맑은 하늘 아래, 오로지 그의 눈에서만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의 뺨을 타고 힘없이 흐른 눈물은 이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아.”

뒤늦게 권이도의 입술이 달싹였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이미 눈물에 푹 젖은 상태였다. 한 번, 두 번, 눈을 깜박인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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