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98)화 (98/131)

98화. Retour des Saisons(9)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감정만큼 부패하기 쉬운 게 또 있을까. 덮어 두고 무시했던 감정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곪아 가고 있던 모양이다. 뒤늦게 존재를 깨닫고 들춰 낸 순간, 나조차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버린 걸 보면.

권이도에게 울분을 쏟아 낸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권이도는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침실엔 여전히 페로몬이 가득했고 피부와 옷가지는 보송보송하니 말끔했다.

‘더 자지, 왜.’

그는 부어올랐을 게 분명한 눈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비서를 시켜서 옷을 가져온 걸까. 원래 입었던 것과 다른 정장을 입은 상태였다. 하기야, 전날 입고 있던 옷은 바닥에서 엉망으로 구겨져 입을 상태가 아니긴 했다.

‘드레스룸에서 옷 좀 꺼내 입혔어요. 벗고 자기엔 추울 것 같아서.’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는 당신은 안 잔 거냐고, 그리 묻지도 못했다. 무어라 말을 꺼냈다간, 금방이라도 지금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마치 그와 약혼했던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우리가 평화롭게 마음을 나눴던 그때로. 물론 그 당시 권이도의 심정이 어땠을지, 거기까진 알지 못했지만.

그 후 권이도가 뭐라고 했는지, 거기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바빠서 가봐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그리 이야기할 땐 이미 수마에 빠져드는 중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권이도는 없었고, 나는 억제제 한 알을 먹고 그럭저럭 버틸 만한 히트 사이클을 보냈다.

사실, 다행이었다. 정신이 드는 순간 권이도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머쓱해졌으니까. 술김에 내뱉은 말들이 민망한 한편, 그럼에도 아직 그와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못했단 사실이 갑갑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과거의 감정을 청산하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는 알지 못했다. 권이도를 대체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감정의 물꼬를 튼 뒤에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실패를 경험했기에 섣불리 무엇 하나 선택할 수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간밤 잠을 설친 김에 만들던 향수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늘 일찍부터 대기하는 이태성이 나를 회사에 데려다줬고, 김 실장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출근했다.

딱 마지막 확인만 남아서일까, 작업은 생각보다 이르게 마무리됐다. 완성된 샘플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올 즈음엔 어느새 출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하나둘 출근하는 직원들은 금요일 밤 회식이 끝나고 귀가하던 때와는 달리 표정들이 영 좋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어요?”

“회사는 안 싫은데 출근이 싫어요…….”

소위 ‘월요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직원 하나가 한 말에 너도 나도 공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회사가 싫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결국 출근은 싫으니 그게 그거인지. 푸스스 웃음을 흘리는 와중에 다른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은 금요일에 잘 들어가셨어요?”

“네, 뭐…….”

나도 모르게 멋쩍은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들고 있던 향수는 슬쩍 몸 뒤로 숨겼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고, 문득 회식 자리에서 권이도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깨에 기대어 있는다거나 혹은 손을 잡는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러고 보니까 전무님한테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오늘도 오시지 않을까요? 대표님, 권 전무님 오신대요?”

다행히 직원들은 나와 권이도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해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딱 한 명, 내 옆자리에 앉았던 대리만이 유독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나는 애매한 대답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상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굳이 오늘까지 미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권이도라면 마지막 점검을 핑계로 찾아오지 않을까. 나와 그런 하루를 보냈으니, 그 또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고.

“이따 오시게 되면 제가 말씀드리죠, 뭐.”

아마 높은 확률로 늘 오던 시간에 올 거라고 생각했다. 회식과 관련된 이야기도 그때 전하면 될 듯했다. 직원들이 좋아했고, 다음엔 내 쪽에서 대접하겠다고. 우선은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해봐야지.

나는 직원들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대표실로 들어왔다. 오전에 있는 회의를 제외하면 권이도가 오기까지 별다른 업무는 없었다. 이틀 만에 보는 권이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또 속이 갑갑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평소라면 권이도가 도착했을 시간. 그 시간이 훌쩍 넘어서까지 그는 회사로 찾아오지 않았다.

* * *

“…….”

째깍째깍,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벽면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향수병을 톡톡 두드렸다. 읽고 있던 서류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고, 왠지 모를 초조함에 기분은 점점 하향세를 그렸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어느덧 권이도가 올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원래라면 이쯤 명분뿐인 미팅을 끝냈을 텐데, 오늘은 아직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매일 올 필요는 없지만, 앞서 3주 동안은 빼먹지 않고 들르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

먼저 연락해 볼까. 그런 생각으로 핸드폰을 들었다가 책상 위에 툭 내려 뒀다. 이기적인 생각임을 알면서도 주말 내내 연락 하나 없었단 사실이 못마땅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더니. 하루아침에 태도가 너무 달라지지 않았는가.

“대체 뭘 하길래…….”

이럴 땐 각인이 하등 쓸모가 없었다. 기분이나 감정만 알지 말고, 어디서 뭘 하는지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그럼 이렇게 목이 빠져라 그를 기다릴 일도…….

“…….”

퍼뜩, 정신을 차렸다. 기다리다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만지작거리던 향수를 놓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원래는 번거롭다고 생각하던 주제에 이제는 더 나아가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고 있었다.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도 정하지 못했으면서 무작정 시계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쩌냔 말이다.

“하아.”

이래서 싫었다. 일상이 어그러지는 기분이라.

일에 방해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소하게 마음이 들썩이는 정도임은 분명했다. 간신이 유지하던 평온함이 권이도가 끼어듦으로써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평온함을 안겨 준 게 결국엔 권이도였지만 말이다.

나는 권이도와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정작 그를 마주하면 밀어 내기 바쁜 주제에, 고민하고 있단 사실부터 모순이었다. 실수로 가득했던 기억들은 분명 괴로운데, 그럼에도 이따금 과거로 돌아가고 싶단 바람이 생겼다.

어쩌면, 그를 완전히 지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에는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물론 누군가 돌아가겠냐고 물으면, 선뜻 긍정의 대답을 내놓진 못하겠지만.

지잉, 지잉.

“…….”

한창 잡념에 잠겨 있던 와중에 윙윙거리는 진동이 나를 방해했다. 하필 핸드폰을 책상에 엎어뜨려 놨던 터라 그 소리가 요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들었다가,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권이도」

“…….”

순간, 핸드폰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머리털이 삐쭉삐쭉 서는 기분이라 전화를 받는 것도 한참이 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대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전화 너머에선 약간의 웅성거림만 들려왔다. 누군가 이야기하는 소리, 달칵거리는 잡음, 도로에서 들리는 마찰음과 그 끝에 들린 익숙한 음성까지.

-아, 정세진 씨.

“…….”

그저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옥죄였다. 덕지덕지 묻었던 찝찝함이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그를 향한 불만은 눈 녹듯 녹아내리고, 대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좀 늦을 것 같아서 연락했습니다.

“……아.”

안 오는 게 아니었구나.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가 날 포기하지 않았단 사실에 안심이 되는 한편, 소소한 심술도 함께 따라왔다.

“……얼마나 늦으세요?”

연락을 좀 더 일찍 했어야지. 이미 한참 늦고 나서 하면 어쩌라고. 내가 오후에 일정이 있으면, 그럼 우리는 미팅을 할 수 없을 텐데.

-글쎄…… 그게 좀 애매한데.

권이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많이 바쁜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이어진 뒷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차 사고가 나서.

“…….”

사고라니.

“……사고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방금 들은 한마디가 심장을 쿵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고가 나서 늦었다는 건가.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 시간이 되도록 발이 묶였단 말인가.

“어…… 어떤, 얼마나…… 아니, 다치셨어요?”

손끝이 차갑게 식는 바람에 핸드폰을 반대쪽으로 바꿔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이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대답하기까지 고작 3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거리는 내게, 한 타이밍 늦게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세진아.

그 한마디가 왜 그리 달큼했는지 모르겠다. 전화 너머인데도 불구하고 권이도의 페로몬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봄날의 바람처럼 따사롭게 날 부른 권이도가 사근사근 부드럽게 덧붙였다.

-괜찮으니까 진정해.

“…….”

그제야, 뒤늦게 숨이 쉬어졌다. 맥이 탁 풀리는 바람에 하릴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심장은 아직도 벌렁거렸지만, 다정한 음성이 그런 나를 상냥히 달래 줬다.

-가벼운 접촉 사고예요. 처리할 게 있어서 좀 걸리는 거고.

만약 권이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느꼈을 거다. 우리는 각인했고, 언제나 서로에게 연결돼 있으니까. 바로 지금, 그가 내 불안을 느끼고 나를 안정시킨 것처럼.

-다치진 않았는데 병원은 다녀올 생각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 거예요.

내가 느꼈던 불안감만큼, 권이도가 나를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본인이 사고가 났을 땐 동요조차 없더니 이제 와 제법 새삼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닌가.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날 걱정할 걸 떠올리면 목구멍이 확 조여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안 다치셨으면 다행입니다.”

나는 열리지 않는 입을 열어 간신히 대답했다. 직접 전화를 걸 정도니까 당연히 큰 사고는 아니겠지. 그런데 그 당연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크게 놀라고 말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앞이 캄캄하게 변할 정도로.

-그럼 우선 끊을 테니까…….

권이도는 이따 보자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뚝, 전화가 끊겼음에도 나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침착함을 되찾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참았던 숨을 토해 냈을 땐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하…….”

모든 걸 체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웬만한 일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이리도 놀라 버린 걸 보면. 쿵쿵거리는 심장이나 아득한 기분이 딱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켰다.

“……권이도.”

권이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고작 접촉 사고 소식 따위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감히 그를 지우려고 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나는 끝내 권이도에게 흔들리는 중이었다.

* * *

언제부터였을까.

사실 돌이켜 보면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증거였다. 그를 집으로 데려간 것부터, 아니 그 이전에 미팅을 수락한 것부터. 그가 제안한 사업의 의도를 가늠하고 미팅에 나온 권이도를 보며 불편함을 느꼈던 것부터.

사그라진 줄 알았던 원망의 불씨가 피어났을 때, 모든 걸 태우고 남은 게 그를 향한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머리로는 그를 밀어 내야 한다고 끝없이 되뇌면서 가슴으로는 그를 밀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과정이 실수로 점철돼 있다고 한들 그 마음까지 실수는 아니었으니까. 어딘가에 속하고 싶단 바람을 포기하더라도, 그에게 느꼈던 감정들이 단순히 그러한 갈망에 불과하진 않았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권이도는 오후가 되어서야 ‘Sejin’을 찾아왔다. 나는 점심 내내 그를 생각하다가 정작 얼굴을 봤을 땐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얼굴을 보자마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막상 입을 열었을 땐 사무적인 이야기들만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뭘 느꼈는지, 권이도 역시 별다른 사담은 없었다. 지난밤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내가 그를 걱정했단 사실을 확인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한 타이밍 늦게 시선을 돌렸을 뿐.

“그리고 자선 행사는…….”

각인이 참 별거 없지.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그가 긴장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왜 긴장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을 추슬렀는지 모르고 있을 거다.

감정은 자각과 동시에 부풀기도 하지만, 어떨 땐 오히려 편안해지기도 한다. 원인 모를 감정보단 이름을 아는 감정이 낫기에, 쓸데없는 고민을 해소하는 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바로 지금, 내가 그에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놀라우리만치 차분해진 것처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먼저 미팅을 끝낸 사람은 권이도였다. 권이도는 추후 일정을 확인한 뒤 서류를 챙겨 가지런히 내려놨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기에, 애초에 그와 회의할 내용도 몇 개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그제야 넌지시 안부를 물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교통사고는 후유증을 가장 조심해야 하니까. 문제가 있다면 입원을 했겠지만 왠지 권이도라면 입원하지 않고 회사로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별 이상은 없다더군요. 애초에 정차된 차를 뒤에서 경차가 박은 거라 내 차는 멀쩡하기도 했고.”

“상대방 과실이에요?”

이번엔 조금 더 아연한 느낌으로 묻고 말았다. 권이도의 차를 뒤에서 박았다니. 수리비만 최소 수천만 원이 나올 텐데. 웬만한 사람 같으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긴 한데…….”

권이도는 별반 대수롭지 않은 투로 운을 뗐다.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운전자가 초보인 데다, 아이가 아파서 급히 병원에 가다가 그랬다더군요. 수리비는 안 받았고, 병원에 좀 데려다주느라 늦었어요.”

아이가 아팠다고 말할 때, 그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은 모를 변화였으나, 나는 그게 권이도가 곤란할 때마다 나오는 표정임을 알았다. 모르긴 몰라도 아픈 아이가 그 또한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사고가 난 건 안타깝지만 다친 사람이 없는 건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후처리는 선호에서 할 거고, 권이도가 차 수리비 하나 없는 사람도 아니니까.

그런데 내 대답을 듣고 권이도는 눈을 내리깔며 느릿느릿 물었다.

“내가 안 다친 게, 아니면 그쪽이 수리비를 안 물어 줘도 되는 게?”

“…….”

선뜻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었다. 내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을 다물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금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이야기했다.

“농담이에요.”

익숙한 눈빛이었다. 입꼬리는 말려 올라가 있는데 반대로 눈동자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게 체념이라는 사실을,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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