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93)화 (93/131)

93화. Retour des Saisons(4)

보통 유예 기간을 둘 땐, 그 기간이 끝난 뒤에 준비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내가 그에게 향수를 만들어 주고 모든 걸 물어보기로 결심했을 때처럼. 혹은 그가 내게 선물을 주기 위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줬던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권이도가 내건 3주는 단순히 프로젝트의 종결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대충 막 던진 기간도 아닐 거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도 아니었겠지. 내가 넘겨짚는 걸 수도 있지만, 그건 권이도의 방식과는 달랐다.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세진아.’

그렇다면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안에 나를 잊을 자신이 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 이후에 또 다른 핑계를 대며 만남을 이어 가려는 걸까. 둘 다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단순히 내 기분상의 문제인 걸까.

“……권이도 씨가 또 오신다고요?”

마주칠 일이 적을 거란 예상과 달리 권이도는 다음 날이 되자마자 김 실장을 통해 회사에 찾아오겠다고 연락했다. 구실은 ‘진행 상황 점검’이었고, 당연히 그를 독대할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오전 내내 그를 기다리다가, 또 한 번 무수히 많은 시선을 받으며 응접실로 향해야 했다.

“대표님 차도 준비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다른 일 보고 계세요.”

그렇게 들어선 응접실 안에는 오늘도 향긋한 원두 냄새가 풍겼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도 함께였다. 권이도는 나와 각인했으니, 이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건 이제 오로지 나뿐일 거다.

“전무님.”

내가 그를 부르자, 권이도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기다랗고 곧은 손가락은 가만가만 찻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바짝 굳어 있던 그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빨리 왔네요.”

빨리 오긴 무슨. 그를 기다리게 만든 것부터 마이너스건만. 도리대로라면 내가 직접 버선발로 마중을 나가야 했다. 어제도 본 얼굴이 뭐 그리 반갑다고 저리도 달큼한 미소를 짓는지 모르겠다.

“우선 앉아서 얘기하죠.”

“…….”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하려고 해도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를 재고 가늠해서, 의도를 캐낼 생각에 절로 긴장이 됐다.

“중간 점검을…… 하러 오셨다고요.”

고작 하루 만에.

그 뒷말은 간신히 꿀꺽 삼켰다. 암만 그래도 하면 안 되는 말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어쨌든 권이도는 갑이었으니, 투정을 부리듯 비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드백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내가 말한 자료는 가지고 왔어요?”

순순히 들고 있던 서류들을 내밀었다. 어제 회의 후에 컨펌을 받기 위해 준비해 놓은 기획서들이었다. 오늘쯤 메일을 보내서 선호 측으로부터 최종적인 결재를 받을 예정이었다.

“아이디어는 괜찮은데 좀 심심한 부분들이 있네요. 혹시 예산이 부족합니까?”

“아뇨, 예산은 충분한데 시간이 부족합니다. 우선 기본적인 틀만 잡아 놓고 추가적으로 살을 붙일 예정이었습니다.”

또 말로 설명해 달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권이도는 진지한 눈으로 서류를 훑어봤다. 그때처럼 장난을 걸 생각은 없는지, 몇몇 부분을 짚어서 착실히 피드백도 덧붙였다. 나는 긴장감을 좀 누그러뜨리며 그가 말한 부분을 볼펜으로 표시했다.

“패키지 디자인은 크게 안 바꿔도 됩니다. 번거롭게 만들 생각은 아니니까, 광고 쪽에 좀 더 치중하죠. 여기랑 여기는 쳐내고, 콜라보 제품에만 마킹 하나 더 해요.”

“그 디자인 말인데, 디자인팀 의견으로는 보틀이 들어가는 세트에 변화를 주는 쪽이 나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홍보팀이…….”

‘Sejin’의 보틀 디자인은 갓 돋아난 꽃봉오리처럼 곡선으로 되어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 컬렉션에서는 여기에 금색 각인과 리본을 추가해 연말 분위기를 낼 예정이었다. 선호재단과 콜라보하게 될 제품은 그쪽에서 만든 씰을 하나 추가해 차별성을 주면 될 듯했다.

“광고는 유일기업 측에 맡기면 됩니다. 비용적인 측면은 선호가 알아서 할 거예요.”

유일기업이라면 선호의 계열사 중 하나인 종합 광고기획사였다. 선호재단과 관련된 일이니 이상할 건 없다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쪽에서 할 일은 확 줄어드는 셈이다.

“……향수 시향해 보시겠어요?”

이건 너무 날로 먹는 기분인데. 그런 생각으로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가 온다는 말에 괜히 껄끄러워하지 말 걸 그랬다.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도 않았고, 그는 정말 열심히 일만 했으니까.

“아뇨, 시향은 나중에 하죠.”

모든 미팅이 끝나고, 권이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유로운 행동이었으나,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핸드폰에 부재중 기록이 잔뜩 찍혀 있을 거다.

“자료는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 놔요.”

권이도는 서류 위에 가지런히 제 명함을 내려놨다.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따위가 적혀 있었는데, 번호가 내가 알던 것과 달랐다.

“연락은 이거 말고 정세진 씨가 알고 있는 번호로 하는 게 빠를 겁니다. 그쪽이 개인 연락처라.”

“…….”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핸드폰이 두 개였지. 내 전화를 받을 때와 업무 연락을 받을 때의 핸드폰 기종이 서로 달랐던 기억이 있다.

“……이번 프로젝트 담당자가 따로 없습니까?”

설마, 메일을 권이도에게 직접 보내야 하나. 그런 생각으로 물었는데 권이도는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느릿느릿 이야기한 것이다.

“담당자가 없냐니……. 내가 여기 있는데.”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고작 그거뿐이었는데, 가슴께가 덜컹 흔들리는 듯했다. 권이도는 퍽 다정한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번 프로젝트 담당이거든요.”

“…….”

세상 어떤 전무가 이런 소일거리를 하십니까. 적당히 팀장급에게 돌리고 미팅은 주에 두 번 정도면 적당한걸.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그는 선호재단과는 연관도 없을 텐데.

“……내일도 오실 겁니까?”

설마 싶어 물었는데,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픽 웃음을 흘리며 내게서 시선을 떼어 냈을 뿐. 또 한 번 시간을 확인한 권이도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다음에 시향하러 오죠.”

* * *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자료를 주고받을 수 있는 21세기에 대면 미팅을 선호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피차 바쁜 입장에, 한쪽은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는 대기업 전무라면.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런 미친 워커홀릭이 바로 권이도였다. 그날 이후, 권이도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Sejin’에 출석 도장을 찍었으니까. 향수를 시향하러 오겠다는 말이 설마 긍정을 뜻하는 말이었을까. 그는 늘 같은 시간에 회사를 찾아와 프로젝트를 점검했다.

‘……또 오셨습니까?’

나는 직원들을 대표해 항상 그를 맞이하러 응접실로 가야 했다. 그사이 장소는 회의실로 바뀌었고, 권이도에게 대접하기 위한 차 종류도 늘어났다. 차라리 시간 낭비였다면 이러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볼 텐데, 그가 한 번 다녀가면 프로젝트의 진척도가 달라졌다.

‘바쁘지 않으세요?’

‘이 정도 시간은 있습니다.’

그 정도 시간이 없다는 건, 시계를 확인하는 눈빛만 봐도 알았다. 나야 끽해야 20분 정도만 투자하면 되지만, 오고 가는 거리를 따지면 권이도는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이다. 그의 5분에는 수억의 가치가 있다는데, 그는 매일 수십억을 내다 버리는 셈이었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권이도와 마주한 채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적당히 산미가 도는 커피 두 잔과 하얀 생크림으로 뒤덮인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의 비서가 인원수에 맞춰 사 오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하나뿐이었다.

‘대표님은 무슨 케이크 좋아하세요?’

며칠 전 권이도가 찾아올 즈음, 나는 직원들과 소소한 잡담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 보면 단 게 당긴다는 말부터 시작된 화제였는데, 하필 그가 들어온 시점이 내가 대답할 즈음이었다.

‘전 굳이 따지면 생크림 케이크가 제일 좋더라고요. 우유로 만든 거.’

그때 권이도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무심코 지나간 한마디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그 말을 한 바로 다음 날부터 그의 비서가 명성호텔에서 직접 만든 케이크를 종류별로, 인원수에 맞춰 배달한 것이다.

‘세상에, 잘 먹겠습니다. 전무님!’

‘감사합니다!’

‘역시 얼굴처럼 마음씨도 훌륭한 분!’

직원들은 뭐…… 좋아했다. 처음엔 권이도에게 낯을 가리더니, 몇 번 보고 나서 경계심을 허문 모양이었다. 정작 권이도와는 한마디도 안 해본 주제에, 나를 대하는 모습만 보고 ‘착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 게 분명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주위에서 보는 우리의 관계였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줄 알았던 직원들은 권이도가 돌아간 뒤 슬쩍 내게 다가와 요구했다. 권이도의 비서가 왜 케이크를 사 왔는지, 충분히 눈치챈 듯한 말들이었다.

‘대표님, 다음엔 마카롱 먹고 싶다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전 쿠키 종류도 좋아요.’

‘물론 케이크도 좋고…….’

장난에 가까운 요구였으나, 직원들도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한마디만 더 하면 다음 날 사 올 간식의 종류가 바뀌리라는 것을.

이렇게 알기 쉬운 사람인 줄 몰랐다니까. 내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면서, 마치 나를 꼬시려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직원들이 탄생시킨 로맨스에 점점 살을 붙이는 격이었다. 오해받기 싫으면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무어라 설명해 주자니 영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말씀드릴 이슈는 이 정도입니다. 나머지는 거의 완성 단계라, 마지막 컨펌만 받으면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자 권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이언트가 까다롭게 굴지 않으니 프로젝트는 막힘없이 척척 진행됐다. 처음엔 시간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남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일을 잘하는군요.”

“……직원들이 능력이 좋아서요.”

사실 권이도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사람이 모든 일을 잘할 수는 없건만, 권이도는 모든 일을 잘했다. 이런 기획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음에도 막힘없이 척척 조언을 던져 줬다.

“이런 건 보통 리더가 잘해야죠.”

권이도는 한 번 더 들고 있던 서류를 훑어봤다. 그의 앞에는 시향지 몇 개와 패키지 샘플로 나온 보틀도 놓여 있었다. 뚜껑 끄트머리에 달린 유리로 된 꽃잎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생크림 케이크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예?”

대뜸 던져진 말에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그는 내 쪽을 보는 대신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은 새하얀 우유 생크림 케이크였다.

“그거, 며칠 내내 손을 안 대길래.”

그걸 보고 있었구나. 그러는 그쪽도 간식거리엔 손조차 안 대면서 말이다. 김 실장이 꼬박꼬박 차와 케이크를 내오지만, 미팅이 끝날 때까지 누구 하나 먹는 사람은 없었다.

“입에 안 맞으면 얘기해요. 다른 거로 사 올 테니까.”

“…….”

왜, 나 때문에 사 오는 거라고 아예 광고를 하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속이 잔뜩 복잡했다. 그의 앞에서 무언가 먹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가 선물한 음식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장식품처럼 놓아두고 말았지만.

“……권이도 씨.”

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눈을 마주칠 때면 그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근거리는 설렘이나 명치가 조여드는 듯한 긴장감, 그리고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리는 가벼운 통증까지.

“이제 그만 찾아오셨으면 합니다.”

“…….”

툭, 내뱉은 말에 그가 표정을 굳혔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짙게 물드는 그의 시선이 평소와는 사뭇 달랐으니까.

“어떤 담당자가 매일 중간 점검을 하러 옵니까.”

“…….”

“그것도 권이도 씨 정도 되는 사람이.”

진작부터 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야멸차다는 걸 알지만, 적당히 선을 그을 시점이었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행동에 여러 책임감을 느꼈으니까.

“전무님이 오시니까 저희 쪽에서도 제가 직접 나와야 하잖아요.”

권이도도 알 것이다. 이게 얼마나 일방적인 만남인지. 구실은 미팅이었으나, 상대가 내가 아니면 성사되지 못할 일정이었다. 무리하게 강행하는 스케줄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을 테고.

“디저트도 사 오지 마시고요.”

고맙다는 말은 덧붙일걸. 말을 꺼내 놓고 후회했다. 그의 성의를 짓밟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최대한 간결하게 말한다는 게 이런 식으로 굴고 말았다.

“……아직 기획이.”

“거의 마무리 단계인걸요.”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했다. 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니, 더 늦기 전에 그를 말릴 타이밍이었다. 모진 대처일지언정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듯했다.

“이러시는 거 부담스럽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보답도 해줄 수 없었다. 간신히 되찾은 평온함에 균열이 생기는 것도 싫었고, 그렇다고 권이도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영부영 일상에 스며들기엔 우리는 너무 가혹한 이별을 하지 않았던가.

“…….”

권이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올곧게 나를 향하는 눈빛에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배 속이 뒤틀릴 만큼 소란스러운 감정과 달리, 겉으로 보이는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처음에 3주를 약속했죠.”

겨우, 흘러나온 말이 그거였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 언저리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내 기분일까, 아니면 권이도의 기분일까. 느리게 눈을 내리깐 그가 나직이 이야기했다.

“아직 시간이 남은 걸로 압니다.”

“…….”

약속이라면 진작 많은 것들이 깨지지 않았던가. 내가 향수를 선물해 주기로 했던 것도,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고.

“부담을 주려던 건 아닙니다. 정세진 씨가 불편하다면 찾아오는 횟수도 줄이도록 하죠.”

권이도는 금세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그와 각인하고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정말 표정 관리에 능했다. 아마 예전 같았다면 아무런 상처도 안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디저트도…… 그래, 안 사 올 테니까.”

“…….”

“그만 오라는 말만 하지 마.”

내가, 그를 끊어 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이거였다. 권이도를 눈앞에 두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서. 처연하게 내리깔린 두 눈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바람에. 은연중에 그를 기다리다가, 그가 떠나간 뒤에 아쉬운 기분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으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은 그에게 받은 상처가 덜 나았던 모양이다. 그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내가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다가도, 다 잊은 줄 알았던 부분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일 얘기는 아니고…… 사적인 거거든요.”

그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봤다. 당연히 물어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대답은 한참이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피한 그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사적인 건 따로 약속을 잡고 물어봐야 되는데요.”

지금…… 나한테 심술을 부리는 건가. 조금 전까지 한껏 심각했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게 황당한 웃음이 나오려 했다. 나는 어이없는 기분을 내리누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안 물어보지, 뭐.”

“…….”

그가 눈가를 움찔했다. 다시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후회가 막심했다. 그러니까 왜, 이기지도 못할 오기를 부릴까. 낭비할 시간이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이면서.

“물어봐도 됩니까?”

“……얘기해요.”

나지막이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티 나지 않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질문을 건네기 위해선 나 또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전에 나한테 각인했을 때…….”

우리가 다시 만나기 전에, 그는 일방적으로 내게 각인했다.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감각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건넬 수 있는 질문도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한 와중에도, 이따금 떠올랐던 의문 하나.

“왜 날 방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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