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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92)화 (92/131)

92화. Retour des Saisons(3)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김 실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가 찾아왔다니. 그 사람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애써 의식적으로 외면한 탓에 어느 순간부터 권이도의 감정이 달라졌단 사실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아까 권이도 보셨어요?”

“와, 말도 마. 진짜 잘생겼더라. 웬만한 연예인보다 낫지 않아?”

“나은 수준이 아니라 당장 영화 찍어도 되겠던데요? 분위기가 무슨…….”

그새 소식이 퍼진 건지,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 직원은 고개를 쭉 내민 채 응접실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해서 불투명한 문이 뚫리지 않을 텐데,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근데 트렌치코트가 원래 그런 핏이었나……? 면세점에서 비슷한 거 입었을 때 난 그냥 바바리맨이던데.”

“아, 팀장님. 저희랑은 기럭지가 다르잖아요.”

“키 몇일까? 190 넘는 것 같지?”

응접실 문을 열기 전,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해 직원들에게 눈치를 줬다. 대부분 칭찬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나, 어쨌든 투자자를 앞에 놓고 숙덕거리는 건 안 될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직원들은 금세 조용해졌고, 미어캣처럼 내밀고 있던 고개도 쑥 들어갔다. 물론 그럼에도 흘긋흘긋 이쪽을 쳐다보긴 했지만 말이다.

“…….”

후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는 순간이 왜 그리 긴장됐는지 모르겠다. 달칵, 문고리가 내려가고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은 권이도가 보였다.

“……전무님.”

내 부름에 권이도가 나를 바라봤다. 그냥 아무렇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쓸데없이, 그 두근거림이 생생히 전해졌다. 평소와 달리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 응접실 문을 닫았다. 김 실장은 밖에서 대기했기에 좁은 방에는 오로지 권이도와 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직원이 커피를 내어 왔는지, 내부엔 향긋한 원두 냄새가 가득 퍼져 있었다.

“…….”

“…….”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두 번째, 권이도와 마주하는 것이었다. 지난번엔 석 달 만이었으나 이번엔 고작 며칠 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번보다는 나았으나, 역시나 당황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최대한 담담한 척 물었는데, 권이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제 발로 찾아온 주제에 망설임이 길었다. 그가 왜 입을 열지 못하는지, 그런 건 지금 느껴지는 기분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권이도는 내게서 시선을 떼어 내며 대답했다.

“……투자자로서 온 겁니다.”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 허울뿐인 구실. 아니, 겉으로는 무표정했으니 남들이 보기엔 진짜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약속을 잡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갑자기 찾아온 건 미안합니다. 다음부턴 미리 연락하고 오죠.”

‘다음’이 있다는 건가. 기껏 따지려고 내뱉은 말이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막혀 버렸다. 내가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달싹이자, 권이도가 맞은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선 앉아요. 정말 할 얘기가 있어서 온 건 맞으니까.”

“…….”

그래, 바쁜 사람이 단순히 내 얼굴만 보자고 찾아오진 않았을 거다. 그건 너무 자아가 비대한 짐작이었다. 투자자로서, 지난번 미팅 때처럼 구실이 있긴 할 터였다.

내가 그의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권이도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관찰하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무의식중에 눈으로 좇는 것 같기도 했다. 내 한 동작 한 동작을 모두 살펴본 뒤에는 한껏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바쁩니까?”

“……네, 바쁩니다.”

사실 바쁘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만약 바쁘다면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대접해야 하는 상대였는데 말이다. 정말 바쁜 게 누구인지, 그건 권이도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용건만 간단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권이도는 아쉬운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본인은 본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차마 그의 눈을 볼 자신이 없어서 눈을 깜박이는 척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번에 선호재단에서 새 프로그램을 짤 예정인데, ‘Sejin’과 콜라보를 했으면 해요. 올겨울에 기획하는 컬렉션 수익의 일부를 재단에 기부하는 형태로.”

“…….”

“당연히 기획 자금은 선호에서 대줄 거고.”

정말 공적인 일이구나. 그 사실에 허무함을 느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고서야 왜 이런 기분을 느낀단 말인가. 나는 애써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권이도에게 물었다.

“……그게 귀사에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권이도가 제안한 사업은 결국 ‘Sejin’이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구조였다. 선호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다시 선호로 들어가는 그런 형태였으니까. 우리는 그냥, 선행을 베푸는 척 좋은 이미지만 남기면 그만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들어 봐야겠지만, 지금 말씀해 주신 것만 보면 너무 일방적인 투자 같아서요. 그건 너무…… 저희 쪽에만 좋은 일이고.”

“‘Sejin’에만 제안한 건 아닙니다. 여러 기업과 연계할 거고, 재단 홍보 효과와 더불어서 수익적인 면에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일종의 상징성이죠. 해신금융을 우리가 인수한 게 결코 좋은 그림은 아닐 테니, 정세진 대표님과 손을 잡아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좀 탈피할 생각입니다.”

얄밉게도, 권이도는 한 번 입이 트인 다음부턴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를 보여줬다. 여유를 좀 찾았는지, 언뜻 자신만만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그 말대로 일방적인 이득이라면 더더욱 정세진 대표님이 거절할 부분은 아니군요. ‘Sejin’은 패키지에 씰 하나만 추가하고 이득만 보면 될 테니까.”

사실, 답이 정해진 제안이었다. 그의 위치, 제안의 내용, 내 처지와 우리 관계. 그 모든 걸 감안해도 수락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럼에도 망설여지는 건, 본능적인 위기감 때문이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직원들과 논의도 해봐야 하고요.”

“불가능한 시간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갑자기…….”

그래, 갑자기. ‘갑자기’ 부분이 중요했다. 그날 이후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다가 왜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는지. 그 행동이 자꾸만 의심되는데, 그걸 의심하는 내가 지나치게 건방진 것 같아서.

“……원래 재단 일에 관심 없으셨잖아요.”

그래서 툭, 그 말이 튀어나왔다. 지나치게 비꼬는 말투였기에, 권이도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권이도 씨 이러는 거 솔직히 이해 안 됩니다. 아무리 공적인 용건이라고 해도 권이도 씨가 직접 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아시잖아요. 김 실장님이 얼마나 당황했으면 저를 불러왔겠어요.”

나는 대표고 그는 전무였지만, 그 위치는 기업의 크기만큼이나 달랐다. 권이도는 누구보다 자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자그마한 회사의 한낱 대표 따위를 직접 만날 리가 없었다. 이렇게 나와, 나란히, 응접실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저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권이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쿵, 쿵, 뛰는 심장은 결코 내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당황했다는 게, 그리고 긴장했다는 게,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대답해야 합니까?”

권이도는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되물었다. 내 대답 여하에 따라 그의 대답 역시 달라질 모양이다. 그 사실에, 힘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뇨…… 사실 아무것도 안 듣고 싶거든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덜컥 두려움이 들었다. 그 안에 담긴 게 무엇일지, 그걸 확인했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근데 우리가 왜 헤어져야 했는지 아시잖아요.”

우리는 솔직하지 못해서 어긋났고, 끝내 침묵하는 바람에 헤어졌다. 그 멍청한 실수를 반복해 마침내 맞이한 결말이 그따위였다. 기적이라는 이름이 모든 걸 돌려놨지만, 이미 깨져 버린 관계를 붙이지는 못했단 말이다.

“…….”

권이도는 내 말을 듣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숨을 멈추기도 했다. 이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보고 싶어서 왔어.”

숨결 같은 목소리가 속내를 털어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손끝이 저릿해서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꾹 움켜쥐어야 했다.

“이러다 진짜…… 미칠 것 같아서.”

억눌린 목소리에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권이도는 말을 고르려는 것처럼 가슴께를 들썩였다. 미미하게 흐르는 페로몬은 그의 기분처럼 음울한 빛이었다.

“하루만 견디면 되겠지, 하루만 더 참으면 되겠지, 그런 식으로 버틴 게 3개월이야. 그러다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 미팅을 나갔는데, 막상 얼굴을 보고 나니까 돌이킬 수가 없더라.”

“…….”

“알아, 이러는 게 우습겠지. 이럴 거면 왜 널 놓아주겠다고 했는지 이해도 안 될 거고.”

혼자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주절주절 늘어놓은 감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담담했다. 얼마나 속에서 곱씹었으면,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개운해 보였다.

“근데 숨을 못 쉬겠어.”

“…….”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

각인으로 전해지는 감정이 꽤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 달리 그건 고작 일부였던 모양이다. 권이도의 입으로 듣는 그의 마음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온전히 느껴지는 상실의 고통은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할 종류였다.

“그래서 이딴 말도 안 되는 기획이라도 만들어서 만나러 온 거야.”

“…….”

“그래야 숨이라도 쉴 것 같아서.”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머릿속이 온통 백지였다.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세진아.”

권이도는 그 말까지 한 뒤에야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울고 있진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늘게 떨리긴 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그 사실을 아는 건 아마 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냥 3주만…….”

“…….”

“이 기획이 끝날 때까지만 볼게.”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리 묻지는 못했다. 그 안에 마음을 접을 거냐고, 그렇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잡념이 떠오르다가도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계약서 가지고 오셨죠?”

나는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도장이 대표실에 있을 텐데……. 그리 중얼거리는 말에는 권이도가 눈가를 움찔했다. 그 모습이 참, 겁먹은 강아지 같아서. 한숨을 삼키며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부턴 약속 잡고 오세요.”

* * *

나한테 바쁘냐고 물어 놓고, 정작 바쁜 건 권이도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무섭게 짐을 챙겨 일어나야만 했으니까. 언뜻 보이는 핸드폰엔 부재중 기록이 장난 아니게 찍혀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최대한 사무적으로 악수를 했다. 비록 맞잡은 손을 그가 한참 놓아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살갑게 웃으며 그를 배웅했고, 그는 여전히 집요하게 내 얼굴을 살폈다.

“……다음엔 연락하고 오죠.”

이보다 더한 짓을 수도 없이 했는데, 악수 좀 했다고 기분이 좋아질 건 뭐란 말인가. 권이도의 기분이 하도 들떠서, 나까지 영향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괜히 눈을 꾹 감았다가 뜨는 와중에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

권이도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대신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들자, 그가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그러더니 느리게 운을 떼며 내 쪽으로 손을 뻗는다.

“여기…….”

그의 엄지가 내 눈 아래쪽을 문지르고 멀어졌다. 너무도 익숙한 행동이었기에 나 또한 그를 말리는 대신 얼굴을 내어 주고 있었다. 그는 내게 손가락을 내밀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속눈썹이 붙었길래.”

“아, 감사합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살짝 매만졌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부드럽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권이도 특유의 엷은 미소가 목구멍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또 올게요.”

그 말만 남기고, 권이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마 지하에 도착하면 그의 비서가 대기하고 있을 거다. 지금 느껴지는 아쉬움은…… 아마 권이도의 것이겠지. 나는 애써 그리 생각하며 사무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벽 너머에서 고개를 쭉 빼고 있던 직원들과.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직원과. 하필 벽이 유리로 된 터라 내부가 지나치게 잘 보였다.

설마 권이도가 있을 때도 저러진 않았겠지. 나는 애써 담담한 척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직원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눈빛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보며 묻고 말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직원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했다. 수군거리는 목소리 역시 지나치게 잘 들렸다. “얼굴에 뭐가 묻어서 그랬나?”라든가, “아무리 그래도 좀…….” 따위의 대화였다. 그중 직원 하나가 용기 있게 질문했다.

“대표님, 권이도 전무랑 원래 알던 사이셨어요?”

“…….”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들이 어디에 꽂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만지는 걸 그냥 두면 안 됐는데. 악수는 어색하게 해놓고 이상한 부분에서 익숙하게 굴었다.

“아뇨, 일하다가 마주친 게 답니다. 아까는 그냥 속눈썹 떼어 준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담담히 대꾸했는데, 다들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잔잔한 야유를 흘리며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질문한다.

“그걸 보통 막, 그렇게…… 그렇게 간지럽게…… 막 그렇게 떼어 줘요?”

질문 하나에 ‘그렇게’가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웃긴 건, 그 추상적인 설명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거였다. 나는 푸스스 헛웃음을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라니…… 홍보팀 표현력이 그래도 됩니까?”

“아니, 그게 있잖아요. 거시기…… 거시기한 그거…….”

아까보다 더 애매한 표현이 나왔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일부러 눈치 없는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 모르쇠가 통했는지, 직원들은 금세 공격 대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역시 그분 눈에도 대표님이…….”

“맞지, 게다가 대표님 오메가시잖아.”

“아까 무슨 한 폭의 그림처럼…….”

실시간으로 멋들어진 로맨스 하나가 뚝딱 탄생했다. 권이도가 첫눈에 내게 반해 속눈썹을 떼어 주는 척 추파를 던진 것으로. 우리가 정말 약혼했던 사이라는 걸 알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어라 말리자니 되려 장작을 넣는 기분이라, 그냥 슬쩍 주제를 돌렸다.

“다들 그 얘기 그만하고, 일거리 생겼습니다. 오후에 회의할 거니까 다들 시간 비워 놓으세요.”

권이도는 권이도고, 일은 일이었다. 이왕 도장을 찍었으니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시간은 조금 빠듯하겠지만, 차라리 바쁘게 지내는 게 나을 때도 있으니까.

나는 머릿속으로 일정을 계산하며 대표실로 향했다. 컨펌이 빨리빨리 돼야 할 텐데. 씰 하나만 추가하는 게 말이 쉽지,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재단 측과도 연락해야 했고, 프로젝트팀도 다시 꾸려 봐야 한다.

3주라는 시간. 그 과정에서 권이도와 마주칠 일은 별로 없을 거였다. 암만 내가 보고 싶다고 해도, 설마하니 일일이 모든 일에 관여하진 않을 테니까. 곧 담당자가 배정되면 따로 연락할 일도 줄어들겠지.

왠지 모를 서운함은 그냥 모르는 척했다. 권이도의 기분이 지나치게 들뜬 것도 애써 외면해야만 했다. 어차피 우리는 끝난 관계고, 조금씩 연명하는 순간을 붙잡고 있을 뿐이니까. 과거에 그랬듯,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이 관계는 끝나고 말겠지.

“…….”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책상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3주 뒤, 본격적인 겨울에 들어서는 차가운 계절. 과거의 내가 죽은 시기도 이맘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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