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91)화 (91/131)

91화. Retour des Saisons(2)

“…….”

“…….”

우리는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로를 마주 봤을 뿐이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내게는 그 모든 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왜.”

왜 여기 있습니까?

그렇게 묻지 못한 건, 안으로 들어온 종업원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종업원은 테이블에 차를 세팅하고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힌 다음에도 우리 사이의 정적은 깨어지지 않았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권이도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미팅 상대가 선호그룹 사람이긴 해도, 그게 권이도 정도의 거물은 아니었단 말이다. 고작 투자처와의 미팅에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천천히 권이도를 살펴봤다. 그새 살이 좀 빠졌는지, 이목구비가 조금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눈매가 한층 깊어졌고, 목으로 이어지는 턱선이 유독 도드라졌다.

환상이 아니었다. 눈앞의 권이도는 분명 현실이었다. 가늘게 흔들리는 눈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도, 이따금 깜박이는 눈꺼풀까지도 모두 진짜였다.

“……권이도 씨.”

이름을 불렀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게 과연 내 감정인지, 아니면 권이도의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표정하게 있을 거면 시선을 좀 거둬 보지. 저런 눈을 하고 왜 태연한 척을 한단 말인가.

“왜…… 아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꾸욱 다물었을 뿐이다. 이내 내리깔린 두 눈이 참으로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미팅을 하러 왔죠.”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이 권이도다웠다. 그 시간 동안 목소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고, 뒤이은 말은 살짝 떨리기까지 했다.

“정세진…… 대표님하고.”

그와 장난을 칠 때나 듣던 호칭이 이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심장은 계속해서 빠르게 뛰는데, 그 와중에 향긋한 페로몬은 또렷이 느껴졌다. 배 속 가득 차오른 아늑함은 오로지 권이도에게만 느끼던 종류였다.

“미팅이라니…….”

정말 미팅이 목적이라면 우리의 구도가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고 그가 허락을 구하듯 문간에 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갑은 저쪽인데 눈치를 보는 건 내 쪽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무님께서 직접 오신다는 말씀은 못 들었는데요.”

그는 ‘전무님’이라는 호칭에 잠깐 눈가를 움찔했다. 내가 대표님 소리에 어색해하듯 그 또한 어색함을 느꼈나 보다. 한동안 말없이 있던 그가 느릿느릿 운을 뗐다.

“우선 천천히 얘기하고 싶은데…….”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정말 미팅을 하러 온 건지, 그렇다면 나는 그를 그냥 사무적으로 대하면 되는 건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와중에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앉아도 됩니까?”

그 질문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권이도가 착석을 허락받는 상황이 올 줄이야.

“안 된다고 하면 서 계실 겁니까?”

“그래야죠. 갑자기 찾아온 건 난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기분 나쁜 기색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표정 정도는 바뀔 줄 알았건만. 지나치게 덤덤한 표정이다.

“……앉으세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을 뿐. 정갈한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내 맞은편 좌석에 앉았다.

“…….”

“…….”

이번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차려진 다과를 눈으로 구경했다. 말린 대추와 고구마로 만든 전병이었다. 찻물로도 체할 수 있던가. 이 분위기라면 숨만 쉬다가도 체기가 생길 것 같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내가 체하기 전에 종업원이 음식을 내어 왔다. 모든 코스가 다 나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새삼 아득한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모르는 척했다.

“드세요.”

권이도는 군말 없이 식기를 들었다. 하나 에피타이저로 나온 밤수프를 먹을 때도 어색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이왕 각인을 했으면, 차라리 생각이라도 읽히면 좋으련만. 그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알 수가 없었다.

온통 조용한 와중에 음식은 차례차례 꾸준히 나왔다. 의선당은 내가 좋아하는 식당인데, 이런 상황에서 먹으니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잘하면 밥만 먹다가 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야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겨울에 크리스마스 컬렉션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조심스레 테이블에 식기를 내려놨다. 역시나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권이도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옆에 챙겨 두었던 서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기대 수익과 반응을 정리한 보고서입니다. 예산과 관련된 내용도 함께 정리해 놨습니다.”

“…….”

그는 서류를 받지 않고 잠깐 멍하니 있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모자라게 굴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오늘따라 멍하기 짝이 없다.

“미팅하러 오셨다면서요.”

“…….”

내가 한 번 더 재촉하자, 권이도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가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기며 살펴보는 동안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를 훑어봤다. 역시, 살이 좀 빠진 모양이다. 볼품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날 선 듯 예민한 느낌이 생겼다.

“제품 개발은 끝난 겁니까?”

“……아.”

퍼뜩, 시선을 떼어 냈다. 하필 조금 까칠해진 입술을 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다행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권이도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끝나서 간단한 테스트 중입니다. 라벨링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이번 달 내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그래요……. 그리고 이 부분 말인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래요?”

그가 가리킨 건, 이번 컬렉션의 기획 의도였다.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내용이었고, 서류에 적힌 걸 제외하면 딱히 설명할 이야기도 없었다. 나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 부분은…….”

여름 시즌에 나왔던 향수와의 연관성, 그리고 계절감에 따른 향의 변화. 몇몇 제품은 크리스마스 한정으로 출시해 희소성으로 가치를 더하겠다는 내용을 얘기했다. 틀에 박힌 것처럼 뻔한 내용이 끝난 후에, 권이도는 곧장 바로 그 아랫줄을 가리켰다.

“여기도 설명해 줬으면 하는데.”

이번에도 마땅히 설명할 부분은 아니었다. 나는 이어서 그와 관련된 것들도 설명을 시작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권이도가 손가락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여기도.”

“…….”

이 사람이 지금 뭘 하는 거지.

차근차근 말을 이으면서도 그가 왜 이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보고서만 읽어 보면 끝날 일을 굳이 말로 들으려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물론 투자자인 만큼 꼼꼼하게 챙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엔 뭔가 이상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시면.”

“아뇨.”

“…….”

“마음에 듭니다. 그냥 말로 듣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면서 그는 종이를 한 장 뒤로 넘겼다. 이번엔 프로젝트의 순서를 나열해 놓은 부분이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역시나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저희 계획은 이렇습니다.”

결국, 그런 식으로 나는 서류에 있는 모든 내용을 입으로 설명했다. 이럴 거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지금까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까다로운 미팅 상대가 아닌가 싶다. 차라리 불만스러운 부분을 지적하면 모를까,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를 일일이 해석하게 하다니.

“……이상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끝냈을 때 서류는 그의 손이 아닌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끝내, 내가 직접 한 부분 한 부분 짚어 가며 말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까지 모든 설명을 끝내자 권이도가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래…… 그렇군요.”

“…….”

왜일까, 내리깔린 두 눈이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없이 그를 응시하자, 그가 흘긋 내 눈치를 살폈다.

“더 설명할 건 없습니까?”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걸로 모자라 내게 추가적으로 다른 내용까지 요구한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래서 어이없는 기분에 대뜸 묻고 말았다. 서류 내용엔 문제가 없는데, 계속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지. 권이도는 눈을 서류에 고정한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냥…….”

“…….”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한 건, 권이도가 정말 기분 좋은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부터 전해지는 감정 역시 그간의 우중충함과는 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평온했을까. 의식하지 않은 사이 그의 기분이 누그러져 있었다.

“……내용은 제대로 들으셨어요?”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속에서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바람에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눌러야 했다. 이렇게 동요하면, 그 또한 내 감정을 읽을 텐데.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럼요. 정세진 씨 입에서 나온 말은 다 기억합니다. 사소한 것까지도.”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내가 지나가듯 말했던 모든 것들을 이뤄 줬으니까. 하물며 욕조에서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다던 그 지나가는 말까지도.

“미팅을…… 하러 오셨다면서요.”

권이도의 목적이 미팅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 정돈 진작 눈치챌 수 있다. 그럼 그는 왜 이 자리에 나왔을까. 나는 그 이유가 딱 하나라고 여겨졌다.

“미팅을 하러 왔죠.”

“…….”

“정세진 대표님이랑.”

나를 만나러 온 거다. 자그마치 석 달 만에, 내 눈앞에 나타난 거였다. 나를 놓아주겠다고 당당히 말한 주제에, 참으로 짧은 기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 사심 채우지 말고 일 얘기를 하셔야죠.”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 테이블을 바라봤다. 메인 요리로 나온 갈비찜과 옥돔구이는 누구 하나 손을 대지 않았다. 식사까지 멈추고 나눈 대화는 일 얘기가 분명했지만, 그게 정말 ‘일’의 영역은 아니었다.

“귀한 점심시간을 그냥 버리시면 안 되잖아요.”

권이도는 지금 1분 1초가 소중한 사람이었다. 선호그룹은 크나큰 격변기를 맞이했고, 그 정상엔 권이도가 서야 했으니까. 차차 부회장 자리를 얻어 내려면 나 따위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어야 한단 말이다.

“뭐…… ‘Sejin’엔 원래도 관심이 많았고, 귀한 시간일수록 필요한 데 써야죠.”

순간, 나를 부르는 줄 알았다. 그래서 움찔 놀랐는데, 권이도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나는 괜히 눈두덩을 누르는 척,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걸 왜 이제야…….”

3개월이었다. 내가 일하기 시작한 걸 기점으로 하면 더 오래였고. 그 시간 동안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더니, 왜 이제 와서 그런단 말인가.

“……그냥 변덕이라고 생각해요.”

권이도는 속 시원히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으로 그렇게 대답했을 뿐. 내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시선을 피하며 질문했다.

“나랑 일적으로 만나는 건 괜찮습니까?”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권이도가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내가…….”

“…….”

“정세진 씨 눈에 띄어도 되겠냐고 묻는 거예요.”

미처 대답하지 못할 만큼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계속 눈에 띌 거냐고, 그렇게 묻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지금 내게 허락을 구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나는 그냥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공과 사 구분은 합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 말을 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고작 한 시간 전으로만 돌아가도 확신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그러나 권이도와 짧은 시간을 함께하고 나니 대답할 수 있었다.

“투자자한테 눈에 띄지 말라고 할 만큼 뻔뻔하지 않아서요.”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를 마주친다고 해서 예전처럼 두려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와의 각인은 이미 다른 기억으로 뒤덮였고, 그를 향한 원망은 피어오르기도 전에 불씨가 사그라드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은 좀 곤란하군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와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불쾌함이라기보단 불편함이었고, 기피라기보단 회피였다. 그와의 해후가 지나치게 어색해서 ‘괜찮다.’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할 말 끝나셨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이도는 나를 붙잡는 대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시선조차 들어 올리지 못하는 모습이, 그 당당하던 권이도와는 사뭇 달랐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전무님.”

좋았던 기분이 바닥으로 뚝 추락했다. 내가 아니라, 내 눈앞에 있는 권이도의 기분이. 나는 곧장 방을 빠져나왔고 우리의 짧은 재회는 거기까지였다.

* * *

일상이 흔들리는 계기는 가끔 아주 사소한 데에서 오곤 한다. 가령 손가락을 베여서 타자 치는 게 어렵다거나, 발목을 삐어서 계단을 오르기 어렵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게 아니면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난 후에 같은 음식을 못 먹게 되는 것처럼.

권이도와 만나고 난 이후, 평화롭던 일상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심각한 건 아니었고, 그냥 평소와 조금씩 달라지는 정도. 여전히 일과는 비슷했는데 아주 사소한 것들이 무의식중에 나를 괴롭혔다.

“……그러지 말 걸 그랬나.”

그중 하나가 바로, 가끔씩 떠오르는 그 날의 권이도였다. 조금 수척했던 얼굴, 흔들리는 시선,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고 나왔던 그 모습까지.

우습게도 나는 시간이 남을 때면 그날의 일을 곱씹었다. 뒤를 한 번은 돌아볼 걸 그랬지. 착잡하게 가라앉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누군가가 내게 등을 돌리는 순간이 어떤지, 무력하게 뒷모습만 바라보는 기분이 어떤지, 그런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안부라도 한 번 물어볼걸. 아니면 이왕 만난 김에 궁금했던 것들을 확인할 걸 그랬다. 공과 사 구분을 한다고 말해 놓고, 지나치게 사적인 감정으로 자리를 뜨지 않았는가.

미안함…… 아니 찝찝함이었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쁜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여태껏 안 볼 땐 괜찮더니 딱 한 번 마주쳤다고 잊어버렸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 탓이다.

‘정세진 씨 페로몬을 닮은 향수를 가지고 싶습니다.’

어차피 날 놔줄 거라면 그런 부탁은 왜 했을까.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 따위 없었으면서 왜 나를 완전히 밀어 내지 않았을까.

시간이 미화하는 기억은 퍽 아름다워서 나빴던 순간보다 좋았던 순간들이 도드라졌다. 나를 매몰차게 외면하던 모습은 다정함에 뒤덮이고, 그 위에 눈물을 흘리던 얼굴이 그려졌다.

‘세진아.’

그럴 때면 나는 일부러 더 일에 집중했다. 이미 만들어 놓은 향수들을 시향하고, 직원들이 올린 보고서를 보며 앞으로의 프로젝트를 대비했다. 그러다 정 안 되겠다 싶을 땐 이희나가 납품한 향료로 직접 향수까지 만들어 봤다.

나로선 최선의 노력이었다. 고작 얼굴 한 번 봤다고 그와의 기억에 연연할 수는 없으니까. 비록, 권이도는 그날 이후 언제나 나를 떠올리는 것 같았지만. 잔잔히 전해지는 감정 역시 애써 모르는 척 외면했다.

“여기서 탑 노트가 너무 무거우니까…….”

“대표님.”

한창 개발팀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 실장이 슬쩍 내 쪽으로 다가왔다. 최 팀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터라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봤다. 김 실장은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그……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말입니까?”

밖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직원들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나를 찾는 걸 보면. 의아함에 눈을 깜박이는 내게, 그는 조금 얼떨떨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권이도 전무가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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