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88)화 (88/131)

88화. Hiver Rigoureux(16)

“…….”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화가 안 났는데, 이번엔 조금 모욕감이 들었다. 다른 모든 부분을 욕해도, 그것만큼은 권이도가 욕할 부분이 아니건만. 눈이 확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왜.”

나는 이불깃을 붙잡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어느샌가 맺힌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그랬으면 어쩌려고.”

화가 났다. 그와 만난 이후에…… 아니, 아버지의 아들로 살게 된 이래 처음으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억울함이 오로지 권이도를 향해 튀어나왔다.

“내가 그쪽 형이랑 붙어먹으면서 질질 쌌으면.”

“…….”

“그럼 더럽…… 하윽!”

쾅! 내리찧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권이도가 무리할 정도로 안쪽을 꿰뚫은 탓이었다. 항상 봐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정말 닿으면 안 될 곳까지 닿은 기분이다.

“너 따위를 믿지 말 걸 그랬지.”

나를 믿지도 않았으면서. 그는 정말 상처받은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내게 더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은 채, 처음 나와 섹스했을 때처럼 물건 다루듯 나를 휙 뒤집었다.

“악, 아, 잠, 아흑…… 흐윽!”

그 후엔 분노할 기회조차 없었다. 베개에 얼굴이 처박히고, 그의 체중에 온몸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손을 뒤로 해 그를 밀어 냈지만, 권이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팔을 잡아 등 뒤에 고정한 채 퍽, 퍽, 허리를 움직일 뿐.

“그만, 흑, 악……!”

아무리 히트 사이클이 왔어도 모든 행위를 쾌감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마구잡이로 쑤셔 박는 동작이 매질을 당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질식할 것처럼 쏟아지는 페로몬에 이대로 내가 잠겨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하윽……!”

“……하.”

퍽! 깊게 삽입한 권이도가 몸을 웅크렸다. 배꼽과 가까운 곳에서 권이도의 성기가 부풀기 시작했다. 주먹처럼 커다랗게 부푼 귀두는 평소라면 닿지 않을 곳에 덜컥 걸렸다. 숨도 쉬지 못한 채 꺽꺽거리는 나를 권이도가 꾸욱 내리눌렀다.

“세진아.”

왜 이런 순간에서까지 그 목소리가 다정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그 부름만큼은 온전히 전해졌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온 조그만 속삭임까지도.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사근거리는 음성이 나를 옭아맸다.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내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덜컥 불안함이 밀려드는 와중에 여린 살결이 콰득 깨물렸다.

“……!”

폐가 한껏 쪼그라들었다. 내장이 뒤틀렸다가 다시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쥐어짜인 페로몬샘에서 마구잡이로 페로몬이 터져 나왔다.

“아, 악……!”

그는 마치 짐승처럼 내 살점에 이를 박아 넣었다. 울컥 터진 페로몬이 그의 페로몬과 묶이기 시작했다. 박제된 것처럼 침대에 고정된 채로, 온몸을 갈가리 찢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아, 아으, 윽……!”

각인당하고 있었다. 이건, 당했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게 남은 자유를 모조리 빼앗기고, 마치 물건처럼 상대방에게 소속되는 것이다. 억지로 타인에게 소속되는 감각은 칼로 장기를 난도질하는 것과 비슷했다.

“흐윽……!”

차라리 강간당하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일방적인 각인으로 짓밟힌 건 고작 내 인격만이 아니었다.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행위였기에 나는 어느 한군데가 잘못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때, 권이도가 아무런 말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으스러뜨릴 듯이 나를 끌어안은 채로, 왜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는지. 그가 선택한 일이면서, 왜 순간 그렇게 놀란 것처럼 보였는지.

특이 형질의 각인은 형질의 우열에 따라 일방적으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우성이었지만, 권이도는 그를 능가할 정도로 우월한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누구도 몰랐던 건, 억지로 맺은 각인으로는 그 무엇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

“……아으윽.”

마음이 통하지 않은 탓일까, 나는 그의 감정과 기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난생처음 느끼는 통증에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전원이 나가듯 픽 쓰러질 때까지, 권이도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눈을 떴을 땐, 다시 권이도의 방이었다. 넓은 침대와 높은 천장이 다시는 벗어나지 못할 감옥처럼 느껴졌다.

고작 이틀. 도망치겠다고 결심한 지 이틀 만에, 나는 다시 그 커다란 집으로 잡혀 들어갔다.

* * *

특이 형질의 각인은 보통 결혼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영혼과 영혼을 묶는, 보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방법.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페로몬만 느끼게 되는 마법 같은 약속.

그에게 각인을 당하고 눈 깜박할 새 몇 개월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그 몇 달간은 히트 사이클조차 오지 않았다. 권이정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목덜미를 깨물린 흔적은 흉터처럼 남았다.

권이도는 이번엔 나를 3층 구석이 아닌 자신의 방에 가둬 놨다. 문을 잠그지는 않았지만, 그건 가뒀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잠을 잘 땐 늘 그의 침대에서 자야 했고, 그 외에 공간을 돌아다닐 땐 반드시 경호원이 붙었으니까.

감금이었다. 감시였고, 새로운 종류의 방치였다. 경호원의 얼굴을 질리도록 보면서도, 나는 권이도의 얼굴만큼은 쉽게 볼 수 없었다. 무언가 바쁜 일이 있는지 그가 방을 비워 놓은 채 어디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뭐, 사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얼어붙은 것처럼 감당 못 할 공포가 일었으니까. 그에게 억지로 속해지던 그 순간의 기억 때문에, 환상통이라는 걸 알면서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나는 그날 죽었고, 지금 남은 건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처음엔 집 안을 돌아다녔으나 어느 순간부턴 방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다. 밥을 굶다 굶다 탈진할 즈음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의사가 찾아와 수액을 놓아 줬다.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엔 으레 마음속에서 정리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평생 놓지 못했던 희망이나, 구질구질하게 남은 감정 따위의 것들. 남은 날을 위해 품었으나 마지막 가는 순간엔 고작 미련밖에 되지 않는 하찮은 것들.

더 이상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버림받는 게 두렵지도 않았고, 추운 겨울 맨발로 눈밭을 헤매는 게 무섭지도 않았다. 기본적인 욕구가 모두 사라져서 멍하니 숨만 쉬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가을,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날씨 탓에 몸살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앓는 내가 이상했던지, 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심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내 팔뚝에서 피를 세 병이나 뽑으며, 제발 밥이라도 잘 먹으라고 내게 애원했다.

“이러다 정말 죽습니다.”

권이도가 오지 않았으면, 나는 이미 그날 죽었을 텐데. 수면제에 취해 영면할 수 있던 나를 억지로 데려온 게 권이도였다. 권이정과 똑같이 나를 강간하고, 그와는 다르게 나를 떠나는 대신 주워 왔다.

이럴 거면 각인을 왜 했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나와 대화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나를 놓아주지도 않는 건지.

그리고 왜, 내가 잠든 사이에만 나를 찾아오는 건지.

“세진아.”

계절은 겨울에 가까워졌는데, 권이도의 겨울은 끝나는 모양이었다. 각인의 여파로 마음이 풀린 걸까. 언제부터인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가만히 눈을 감은 내게 천천히 다가와 가끔은 이렇게 속삭이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무릎을 꿇어 보라고 할까. 그리 생각했다가 관두기로 했다. 뒤늦게 깨달은 건데, 그 말을 하던 권이도는 나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을 거다. 그저 화풀이처럼 욱하는 마음에 내뱉었겠지.

“세진아.”

이름을 부를 거면 적어도 눈을 뜨고 있을 때 불렀으면 했다. 왜 내가 깨어 있을 땐 한마디도 못 하다가 잠이 들 즈음에야 찾아오는 건지. 내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몰라도 이상했고, 이미 알고 있어도 이상했다.

아마 조금만 더 기력이 있었다면 물어봤을 거다. 눈을 뜨고, 권이도를 바라보며 얘기했겠지. 나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데, 너는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임신하셨네요.”

다음 날, 심 교수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전해 줬다. 멍하니 있던 나조차도 놀랄 만큼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고, 심 교수는 이 말 한마디만 남겨 놓고 자리를 떠버렸다.

“식사는 꼭 하세요.”

나는 오메가였지만, 단 한 번도 임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권이도에게 임신 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도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을 뿐이다.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구실이, 그에게 후계를 낳아 주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그날 밤, 나는 어둑어둑한 복도를 지나 서재로 향했다. 맨발로 카펫을 밟으며 긴긴 복도를 열심히 가로질렀다. 오랜 시간 걷지 않아 자꾸만 무릎이 꺾였지만,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이끌고 다리를 움직였다.

‘어차피 내 애나 그 새끼 애나 비슷할 텐데…….’

내 배 속에 있는 건 과연 권이정의 아이일까, 권이도의 아이일까. 나는 두 명의 알파에게 강간을 당했고 그들은 모두 내게 노팅했다. 고작 3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그게 누구의 아이건 간에,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달칵, 서재 문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권이도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 나는 텅 비어 있는 내부를 바라보다가 벽에 걸린 장식품으로 다가갔다.

‘나한테 그랬죠. 서재에 있는 총이 진짜냐고.’

나무로 짜인 프레임에 곱게 걸어 놓은 총. 검은 몸체와 이어진 은색의 총구가 매끄럽게 반짝이는 묵직한 물건. 처음엔 라이터인 줄 알았으나 그가 말해 주는 바람에 진짜라는 걸 알게 된 흉기.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될 거예요.’

천천히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 무슨 생각이었냐고 물으면,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늘 이 순간을 기다려 왔고 마땅한 전환점이 없어서 흘러가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건 내 각오이자 다짐이에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타협하지 말자는 다짐.’

가짜이길, 조금 바랐던 것 같다. 그가 말한 각오와 다짐이 약간의 허세이길 바랐다. 나 또한 타협하지 않기 위해 이 물건을 골랐으면서, 마지막 순간엔 망설임이 생겼나 보다.

나는 그에게 불어를 알려 주던 테이블에 걸터앉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살면서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물건이었으나, 그 무게감이 라이터와는 달랐다. 생각보다 훨씬 묵직한 탓에 그간 약해진 내가 들기엔 버겁단 생각이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현실 감각이, 없다는…….’

그때, 입을 맞추지 말걸. 아니면 차라리 사실대로 이야기해 볼걸. 그랬다면 혹시라도 그와 내 사이가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머리는 좀…… 너무 징그러운가.”

그동안 말을 너무 안 했더니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혼잣말임에도 불구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와의 추억을 하나 떠올렸을 뿐인데 멈춘 줄 알았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느릿느릿 총구를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어디가 정확한 위치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어림잡아 그 언저리를 겨누었다. 혹시 불발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괜찮은 오메가라더니…….’

우습게도, 나는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에 권이도를 떠올렸다. 그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모든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를 내려다보던 눈길, 그 눈빛이 차분하게 변하던 순간, 그리고 끝내 따사롭게 웃던 모습까지.

‘오늘 내 방에서 잘래요?’

아,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해봤다. 그토록 자주 몸을 섞었는데 입으로 마음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에게 들어 본 적도 없으니 그나 나나 마찬가지일까.

“……권이도.”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은 소름이 끼칠 만큼 낯선 것이었다. 속에서 질리도록 외운 이름이었지만 입술을 움직여 발음한 건 몇 번 되지 않았으니까. 기회가 있다면 더 불러 봤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어 두었던 문틈으로 익숙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던 상대방이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세진?”

왜 그때,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서인지, 아니면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는 도취감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를 한 번이라도 봤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웠기 때문인지.

“잘 지내요, 권이도 씨.”

인사를 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멈춘 것처럼 살아왔던 날들이 이제 와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괜한 억하심정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잘 지내봐요, 한번.”

당신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후회하길 바라진 않아도 나라는 사람을 잊지는 않았으면 했다.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기억 정도로는 남고 싶었다.

“안 돼…….”

권이도가 숨결처럼 속삭였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가슴에 총구를 바짝 들이밀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오므라드는 순간, 그제야 그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정세진!”

탕! 커다란 발포음이 귀를 찢는 것 같았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평온함이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고, 앞으로는 걱정할 일이 없을 거라고. 끔찍하게 되풀이되던 날들도 이제는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안도.

“안 돼, 안 돼…….”

그 후엔 드문드문 기억이 끊겼다. 그가 내게 다가오는 모습,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절망 어린 표정, 피가 쏟아지는 가슴팍을 누르는 손길, 그리고 내 손을 부여잡은 채 제 얼굴로 가져가는 것까지.

“세진아…….”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온전한 사랑을 받아 봤으면 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누군가 방법을 알려 주길 바랐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너그럽게 넘어가 주길. 그리고 이번엔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길.

“안 돼, 제발…….”

추운 겨울이 지나 눈이 녹듯, 차디찬 눈동자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상황에 맞지 않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우는 건, 나를 잃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지난날에 대한 허무함 때문일까. 적어도 그게, 내게 남은 감정 때문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때, 구급차 소리를 들었던가. 아니면 그 소리가 들리기 전에 세상에 어두워졌던가. 단 하나 확실한 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권이도가 나를 놓지 않았다는 것 정도.

“허억…….”

서서히, 공간이 어그러졌다. 나를 보며 눈물짓던 권이도 대신, 나를 내려다보는 권이도가 보였다. 뿌옇던 머릿속에 안개가 걷히고,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근차근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벽면에 걸린 총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그에게 불어를 가르쳐 주던 테이블 역시 더는 그곳에 놓여 있지 않았다. 같은 시간이지만 서로 다른 장면들. 그리고 지금껏 잊고 있었던 그와의 다른 추억들.

“……세진아.”

그 기억의 끝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권이도는 더 이상 과거의 환상이 아니었다. 나를 끌어안은 따듯한 온기를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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