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87)화 (87/131)

87화. Hiver Rigoureux(15)

김 실장은 정말 30분 만에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몸을 씻는 대신 옷만 갈아입고 모든 짐을 챙겨 집을 빠져나왔다. 운 좋게 고용인을 마주치지 않았고, 당연히 아무도 날 붙잡지 않았다.

김 실장과 함께 향한 곳은 내가 남겨 놨던 오피스텔이었다. 만약 징역을 살았다면 처분해야 했을 텐데, 다행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내가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김 실장이 그 사이에 사 온 약을 내밀었다.

“……근무 시간 아닙니까?”

“근무 시간 맞습니다.”

약국 봉지엔 눈치 빠르게도 열상에 바르는 연고도 들어 있었다. 이건 퍽 민망한데……. 나는그리 생각하며 연고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널브러뜨린 짐을 정리하던 김 실장이 멋쩍은 투로 덧붙였다.

“……아내가 아프다고 하고 잠깐 나왔습니다.”

얼굴만 아는 부인께 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일을 그만둔 다음에도 귀찮게 하려던 게 아닌데. 연락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이렇게 됐다.

“고생하셨습니다. 돌아가 보세요.”

그래도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비록 내가 잡혀갔던 날을 기점으로 연락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그, 경찰엔 연락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그는 한참 눈치를 살피다가 넌지시 물었다. 쓸데없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눈치챈 모양이다. 아마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니 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쪽이랑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

“어차피 좋은 소리도 못 들을 것 같고…….”

내가 당한 건 강간이 맞지만, 딱히 신고할 생각은 없었다. 매스컴만 신나 할 내용이었고 내가 이길 가능성도 없었다. 일을 크게 키워 봤자 권이도가 막아 준 횡령 건만 다시 수면 위로 떠 오를 거다.

“……죄송합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협탁에 약을 내려놓고 비틀비틀 침대로 다가갔다. 목욕 가운 차림이었지만, 옷을 입을 만큼 체력이 남지도 않았다.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지 말라고.”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은가 보다. 권이도가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전할 수 있는 걸 보면. 지금은 그냥…… 그냥 자고만 싶었으니까.

“들어가세요. 감사했습니다.”

“…….”

김 실장과의 인연도 여기까지겠지. 진작 끊겼을 관계를 내가 한 번 연장한 것뿐이었다. 김 실장은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다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가보겠습니다.”

“……아, 맞아.”

나는 한 타이밍 늦게 그런 김 실장을 붙잡았다. 몸이 잔뜩 지쳤는데도, 정신은 또렷하기만 했다. 망할 불면증이, 이대로는 잠을 잘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혹시 수면제 가진 거 있으세요?”

이틀을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잤다. 김 실장이 내게 건네준 수면제 덕분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불안하단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내가 안 죽겠다고 이야기하자 약통을 건네줬다.

‘가끔 붙어먹자고, 응?’

꿈에선 계속, 계속 악몽이 반복됐다. 권이정에게 붙잡혔던 순간이 떠올랐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가끔은 배경도 바뀌었는데, 그중엔 권이도가 그 모습을 구경하는 악몽도 있었다.

열이 몇 번이나 올랐다가 내린 것 같다. 잠에서 깨면 다시 수면제를 먹었고, 그러다 일어나면 또다시 수면제를 먹었다. 권이정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도 페로몬이 남는 바람에, 그날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설마 권이도가 말한 선물이 이거였을 줄은…….’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는데, 망가진 마음이 시간으로 나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 아니었건만, 그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한 몸뚱이를 침대에 늘어뜨린 채, 이대로 굶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수면제를 먹고 죽는 게 아니니, 이 정도면 거짓말도 아니지 않은가.

‘저 오메가예요.’

그냥, 그날 죽는 게 나았으려나. 뭐 가치 있는 삶이라고 꾸역꾸역 연명했을까. 아니, 적어도 눈밭에서 죽는 건 아니니 호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쾅!

악몽은 점점 애매하게 바뀌었다. 이제, 나를 강간하는 상대는 권이정이 아닌 권이도였다. 내 뺨을 때리는 사람도 권이도였고, 억지로 나를 굴복시킨 사람도 권이도였다.

쾅!

시끄럽게. 어느 쪽이 꿈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모르겠다. 온몸에 느껴지는 통증은 현실 같은데, 먼발치에서 들리는 쿵쿵 소리는 꿈만 같았다. 이제 진짜, 정신이 나간 걸까.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굉음이 들릴 리가 없는데.

쾅!

깊이 잠들지 못한 몸뚱이가 주변 소리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중엔 권이정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으니, 뭐가 진짜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는데.

“…….”

드디어, 쿵쿵거리던 소리가 멈췄다. 먹먹한 귓가에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타박타박,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과연 꿈일까, 현실일까.

“……정세진.”

“…….”

뚝, 잡념이 끊어졌다. 머릿속을 울리던 웅성거림이 싸늘한 침묵으로 바뀌었다. 가만히 숨을 죽이는 내게, 다시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집을…… 아직도 남겨 놨을 줄이야.”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내가 아는 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성격처럼 명확한 발음이, 이불 속에 있었음에도 귓가에 또렷이 파고들었다.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고요하던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때도 여기로 왔던 건가…….”

어떻게 들어온 걸까. 금방이라도 날 일으켜 세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권이도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속에서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흐.”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흐느끼고 말았다. 무척이나 조용한 소리였지만, 권이도의 귓가엔 똑똑히 들렸을 거다. 동시에 그는 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휙 걷어 냈다.

“…….”

“…….”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완벽한 차림새의 권이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온통 새카맣게 차려입은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잔뜩 지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서서히 굳어 가는 표정은 나조차 흠칫 놀랄 만큼 냉랭했지만.

“어떤 새끼가 이랬어.”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매섭게 내려앉았다. 그 말을 이해할 새도 없이 권이도가 내 턱을 붙잡았다. 아직도 얼얼한 뺨에 손가락이 스치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순간이었다.

“……권이정?”

퍼뜩, 권이도가 중얼거렸다. 내밀었던 손을 침대에 짚곤 짓씹듯 뒷말을 덧붙인다.

“그 새끼 페로몬이 느껴지는데.”

“…….”

왜 모르는 척을 하지.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기대하게 됐다. 모든 게 내 오해고, 사실은 권이도도 모르는 일이라고. 그렇게 기대했다가 다시 실망하고 싶지 않았건만.

“정세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권이도가 실재인지 허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뭘 바라는지는 둘째치고, 왜 이곳에 와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왜 오셨어요?”

그래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눈꺼풀을 한번 감으면 다시 뜨는 데까지 한참이나 걸렸다. 시간을 느리게 감은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는 속도 역시 더디기만 했다.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는데.”

나를 무시하지 않았던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항상 외면했던 주제에.

“멋대로 나온 건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사과를 건네고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약 기운에 눈앞이 핑핑 돌았지만 가까스로 침대 아래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지. 그런 생각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몸이 크게 휘청였다.

“……아.”

덥석, 팔이 붙들렸다. 그가 나를 붙잡아 줬다는 사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잠을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몸이 현실에 적응하질 못했다.

“아…… 감사합니다.”

권이도의 얼굴을 올려다보진 않았다. 그냥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살짝 그를 밀어 냈을 뿐. 다행히 그는 금방 물러섰고, 거실로 향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물을 마시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권이도는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니,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다른 손엔 내가 먹다 남은 수면제 통을 들고 있었다. 지그시 성분표를 응시하던 권이도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으려고?”

질문을 이해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아무래도 물을 마신다고 차려질 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여전히 머릿속은 몽롱하고 몸에선 기운이 쭉쭉 빠졌다.

“……아뇨.”

“…….”

“자려고 먹은 건데.”

정신이 왜 이렇게 없지.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사고가 이어지질 않았다. 머리가 자꾸 한쪽으로 쏠려서 문고리를 잡은 채로 권이도에게 물어야 했다.

“안 가세요?”

“뭐?”

그는 황당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아, 이게 아닌가. 이상한 질문을 건넨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정세진.”

아까보다 차분해진 음성이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권이도는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내뱉었다.

“내가…… 그게 누구 짓이냐고 물은 것 같은데.”

기시감이 느껴졌다. 지난번에도 이런 식으로 기회를 줬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엔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누가 이랬는지 아시잖아요.”

그러나 정작 나오는 말이 이따위였다. 나는 이미 너무 지쳤고, 속에 있는 말들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조차 체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대처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이럴 거 예상 못 하신 것도 아닐 테고.”

이 모든 건, 그가 권이정을 집으로 부르는 순간 예정된 일이었다. 보안 시스템이 그렇게나 많은데 타인의 방문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집에 CCTV가 널리고 널렸는데 이제 와 모르는 척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권이도 씨 형이랑 잤습니다.”

잤다고 표현해도 되나. 처음엔 강제였으나 마지막엔 나도 저항하지 않았다. 이틀 내내 그 일을 곱씹었더니 권이정이 했던 말들만 고스란히 남았다.

“보이는 그대로예요.”

내 몸에 남은 폭행의 흔적은 짙은 정사와 애무의 흔적 같기도 했다. 결국엔 다 멍이었지만, 얼굴에 남은 상처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원래도 멍이 잘 남는 편이라, 권이도와 잤을 때도 비슷한 자국이 남았으니까.

“어차피 이걸 바라셨을 텐데…….”

“정세진 씨.”

그는 내 이름을 부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억지로 속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느릿느릿 가슴께가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모르나 본데, 우리 아직 서류상으로 부부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단 얘기예요.”

부부라니, 그런 근사한 이름을 붙여도 되는 관계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이혼하면 되지.”

이미 내 쓰임새는 끝났고, 남은 건 관계의 종말뿐이었다. 체념이라기보단 포기였는데, 그 또한 내게 바라는 게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나 같은 걸 먹이고 재울 바엔 사라져 주는 게 편할 거다.

“어차피 진짜 부부도 아니었고…….”

“……이혼이라니.”

그런데 권이도는 선뜻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픽, 헛웃음을 흘린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그런 걸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해?”

초점이 흐려서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마 화가 난 것 같은데, 어디가 그럴 부분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는 내게 한껏 억눌린 목소리가 경고했다.

“주제 파악을 똑바로 해야지.”

“…….”

비슷한 말을 너무 많이 들었나. 내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는데, 정작 그 말을 하는 권이도만 불안해 보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눈을 찌푸렸으나, 역시나 흐려진 시야는 돌아오지 않았다.

“짐 챙겨요. 다시 내 집으로 갈 거니까.”

그는 더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들고 있던 약통을 쓰레기통에 처박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기도 했다. 병원이라든가, 링거 따위의 말이 들린 것도 같은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부족하면 한 번 더 하겠습니다.”

“…….”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따라붙었다. 머리가 핑 도는 바람에 나는 벽에 손을 짚은 채 중심을 잡아야 했다.

“어차피 자주 붙어먹자고 했고…….”

권이정이 그랬다.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하다고. 어쩌면 몇 번 더 비슷한 행위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권이도 씨가 만족하실 때까지 할게요.”

모든 걸 끝내고 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만약 또다시 외면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단기간에 끝냈으면 했다. 기약 없는 두려움만큼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혼합시다.”

“아…… 씨발.”

날카로운 욕지거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권이도는 한 손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세진아.”

“…….”

“왜 사람을 미치게 해.”

그렇게 말한 권이도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걸어왔다. 움찔 놀란 나를 붙잡더니 억지로 침대를 향해 질질 끌고 간다.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힘이 나를 거칠게 침대로 내던졌다.

“아윽……!”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에 무리가 가긴 했다. 신음을 참으려 끙끙 앓는 나를 보고 권이도는 싸늘한 어투로 내뱉었다.

“내가 가잘 때 갔으면 좋았잖아.”

그제야, 권이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정확히는 짙은 눈동자에 담긴 그 감정들이. 온갖 너덜너덜한 감정들은 대개 분노와 원망 따위가 전부였다.

“잠깐, 이게 무슨…… 아, 허윽……!”

그의 손이 가운 깃을 억지로 벌렸다. 파도처럼 범람한 페로몬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 숨이 턱 막히는 감각과 함께 몸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허억…….”

꺼진 줄 알았던 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댐을 잃은 강물처럼 페로몬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짙은 꽃 냄새가 훅 풍기는 순간, 권이도가 내 양 손목을 붙잡아 머리맡에 고정했다.

“정세진.”

“하아, 하읏…….”

저항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밀려든 성감이 본능적으로 그의 페로몬을 갈망했다. 그런데도 그는 벗어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렇게 씹질이 좋으면 말로 했어야지.”

비웃듯 건넨 말에 애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는데, 가슴 언저리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자욱한 페로몬이 그의 것과 섞여서 비를 맞은 나무가 꽃을 피운 것만 같았다.

“……하으윽.”

그의 다른 손이 내 허벅지를 붙잡았다. 이미 벗겨진 가운은 몸을 가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그가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다리 똑바로 벌려.”

“……흐.”

그는 이미 부드럽게 풀린 입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페로몬을 느낀 순간부터 그와의 정사를 준비하고 있던 곳이었다. 질척거리는 내벽을 확인한 권이도가 억눌린 목소리로 짓씹었다.

“이따위 취급을 받으면서…….”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불같이 쏟아지는 페로몬이 그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권이도가 내 손을 놓아줬지만, 나는 팔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였다. 그는 내 무릎을 어깨에 걸친 채, 아무런 전조 없이 귀두를 푹 찔러 넣었다.

“……!”

다 풀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덜 나은 상처가 버거웠기 때문일까. 주먹으로 헤집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강타했다. 깊이를 가늠하려는 듯 허리를 움직인 그가 반쯤 빠져나간 성기를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 아파…….”

“……아파?”

목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신음처럼 흘린 말에 권이도는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웃음을 흘린다.

“여길 이렇게 세워 놓고…… 아프다고?”

그의 손이 발기한 성기를 콱 움켜쥐었다. 프리컴을 질질 흘리는 성기는, 비단 히트 사이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받아들이는 권이도를, 그의 온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

그는 엄지로 귀두를 문지르며 깊이 쑤셔 넣은 성기를 크게 쳐올렸다. 덜컹, 흔들린 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흐, 으……!”

아픈데, 아픈 만큼 쾌감이 일었다. 다리가 한계까지 벌어지고 아래가 찢어질 것처럼 뻐근했는데도 말이다. 마음과는 달리 몸이 반응해서,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병신 되고 싶지 않으면…….”

“아흑, 흐……!”

“힘, 빼는 게 좋을 텐데.”

나는 허벅지를 파르르 떨며 몸을 비틀었다. 이미 한번 혹사당했던 몸이 쥐가 날 것처럼 아렸기 때문이다. 그는 내 골반을 단단히 붙들고는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흑, 흣……!”

지나친 쾌감은 사실 통증이나 다름없다. 권이도가 딱 두 번 움직였을 때, 나는 찌릿찌릿한 쾌감을 느끼며 사정했다. 울컥 터져 나온 정액을 보고 그가 그르렁거리며 목울대를 울렸다.

“권이정이 박아 줬을 때도 이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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