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85)화 (85/131)

85화. Hiver Rigoureux(13)

계절이 하루아침에 바뀌듯 권이도와 내 사이도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불던 시선에선 이제 더 이상 나를 향한 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날씨는 아직 여름에 머무르는데, 그와 내 사이에만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혼당할 줄 알았다. 이 집에서 쫓겨나거나 다시 갈 곳을 잃어버릴 거라고. 어쩌면 다시 수갑을 차고 영영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내가 돌아갈 곳은 아무 데도 없으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권이도는 그냥 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그와 결혼해 이 집에 처음 들어왔던 그때처럼.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고 나를 무시했다. 나는 죽은 듯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가, 고용인이 식사를 하라고 부를 때만 밖으로 나왔다.

언제 나를 버리려나. 그런 두려움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었는지 모른다. 이미 동나 버린 수면제를 타 오고 싶었는데,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잠이 들 때마다 항상 권이도의 꿈을 꿨다. 처음엔 평범했던 꿈이 날짜가 바뀔수록 점점 악몽에 가까워졌다. 그에게 자료를 들켰던 날의 일이, 그가 내 뺨을 때리던 손길이 현실보다 더 끔찍하게 바뀌었다.

‘정세진.’

마치 앞뒤로 길이 막혀 고인 강물이 된 기분이었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서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조금만 더 지나면 썩어 버릴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망가진 관계를 고치는 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보다 어렵다. 감정을 쌓는 계기는 보잘것없었는데 부서진 감정을 잇는 데엔 많은 품이 필요했다. 그와 나눴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에도 처음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몇 번이나 해야 했다.

사소한 변명을 하나라도 해볼걸.

진작 그에게 모든 사실을 고해 볼걸.

자료를 훔치는 대신 무능력한 아들이 될걸.

모든 걸 내 손으로 망친 게 분명했다. 가족의 울타리에 속하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는데, 결국 내 곁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결백을 믿어 준 유일한 상대에게 용서를 빌 수조차 없을 만큼 멍청한 짓을 하고 말았다.

날이 지날수록 나는 초조함에 점점 말라 갔다. 우연히라도 나를 마주치면 지저분한 것을 보듯 피해 버리는 권이도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 하나 받지 못해서, 방치된 화초처럼 시들시들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늘 주어진 상황에 맞춰 살아왔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래가 걱정됐다. 마침내 나를 버린 가족들처럼 권이도도 언젠가 나를 버리고 말 테니까.

맨발로 눈밭을 헤매고 다닐 때 이러했을까. 눈을 감으면 금방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차라리 다시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는 것 정도.

“……언제 들어오는 거지.”

권이도는 매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내 방은 3층 구석이었지만, 계단 언저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고, 혹시 조금이라도 그의 페로몬을 느낄 수는 있지 않을까 해서.

그날도 나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권이도를 기다렸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운이 좋으면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으로 막연히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박, 타박, 계단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뒤로 몸을 숨겼다.

“…….”

그런데 기분 탓일까, 발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는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걸음걸이가 오늘따라 유독 느리게 느껴진 것이다. 간격도 뭔가…… 이상한 것 같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분명 권이도의 페로몬이었고, 걸음걸이 역시 눈에 익었다. 역시나 상대는 권이도가 맞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와는 달랐다.

어디 아픈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2층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

취한 거였다. 그리 나쁘지 않은 후각으로 짐작하건대, 그의 페로몬에 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많고 많은 양주조차 가끔 온더락으로 마시는 게 다이지 않았나.

나는 홀린 듯,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권이도는 비틀거리지 않았지만, 현저히 느려진 걸음걸이가 영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마침 2층에 다다른 권이도가 무심코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

“…….”

한참, 시선이 오고 갔다. 느리게 깜박이는 두 눈은 분명 취기가 오른 사람의 그것이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권이도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자려고 누워 있다 나온 터라, 나는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정장 차림의 그와 대조적으로 홈웨어를 입고 있는 모습이 퍽 비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는데 그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이젠 헛것도.”

고개를 저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지나쳤다. 그대로 방으로 가려는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권이도 씨.”

“…….”

그가 멈칫, 걸음을 멈췄다. 권이도는 물론, 그의 이름을 부른 나조차도 놀라고 말았다. 그대로 가만히 서 있던 권이도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뒤를 돌아봤다.

마주친 시선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드물게 당황한 얼굴은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 남았다. 이게 얼마 만에 마주 보는 얼굴이지. 고작 마주 보고 있을 뿐인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단 생각에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그와 마지막 대화 이후 처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용기가 부족해서 하지 못했던 한마디가 이제야 입 밖으로 나왔다.

“……변명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얼마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망한 모습을 보면서 오해를 풀었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후회했다.

“저는 그냥,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대단하네요.”

그런데 권이도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대답했다. 대단하다니. 긍정적인 말로는 들리지 않았다. 멍한 시선을 보내는 내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어투로 내뱉었다.

“며칠간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게 고작 그따위 변명인가 보죠.”

“…….”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냉랭한 표정이었다. 좀 전의 당황스러움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고, 마른 모래처럼 무미건조한 시선만이 느껴졌다.

“이제 와서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권이도는 그 말만 내뱉고 나를 지나쳤다. 내가 멍하니 눈을 크게 뜨자, 스치듯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가 기회를 줬었잖아, 세진아.”

비로소 알게 됐다. 정말 무슨 짓을 해도 돌아갈 수 없겠구나. 타이밍이 어긋났던 그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던 미래구나.

“……잠, 권이도 씨!”

머릿속이 하얘지는 바람에 다짜고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미 등을 돌린 그를 붙잡아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그를 놓쳤다간 또다시 고립되고 말 거란 생각에, 어떻게든 기회를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

“하라는 대로…… 권이도 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평생에 거쳐서 갚고, 자료가 필요하다면 다시 훔쳐 오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내 도둑질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

그래서 우리 관계를 돌이킬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가 나를 버리지 않고, 또다시 온전한 애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의 뒷모습을 더는 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한 번만…….”

“……뭐든지 하겠다고?”

권이도는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만큼 흐릿한 음성이었다. 픽 웃음을 흘린 그가 느리게 되물었다.

“그럼 무릎이라도 꿇어 볼래요.”

“…….”

“용서를 구할 거면 그 정도는 해야지.”

아마, 그는 내가 못 하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붙잡은 팔을 툭 털어 내고 등을 돌렸겠지.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스르륵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짙은 시선이 내 머리꼭지에 따라붙었다. 나는 그의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댄 채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

“권이도 씨를 배신하려던 게 아닙니다.”

나는 정말 그의 신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상처 주거나 화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 충분히 예상했지만, 그게 이토록 아플 줄은 몰랐단 말이다.

“제 생각이 짧아서…….”

“압니다. 그러려던 게 아닌 거.”

권이도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분명 담담한 목소리였는데, 그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들자, 비웃듯 흘러나온 한마디가 들렸다.

“그쪽은 배신이라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

“…….”

가끔, 그가 정말 내 속내를 읽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말대로, 처음 자료를 훔칠 때까지도 그가 내게 실망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우리가 그런 사이가 아니었고, 이런 사이가 될 줄도 몰랐으니까.

“정세진 씨 머릿속엔 딱 두 개밖에 없었겠죠. 정 회장, 그리고 해신그룹.”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아버지는 몰라도, 해신의 영광은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나는 그저, 그 누구에게도 버림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거기에 나는 없고.”

하나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건, 술기운에 흐려진 그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내가 간절히 갈망하던 감정이 스치듯 내비쳤기 때문이었고.

“……그래, 거기에 나는 없고.”

그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가만히 날 내려다봤다. 그러다 문득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세진아.”

커다란 손이 느릿느릿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엄지로 뺨 언저리를 문지르고 살금살금 목까지 내려간다. 어린 짐승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그 손길을 갈구했다. 눈앞이 흐려지는 이유가 그의 페로몬 때문인지, 아니면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귀 아래 움푹 들어간 곳을 누르던 손이 확 떨어졌다.

“정세진.”

“…….”

날카로운 페로몬이 나를 한가득 짓눌렀다. 마치 집중하라는 것처럼. 아, 이건 페로몬 때문이구나. 그리 생각하며 색색 숨을 몰아쉬는 나를 권이도는 한참 내려다봤다.

“…….”

“…….”

말주변이 좀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 정적을 깨뜨릴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권이도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다시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뭐든지 하겠다니…….”

“…….”

“그쪽이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는데.”

그 말을 이해할 시간도 없었다. 그가 내 뒤통수를 잡아 바지춤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뜨자 권이도가 내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한번 해봐요. 마음에 들면 그깟 자료쯤은 더 줄 테니까.”

“…….”

나도 모르지 않았다. 권이도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지금의 상황이, 무얼 뜻하는 건지.

“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머리채가 붙잡혔다고 느꼈다.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감싸던 손길은 이내 억센 것으로 바뀌었다. 하릴없이 넘어간 고개 탓에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창부처럼 굴어야지.”

그에게 저항할 새도 없었다. 눈 깜박할 새에 커다란 무언가가 내 입술에 닿은 것이다. 아차 하는 사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물건은 입을 한계까지 벌렸음에도 제대로 물 수조차 없었다.

“으웁…….”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 그의 행동에 놀라기보다,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더 놀라고 말았다. 구역질이 차올랐지만, 그마저도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감각에 막혀 버렸다. 느릿느릿 밀고 들어온 성기가 입천장과 혀뿌리를 꾸욱 짓눌렀다.

“입 똑바로 벌려.”

나는 이런 걸 바라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이야기한 게 아니다. 그저 권이도가 내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길 바랐을 뿐이지. 그게 변명할 기회건 아니면 사죄를 할 기회건. 어느 쪽이건 이깟 분풀이를 바란 게 아니었다.

“정세진.”

분명 무덤덤한 목소리였는데, 가슴이 시릴 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서가 아니라, 이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냉정하게 구는 권이도를 향해 울컥 원망스러움이 솟구치는 바람에.

“우으…….”

그는 내게 아무런 자비도 보여 주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은 손길은 내가 물러서지 못하게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투툭, 입꼬리가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목구멍이 억지로 열리기 시작했다.

“후…….”

목이 불룩, 나온 기분이었다. 권이도는 기어코 뿌리 끝까지 처박은 뒤에야 삽입을 멈췄다. 낮은 숨소리를 내며 멈췄던 그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허리를 느릿느릿 뒤로 물렸다. 그리고 이내, 반쯤 빠져나간 성기가 아무런 전조 없이 목구멍을 확 꿰뚫었다.

“욱……!”

목젖이 콱 짓눌리고 구역질이 치솟았다. 목구멍이 조여드는 만큼 가까스로 벌렸던 입술 역시 함께 오므라들었다. 그저 머금고만 있던 성기에 앞니가 닿는 순간, 그가 움직임을 멈춘 채 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

힘없이 상체가 옆으로 무너졌다.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리는 동안 권이도는 제 페로몬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온몸을 덜덜 떨며 널브러진 내게, 싸늘한 목소리로 이야기했을 뿐.

“이거 하나 똑바로 못 해?”

“흐…….”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터졌다. 살면서 울어 본 기억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은데. 뭐가 그렇게 서럽다고 줄줄 흘러내렸는지 모르겠다. 입을 열면 흐느낌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문 채로 숨까지 참아야 했다.

“다리를 못 벌리면 입이라도 잘 벌려야지.”

차라리 다리를 벌리겠다고 할까. 처음엔 죄책감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이제는 서러움과 분노로 얼룩지고 말았다. 심장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어딘가 망가진 기분이었다.

“이런 재주도 없이 뭘 하겠다는 건지…….”

권이도는 일부러 나를 상처 주려고 마음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콜록거리며 웅크리고 있는 나를 아무런 감흥 없이 내려다본 것이다. 분명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주제 파악을 하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하.”

모자란 숨을 몰아쉬는 사이, 다시 뒤통수가 붙잡혔다. 눈물로 뒤덮인 얼굴에 그가 제 성기를 문질렀다. 뺨을 툭 건드리곤 꾹 닫힌 입술에 다시 귀두를 가져다 댄다. 억울함에 눈을 들어 올리자, 권이도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얌전히 굴어, 정세진.”

그 한마디는 마치 족쇄와도 같았다. 똑바로 하지 않으면 풀어 주지 않겠다는 가혹한 족쇄. 내 손에 채워졌던 수갑처럼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그런 종류.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끊어 낼 수 없는 그런 굴레 말이다.

“……욱.”

양 뺨을 그러쥔 권이도가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입 안을 파고들고, 아까처럼 목구멍을 억지로 열기 시작했다. 중심을 잡기 위해 그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지만, 그마저도 힘없이 미끄러졌다.

“흐웁…….”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권이도를 밀어 냈다간 정말 다시는 얼굴조차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푹, 밀려든 성기가 입 안을 마구 헤집었다. 혓바닥에 닿는 액체가 눈물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토기가 치솟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목구멍을 조이며 견디는 것뿐이었다.

“……하.”

엉망진창인 행위였다. 나는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고, 모자란 호흡 탓에 눈앞이 어두워지길 반복했다. 기둥이 이에 긁힐 것이 분명한데도, 권이도는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마침내, 그는 내 목구멍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꿀렁이며 넘어온 정액에 페로몬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권이도는 내가 모든 걸 삼킬 때까지 그대로 머물다가 성의 없이 나를 놓아주고 옷차림을 갈무리했다.

“콜록, 콜록…….”

그리고 끝이었다. 나를 바닥에 버려둔 채, 그는 곧장 제 방으로 돌아갔다. 달칵, 닫히는 문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랗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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