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Hiver Rigoureux(12)
빗줄기는 계속해서 거세졌다. 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인 건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낀 먹구름 탓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이도의 비서는 집으로 향하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감 있는 태도가 정말 김 실장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또다시 넋을 놨고, 차는 빗길을 지나 내가 머물던 그의 집에 다다랐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비서는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 곧장 다시 차에 올라탔다. 나는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왔다. 권이도는 아직 퇴근 전이었기에 그 커다란 집엔 고용인들만 남아 있었다.
“…….”
설마, 이 집에 돌아오게 될 줄 몰랐는데. 만약 무죄가 증명된다고 해도 다시 권이도와 만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미 한 번 누명을 쓴 나를, 그가 구제해 줄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민 사람이 권이도였다.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비참함을 느껴야 하는 건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와중에 드는 생각이 이거였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를 도와준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에게 어떤 피해를 줄지 모르니까. 만약 모든 걸 알게 된다면 단순히 배신감을 느끼는 걸로 끝나지는 않겠지.
나는 홀린 듯 걸음을 돌려 정원으로 나갔다. 우산은 챙기지 않았고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간 뒤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빗속으로 나아갔다.
쏴아아, 내리는 빗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장대비는 아니었지만 맨몸으로 맞기엔 또 굵은 비였다. 이미 다 구겨진 정장이 쫄딱 젖고, 비 맞은 생쥐처럼 볼품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화사하게 꽃이 핀 정원이 이토록 우중충하게 보일 줄이야. 하늘이 온통 회색이었기 때문에 푸르른 풍경마저 낮은 채도를 띠었다. 가라앉은 기분처럼 정적인 풍경은, 쏟아지는 빗소리가 아니었다면 정지 화면처럼 느껴졌을 거다.
나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서 온몸을 적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비에 잠겨 숨이 멎고 싶었다. 뒤이어 밀려올 미래가 너무도 두려워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꼭 모든 바람이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진작 아버지의 아들로서 인정받았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는 빗줄기는 내 마음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진아.’
권이도가 보고 싶었다. 양심 없게도, 두려움 끝에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다. 비로소 혼자가 되어 버린 나를 그가 딱 한 번만 받아 줬으면 했다.
기분 탓일까.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갈하고 올곧은 걸음걸이가 내가 아는 한 사람을 닮아 있었다. 타박타박,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에 감겼다. 습기 가득한 공기에 짙은 나무 냄새가 섞여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인 건,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와 수려한 이목구비.
“정세진.”
“…….”
비 내리던 하늘이 우산 그림자에 뒤덮였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만약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담긴 걱정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것이길 바랐다.
“왜 이러고 있습니까?”
“……아.”
나는 뒤늦게 그가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분명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나타나자마자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권이도가 한쪽 팔로 단단히 붙들었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권이도 특유의 페로몬이 비 냄새에 섞여 훅 풍겨 왔다. 이미 젖어 버린 몸뚱이를 한 품에 안은 그가 우산을 내 쪽으로 좀 더 기울였다.
“몸이 찬데…….”
늘 서늘하다고 느꼈던 권이도인데, 지금은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아니, 그의 말대로 내가 지나치게 차가운 걸 수도 있었다. 붙잡힌 팔뚝도,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도, 그 모든 게 가슴에 응어리져 남았다.
“기껏 빼 왔는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까칠한 말투와 달리, 그 내면에 담긴 내용물은 분명 걱정이었다. 민재가 내비치던 그것, 그의 눈을 통해 전해지는 달큼한 감정.
“왜…….”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데도 갈증이 났다. 목을 축이고 싶다는 충동과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함께 찾아들었다. 몸이 이렇게나 젖었는데, 반대로 목은 바짝바짝 말라 갔다.
“……왜 데리고 나오셨어요?”
차라리 그냥 두지. 그랬다면 민재를 마주칠 일도, 권이도의 얼굴을 보고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양심을 쥐어짜는 것처럼 이토록 괴로운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도…… 남편이 잡혀가면 좀 곤란해서.”
권이도는 아무렇지 않게 나와 시선을 맞췄다.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다가 코와 입술, 그리고 어깨까지 꼼꼼히 살펴본다. 느리게 움직인 입술이 야트막한 숨결을 내뱉었다.
“뭐, 이게 명목상의 이유고.”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젖은 머리칼을 헤집는 손길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은 그가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너한테 그럴 깜냥이 없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담담히 내뱉은 한마디가 그 어떤 위로보다 마음에 남았다. 그의 단조로운 평가를 듣는 순간, 그제야 손목에 찼던 수갑이 풀어진 기분이 들었다.
“돈이 필요했으면 그냥 내 환심을 사려고 했겠지. 몇 푼 되지도 않는 그깟 공금을 횡령하는 게 아니라.”
자칫 재수 없을 말이 권이도의 입에서 나오니 타당하게 들렸다. 실제로 내게 그런 욕심이 있었다면 권이도의 편에 붙는 게 훨씬 합리적이었을 거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받지 못해서, 그래서 지난밤 내내 내게 내려질 선고만을 기다렸다.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버릇은 고쳐야지.”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뒤늦게 밀려든 억울함이 미처 막아낼 틈도 없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눈두덩이에 뜨겁게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흑…….”
내가 뭘 그리 잘못했을까. 눈을 깜박이기 무섭게 눈물이 쏟아졌다. 힘없이 흘러내린 눈물은 부끄럽단 생각이 들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윽…….”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됐을지도 몰랐다. 남들은 부럽다고 할 만한 것들을 갖췄는데, 그럼에도 이런 대우를 받는 걸 보면.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크게 어그러진 게 아니고서야, 항상 이런 결과를 맞이할 리가 없지 않은가.
“……흡.”
“…….”
권이도는 어설프게 나를 품에 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비 한 방울 맞지 않도록 우산을 씌워 준 채 자신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내 몸을 끌어안았다. 짙은 나무 냄새와 권이도 특유의 향긋한 체향이 응어리진 마음을 살살 어루만졌다.
“……흐윽.”
너무 미안하면 미안하다는 말도 안 나오는구나. 정말 미칠 만큼 죄책감이 들어도, 그걸 사과하는 것마저 용기가 필요하구나. 내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비는 행위가 사실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것이었구나.
“흡…….”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래서 고백할 수 없게 됐다. 혹시라도 그가 한순간에 나를 내칠까 봐, 나라는 사람에게 차갑게 등을 돌려 버릴까 봐.
“흐읍, 흑…….”
속으로 얼마나 많은 고해 성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고, 그리고 또 미안하다고. 당신을 실망하게 만들 것 같아 너무 면목이 없다고. 내가 이렇게 너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정말 양심 없는 짓이라 해줄 말이 없다고.
“울지 마, 세진아.”
나는 그의 품에서 내리는 비처럼 끝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권이도는 한참이나 나를 안아 줬고, 나긋나긋 부드러운 페로몬을 흘려보냈다. 나를 달래는 음성,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 등을 다독이는 손길까지 전부 녹아내릴 것처럼 상냥했다.
그래서 끝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도 흐느낌이 새는 바람에 다시 다물어야 했다. 지금의 다정함을 차마 잃을 자신이 없어서 나를 구해 준 그에게 감사 인사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며칠 뒤, 해신금융그룹에서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출시했다. 독보적인 보안 시스템을 갖춘, 해신만의 프로그램이었다. 그건, 내가 권이도의 서재에서 훔쳐 간 바로 그 시스템이었다.
* * *
냉랭한 공기가 서재 내부를 한가득 채웠다. 분명 서늘한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손끝이 차갑게 식을 만큼 차가운 기온이 느껴졌다. 드러난 목덜미가 따끔거리는가 하면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
나를 보는 시선은 지금껏 느껴 본 그 무엇보다 두려운 종류였다. 짙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으면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싹싹 빌고 싶어지곤 했으니까. 하물며 이번엔 내 잘못인데,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 예의상 물어는 봐야겠죠.”
평소엔 풍부했던 음색이 지금은 바닥을 기듯 가라앉아 있었다. 얼핏 무뚝뚝한 목소리였으나 그에게 제법 익숙해진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눈앞의 남자는 지금,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간신히 내리누르고 있다는 걸.
“그쪽이 그랬습니까?”
그의 손에 들린 건 선호그룹 마크가 찍힌 서류뭉치였다. 이미 한 번 눈으로 본 적 있는 것이었고, 나는 그게 어디에 놓여 있던 서류인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 권이도와 대치하고 있는 바로 이곳. 벽면에 총이 걸린 서재의 테이블 위에서 그것과 같은 서류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말밖에 없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서재에 들어온 순간부터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권이도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눈으로 나를 보는지, 그런 것들을 도무지 확인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죄송하다고…….”
픽,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권이도는 그다음 말을 내뱉을 때까지도 한참이 걸렸다. 괴로울 정도로 긴긴 침묵 끝에 그가 딱 한마디를 더 물어봤다.
“언제 그랬습니까.”
질문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손에 서류가 들어온 날짜. 그 시기를 묻고 있는 거겠지.
“권이도 씨가 출장 갔을 때…….”
본가에 들러 저녁을 먹고, 나 홀로 오피스텔에서 밤을 보냈던 날. 나는 그날 아버지의 말을 거절할 수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은혜 갚기건, 이미 학습된 복종이건, 아버지의 말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그때 전달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다. 평소엔 철두철미한 권이도가 실수로 서류를 놓고 갔을 테니. 하필 고용인조차 들어오질 않아서, 핸드폰으로 모든 내용을 찍을 시간이 충분했으니.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는데, 내가 너무 모자란 사람이라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구차한 애정 한 조각 받아 보겠다고 해서는 안 될 행동조차 구분하질 못했다.
권이도가 가진 시스템은 미완성이었기에 아마 아버지는 내가 전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나머지를 완성시켰을 거다. 세상에 출시하기 전에 특허를 내서, 그 이후엔 해신의 허락이 없으면 사용하지 못할 터다.
“……하.”
사업은 아주 조그만 일로 틀어지곤 했다. 개발에 필요한 건 자원이기에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필히 적자가 나는 구조였다. 선호는 매년 새로운 상품을 내놓았으니, 이번 일로 연 단위 스케줄이 어그러지는 경우도 있을지 몰랐다.
“정세진 씨.”
나는 그의 부름을 듣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직까지도 그의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서 잔뜩 숨을 죽인 채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 그때는 나랑 아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권이도의 손에서 서류가 떨어졌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서류들이 마치 지금의 내 심정과도 비슷했다. 팔랑, 날아온 서류 한 장은 정확히 내 발치에 안착했다.
“왜 그동안 안 말했습니까?”
그가 느낄 감정을 알고 있다. 입을 맞추고 감정을 나누는 동안, 자신을 속였단 사실에 화가 나겠지. 우리가 섞은 건 비단 몸뿐만은 아니었는데, 그 안에 불순물이 섞여 있었단 사실을 견딜 수가 없을 거다.
“그 시간이, 정세진 씨한테도 짧지 않았을 텐데…….”
“…….”
“나한테 한마디만 했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겠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계획이 제대로 망가진 모양이었다. 한 번 더 죄송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아까보다 훨씬 싸늘한 부름이 흘러나왔다.
“정세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냥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화가 났으리라 생각한 그에게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들이 느껴졌으니까. 덜덜 떨리는 눈으로 보게 된 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처참한 눈빛을 한 권이도였다.
“난 지금 변명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거야.”
“…….”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저 원망 따위가 가득할 줄 알았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엿보였다. 가령 배신감과 후회, 그리고 허무함과 쓸쓸함 따위의 것들이. 심지어는 지저분하게 얼룩진 애정과 그 끝에 피어오른 작은 상처까지도.
“그럴싸한 핑계라도 대봐요. 안 그러면 나 좋을 대로 생각할 것 같으니까.”
아니라고 말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건, 권이도가 주는 마지막 자비였다. 그저 아버지가 시키신 일이라고, 당신을 실망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바짝 엎드려서 빌 기회.
“협박이라도 당했어요?”
그런데 막상 말을 하려고 보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협박당하지 않았고, 아버지에게 그 어떤 대가도 약속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걸 타인의 탓으로 돌려도 되는 건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알 수가 없어졌다.
‘세진이 네가 선택한 일이야.’
무언가 일을 그르쳤을 때,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고. 마치 아버지의 아들이 된 이상 반드시 해야 할 의무들이 있듯이.
“……협박 같은 거 안 당했습니다.”
홀린 듯 입술을 움직였다. 변명거리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막상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결국 나오는 말들이 이런 거였다.
“제가…… 제 손으로 훔친 거예요.”
‘그냥 네가 했다고 하면 끝나는 일 아니냐, 응?’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변명이 통했던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안 그러겠습니다. 딱 그 정도 이야기가 내게 허락된 전부였다. 무어라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항상 최악에 가까워지곤 했다.
“처음부터 해신이 받을 자료라고 들어서…….”
짝, 가벼운 파열음이 들렸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내가 한참이나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건, 그 통증이 지나치게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내게, 아까보다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미쳤다고 남한테 그런 서류를 넘겨주나?”
남이라니. 방금 맞은 뺨보다 그 말이 더 아팠다. 왼뺨에선 이제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데, 배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속이 갑갑했다. 낮게 헛웃음을 흘린 권이도가 짓씹듯 이야기했다.
“내가 변명할 가치도 없는 사람인가 보죠.”
“…….”
아, 내가 또 말을 잘못했나 보다.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방금 날려 버린 게 분명했다.
“바라는 게 없다더니…….”
“…….”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명치가 확 비틀렸다. 목구멍이 바짝 조여들고 뒷덜미가 싸하게 굳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했어야지.”
권이도는 그 말만 내뱉고 표정을 지워 냈다. 아까의 상처받은 표정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사무적인 태도로 딱딱하게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을 뿐.
“정세진 씨.”
모르고 있었다. 가장 예의를 차린 이름이 가장 남처럼 느껴진다는걸. 그가 내게 화를 내는 것보다 싸하게 굳은 얼굴이 더 두렵다는걸.
“이 일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는 나를 지나쳐 곧장 서재를 빠져나갔다. 쾅, 하고 닫힌 문소리가 우리 사이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고, 내게 남은 건 날카롭게 날이 선 그의 페로몬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