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Hiver Rigoureux(11)
정신없이 질문을 들었다. 처음 보는 서류가 계속해서 나왔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돈이 통장 잔고로 남아 있는가 하면, 내가 결재한 적 없는 서류에 내 도장이 찍혀 있기도 했다.
“정세진 씨, 대답 안 하시면 곤란합니다.”
난생처음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새 소식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이 건물 앞에서 내 사진을 마구잡이로 찍어 갔다. 기업 비리를 뿌리 뽑겠다는 생각이었는지, 퍼포먼스와도 같은 연행이었다.
“변호인이 오기 전까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으나, 돌아온 건 알 만하다는 시선이었다. 이따금 들리는 소곤거림은 ‘은혜도 모르는 놈’ 따위가 주된 내용이었다.
뭐라더라, 거액의 횡령 혐의라고 했다. 수백억이 넘는 돈이었고 그게 모두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고. 금액을 계속 강조하면서, 금융 기업이 그래도 되냐는 질책이 따라붙었다.
나는 오랜 기간 휴가를 다녀왔기에 그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재정이 기울었다는 것도, 공금에 구멍이 났다는 것도 몰랐다. 분명 위태롭긴 했으나, 이렇게 와르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건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내 휴가조차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수작 정도로 보았다. 억지로 끼워 맞춘 퍼즐을 들이밀며 이게 사실임을 인정하라고 끝없이 닦달했다. 김 실장조차 없이 홀로 남은 처지에선 그저 가만히 입을 닫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정세진 님 담당 변호인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변호사는 아버지의 전담 변호인이 아니었다.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변호사는 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러 갔다. 나는 하염없이 내 무죄가 증명되길 기다렸으나, 돌아온 변호사가 해준 말은 고작 이따위였다.
“회장님께서 죗값을 치르고 나오라고…….”
“……예?”
죗값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해신에서 일하는 몇 년간 나는 단 한 번도 돈 장난을 친 적이 없는데. 이따금 임원들이 그런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건 내 선에서 건드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얌전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정세진 님을 도와줬다간 기업 이미지가 나빠질 거라면서…….”
변호사가 전해 준 말들은 전체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죄를 인정하라는 말도, 형량을 다 받고 나면 돌아오라는 말도,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말도.
“형량을 줄이려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쪽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가 끼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친아들이 아니라는 불안감에 욕심이 생겼을 뿐이라고, 변호사는 그런 식으로 동정표를 얻자고 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잡아떼라거나, 누명을 벗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거나 하는 내용도 없었다.
“저, 그리고…….”
알고 있었다.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 뿐, 이 모든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내게 덤터기를 씌운 채 이번 문제를 모면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기회에 내게서 모든 걸 빼앗을 생각인지도 모르지.
“본부장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하루를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다.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았고 들리는 거라곤 정체 모를 기계음이 전부였다. 핸드폰을 압수당한 탓에 연락 수단조차 없었지만, 설령 있다고 한들 도와 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없었을 거다.
나는 밤새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온통 믿지 못할 상황 속에, 지금껏 지내 온 날들을 끝없이 반추했다. 맨발로 눈밭을 가로지르던 순간, 아버지를 마주했던 그 날의 일, 아들로 인정받기 위해 했던 많은 노력과 그럼에도 해소하지 못했던 갈증까지.
이런 결과를 보겠다고 여태까지 발버둥 쳐왔을까.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게 꿈일 것만 같았다. 아득히 멀어진 현실감은 도무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였다. 눅눅한 공기에 쇠 비린내가 섞이고, 들이마신 숨결엔 비 맞은 아스팔트 냄새가 느껴졌다.
‘네가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다, 세진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아마 그럴 수 없을 거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번 일을 끝으로 내 쓸모는 다했을 테니. 만약 징역살이를 한다면 그 이후엔 정말 타인이 되어 버릴 터였다.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가 손가락에 걸리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엔 어색하기 짝이 없던 것이 지금은 없으면 허전할 만큼 익숙해졌다. 권이도는 이 소식을 들었을지. 그럼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런 잡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세진아.’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들켰을 잘못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척할 수 있을 테니. 비록 그에겐 최악의 사람으로 남겠지만 이렇게라도 도망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수도.
누군가가 나를 찾아온 건 창밖에 해가 떠오를 무렵이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온통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이 보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제 나를 쥐잡듯 몰아붙이던 남자가 들어왔다.
“따라 나오세요.”
남자가 향한 곳은 내가 조사를 받던 장소였다. 그는 내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연신 탐탁지 못한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내가 핸드폰을 받지 않자, 억지로 손에 쥐여 주며 혀를 차기도 했다.
“죄짓고 살지 맙시다. 예?”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밤새 굳어 버린 머리로는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변호사조차 변호를 포기했는데, 갑자기 소지품을 돌려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아직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않았건만, 이건 마치 나를 놓아주는 것 같지 않은가.
“하여튼 돈 많은 것들은…….”
남자는 짜증스럽게 중얼대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이래서 재벌들은 안 된다느니, 세상 참 불공평하다느니. 억울함 담긴 한탄을 듣고 있노라니 뒤늦게 머리가 돌아갔다.
“거기 계속 서 계실 겁니까?”
누군가가 나를 보석으로 풀어 준 것이다.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고 재판을 받기도 전에 밖으로 빼낸 거였다. 혹시, 그게 설마 아버지는 아닐까. 그러한 기대는 잠시였다.
“정세진 님?”
열린 문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30대쯤 되어 보였고, 끼고 있는 얇은 안경이 김 실장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 명함을 한 장 내밀며 이야기했다.
“전무님 비서인 박경석입니다.”
가장 먼저, 선호그룹 마크가 보였다. 이름과 직급, 연락처 따위가 적힌 명함은 도무지 가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전무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전무님 지시로 모시러 왔습니다.”
* * *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꺼져 있던 핸드폰 전원을 켜 그간 쌓인 연락을 확인했다. 부하직원들에게 온 메시지, 권이도가 남긴 부재중 기록, 연락도 닿지 않던 친구들의 안부 확인과 김 실장이 남긴 메시지까지.
「죄송합니다.」
“…….”
당신도 알고 있었을까.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그래서 출근길 내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잘하실 거라던 말은 어쩌면 구치소를 뜻했던 건 아닐까.
우습게도, 그중에 가족들의 연락은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민재와 서영이까지도. 내가 하루아침에 검찰에 구속됐는데,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처럼 하나같이 입을 닫아 버렸다. 제대로 된 변호인조차 없이 죗값을 치르고 나오라며 절벽으로 등을 떠민 것이다.
아, 나는 진짜 버림받았구나. 그저 쓰다 버릴 카드에 불과했구나.
무심코 깨달은 사실이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원래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 새삼 뼈에 사무칠 만큼 절절히 억울했다. 이제 와 비참해질 부분이 남지도 않았건만, 가슴 한편이 어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네가 우리 기업의 영웅이다, 세진아.’
나는 영웅이 아니라 아들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고작 희생양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누군가는 실제로 저질렀을 비리를 내게 다 뒤집어씌우고 잘라 낼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장기말로서 수명을 다했으니 꼬리를 자르듯 내다 버린 것이다.
“……하.”
멀미가 났다. 속이 잔뜩 뒤집히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욕지기가 솟구쳤다. 입을 열면 모든 걸 쏟아 낼 것 같아서 마른침을 삼키며 상체를 숙여야 했다.
“괜찮으십니까?”
권이도의 비서는 사무적인 얼굴로 내 안위를 살폈다. 불편하면 부축해 드리겠다며 조심스럽게 내 팔을 붙잡았다. 정말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그를 밀어 낼 생각도 못 한 채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렸다.
“……정세진?”
그런데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를 어두운 색으로 물들이고, 답지 않게 수수한 옷차림을 한 사람.
“정세진 너……!”
민재는 성큼성큼 다가와 다짜고짜 내 양팔을 붙들었다. 나를 부축해 주던 비서가 주춤거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잔뜩 일렁이는 두 눈이 보였다.
“너…… 너 어떻게 나왔어?”
우습게도, 그 내면에 담긴 감정은 분명 걱정이었다. 눈 밑은 퀭하게 변한 채로, 민재는 분명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부담스러웠을 그 감정이, 지금은 마냥 우습게 느껴졌다.
“분명 아버지가…….”
말을 이으려던 민재가 입을 딱 다물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또한 함구령을 들었을 게 분명했다. 제아무리 안하무인인 민재라도 이런 중요한 일에 멋대로 굴진 못하겠지.
“……그 새끼가 빼줬냐?”
민재는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치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한껏 사나워진 두 눈이 나를 지나 비서에게 닿았다. 비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자리 피해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성의 없이 민재의 팔을 떨어뜨렸다. 거칠게 붙잡고 있던 것치고 민재는 금세 나를 놓아줬다. 나는 옷자락을 털어 내며 민재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긴 왜 왔어?”
어떻게 들어왔을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나 좀 쥐여 주거나, 아니면 면회를 핑계로 아버지의 이름을 팔았겠지. 올라오지 못하고 주차장에 머물던 걸 보면 아마 그냥 돌아갔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왜 왔냐니.”
민재는 떠듬떠듬 입술을 달싹였다. 내 표정을 보고 뭘 느꼈는지, 평소보다 성질이 한풀 꺾여 있었다. 이내, 인상을 팍 찌푸린 민재가 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네가 잡혀갔다니까…….”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생각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이 날아간 건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 망가진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문제였지.
“내가 잡혀갔는데, 그게 뭐.”
“…….”
냉랭한 말투에 민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를 이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착한 아들 연기에는 언제나 착한 형 연기도 자연스레 따라붙었으니까.
“동정이라도 하러 왔어? 아니면 ‘형 걱정해 주는 건 동생밖에 없네.’ 이 말이 듣고 싶어서?”
“야 씨발, 너 말을 그따위로……!”
“정민재.”
그냥 다 지긋지긋했다.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이 말을 하는 상황조차 피곤했다. 원래라면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이제는 이러면 안 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잡혀 왔는지 너도 알잖아.”
지금의 상황이 아버지의 독단적인 행동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해자가 있으면 조력자가 있기 마련이고, 조력자가 있으면 방관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 커다란 집에 있는 식구들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한 편이나 다름없었다.
“알면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
“…….”
나를 보는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역시, 민재도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왜 잡혀 왔고, 그게 누구 때문인지. 앞으로 어떻게 되었을지 따위를.
“알아들었으면 집에 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민재를 지나쳤다. 통쾌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냥 공허했다. 물밀듯 밀려드는 허무함에 눈물 한줄기조차 나오지 않았다.
“씨발, 정세진!”
그런데 한 세 발짝 걸었을까. 민재가 버럭 소리쳤다. 손목이 억세게 붙잡히고 몸이 휙 돌아갔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민재가 짓씹듯 이야기를 꺼냈다.
“너 진짜 그따위로밖에 말 못 하냐?”
적반하장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설령 이 일에 민재의 잘못이 없더라도. 일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을 텐데.
“왜 잡혀 왔는지 알면, 그럼 씨발 오지도 못해? 지금 그 새끼가 너 빼줬다고 뵈는 게 없어?”
왜 얘는 배우는 게 없지. 내가 이 정도로 말했으면 적당히 물러서야 하는 게 아닌가. 왜 기어코 사람을 끝까지 뒤집어 놓느냔 말이다.
“너 씨발 지금……!”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민재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프도록 붙잡힌 손목에서조차,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지.”
“…….”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비겁하다고 해도 좋았다. 항상 모르는 척 무시해 놓고, 이런 상황에서 알은체를 한다는 게. 그가 미처 놓지 못한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 그걸 이용해 말문을 막아 버린다는 게.
“너도 알잖아. 내가 왜 일부러 형 소리하는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딱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지금껏 지켜온 울타리가 지저분한 잔재만 남긴 채 와르르 무너져 버린걸.
“형은 무슨…….”
픽, 웃음이 나왔다. 이 말을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는데. ‘형은 씨발…….’ 그리 말하던 민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형 이름 부르면서 자위하는 동생이 어디 있어.”
어머니를 닮아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마구 흔들리는 두 눈은 이제 안쓰러울 정도였다. 울긋불긋하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민재의 손을 떼어 냈다.
“민재야.”
“…….”
“내가 여태 널 봐준 건 네가 내 동생이라서야.”
만약 우리가 정말 가족이었다면, 나는 이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다. 누가 봐도 안쓰러운 몰골인 민재를 보며 이토록 무미건조한 감상을 느끼지도 않았겠지. 우리가 정말 남이니까, 호적조차 올리지 않은 타인이니까, 그래서 이런 결과가 되어 버린 거였다.
“우리가 가족이 아니면 내가 네 어리광을 받아 줄 이유도 없어.”
그는 나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가 가족이라 유지되고 있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질없는 관계였으나, 내가 지키려고 노력한 덕에 여기까지 온 거였다.
“나는 여태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했거든.”
나 혼자 놓지 못한 미련이었다. 애초에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부득불 고집을 부린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일이었으니, 마땅한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근데 이젠 아닌 것 같다.”
밤새, 생각이 정리된 모양이다. 그 처참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씁쓸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게 메마른 것처럼 내내 고요한 기분이었다. 어차피 이런 마지막을 맞이할 텐데, 대체 뭘 그렇게 노력한 걸까.
“갈게.”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게 정말 민재와의 마지막 대화라는걸. 나는 그대로 민재에게 등을 돌렸고, 민재 역시 나를 붙잡지 않았다. 20년간 이어진 인연은 딱 거기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