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Hiver Rigoureux(10)
권이도는 내게 불어를 가르쳐 달라고 이야기했다. 일 때문에 잠깐 필요해졌는데 그렇다고 또 선생을 고용할 정도는 아니라면서. 가르치는 데는 소질이 없다고 대답하자, 그냥 간단한 인사말과 읽는 법 정도면 된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와의 입맞춤은 다소 충동적인 경향이 있었다.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아니고,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아니다. 밖에서는 살가운 관계를 연기할지언정 집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단 말이다. 그런데 불어를 가르쳐 달라니.
‘정세진 씨.’
‘…….’
‘나랑 섹스도 하고 방금은 키스까지 했으면서. 불어 하나 가르쳐 주는 건 못 합니까?’
그 말에 반박할 얘기가 없었던 게 문제였다. 그때까지도 권이도의 온기가 남아 있는 기분이라, 머릿속이 잔뜩 혼란스러웠다. 정말 달 속에 있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말 필요로 한다면 마땅히 거절할 구실도 없었으니까. 권이도는 그제야 만족한 듯, 드물게 입꼬리를 말아 올린 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후에는 별다른 것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우리는 항상 아침 식사를 함께했고 그가 퇴근한 뒤에 간단한 불어를 가르쳐 줬다. 장소는 2층 끝자락에 있는 서재였는데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은은하게 권이도의 페로몬이 몸에 배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끝난 뒤엔 더할 나위 없이 깊은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처음엔 그와의 시간이 너무 긴장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있던 터라 잔뜩 지쳐 버린 몸뚱이가 나가떨어졌을 뿐이라고. 혹은 불면증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정말 잠을 자야만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됐다. 그의 페로몬이 늘 먹던 수면제보다 훨씬 낫다는걸.
아마 최 교수가 말한 상성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권이도의 페로몬에 안정감을 느꼈고, 특유의 묵직한 존재감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와의 섹스 후에 원 없이 잤던 것도, 체력을 다 써서가 아니라 페로몬 때문일지도 몰랐다.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감히 권이도에게 ‘안정감’을 느끼다니. 모순적이게도, 나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 권이도였건만.
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그가 내게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타오르는 갈증만큼이나 부푸는 감정이 있었다. 자괴감과 죄책감, 그리고 일말의 양심을 건드리는 가책 같은 것들.
‘……정말 바라는 게 없어?’
바라는 게 있다면 오직 한 가지,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그와 처음 만나던 날로, 그게 안 된다면 아버지를 만났던 그때로, 아니면 권이도와 가까워지기 이전으로.
도피라고 해야 할까. 아니, 회피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양심을 좀먹히는 통증이 싫어서 나중엔 아예 생각 자체를 죽여야만 했다. 다행히 권이도를 눈앞에 두면, 그를 제외한 다른 건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오늘은 내 방에서 하죠.”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 권이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언제부터인가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마쳤기에 식탁엔 빈 그릇만 놓여 있었다. 나는 식기를 옆으로 모아 놓고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2층에 있는 권이도의 방은 계단과 멀지 않은 위치였다. 그가 문을 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그의 방에 들어가는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먼저 찾아갈 일도 없고, 그가 나를 부를 일도 없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내부는 삭막하리만치 깔끔했다. 가구는 최소한으로 놓여 있었고, 인테리어에 쓴 색채도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생활감 없는 모습조차 권이도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앉아요.”
나는 권이도가 가리키는 대로 옆쪽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방 안 가득 풍기는 페로몬이 배 속 깊은 곳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비에 젖은 나무 냄새, 그보다 더 묵직한 권이도 특유의 향기.
“졸려 보이는군요.”
권이도는 내 대각선 위치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몽롱하게 눈을 깜박이다 말고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나른한 감각이긴 했지만, 졸린 것보단 편안한 것에 가까웠다.
“아뇨, 졸린 건 아닙니다.”
“요새는 잘 잡니까?”
“네, 뭐…….”
어설프게 대답을 뭉뚱그렸다. 네 페로몬 덕에 잘 잔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좀 민망했으니까. 권이도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아무렴 어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 배울 건 뭡니까?”
“아, 오늘은…….”
간단한 불어를 가르쳐 달라는 말대로 나는 그에게 기본적인 스펠링과 읽는 법 따위를 알려 줬다. 대학 시절의 기억이 흐릿한 탓에 그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나 또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낮 동안엔 개인적으로 책을 보고, 오후가 되면 그날 익힌 내용을 바탕으로 그를 가르쳤다.
사실 번거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권이도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배움이 빨랐다. 원체 머리가 좋은 건지, 무언가 말해 줬을 때 까먹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발음은 또 기가 막히게 좋아서, 어쩔 땐 나보다 나은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항상 느끼는데…… 되게 빨리 배우시네요.”
대충 준비한 내용을 모두 이야기했을 즈음, 나는 책을 읽는 권이도를 보며 이야기했다. 힐긋 시선을 들어 올린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리며 대꾸한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
으스대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듯 담담했을 뿐.
“웬만하면 한 번 본 건 안 까먹거든요.”
이 사람은 정말 부족한 게 뭐지. 모든 걸 다 갖췄는데 이제는 머리까지 좋단다. 유일하게 성격만 좀 나쁘다고 생각했으나, 요새는 그마저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뭐, 잘 가르치는 선생 덕도 좀 있고.”
립서비스를 할 줄 아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장난스레 말하는 권이도가 좀 귀엽게 느껴져서. ‘그’ 권이도가 귀엽다니. 남들이 들었다간 미친 소리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영광이죠.”
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살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은은히 느껴지는 페로몬이나 지금 이 분위기가 불안한 기분을 모두 지워 내는 듯했다. 조금만 더 욕심을 내도 된다면 이 안온함에 안주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
권이도는 잠깐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예의 그 짙은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였다. 왜 이러나 싶어 시선을 맞추자,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이네.”
뭐가 정말이냐고 묻지는 못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권이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것이다. 관찰하듯 나를 꼼꼼히 살피고는 별안간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정세진 씨.”
“네.”
왠지 모를 긴장감이 엄습했다. 자세를 바로 하고 표정을 굳히자, 반대로 권이도의 표정은 누그러졌다. 그는 테이블에 얹은 손을 톡톡 두드리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나한테 그랬죠. 서재에 있는 총이 진짜냐고.”
서재 벽면에 장식된 총. 가짜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곳에 갈 때면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권이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 맞습니다.”
장난…… 아니, 진담인가. 지난번에도 들었던 말이 지금은 도무지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될 거예요.”
“…….”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눈가를 찌푸렸다. 그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보다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하나 싶은 마음이 더 커다랬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권이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아.”
궁금하긴 했다. 그렇다고 진짜라는 걸 확인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건 내 각오이자 다짐이에요.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타협하지 말자는 다짐.”
목표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생기 넘치는구나. 나는 그걸 권이도를 보며 깨달았다. 제 손으로 뜻한 바를 얻어 내려는 의지란 이런 느낌이라는걸.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탐욕스러움과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지켜봤지만, 권이도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조금 쉬엄쉬엄해도 괜찮을 텐데,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일에 몰두하지 않았던가.
“전…… 무서워서 장식해 두진 못할 것 같은데.”
아마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히지 않을까. 언제 발사될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입이 바짝바짝 마르겠지. 나는 무슨 일이건 직면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맞닥뜨렸다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신기하네.”
권이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단조로운 감상을 내뱉었다. 느리게 깜박이는 두 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비로웠다.
“총은 무섭고, 그걸 장식해 놓은 난 안 무서워?”
무슨 당연한 말을 하나 싶었다. 그 총이 진짜라고 해서 권이도가 무서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걸 내게 겨누거나 쏘지도 않을 텐데.
“……무서워해야 하나요?”
“적어도 미친놈 소리 정도는 들을 줄 알았거든요.”
권이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픽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아,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
그 말엔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실제로 그에게 총이 있건 말건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으니까. 권이도는 눈치 빠르게 그런 내 속내를 꿰뚫어 봤다.
“신기하죠.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은데 또 미묘하게 건조하게 구는 게.”
“…….”
“아니…… 날 안 싫어하는 부분이 가장 신기하지만.”
그 취급을 받고도 그럴 생각이 드냐며, 권이도는 단조롭게 물었다. 내 취급에 문제가 있었던가. 그 부분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나한테 바라는 게 없습니까?”
자꾸만 이 질문을 건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능하면 이제 그만 물어봤으면 했다. 그가 이런 시선을 보낼 때마다, 진심으로 숨이 막히곤 했으니까.
“저는…….”
갑갑한 마음이 든다고 해서 사실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내게는 확신이 부족했고, 권이도처럼 문제와 직면해 스스로를 다잡을 용기도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로선 최선이었다.
“권이도 씨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가장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어떤 대가도 원하지 않는다고. 비록 중간부터 목이 메는 바람에 점점 고개가 수그러들었지만.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염치없는 놈이라며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배 속이 잔뜩 뒤틀려서 명치 언저리가 콕콕 쑤셨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그건 나한테만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러는 겁니까.”
권이도는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느새 그의 페로몬 역시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내가 아무 말 못 하는 사이, 그의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아 왔다.
“가끔 궁금해요. 대체 어떤 집에서 자랐길래 이렇게 된 건지.”
이렇게가 어떻게지. 그렇게 묻지도 못했는데, 그가 내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억지로 눈을 맞추고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본다.
“얼굴만 보면…… 모자란 거 없이 컸을 것 같은데.”
“…….”
“본인도 알잖아요,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민망하진 않았고, 그냥 어이가 없긴 했다. 그렇게 말하는 권이도야말로 모자란 거 없이 컸을 것처럼 생겼으니까. 아니, 실제로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부족함을 느껴 보지 못했겠지.
“어쨌든…… 그 대답을 감안하고 묻겠는데.”
턱을 잡았던 손이 옆으로 옮겨 갔다. 뺨을 살짝 문지르고 귓불을 만지작거린다. 그가 매만지는 손길을 따라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피부에 남았다. 누덕누덕 엉망이던 머릿속이 어느새 깨끗하게 비워졌다.
“오늘 내 방에서 잘래요?”
그는 페로몬만큼이나 달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평범하게 말했어도 지금 이 분위기에선 그렇게 들렸을 거다. 손가락을 머리카락으로 미끄러트린 그가 사르륵 옆통수를 어루만졌다.
“사실 이럴 생각으로 불렀거든요.”
내가 지금, 이 상황에 설레도 되는 건가. 두근거리는 심장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 시간대에 입을 맞추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 누구 하나 이유를 묻지 않고,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는 그런 스킨십이.
“정 싫으면 뿌리쳐도 되는데…….”
“…….”
“내가 눈치가 좀 좋아서.”
확신 어린 눈동자가 나를 옭아매는 듯했다. 목덜미에서 시작해서 내 양 손목과 발목,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까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가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이야기했다.
“자고 가, 세진아.”
* * *
관계를 바꾸는 전환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잘 만나던 연인과 헤어지거나, 혹은 연락도 없던 친구가 다르게 보인다거나. 혹은 권이도와 나처럼 하루아침에 부쩍 가까워진다거나.
‘으응, 흣…….’
그날, 권이도의 방에서 나는 히트 사이클도 오지 않은 채로 그와 몸을 섞었다. 세상에 오로지 우리 둘만 남은 것처럼, 간절히 그에게 매달려 온기를 구걸했다.
‘세진아.’
어떤 시점부터였을까. 그 부름이 더는 차갑지 않았던 게. 시나브로 스며든 마음이 이전과는 달리 따사롭게 바뀌어 버린 게.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 버린 깨달음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은 건, 지나친 쾌감을 참지 못해 온 입 안을 깨무는 것 정도. 그리고 권이도가 한 건, 다음날 그런 나를 보고 걱정 어린 눈으로 혀를 찬 것 정도.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계절, 우리는 평범한 감정을 공유했다. 권이도는 더 이상 고압적으로 굴지 않았고, 이따금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일도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라는 구실 없이 몸을 섞었고, 그 행위는 더 이상 배설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게 이런 관계였을까. 사실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에게 받는 애정이, 그리고 온기가, 내도록 갈망하던 바람과 비슷했으니까. 그건, 마지막에 닥치는 게 무엇일지라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본부장님.”
길고 길었던 휴가가 끝나던 날, 일기 예보에선 장마 소식이 들렸다. 여전히 아버지에겐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고, 나는 불안함을 넘어 그 불안을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내가 두려워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그런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 쉬어서 적응하려면 좀 걸리겠어요.”
“……잘하실 겁니다.”
김 실장은 왠지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안경을 추켜올리는 습관은 그대로였으나, 미처 내 얼굴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이 왜 이러나. 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무어라 캐묻지는 않았다. 마침 권이도와 그럴싸한 입맞춤을 나눈 직후라 기분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차는 침묵 속에서 회사에 도착했고, 나는 기사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사무실로 올라갔다.
“…….”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사무실은 김 실장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직원들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는 데다, 어딘지 모르게 내부도 어수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낯선 얼굴의 남자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세진 씨?”
김 실장이 습관적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한 뒤 목에 걸고 있던 신분증을 내밀었다. 사진과 이름, 그리고 소속이 적힌 신분증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기관이 적혀 있었다.
“공금 횡령 및 탈세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