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81)화 (81/131)

81화. Hiver Rigoureux(9)

갈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막연히 바라던 애정이 정말 실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잘하면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걸 깨닫는 바람에.

“뭐 하고 놀았어?”

“오빠랑 그림 구경하고, 과자도 먹고, 꽃 이름도 들었어.”

“재미있었겠네.”

“으응, 그리고 오빠가…….”

소곤소곤, 속삭이는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은 나를 권이도가 힐긋 내려다보는 것만 느껴졌지. 권혜율이 무슨 말을 했는지, 권이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래?”

“응!”

권혜율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권혜율을 한 번, 나를 한 번 돌아본 권이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삼촌도 다음에 볼게.”

나는 그제야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이도가 돌아왔으니 이제 방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애초에 권혜율과 놀아 주고 있던 것만으로 꽤 주제넘은 짓이니까.

“어디 갑니까?”

그런데 한 발짝 움직이는 순간, 권이도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혜율이를 고쳐 안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아이를 안고 있기 때문일까. 그 표정이 평소처럼 냉랭해 보이지는 않았다.

“저녁이나 먹죠.”

이 집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저녁을 함께했다. 권혜율의 입맛에 꼭 맞춘 식사는 내가 먹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땐 혜율이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어 준 덕분에 정적이 감도는 순간은 없었다.

다만, 그 주제만큼은 조금 불편했지만.

“오빠도 밥 혼자 먹는 거 싫어한대.”

혜율이는 나와 있을 때 나눴던 대화를 미주알고주알 권이도에게 설명했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민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권이도는 관심조차 없을 텐데 조카가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나에 관한 사소한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일 테니.

“그리고 프랑스어 엄청 잘해. 학교에서 배웠다고 그랬어.”

“불어를 잘합니까?”

“……네, 뭐. 어느 정도는.”

권혜율이 가지고 싶은 그림이 파리에 있다기에 나온 말이었다. 자기는 프랑스어를 잘하고 싶은데, 아직 기본적인 인사밖에 못 한다며. 오빠는 잘하냐고 묻기에 이런저런 인사말을 알려 줬었다.

“삼촌, 나 그 수련 가지고 싶어.”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그 그림이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게 가지고 싶냐고, 상냥하게 물은 권이도는 우선은 기억해 두겠다며 대답을 보류했다.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맞아, 그리고…….”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권혜율이 콧잔등을 찡긋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도 했다. 무얼 하나 싶었는데, 그의 입에서 범상치 않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오빠한테 꽃냄새 나.”

* * *

아직 발현하지 않은 아이들은 타인의 페로몬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 보통은 제 페로몬에 묻힐 것들을 놓치지 않고 모두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게 ‘페로몬’이라는 사실은 구분하지 못해도 냄새의 한 종류라고 생각해 알아차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혜율이가 했던 말은 내 히트 사이클을 알리는 전조였던 모양이다. 권혜율이 다녀간 다음 날 나는 권이도의 집에서 세 번째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열병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내 밑바닥을 낱낱이 드러냈다.

“……흣.”

무슨 생각을 했더라. 빨리 이 과정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누군가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께 했었다. 평소엔 그 상대가 추상적이었다면, 이번엔 내가 원하는 상대가 뚜렷이 정해져 있었다.

“권, 이도…….”

그 달큼한 페로몬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가차 없이 쏟아 내도 좋으니 차라리 그의 페로몬에 휩쓸리고 싶었다. 고이고 고인 열기를 마구잡이로 터뜨리고, 그때처럼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내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어 번 노크를 건넸음에도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결과였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는 내게, 규칙적인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

그냥 알 수 있었다. 권이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걸. 지금 손을 뻗으면 이번에도 나와 몸을 섞어 주리라는 걸. 그게 애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배설에 불과한 행위라 한들, 내게는 실낱같은 희망이 될 거라는 사실도.

“……왜 안 내려오나 했더니.”

왜, 그 말이 내 부재를 신경 쓰는 것처럼 들렸는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밥을 먹으러 내려오지 않아서 직접 찾으러 왔다는 것처럼. 그가 내게 그 정도로 관심을 기울일 리가 없는데도.

“정세진 씨.”

우습게도, 나는 그 부름을 듣자마자 가능성을 엿봤다. 그가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불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랑 자요.”

“…….”

손바닥에 느껴지는 체온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원체 손이 차가운 사람이지만, 지금은 내가 뜨거워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서, 고개를 들었음에도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

“아무것도, 안 줘도 되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를 잡아당겼다. 피부로 전해지는 페로몬이 이다지 유혹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꾸역꾸역 내가 가진 페로몬을 보여 주며, 이 모든 걸 내어 줄 테니 나를 안아 달라고 애원했다.

“제발, 흣…….”

그는 성의 없이 이불을 걷어 내고 내 위로 올라왔다. 내가 알아서 엎드리려고 하자, 짜증스럽게 내 팔을 붙잡아 똑바로 눕히기도 했다. 깜박, 깜박, 감았다가 뜬 눈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강간하는 기분이니까 울지 마.”

그 말만 하고 권이도는 곧장 내 바지를 벗겨 냈다. 속옷까지 한 번에 침대 아래로 떨어뜨린 뒤엔 잔뜩 젖은 아랫도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흥미가 식기라도 한 걸까. 그리 걱정하는 와중에 그의 페로몬이 훅 짙어졌다.

“흐읍…….”

나는 모자란 숨을 채우듯 다급히 그 페로몬을 받아 마셨다.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잡고 몸을 잔뜩 웅크리기도 했다. 곧장 삽입할 줄 알았건만, 의외로 아래를 파고든 건 손가락이었다.

“……흐, 왜…… 거길…….”

“……뭐?”

“거길 왜, 손으로…… 흐읏…….”

권이도가 쯧, 혀를 찼다. “풀어 준 사람도 없나 보지.” 그리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제법 냉랭하게 들렸다. 깊숙이 밀려 들어온 손가락은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벽을 넓히기 바빴다.

“그쪽 지난번에 피 났거든.”

그랬던가. 사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유독 앉는 게 불편하긴 했는데, 모든 게 처음이니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릴 리가. 다리 사이에 흐르는 건 그저 권이도가 싸지른 정액인 줄로만 알았다.

“아, 아흣!”

한 개였던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나고, 어느덧 세 개까지 여유롭게 삼키게 됐다. 이따금 가장 느끼는 부분을 건드리는 바람에 앞을 만지지 않았음에도 줄줄 새어 나온 정액이 배꼽 아래에 고였다.

“……아흑!”

권이도는 금세 손가락이 아닌 제 것을 삽입했다. 충분히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 속이 결리는 기분이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는 동안 그가 내 허벅지를 붙잡아 제 어깨에 걸쳤다.

“아, 아흣……, 흐, 흐읍…….”

건조한 섹스였다. 입을 맞추지도 않았고, 상반신이 겹쳐지는 일도 없었다. 자욱한 페로몬은 분명 열에 달뜬 상태인데, 몸을 섞는 과정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더, 그에게 매달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해놓고 사람의 온기가 느끼고 싶었다. 그저 성욕을 해소하는 걸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거기, 읏, 흐응…….”

“……하.”

어느 순간, 그가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신음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날 선 발음은 그대로 전해졌다. 역시, 내가 너무 귀찮게 굴었을까. 그런 생각으로 떨어지려는 나를 그가 단단히 끌어안았다.

“정세진.”

나직한 부름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려고 했다. 애교를 부리듯 목덜미에 얼굴을 문지르자, 큼직한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왔다.

“그 조그만 머리통에…… 대체 무슨 생각이 있는진 모르겠는데…….”

“……흐으, 흣!”

“이럴 때만, 후, 나한테…….”

맨살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 이따금 내뱉는 짜증스러운 욕설과 억눌린 신음까지.

“……정말 바라는 게 없어?”

권이도는 그 질문을 한 세 번쯤 더 했다.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퍽 집요한 확인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계속 고개를 저었고, 모든 행위가 끝날 때까지 그의 품을 벗어나지 않았다.

* * *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상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을 느끼고, 내게 무슨 감정을 가졌는지. 말보다 솔직한 게 몸이었고, 몸보다 솔직한 건 페로몬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권이도와의 두 번째 섹스 이후, 우리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이번에도 참 애매한 부분이었는데 이전과 달리 대화가 조금 늘어난 것이다. 정확히는 아침에 마주칠 때 나누는 인사가.

“잠을 못 잤나 보군요.”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권이도는 내 모든 행동에 점수를 매기려는 사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평하는 시선을 보냈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우선 경계를 하고 봤다.

“잠자리가 적응이 안 됩니까?”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껍질이 한 풀씩 벗겨졌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던 시선에 서서히 미풍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처럼 찬바람이 아닌, 따사로운 계절만큼이나 온화한 바람이.

“아뇨…… 제가 불면증이 좀 있어서요.”

20년을 지내 온 가족들에게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점점 누그러지는 태도는 내게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을 안겨 줬다. 불편하던 자리가 편해지고 기다려진다는 게, 이토록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다.

“직장인이면 다들 한 번씩 겪잖아요.”

“하긴, 수면 장애는 흔하니까.”

그에게라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온전한 애정을 내비칠 줄 아는 사람이니, 어쩌면 내 오랜 기갈을 해결해 주지 않을까. 그런 바람이 생기는 한편,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자괴감이 자꾸만 내 목을 졸라 왔다.

“쉴 때 좀 자둬요.”

권이도가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 관계는 순식간에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노을빛이 서렸던 그 얼굴이 얼마나 차가워질 수 있는지 이미 한 번 겪지 않았던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멈추든가, 혹은 손을 내밀든가. 불확실한 위험성만 가득한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데, 눈앞의 길이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아, 그래. 정세진 씨.”

그는 식사를 하다 말고 문득 내게 말을 걸었다. 따끔거리는 속을 달래며 고개를 들자, 단조로운 질문 하나가 건네졌다.

“불어를 잘한다고 했던가요?”

* * *

권이도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나를 2층 서재로 데려갔다. 아직 출근 시간이 남았으니, 간단히 부탁할 게 있단 것이었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역시나 벽에 걸린 총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요.”

“얘기해요.”

“저 총…… 장식 맞죠?”

끽해야 라이터일 텐데, 자꾸 진짜처럼 보였다. 매끄럽게 이어지는 총구가 반짝여서일까, 혹은 몸체가 정말 묵직해 보여서일까.

“아뇨.”

권이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이기도 했다.

“실탄이 장전된 진짜 총입니다.”

“…….”

말문이 턱 막혔다. 진짜 총이, 여기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총기 소지는 불법인데. 아니,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 능력을 갖춘 사람이지만 아무튼.

“이건 정 회장한테 말할 겁니까?”

“……아.”

장난이었나?

“아버지께 우리 대화를 막 전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느릿느릿 대꾸했다. 애초에 아버지와 연락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다. 아니, 이 경우엔 아예 없다고 해야겠지.

“뭐…… 그렇겠죠.”

그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픽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휴가 낸 이후로 아무와도 연락을 안 하던데.”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는 오싹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통화 기록을 뽑았거든요. 근 한 달 정도.”

“…….”

“비서가 왔다는 얘기도 못 들었으니, 전서구라도 보내지 않는 이상 외부와의 소통은 없었겠죠.”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큰일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엔 운이 좋아 걸리지 않았지만, 만약 아버지와 연락이라도 나눴다간 들켜 버렸을 것이다.

“혹시 불쾌했더라도 넘어가요. 나도 최소한의 경계는 해야 하는 입장이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권이도 몰래 주먹을 꾹 움켜쥐는 사이, 그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내밀었다.

“이거 읽어 봐요.”

“…….”

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제목을 읽자, 권이도가 무심히 표지를 살폈다.

“발음이 좋네.”

나는 겨우겨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온갖 최악의 경우가 다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무사히 지나가길 바랄 뿐.

“저자는…… 샤를?”

“……네, 샤를.”

“그래요, 그럼 다음엔 이거.”

이번에 내민 건 작은 사이즈의 시집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볼펜을 가져와 옆쪽에 있는 소파를 턱짓했다.

“거기 앉아서 내가 가리키는 거 해석해 봐요.”

이게 갑자기 웬 테스트인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펜을 건네받았다.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그가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겨 문장 하나를 가리켰다.

“이것부터.”

「Mon Cher Amour」.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뜻이었다. 또박또박 글씨를 쓴 다음엔 그가 두 장을 더 넘겨 두 번째 시를 펼쳐 줬다.

“이거랑 이거, 이것도.”

“…….”

그냥 기계적으로 옆에 해석을 달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은 터라 맞는 해석도, 틀린 해석도 있었다. 의역해야 할 부분을 대책 없이 직역하거나 관용어를 사실적으로 적어 버리기도 했다.

“내가 못 알아본다고 막 적으면 곤란한데.”

“…….”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권이도가 다리를 꼰 채 다섯 번째 시를 펼쳤다. 사랑에 빠진 기분을 여러 방면으로 써놓은 서정시였다.

“이거, 적어 봐요.”

「나는 달 속에 있었다.」 그렇게 적은 뒤엔 잠깐 망설여졌다. 아마 이것과는 다른 의미일 텐데, 그걸 설명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타이밍 좋게 내 옆모습을 지켜보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짙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란히 앉아 있을 뿐인데,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거리가 더 가까웠다. 조금만 고개를 내밀면 입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자칫 숨결이 섞일 만큼 아슬아슬한 거리다.

“……무슨 뜻입니까?”

권이도는 한 타이밍 늦게 내가 적은 구절의 의미를 물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어 내지 않고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현실 감각이, 없다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낮게 내리깔렸다. 길게 늘어진 말꼬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뜬 그가 무언가에 홀린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현실감.”

그냥, 타이밍이 맞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신호가 통했다고 해야 할까.

스르륵, 눈꺼풀이 감겼다.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코끝에 숨결 섞인 페로몬이 스쳤다. 서서히 얼굴이 가까워진다고 느낄 즈음, 입술에 보드라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

“…….”

이 사람도, 입술은 따뜻하구나. 그걸 몸을 두 번이나 섞은 다음에야 깨달았다. 옅게 전해지는 떨림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느낀 채 그대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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