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Hiver Rigoureux(8)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들이 있다. 가령 따사로워진 바람이라든가, 파릇파릇한 정원에 수놓아진 화사한 꽃들 같은 것. 창문을 열면 봄 내음이 풍기고 출근길 옷차림이 한 겹 얇아지는 시기.
권이도와 나는 초봄에 결혼했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공기가 남아 있었다. 내리는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릴 정도니 그 계절의 여파를 충분히 알 만했다. 아마 눈 깜박할 새에 여름이 오고, 금세 녹음이 우거지겠지.
어쨌든 한 달하고도 절반. 그와의 결혼 생활 역시 익숙해졌다. 정확히는 바뀐 거처와 갑작스럽게 생겨 버린 식사 상대가 더는 불편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적응이 안 되는 건, 미묘하게 달라진 그의 태도 정도.
‘그만 돌아가죠.’
한강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권이도가 조금 이상했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긴 애매한데, 나를 보는 시선이 예전과는 달랐다. 원래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면 지금은 적어도 바람 없는 날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그걸 가장 먼저 느낀 건 그와의 아침 식사에서였다. 늘 그랬듯 아침을 먹던 권이도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던 그때부터.
‘먼저 일어나죠.’
그 말이 뭐가 이상하냐고 묻겠지만, 나로선 놀랄 만한 일이었다. 권이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양해를 구하고 일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통보였으나, 내 인사도 무시하던 때와 비교하면 퍽 눈에 띄는 차이였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그 당시만 해도 딱 그 정도 의문에 불과했다. 진짜 이상함을 느낀 건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욕조는 쓰고 싶을 때마다 써도 됩니다.’
‘……네?’
함께 아침을 먹는 와중에 권이도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뜬금없는 주제였고, 그답지 않게 자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사람 다음 말을 듣지 못했다면 더 좋았을 거다.
‘또 쓸데없이 감기나 걸리지 말고.’
이걸…… 잘해 준다고 해야 할까. 사실 애매했으나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를 벌레 보듯 보지 않는 것만으로 숨 쉴 구석이 조금은 생겼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뀐 태도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를 마주할 때면 가시가 박힌 것처럼 명치 언저리가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얼굴을 보는 횟수가 적을 땐 괜찮았는데, 날이 지날수록 점점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아이고, 본부장님 나오셨어요.”
그리고 주말 오후. 홀로 정원을 산책하던 때였다. 원래는 늘 방에만 있었지만, 날씨가 좋아서 잠깐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마침 화단을 정리하던 정원사가 나를 보고 살갑게 알은체를 해왔다.
“산책하시나 봐요.”
정원사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피부색이 건강한 남자였다. 나이쯤 50대쯤 됐고, 늘 흙이 묻은 목장갑과 지저분한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네, 꽃이 많이 폈길래 좀 보려고요.”
살갑게 웃으며 대꾸하자, 정원사의 얼굴에도 해사한 미소가 걸렸다. 그간 알게 된 사실인데, 본인 일에 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잘 조경된 정원을 칭찬하면 누구보다 뿌듯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아, 방에 장식할 수 있게 꽃 좀 드릴까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원사가 화단에 쭈그려 앉았다. 주섬주섬 장미와 작약 따위를 꺾더니 손이 다치지 않도록 가시를 깔끔하게 다듬어 한 뭉텅이를 만든다. 잘 자라던 꽃을 꺾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가 민망해할까 싶어 말없이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아이고, 너무 많아졌네. 자, 본부장님이랑 잘 어울리는 예쁜 놈들로만 골랐습니다.”
울긋불긋한 꽃들이 화사하고 예뻤다. 향긋하게 풍기는 꽃내음이 가라앉은 기분을 한층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냥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 입매가 부드럽게 풀릴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화병을 부탁드려야겠어요.”
물에 꽂아 놓으면 얼마나 가려나.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냄새를 맡아 봤다. 방에 장식해 두고 며칠 정도 달큼한 향기를 만끽하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정원사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다시금 감사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꽃향기가 솔솔 느껴져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꽃다발을 좋아하나. 그리 생각하며 계단을 오르던 때였다.
“…….”
그 언젠가처럼, 2층에 권이도가 서 있었다. 빈틈없이 정장을 차려입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완벽한 차림새로. 아직 들어올 시간이 아닐 텐데. 내심 당황하는 바람에 대뜸 묻고 말았다.
“언제 들어오셨어요?”
그의 시선이 뚫어져라 내 얼굴을 향했다. 뒤이어 움직인 입술에선 “방금.”이라고 단조로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내 느릿느릿 눈을 내린 그가 물끄러미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바라봤다.
“어…… 좀 드릴까요?”
나는 반사적으로 꽃다발을 반으로 나눠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받지 않고 미간을 좁히기에 멋쩍게 덧붙이기도 했다.
“선물로.”
“……선물?”
아, 단어 선택을 잘못했다.
“권이도 씨 정원에서 나온 거니까 선물이라기엔 뭐하지만…….”
결국엔 이 꽃도 권이도의 소유일 텐데. 남의 물건으로 생색을 낸 기분이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접어 웃었다.
“예쁘잖아요.”
“…….”
그는 말없이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봤다. 꽃을 받지도,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혹시 기분이 상할 행동이라도 한 걸까. 그리 생각할 즈음에야 그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누가 줬습니까?”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들은 그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더 빛을 발했다. 이 사람은 뭘 들어도 잘 어울리겠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대답했다.
“정원사분께서 주시더라고요.”
“고용인들이랑 사이가 좋군요.”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는 표정은 기분이 나빠 보였다. 혹시 정원사에게 불똥이 튈까 싶었는데, 다행히 권이도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꽃을 좋아해요?”
“네, 뭐…… 좋아하는 편입니다.”
꽃이라면 평범하게 좋아했다. 그들이 머금고 있는 향기는 언제 느껴도 참 따사로운 것이었으니. 한때 조향사를 꿈꿨던 내겐 그 모든 냄새가 퍽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쩐지…….”
그는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중얼거렸다. 언뜻 페로몬이라는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너무 작은 소리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왼손으로 장미 한 송이를 뽑아 든 그가 줄기를 빙그르르 돌리며 이야기했다.
“조만간 선호그룹 창립 기념식이 열릴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매년 이맘때쯤 소식이 들렸다. 나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몇 번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이번엔 내가 그의 파트너로 참석해야 할 거다.
“입을 옷은 내 쪽에서 준비할 테니까 그날 시간만 비워 놔요.”
그의 왼손엔 내가 끼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기념식 날이 되면 우리는 모두의 앞에서 금실 좋은 부부를 연기하겠지. 아마 결혼식 때처럼 나는 방긋방긋 웃고, 권이도는 남들의 아부를 듣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네, 기억해 두겠습니다.”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또다시 가슴 언저리가 뭉치는 듯했다. 아까는 향긋하게 느껴지던 꽃향기가 지금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권이도에게 인사를 건네고 3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권이도는 그런 나를 붙잡는 대신 가만히 내 뒷모습을 바라봤다. 뒤통수에 따라붙는 시선이 양심을 콕콕 건드리는 듯했다.
* * *
창립 기념식은 명성호텔 리브라홀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기념식 당일이 되자마자 나는 권이도가 준비한 샵에 들러 옷과 머리를 세팅했다. 나란히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뒤엔 우선 자연스럽게 그에게 팔짱부터 껴야 했다.
넓은 식장에서 내 자리는 당연히 권이도의 옆이었다. 권이도의 식구들도 근처에 있었지만, 그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딱 한 명 권이정만이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추파를 던졌을 뿐이다.
“인물들이 어쩜 저렇게 좋은지 몰라…….”
누군가 중얼거린 말대로였다. 내가 이 사이에 섞인 게 민망할 정도로 그들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만큼이나 외적인 요소도 훌륭했다. 식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쏠린 시선은 대부분이 경외와 탐욕으로 가득했다.
미리 고지된 순서에 따라 기념식이 행해지고, 부회장인 권상미가 권병욱 회장의 부재를 사과했다. 얼핏 권이도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지만, 애써 아무것도 모르는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니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겁니까, 권이도 전무님.”
식순이 끝나고 마주친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권이도에게 악수를 청할 때도 이전과 같은 비굴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를 쭉 편 채, 사근사근 웃으며 이야기했을 뿐.
“아직 신혼이라 바쁘실 텐데, 일도 좀 쉬엄쉬엄하셔야죠. 부부 관계에 너무 소홀하면 이 애비 마음이 어떻겠어요.”
늘 생각하지만, 뻔뻔함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물론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주제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진짜 뻔뻔한 건 권이도의 옆에 서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고 있는 나겠지.
“글쎄…… 잘 쉬고 오라고 본가에 보내 놨더니 하루 만에 돌아오던데.”
권이도는 느릿느릿 이야기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서영이를 번갈아 봤다. 내가 느끼기에도 위압적인 시선이었기에 세 사람 모두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다. 이윽고 그 냉랭한 시선이 닿은 곳은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민재였다.
“부부 관계에 소홀한지 아닌지는 거기 있는 아드님이 제일 잘 알겠군요.”
“…….”
민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말없이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한참을 그대로 있던 민재는 별안간 아무런 말 없이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떠버렸다.
“……하, 하하, 애가 오늘 종일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아버지는 능청스럽게 이런저런 핑계를 갖다 붙였다. 배가 아파 보였다거나, 속이 안 좋아 보였다거나 하는 내용이었다. 무척이나 상투적인 핑계였고, 정작 권이도도 나도 그가 왜 자리를 떴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조만간 연락하실 일이 있을 겁니다, 전무님.”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얼핏 내 쪽에 시선을 보낸 것 같기도 했다. 권이도는 괜한 허세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나로선 숨이 턱 막힐 만큼 두려운 경고였다.
이미 예정된 결과가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무시하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와 내 발목을 붙잡을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언젠가 크게 넘어져 다치는 날이 오고 말 테다.
그 후엔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하러 다녔는지 모르겠다. 자꾸만 속이 울렁거려서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이라도 욕지기가 솟구칠 것 같았다. 다행히 배 속이 뒤집힌 와중에도 내 본분을 다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과정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휙휙 바뀌는 바깥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퍼뜩 고개를 돌렸는데,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권이도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순간 참고 참았던 감정이 확 밀려들었다. 그건, 토기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자괴감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상체를 확 웅크리자, 권이도가 앞좌석과 연결된 인터폰에 대고 이야기했다.
“차 세워.”
차가 갓길에 멈춰 섰다. 괜찮으니 출발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조금만 방심하면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게 눈물인지, 아니면 구역질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으.”
겨우겨우 지탱하던 배가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고 침몰할 걸 알면서도 그대로 버티고 서 있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구조 요청을 보내고 싶은데,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게 뻔해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멀미라도 해요?”
“…….”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게 걱정하는 말투로 들린 건, 그만큼 내가 정신이 없기 때문일 거다. 나는 가까스로 마른침을 삼키고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그 죄송하단 말은…….”
권이도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운을 뗐다. 멈춰 있는 차 안엔 권이도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커다랬다. 그의 페로몬이라든가, 혹은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같은 것들이.
“습관인가 보죠. 본인이 잘못한 게 아닌데도 매번 사과하는 걸 보면.”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이번엔 내가 잘못한 게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이도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단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단호하게 이야기할 뿐.
“고쳐요. 나쁜 버릇이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목구멍이 확 조여들었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지끈거리는 통증이 온몸에 일었다. 언젠가 그가 페로몬을 쏟을 때 그랬듯, 호된 매질을 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모든 걸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결국엔 모든 게 예정대로 진행되겠지. 이제 와 돌이키려고 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내게는 그럴 용기도, 권한도, 그 무엇 하나 주어지지 않았으니.
“……출발하셔도 됩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권이도에게 이야기했다. 차마 그를 바라볼 자신은 없어서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그대로 창밖을 바라봤다.
권이도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몸이 안 좋으면 병원을 가죠.”
“……아뇨.”
“…….”
“괜찮아졌습니다. ……죄송합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군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한 번 혀를 차긴 했지만, 무어라 질타를 건네지는 않았다. 나는 억지로 여러 말들을 삼켜 냈고, 그렇게 닫힌 입술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 * *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망쳤단 사실을 알아도, 그 선택을 돌이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과거를 바꿀 수 없으니 현재를 바꿔야 하는데, 그럴 만한 기회가 찾아오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막연히 외면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출구 없는 수렁에 목까지 잠겨 버린 나를 발견하고 만다.
권이도에게 사실을 고하는 게 좋을까.
그 고민을 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하필 회사는 지나치게 한가했고, 아버지가 내게 장기 휴가를 명령하는 바람에 더 그랬다. 몸이 안 좋아 보이니 집에서 몸조리나 하라는 이유였는데, 당연히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도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번씩 저울을 기울였다. 툭 치면 무너질 울타리 안에 머물 것인지, 간사한 양심일랑 지켜볼 것인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평생을 갈구한 애정을 쉬이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다. 내 모든 고민은 끝내 그곳으로 귀결됐다. 지금껏 어떻게 지켜 온 울타리인데, 그걸 내 손으로 부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숨죽여 지내는 와중에 권이도의 조카인 권혜율이 놀러 왔다. 긴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아이는 베이지색 멜빵 바지에 품이 넓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처음엔 낯을 가리기 바빴으나, 함께 권이도가 가진 그림을 구경하다 보니 경계를 허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권이도는 내가 권혜율과 정원을 둘러보고 있을 때 퇴근했다. 화단에 핀 꽃들을 보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던 즈음이었다. 오빠는 어떻게 그런 걸 아냐는 질문에, 책에서 봤다고 대답하려던 순간이기도 했다.
“오빠?”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곳엔 권이도가 부드럽게 입매를 말아 올린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혜율이에게 다가와 그 조그만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까지.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지, 혜율아.”
“…….”
저무는 노을이 권이도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매끄러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노을은 짙은 눈동자에 선명하게 고였다. 그가 다정하게 눈을 접는 모습, 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 그리고 사근사근 속삭이는 목소리까지.
“잘 놀고 있었어?”
누군가에게 반하는 이유는 간혹 아주 보잘것없곤 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뇌리에 남아 버린 특별함. 내 경우엔 그게 고작 웃는 얼굴이었다.
아니, 반했다고 표현하면 안 될지도 몰랐다. 나한테는 보여 주지 않는 표정, 태어나 단 한 번도 받지 못한 애정 어린 눈빛. 그러한 것들을 나 또한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