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Hiver Rigoureux(7)
한 번의 섹스는 관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까. 섹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배설 행위 끝에 내가 느낀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뭐가 허무했냐면, 이토록 쉽게 히트 사이클을 끝낼 수 있단 사실이.
뭐, 그게 ‘쉬웠냐.’라고 물으면 그건 정말 할 말이 없었지만.
‘아흑, 흐읍, 더, 흐…….’
‘……하, 씹.’
아무리 내게 비교 대상이 없어도 이게 정상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을 만큼 쾌감이 일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데, 그가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아마 섹스를 잘하는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마구잡이로 박아 대는데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배려는 좀 부족한 것 같았지만, 그건 굳이 배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으…….”
아침이 되었을 때, 권이도는 내 옆에 누워 있지 않았다. 나는 온몸 가득 근육통을 달고 침대에서 내려와 가까스로 욕실로 향했다. 오늘부터 주말이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섹스 후유증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병가를 낼 뻔했다.
샤워를 하는 동안엔 흐르는 정액을 빼내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누가 알파 아니랄까 봐, 한 번 사정할 때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종국엔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만일 노팅했더라면 틀림없이 임신이 됐을 거다.
부끄럽냐고 물으면 딱히 그렇진 않았다.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할 터였다. 권이도는 성욕을 풀고, 나는 히트 사이클을 무사히 넘겼으니, 어쩌면 이건 상부상조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후의 어색함까지는 감당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
분명 꽤 늦게 내려왔는데, 권이도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차려입은 모습으로. 출근을 안 하는 것도 아니니 이 시간까지 집에 있을 이유가 없건만.
“앉아요. 정신 사납게 서 있지 말고.”
“……실례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늦잠을 잤나?
나는 그리 생각하며 엉거주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굴고 싶었지만 말하기조차 민망한 곳들이 다 아픈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원래 다음 날은 다 이런 건지. 일상생활에 영향을 너무 준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식사가 차려지고,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였지만, 권이도와의 식사는 이게 보통이었다. 딱히 대화거리도 없는 데다 내가 먼저 살갑게 구는 건 그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티 나지 않게 그를 살핀 뒤 젓가락을 움직였다. 권이도가 식사하는 모습은 잘 짜인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작위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서. 젓가락을 쥐는 손동작도, 턱을 움직이는 모습도, 가끔 신기할 정도로 시선을 빼앗아 갔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요.”
“……예?”
대뜸 튀어나온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하필 그를 지켜보던 중이라 더 그랬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권이도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이야기했다.
“돈이든 뭐든, 하나 정돈 들어주죠.”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지.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니, 그와 내 사이에 나올 주제가 아니었다. 그것도 이렇게 보상을 해주듯…….
“아.”
순간, 탄성이 나왔다. 그가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 뒤늦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바람 빠지듯 웃음이 나왔다.
“……화대처럼 말씀하시네요.”
내 몸을 사주는 덜떨어진 놈한테 가라고 했으면서, 그 대가를 쥐여 주면 결국 본인이 덜떨어진 놈이 되는 게 아닌가. 히트 사이클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침대에 엎드려 신음하던 내가 그런 실리를 따지리라 생각한 걸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뭘 바라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정신이 없었을 뿐이고, 이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정중히,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했다. 자존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받고 싶은 게 없지는 않았지만, 그걸 내 입으로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정 바라는 게 있다면…… 욕조에 몸이나 좀 담그고 싶군요.”
“……욕조?”
권이도는 그렇게 되물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제 방엔 욕조가 없거든요.”
“…….”
아차 싶은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분명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데 자세히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워낙 남을 살피는 게 습관이라, 늘 예민하게 눈치를 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욕조에서 하늘이 보이면 좋겠어요.”
뒷말은 너스레를 떨듯 덧붙였다. 정말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듯 건넨 가벼운 희망 사항이라고 어필하기 위해서. 왜, 사람들이 그냥 버릇처럼 ‘여행 가고 싶다.’라고 말하듯이.
“고용인한테 말해 놓죠.”
그런데 권이도는 흔쾌히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고개를 까딱하기도 했다.
“하늘은 못 보겠지만.”
아마, 이걸 빌미로 어제 일을 없었던 셈 치려고 하는 걸 수도 있었다. 나와 잔 게 퍽 후회스러운 모양이니 뭐라도 해주고 입을 닦으려는 거겠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여유를 부릴 상황이 되었으니 처음보단 낫다고 해야 할까.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건 내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으니까.
또 한동안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내 입맛에 꼭 맞는 음식이 지금은 모래알처럼 꺼끌꺼끌하게 느껴졌다. 겨우겨우 한 입씩 삼키는 와중에 권이도가 내게 물어 왔다.
“감기는 어쩌다 걸린 겁니까?”
“아…… 비를 맞았습니다.”
“어디서?”
“……그냥, 뭐.”
구체적인 상황을 꼭 말해야 하나. 혼자 청승을 떨었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영 민망했다. 그래서 그냥, 대화를 끝내고자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걱정시켜 드렸다면…….”
“걱정이라니.”
권이도는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눈가를 확 찌푸린 채 혀를 찼다.
“내 집에서 빌빌거리고 다니는 게 싫었을 뿐입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그 말만 하고 권이도는 젓가락을 내려놨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는 표정이었는데 사과를 하기에도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고, 덩그러니 나를 내버려 둔 채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출근한 뒤엔 약속대로 고용인이 목욕물을 받아 줬다. 이렇게 호사를 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향긋한 입욕제까지 풀어져 있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실컷 몸을 담그고 있다가 살이 발갛게 익을 즈음에야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돌아온 방에는 지난밤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침대 시트도 새것이었고 어지러이 흐트러졌던 옷가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거라곤 아주 미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페로몬 정도.
신도 참 불공평하지.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에게 우월한 형질까지 안겨 줬다. 그 대신 성격이 좀 나빴지만, 그 또한 본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야금야금 그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공기 중에 떠도는 페로몬은 매일 복용하던 수면제보다 훨씬 나았다. 그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 *
함께 히트 사이클을 보냈지만, 우리 사이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누구 하나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딱히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보니 늘 함께 아침을 먹게 됐지만, 그마저도 살가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냥 달라진 건, 내가 늘 그 인사를 건넨다는 것 정도. 그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눈앞에서 일어나니 뭐라도 말했을 뿐이다. 처음엔 묘한 눈으로 쳐다보던 권이도도 시간이 지나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여전히,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뚝 끊겨 버린 연락은 내게 여러 가지 사실을 깨닫게 했다. 가령 내가 정말 멍청했다는 사실과 이제는 돌이키기엔 늦어 버렸다는 사실 따위.
마치 잔잔한 바다 위를 부유하는 뗏목이 된 기분이었다. 조만간 비바람이 칠 게 확실한데,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떠는 것뿐이었다.
“……하잖아.”
늘 그랬듯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차고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그 앞에서 누군가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굳이 가까이 가지 않더라도 그게 권이도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나도 알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거.”
권이도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옆모습은 방금 카탈로그에서 튀어나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보이던 여유로운 모습 대신 이상하리만치 처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버티는 데까지 버텨 봐야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누나가…….”
일순, 권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치고, 그는 딱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띵,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는 안으로 올라타는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묻는다.
“안 탑니까?”
위로 올라가는 내내 숨 막히는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엿들으려던 게 아니라고 변명했어야 하는데, 정신을 차리니 타이밍이 애매해졌다. 좋게 보여도 모자랄 상대에게 왜 자꾸 나쁜 모습만 보이는지. 아니, 이제는 어떻게 보이건 상관없으려나.
“정 회장한테 가서 말할 생각입니까?”
1층에 도착했을 때, 권이도가 내게 물었다. 나는 한 타이밍 늦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아뇨.”
“…….”
“그런 가족사를 함부로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권이도의 할아버지라면 현 선호그룹 회장인 권병욱이었다. ‘돌아가신다.’라는 가정이 나왔다는 건 실제로 오늘내일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알음알음 도는 찌라시가 반쯤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들었다는 얘기군요.”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듣고말고. 그 거리에선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들렸을 텐데. 게다가 차고는 원체 소리가 울리는 공간이 아니던가.
“죄송합니다.”
“사과하라고 한 얘기 아닙니다.”
그는 딱딱하게 대꾸하곤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어째서인지,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내가 지금, 심적으로 지쳐서일까. 그를 그냥 보내는 게 이상하리만치 불안했다.
“……권이도 씨.”
그래서 충동적으로 권이도의 이름을 불렀다. 놀랍게도 그와 만난 이후로 처음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가 느리게 나를 돌아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술이 움직였다.
“같이 한강이나 한 바퀴 돌고 올래요?”
뜬금없는 제안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그만큼 친하지 않았고, 내게는 이런 말을 건넬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꺼낸 건, 따끔거리는 양심이 자꾸만 그를 붙잡으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잠깐 차를 대고 쉴 수 있는 곳이 있거든요.”
“…….”
“강물에 야경이 비치는 모습이 예뻐서, 아마 권이도 씨가 보기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권이도가 보기엔 분명 보잘것없는 풍경일 터다. 강물에 비치는 야경 따위를 이 사람이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게 뭔 개소리냐고. 그리 거절당할 준비를 하는 와중에, 그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물어 왔다.
“운전 잘합니까?”
“……예?”
그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약지엔 나와의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왼 손목을 가볍게 턴 권이도가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운전을 그쪽이 하면 생각해 보죠.”
* * *
한강으로 향하는 길은 오고 가는 차 한 대 없이 한적했다.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데다 아직은 평일이라 놀러 가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줄줄이 세워진 가로등을 따라가며, 나는 넌지시 자연스러운 화제를 꺼냈다.
“……차가 정말 좋네요.”
아까, 운전을 내가 하라던 말대로 권이도는 내게 차 한 대를 빌려줬다. 선호에서 나온 세단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출시한 차종답게 승차감이 나쁘지 않았다. 차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이 정도면 한 대 장만해도 좋을 것 같다.
“가지고 싶으면 가져요.”
권이도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뒷말을 이었다.
“내가 남의 손을 탄 물건은 안 써서.”
“…….”
그럼 차를 빌려주지 말았어야지. 괜히 핸들을 쥐고 있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 나는 신호에 맞춰 차를 돌리며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사양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가 나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옆얼굴에 따라붙은 시선은 한동안 그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운전 중이라 그를 마주 보지도 못하는데, 동물원 속 원숭이처럼 고스란히 관찰당하고 있었다.
“내가 웬만하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데.”
그가 입을 연 건, 강변에 차를 세울 즈음이었다. 역시 이 사람을 데려오기엔 보잘것없는 곳이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할 즈음이기도 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쪽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으로도 내 속내를 읽지 못한다는 게. 내가 그냥 웃어넘기려는 찰나, 권이도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목구멍이 콱 옥죄는 느낌이었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자, 나를 바라보는 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 안에 풍기는 페로몬마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바라는 거라면.”
“그쪽 성격상, 여기까지 오자고 했으면 하려는 얘기가 있었겠지.”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면서. 제법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나. 티 나지 않게 마른침을 삼키자, 권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나랑 데이트나 하자고 부르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권이도는 뭐라고 대답할까. 상상하는 것조차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진짜 배우자라도 된 것 같냐고 싸늘한 냉대가 돌아올지도 몰랐다.
“정 회장이 그쪽한테 협상이라도 시켰습니까?”
“…….”
나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정면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담담한 척 있었지만,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양심의 가책이 뱃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내려앉았다.
‘네가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다, 세진아.’
“저는…….”
“…….”
“저는 정말 바라는 게 없습니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회사에서 한자리 꿰차고 싶지도 않았고, 권이도에게 빌붙어 한몫 챙기고 싶은 야망도 없었다. 그냥 아들로서의 인정. 그리고 안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울타리. 딱 그 정도를 바라고 평생을 살아왔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
그는 내 사과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 바라는 게 없어서 죄송하다는 말로 알아들었겠지. 그 안에 어떤 고백이 담겨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로.
“……정말 죄송합니다.”
괜히 한 번 더 사과를 내뱉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었다. 한강에 오자고 하지 말걸. 대학 시절부터 기대하던 야경을 고작 이런 상황에 보고 싶었던 게 아닌데. 자꾸만 고개가 수그러드는 와중에, 권이도가 느리게 운을 뗐다.
“보통…… 아들은 아빠를 많이 닮던데.”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평소보다 조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차라는 밀폐된 공간에 있기 때문일까,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쪽은 정말 친아들이 아니군요.”
해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의 말은, 단순히 피가 섞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리라. 좀 더 근본적으로, 아버지와 내 사이에 차이점을 찾아냈다면 모를까.
“그만 돌아가죠.”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렇게 요구했다. 나는 곧장 차를 돌렸고, 우리는 고작 5분 만에 한강을 벗어났다. 강물에 비치는 야경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아름답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