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77)화 (77/131)

77화. Hiver Rigoureux(5)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말과 함께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치 빠른 주방장이 내 식사를 차려 주고, 넌지시 눈인사를 건넨 뒤 돌아갔다. 곱게 차려진 식사는 고슬고슬한 쌀밥과 불고기 따위였다.

권이도는 흘긋 내 앞에 차려진 음식을 살펴봤다. 그의 앞에는 나와는 달리 잘 구운 빵과 달걀, 그리고 샐러드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메뉴가 다른 게 신경 쓰였지만, 그는 딱히 지적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

“…….”

달그락,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식사였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에 돌을 삼킨 것처럼 명치가 무거웠다. 암만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그의 존재감이 너무 커다랗다. 밥을 먹는 내내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음식을 절반쯤 비웠을 때, 권이도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운을 뗐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는 살짝 찌푸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모양 좋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나랑 마주칠 때마다 귀신 보듯 피할 필요 없습니다.”

“…….”

의외의 말이었다. 저 말을 하려고 앉으라고 했던 건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권이도가 고개를 까딱했다.

“시위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시위라니. 내가 그런 걸 할 수 있는 입장이던가.

“죄송합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아뇨.”

“…….”

“그렇게 안 보였습니다.”

잠깐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뭘 어쩌라는 건지, 황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권이도는 어쩐지 불쾌함이 서린 눈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근데 그게 기분이 나빠서.”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한들 다른 방법은 없었다. 기분이 나쁘다는데, 다음부터 그러지 않도록 신경 써야지.

“…….”

하나 권이도는 정작 내 사과를 듣고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을 뿐. 그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의 시선이 잠깐 내 얼굴에 머물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안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금세 등을 돌렸고, 짧은 식사는 그렇게 끝이었다.

분명히 체하리라 생각했건만, 의외로 출근길에 오른 다음에도 속은 편안했다. 늘 그랬듯 기사와 김 실장이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뒷좌석에 앉아 김 실장이 전달해 주는 오늘 일정을 들었다. 오전에 있는 내부 미팅을 제외하면 특별히 바쁠 것 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브리핑을 끝낸 김 실장이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아직 할 얘기가 남은 모양이었다. 얘기하라는 의미로 그를 돌아봤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조만간 본가에 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본가에 들르라니.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웬만해선 아버지가 나를 본가로 부를 일이 없었으니까. 하물며 결혼하라는 통보조차도 회장실에서 듣지 않았던가.

혹시 민재가 사고를 친 걸까, 아니면 권이도가 기어코 나를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은 걸까. 온갖 안 좋은 생각만 떠오르는 와중에, 김 실장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유를 말해 줬다.

“가족끼리…… 식사를 하자고 그러셨습니다.”

“……식사요?”

“예, 온 김에 하룻밤 묵고 가라고…….”

이번엔 더 당황스러운 내용이었다. 가족끼리 하는 식사에 나를 부를 만한 이유가 없는데. 아버지가 말하는 가족엔 내가 포함되지 않을 테니까.

역시나 이어진 뒷말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려 줬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아.”

그럼 그렇지. 용건이 없을 리가 없다. 단지 그게 김 실장의 입을 통해 전달될 말이 아니었을 뿐.

“급한 일입니까?”

“아뇨, 천천히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치곤 너그럽지 않나 싶다. 볼일이 있을 때면 항상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당장 찾아오라며 재촉하던 분인데. 권이도와의 결혼으로 어지간히 마음의 여유가 생겼나 보다.

“다음 주쯤 들른다고 전해 주세요.”

“예, 우선 주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권이도에게 얘기를 해야 하나. 일일이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하룻밤을 자고 온다면 말하는 게 좋을 듯했다. 권이도는 내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없이 사라지는 건 얘기가 다를 테니.

“당일에는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아마…… 결혼 생활이 어떠냐고 물어보시려나. 혹은 자녀 계획은 아직이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뭐, 높은 확률로 전자에서 후자로 이어지는 질문을 건네겠지만 말이다.

어느 쪽이건 부디 조용히 넘어갈 수 있길. 적어도 지금의 생활을 더 나쁘게 만들 용건만은 아니길.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 * *

며칠,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그사이 나는 권이도와 꽤 많은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일부러 노린 건 아니었는데, 내가 내려갈 때마다 권이도가 식탁에 앉아 있던 탓이다. 귀신 보듯 피하지 말라고 했으니,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종종 민재에게 전화가 왔었다. 별 쓸데없는 용건들(“넌 씨발, 결혼하고 얼굴도 안 비치냐?”)이었는데, 목소리를 들어 보니 대부분 술에 취한 듯싶었다. 문제는, 민재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하필 권이도와 마주쳤다는 것 정도.

‘술도 못하면서 와인은 왜 그렇게 마셨어.’

하필 전화를 받을 시간대가 퇴근길이라서 그랬다. 그냥 무시했다간 후폭풍이 심각할 테니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방으로 올라가며 전화를 받았을 뿐이다. 당연히 권이도가 2층 계단에 서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버지 걱정하실 텐데 얼른…….’

어색하게 웃고 있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가까스로 살갑게 누그러뜨렸던 음성 역시 굳어 버릴 뻔했다. 떡하니 마주쳐 버린 권이도의 모습에 하마터면 계단 뒤로 넘어갈 뻔했다.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가까스로 말을 마쳤으나, 권이도는 제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마저 통화하라는 듯이. 하필 민재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핸드폰 너머로 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대부분이 어리광 비슷한 투정이었다. 씨발이라든가, 혹은 너 따위가 왜 날 걱정하냐든가. 반쯤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누가 봐도 미련 가득한 목소리엔 갈 곳 잃은 마음을 향한 분노도 섞여 있었다.

‘……민재야, 형이 지금 바빠서 나중에 연락할게.’

다급히 통화를 끊었지만, 권이도는 별말 없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불쾌함과 혐오감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권이도는 민재의 마음도, 내가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민재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아무래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눈 깜박할 새에 아버지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나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김 실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권이도의 집을 나섰다. 오후에 비 소식이 있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청명하기만 했다.

‘본가?’

권이도는 집에 다녀온다는 말에 이전처럼 싸늘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전히 관심 없는 표정이었으나 날짜를 가늠하려는 듯 시계를 확인한 것이다. 톡, 톡, 검지로 손목시계를 두드린 뒤엔 혼잣말처럼 말하기도 했다.

‘내가 출장 가기 전날이군요.’

그는 자신이 사외 이사로 있는 시티그룹 주주 총회에 다녀온다고 했다. 대략 일주일 정도가 될 테니, 본가에는 마음대로 머물다가 오라고. 언뜻 상냥한 허락 같았으나 결국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겠네요.’

‘네, 뭐…… 그럴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웬일로 잡담을 할까.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권이도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쪽 동생도 볼 테고.’

‘…….’

뭐랄까. 일부러 그런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알 수 없는 수치심이 확 밀려들었다. 그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선물을 하나 주죠. 사업 파트너한테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권이도가 꺼내 준 건 시가 오천만 원이 넘는 와인이었다. 이렇게 과분한 물건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과분한 게 싫으면 이 결혼을 거절했어야지.’

맞는 말이었다. 내게 가장 과분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권이도일 텐데. 고작 몇천만 원짜리 술은 그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겠지.

‘그딴 알파 새끼가 준 거라고 얘기해요.’

사실, 화제가 안 돌아갔던 모양이다. 민재의 말 따위 상관없다고 대답해 놓고 사실은 기분이 나빴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말이 괜히 가시 돋친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겠지.

“도착했습니다, 본부장님.”

멍하니 생각에 잠긴 사이 차는 대문 앞에 도착했다. 회색 담벼락은 어릴 때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높게만 느껴졌다. 크기로만 치면 권이도의 집 쪽이 높을 텐데, 답답하긴 이쪽이 더 심한 것 같다.

“괜찮으십니까?”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애써 담벼락 꼭대기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담담한 척 괜찮다고 대답한 후엔 먼저 대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오셨어요? 아이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집으로 들어가자 문 집사가 나를 맞이해 줬다. 뒤늦게 어머니가 나왔고, 그는 아버지가 서재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나는 고용인에게 와인을 건네준 뒤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땐 배 속이 뒤틀리는 듯한 긴장감이 들었다. 본능적인 촉이라고 해야 할까, 결코 좋지 못한 얘기를 들으리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선택권은 없으니, 결국 노크를 건네야 했지만.

“아버지, 정세진입니다.”

들어오거라. 인자한 목소리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끼익, 열린 문틈으로 골프채를 들고 퍼팅 연습 중인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 안에서 무슨 말을 들을지, 그게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런 건 전혀 상상도 못 한 채로.

“찾으셨다고요.”

* * *

해가 질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온통 새카만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끝없이 비가 쏟아졌다. 나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그 비를 구경하다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본가를 빠져나왔다.

“오피스텔로 가주세요.”

김 실장은 내 요구에 별다른 반박 없이 차를 돌렸다. 내가 오피스텔을 정리하지 않았다는 건, 그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멍하니 창밖에 내리는 가랑비를 응시하길 한참, 김 실장이 넌지시 물어 왔다.

“……수면제는 안 필요하십니까?”

“아.”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곧 수면제가 다 떨어질 예정이었으니까. 몇 달 치를 한 번에 받아오지만, 정작 내가 복용하는 기간은 그보다 훨씬 짧았다.

“필요합니다. 말씀드린다는 걸 까먹었네요.”

“조만간 챙겨서 갖다 드리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차 안엔 다시 정적이 맴돌았다. 나는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응시하며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관계에 진전이 없냐는 질문과 아이는 아직이냐는 의문. 아들에게 하지 못할 모욕적인 말들 끝에 흘러나온 진짜 용건까지.

‘자료 하나만 가져오거라.’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게 수락과 거절은 아닐 것이다. 단지 기꺼이 알겠다고 할지, 아니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지의 차이일 뿐.

‘훔치라는 게 아니야, 그냥 좀 빨리 보자는 거지.’

아버지가 늘어놓는 말들은 온통 궤변이나 다름없었다. 도둑질이었고, 배신이었으며, 권이도가 알면 불같이 화를 낼 내용이었다.

‘잘 생각해야 해. 네가 이걸 안 가져온다고 너희가 이혼을 안 할 것 같아?’

‘…….’

‘아니, 그놈은 반드시 널 버릴걸.’

그 말엔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애정 하나 없는 오메가를 권이도가 얼마나 데리고 있으리라고. 내게 바라는 게 후계가 아니라면 마침내 쓰임새를 다했을 땐 팽하고 말겠지.

‘믿을 건 가족뿐이야.’

여태껏 나를 키워 준 아버지와 짧은 시간 동안 함께 지낸 권이도.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할지는 뻔하기만 했다. 애초에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으니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가 배신감을 느끼진 않을 터다. 그저 걸리적거리는 오메가가 일을 쳤구나, 그 정도 평가를 하면 모를까.

‘……그 새끼가 잘해 주냐?’

응접실에 앉아 있을 즈음 민재가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어둡게 염색한 탓에 오늘따라 어머니와 더 닮아 보였다. 나는 그런 민재를 보고 최근 들어 가장 열심히 흉내 냈던 미소를 또 한 번 지어야만 했다.

‘잘해 줘. 집에 다녀온다니까 선물까지 줬잖아.’

잘해 주긴 무슨. 애초에 대화조차 없는 사이건만. 그와 나눈 대화를 모두 합쳐도 책 한 페이지조차 안 되는 분량일 텐데. 그마저 대개는 권이도의 일방적인 조소가 아니던가.

‘……그래서 만족해? 지금 그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내게 다른 길이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건네는 말이야말로 정말 잔인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져온 와인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내 결혼 생활이 어떤 식인지 보지도 못한 주제에.

‘역시 형 걱정해 주는 건 동생밖에 없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화풀이가 그것이었다. 화제를 돌릴 수 있는 적당한 말이기도 했다. 역시나 민재는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얼굴로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도착했습니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을 때, 창밖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김 실장은 야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우산을 펼친 채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오늘은 비 맞으시면 안 됩니다.”

단호한 말에는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비를 맞는 걸 좋아한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잔인하게도 맞는 건 안 되니 보기만 하라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온전히 나를 향한 걱정 때문이었지만.

“도련님 안색이…… 오늘은 정말 안 될 것 같습니다.”

문 집사도 비슷한 말을 하던데. 삼시 세끼 꼬박꼬박 얻어먹는데도 얼굴이 별로였나 보다.

“감기는 김 실장님이 걸리겠어요.”

나는 차에서 내려 그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아 왔다. 아마 입구까지 씌워 줄 요량이었겠지만, 그렇게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들어가세요. 고생하셨습니다.”

다행히, 김 실장은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그럼 내일 데리러 오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절대 비를 맞지 말라고 강조하기에 알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그냥 웃기만 했다.

차는 나를 내버려 둔 채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 뒤꽁무니를 보다가 팔을 툭 아래로 떨어뜨렸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가랑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

비 맞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갑갑한 속을 씻어 내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습기를 머금은 공기에 여러 냄새가 섞여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했고. 눅눅히 젖은 흙냄새, 싱그러운 풀 냄새, 잔잔히 풍기는 나무 냄새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

시간이 늦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멀쩡히 정장을 차려입고 주차장에서 비를 맞는 젊은 남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꽤 구질구질한 장면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곳에서 내리는 비를 맞았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온몸이 차갑게 식고, 아버지가 했던 말을 수없이 반복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속으로 받아들일 때까지.

그 때문일까. 홀로 오피스텔에서 잠이 든 다음 날, 나는 지독한 열병 속에서 눈을 떠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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