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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76)화 (76/131)

76화. Hiver Rigoureux(4)

눈을 떴을 땐 온몸이 땀과 체액으로 엉망이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익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방 안, 옅게 남은 페로몬과 잔뜩 찝찝한 몸뚱이. 그런 것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익숙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으며 히트 사이클의 흔적을 모두 지워 냈다. 사정을 몇 번이나 했는지, 나중엔 한껏 예민해진 살이 건드리기만 해도 따끔거릴 정도였다. 당연히 종국엔 정액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하아…….”

지독한 회의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히트 사이클이 끝나면 항상 느끼곤 하는 감정이었다. 자괴감 비슷한, 그런 원망들이 대상을 찾지 못해 속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이번엔 일찍 끝났으니 다행일까. 보통은 꼬박 일주일을 앓곤 했으니. 그보다 문제는 주기가 갑자기 왜 앞당겨졌냐는 건데…….

“……우선 사과하러 가야겠지.”

못 볼 꼴을 보였으니 예의상 인사를 해둬야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권이도에게 말이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그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겸사겸사 주말이 지나면 회사에 나가야 한단 말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애매하게 점심에 가까워진 시간이니 지금 찾아간다고 해서 딱히 무례하진 않을 것이다.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더 가다듬고, 지저분한 페로몬이 남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내 방을 빠져나와 1층으로 내려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내게 식사를 하겠냐며 물었고, 괜찮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계단으로 올라갔다. 아마 내 방을 치우려는 듯 보였는데, 나는 스치듯 지나가는 고용인을 붙잡아 물었다.

“혹시 권이도 씨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권이도는 2층 서재에 있다고 했다. 원래는 주말에도 출근하지만, 오늘은 집에서 업무를 본다고 했다. 나는 2층 끝자락에 있는 방이 서재라는 것과 그가 주로 그곳에서 업무를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단조로운 음각이 새겨진 나무 문은 2층에 있는 모든 방과 똑같았다. 문을 열어 보지 않는 이상 이 방이 무슨 쓰임새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

약간의 간격을 두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붙잡아 내리는 순간엔 이유 모를 긴장감까지 들었다. 권이도가 내게 보였던 차가운 표정이 눈앞을 아른거리는 기분이다.

달칵, 문이 열리고 서재 내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문을 마주 보게 놓인 책상.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에 자리한 의외의 물건까지.

“바쁘니까 용건만 하죠.”

총이었다. 새카만 몸체에 주둥이가 은색으로 반짝이는 기다란 총. 그 무게감과 정교함이 도무지 가짜로는 보이지 않는 물건.

라이터인가?

서재에 총 같은 걸 장식해 놓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대부분 가짜였고, 벽에 걸린 저 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무로 짠 프레임 안에 곱게 걸린 모양새가 조금 현실감 넘쳐서 그랬지.

“무슨 일입니까.”

내가 멍하니 있자, 권이도가 다시 재촉했다. 나는 그제야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권이도를 바라봤다. 서류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움직이는 모습이 어지간히 바빠 보였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

왜인지, 그가 멈칫했단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 역시 뚝 하고 멈춰 버렸다.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저 사람도, 집에선 편하게 입고 있구나. 머리를 편하게 내린 모습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빡빡해 보이던 인상이 지금은 좀 더 유하게 느껴졌다.

“괜찮으시면 잠깐 시간을…….”

“…….”

“……왜 그러십니까?”

그의 시선이 찬찬히 내 온몸을 훑었다. 저렇게 보는 건 습관인가. 전처럼 평가하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깊이 생각에 잠긴 것 같긴 했다.

“씻었나 보군요.”

느리게 흘러나온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별거 아니라는 듯 눈가를 찌푸린다.

“페로몬이 전혀 안 남았길래.”

“……아.”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권이도가 내 방에 들어왔을 때, 그 안엔 적나라한 페로몬이 가득했을 테니. 대놓고 욕정으로 넘실거리던 페로몬은 알몸을 드러낸 것보다 더 민망했다.

“네, 씻고 왔습니다.”

“얘기해요.”

그는 펜을 내려놓고 양손을 포개 책상에 올려놨다. 여전히 눈가는 찌푸린 상태였고 시선도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제는 여러모로 실례 많았습니다.”

히트 사이클이 오고 나면 아버지는 늘 나를 짐승 보듯 보곤 했다. 베타인 그에겐 발정기나 다름없는 그 시기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권이도는 우성 알파지만, 밑바닥을 드러낸 오메가가 추잡스러웠을 것이다.

“원래는 주기가 일정해서 갑자기 히트 사이클이 올 줄 몰랐습니다. 미리 대비해야 했는데 책임감 없게 굴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알면 됐습니다.”

줄줄이 이어지는 말에 권이도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을 하러 여기까지 왔냐는 듯 귀찮음이 듬뿍 담긴 표정이었다.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는데, 문제는 그 무관심함에 오히려 불안함이 생겼단 사실이다.

“……그.”

억제제가 안 듣는다는 사실을 눈치챘겠지. 왜 이런 불량품을 보냈냐고 아버지에게 따져 물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가 나라는 오메가에게 바랄 건 끽해야 거기서 거기일 텐데. 손조차 대지 않고 넘어간 어젯밤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제가 남자라 임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우성이라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위해 차분히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에게 조건을 듣지 못했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아버지가 말한 ‘오메가 구실’이 무엇일지 모르고 있지 않았으니까.

“병 같은 것도 따로 없고, 병원에서도 주기만 맞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당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주절주절 늘어놓듯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듯 담담히 이야기하고, 그러니 최대한 말씀하시는 조건에 맞추겠다고 할 생각이었단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 있는데.”

그런데 지나치게 냉정한 목소리가 내 말을 뚝 끊어 버렸다. 움찔 고개를 들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 보였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최소한의 노력 없이 다른 수단만 찾는 사람들, 예를 들어 그쪽처럼 몸이나 팔아서 한자리 얻으려는 한심한 경우.”

몸이나 판다는 부분에선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민재에게 들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 서늘한 시선이,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정말 나를 혐오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진 게 그 비루한 몸뚱이밖에 없는 건 알겠지만, 그딴 식으로 낳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는 생각해야지.”

권이도는 진심으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 짙은 눈동자에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수치심이 들었다. 아버지가 내게 요구한 건 이런 일일 텐데, 이제 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고작 후계자 따위가 필요했다면 그쪽 말고 더 좋은 조건의 오메가가 많았을 겁니다. 몸을 팔 생각이라면 내가 아니라 그 몸을 사주는 덜떨어진 놈들한테 가면 되겠군요.”

“……죄송합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 자존심이 상한 건 아니었고, 그냥 괜한 짓을 했다 싶다. 그럼 내게 바라는 게 무어냐고 묻고 싶었으나, 거기까지 따져 물을 만큼 눈치 없지 못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의 앞에서 몹쓸 꼴을 보이는 일이건, 혹은 후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건. 어느 쪽이건 다음부턴 조심해야 했다.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기엔 그 이후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인정이 빠른 건 편하군요.”

권이도는 금세 시선을 거둬들였다. 다시 펜을 들고 내게서 완전히 관심을 끄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불쾌함 역시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 내가 밖으로 나가지 않자, 삐딱하게 물어 오기도 했다.

“안 나갑니까?”

“월요일부터 다시 회사에 복귀할 예정입니다. 사과드릴 겸 이 말씀 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내게 남은 마지막 용건까지 그에게 이야기했다. 이대로 서재를 나가면 또 한참 그를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쪽 생활을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일상생활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었다. 그게 자유를 주는 게 아니라 사실은 방치에 불과했나 보다.

“바쁘신데 실례 많았습니다.”

꾸벅, 인사를 건네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런 것들을 대략 알 것 같았다. 살갑게 구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주제 파악만 제대로 하면 될 듯했다.

“아.”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그가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문고리를 붙잡은 그대로 그를 돌아봤다. 권이도가 나를 보며 오른손으로 제 왼손 약지를 가리켰다.

“반지, 까먹지 말고 하고 다녀요.”

“…….”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반지를 안 끼고 있는데.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권이도는 곧장 시선을 돌렸고, 우리 사이의 대화도 거기서 끝이었다.

* *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휴가가 지나는 동안, 회사엔 별달리 변화라고 할 게 없었다. 경영기획 본부는 여전히 바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같이 많았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김 실장과 함께 출근하자,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쾌활하게 나를 맞이해 줬다.

“아니, 이게 누구야. 유부남 된 본부장님이시잖아?”

“본부장님한테 신혼 냄새 나는 것 같아요.”

“결혼 일주일 차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나는 잔뜩 관심을 내비치는 그들에게 늘 그랬듯 살갑게 웃어 보였다. 그 삭막한 집보다는 회사에 나오는 게 훨씬 기분이 좋았다. 에너지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권이도와의 결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우와, 반지! 이거 다이아예요?”

직원들의 관심은 금세 내가 끼고 있는 결혼반지로 돌아갔다. 척 보기에도 값비싼 물건이니 그들이 신기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식이 얼마라느니, 예물이 얼마라느니, 그런 말들이 인터넷에 끝도 없이 올라왔다.

“반지 너무 예뻐요.”

“아니야, 이건 본부장님 손이 다 했지.”

“맞아요, 오백 원짜리 문방구 반지 껴도 예쁠걸요?”

그들은 한참이나 돌아가며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워낙 관심을 보이기에 반지를 빼주려 했는데, 정작 누구 하나 받아드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비싼 물건이라 괜히 흠집이라도 내면 큰일 날 것 같단 이유였다.

“전 본부장님 인수인계하시길래 그만두시는 줄 알았어요.”

“하하…… 그거야 오래 쉴 거니까 그런 거죠.”

“이거 봐, 또 고작 이주 쉬셔 놓고 오래라고 하신다니까?”

윤 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본부장님 정도면 농땡이를 좀 피워도 된다며 짓궂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픽 웃음을 흘리고 직원들을 쭉 훑어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회식이나 할까요?”

회식 장소는 늘 그랬듯이 소고깃집이었다. 처음엔 눈치만 살피던 직원들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술과 고기를 주문했다. 저들끼리 웃고 떠들며 술잔을 주고받다가 이따금 내게도 한 잔씩 권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한 후에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여전히 본부장으로 일하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정해져 있었다.

“본부장님이 행복하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사랑받는 아들 다음엔, 사랑받는 배우자일까. 나는 회식 내내 그들에게 축하와 감탄을 번갈아들어야 했다. 권이도가 얼마나 잘해 주냐는 식의 질문에는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듯 웃기만 반복했다.

그리고 모든 회식이 끝나 권이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유 모를 한숨을 삼켜 내야 했다. 넓은 내부와 높은 천장. 본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집이 유독 갑갑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아무도 나를 맞이해 주지 않는 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건만. 상황이 변했을 뿐, 환경만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소리 없이 3층으로 올라가 구석진 곳에 있는 내 방으로 향했다. 내일도 일을 나가야 하니 일찍이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이다. 수면제는…… 오늘도 세 알 정도면 되겠지.

한적한 복도가 지나치게 넓게 느껴졌다. 방문을 여는 순간엔 목 언저리가 콱 옥죄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대체 며칠이나 반복될까. 그러한 의문은 억지로 머리에서 지워 냈다.

* * *

며칠이 흘렀다. 나는 변함없는 일상을 반복했고, 잠깐 짬을 내 최 교수를 만나고 왔다. 히트 사이클 주기가 이상해졌다는 이유였는데, 그가 말해 준 원인이 참으로 터무니없었다.

‘간혹 있는 일인데, 상대가 너무 우성이거나 페로몬 상성이 잘 맞으면 주기가 당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련님 같은 경우엔 형질 차이는 아닐 거고,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요컨대 권이도와의 상성이 좋아서 각인한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는 말이다. 최 교수는 부부 사이엔 좋은 일이라며 축하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웃기만 했다. 주기가 들쑥날쑥해지면, 곤란한 건 오로지 나뿐일 테니까.

권이도의 주기를 물어봐야 하나. 안타깝게도 그 생각조차 실천으로 옮길 기회가 없었다.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나는 항상 쥐 죽은 듯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권이도와 마주치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였고, 혹여나 식사 시간이 겹칠 것 같으면 내 쪽에서 피하길 반복했다. 피치 못하게 마주칠 상황이 생기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그냥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본가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나는 이런 식으로 지내 왔으니까. 아버지의 눈에 거슬릴 때마다 다음부터 조심하겠다고 저자세로 나가야만 했다.

다행인 건, 시간이 지날수록 고용인들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는 점이었다. 내 방을 치워 주는 하우스키퍼와 요리를 맡은 주방장, 그리고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그들이었다.

‘고생은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

‘사장님은 맛있다는 말을 안 하시거든요.’

‘아이고, 꽃 같은 데 관심 있으세요?’

내가 한 건 별거 없었다. 그냥 마주칠 때마다 간단히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어느 순간부터 태도가 한결 살가워졌다. 삭막하던 방에 예쁜 장식품을 놓아 준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구태여 물어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권이도가 출근한 주말엔, 온종일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으니. 나를 고깝게 여겼다면 그 시간마저 껄끄러웠을 터였다.

그래, 마치 이렇게 권이도와 마주치는 순간처럼.

“…….”

“…….”

출근을 앞두고 주방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평소라면 이미 일을 나갔을 권이도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함께 밥을 먹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으니, 그냥 식사를 거르고 출근할 생각이었다. 원래도 아침밥을 챙겨 먹지 않았지만, 주방장이 하도 챙겨 줘서 먹던 참이었다.

“그냥 앉죠.”

그런데 등을 돌리는 순간, 나직한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우아한 동작으로 식사를 이어 가던 권이도였다. 그는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명령하듯 이야기했다.

“두 번 말하기 싫으니까 앉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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