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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75)화 (75/131)

75화. Hiver Rigoureux(3)

권이도가 향한 곳은 차를 세워 둔 정원 입구였다. 원래라면 웨딩 카를 타고 신혼여행을 갔을 텐데, 그런 과정은 생략한다고 했다. 하기야, 이토록 바쁜 사람이 팔자 좋게 정략결혼 상대와 여행이나 가고 싶진 않을 거다.

권이도가 먼저 차에 올랐고, 나도 그를 따라 옆자리에 올라탔다. 운전석과 뒷좌석이 분리된 프라이빗한 세단은 개인이 개조해 만든 차종인 게 분명했다. 아버지에게도 같은 차가 있지만, 내부가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었다.

“…….”

“…….”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우리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괜히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어둑어둑해진 바깥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피로감과 함께 이런저런 걱정이 밀려드는 듯했다.

권이도는 아까의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을까. 길게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곤란할 부분이라면 있었다. 가령 ‘그딴 알파 새끼’ 같은 부분.

“……실례지만 한 가지 여쭙고 싶은데요.”

나는 그렇게 운을 떼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면 아마 그와 대화할 일이 없을 테니까. 계속 눈치를 볼 바엔 우선 신경 쓰이는 부분을 묻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권이도는 태블릿 PC로 업무를 보다 말고 흘긋 나를 바라봤다. 그게 얘기하라는 허락처럼 느껴져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어디서부터 들으셨습니까?”

뭐에 관련한 질문인지는 그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역시나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누가 오메가 아니랄까 봐 그딴 알파 새끼한테 혹했다는 부분부터.”

“…….”

들었구나. 민재의 목적은 나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 알파 새끼가 칭하는 건 결국 권이도였다. 누구보다 잘 보여야 하는 상대인데,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곧장 그에게 정중한 사과를 내뱉었다. 그가 마저 말하라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동생이 아직 학생이라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잘 타이르겠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거라고 민재를 변호할 필요도 없었다. 괜히 잘못 말하는 것보단 순순히 인정하는 게 나을 테니.

“아뇨, 상관없습니다.”

의외로 대답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 문제는 대수롭지 않게 이어진 그 뒷말 정도.

“해신금융 차남이 피 안 섞인 오메가를 좋아하건 말건,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죠.”

“…….”

고저 없이 건넨 말들이 참 가혹했다. 고작 그 대화만 듣고, 제법 많은 걸 눈치채지 않았나. 내가 애써 무시하고 있던 부분을 타인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나이대에는 좋아하는 사람 일엔 눈이 돌아가곤 하니까.”

너그럽게 말하는 주제에 권이도의 표정은 전혀 너그럽지 않았다. 민재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남 일이니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민망한 기분에 괜히 또 한 번 사과를 한 번 더 건넸다. 권이도는 대화를 끝내려는 듯 다시 태블릿 PC로 시선을 돌렸다. 픽, 조그만 비웃음과 함께 그의 입술이 살짝 달싹였다.

“쓸데없는 변명이 없어서 좋군요.”

단조로운 평가를 끝으로 우리 사이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쥔 채 창밖을 내다봤고, 권이도는 더는 내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손에 낀 결혼반지가 괜히 갑갑하게 느껴졌다.

* * *

앞으로 내가 머물게 될 집은 권이도가 소유한 집 중 가장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위로 3층짜리 건물에, 지하에는 그의 차가 모두 들어갈 만큼 넓은 차고도 있다. 아버지가 머무는 본가보다 커다란 곳에서, 내게 허락된 장소는 3층의 작은 방이었다.

“이 집에서 지켜야 할 사항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게 방을 안내해 준 고용인은 사무적인 말투로 이런저런 것들을 설명해 줬다. 가령 내게 허락된 공간이 내 방과 주방 정도라는 것, 집에서는 가능한 한 조용히 지내고 친구나 가족을 데려오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

“방 안에 있는 물건은 마음대로 쓰셔도 됩니다.”

대단한 선처라고 해야 할까. 가장 구석진 방이었지만, 있을 건 다 갖춰져 있었으니. 화장실과 드레스룸까지 딸린 공간은, 내가 어릴 적 살던 집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만, 그게 내 편의를 위해서라기보단 괜히 돌아다니지 말라는 경고처럼 느껴졌다는 게 문제지.

“식사는 끼니때마다 챙겨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면 주방장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살가운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었다. 고용인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며 방을 나가 버렸고, 나는 넥타이를 풀며 방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뭐…… 나쁘진 않지.”

골방을 준 것도 아니고 딱 생각한 그대로의 방이었다. 크기가 좀 작고, 가구라곤 달랑 침대가 전부여서 그랬지. 뭐, 내게 필요한 건 옷가지 정도였으니 더 넓은 공간은 사치에 불과했다.

나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예복을 벗은 뒤 샤워를 마쳤다. 옷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가, 옆쪽에 곱게 걸어 놨다. 어쨌든 내 옷은 아니었으니 막 다루기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 넓지 않은 욕실엔 덩그러니 샤워 부스만 놓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싶었지만, 환경이 여의치 않으니 포기해야 했다. 물론 만약 욕조가 있다고 하더라고 한가롭게 여유를 부릴 입장은 아니었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앞서 챙겨 두었던 홈웨어로 갈아입었다. 김 실장이 챙겨 준 캐리어엔 간단한 옷가지와 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결혼식 내내 모습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내 오피스텔로 가서 짐을 챙겼던 모양이다.

나는 짐을 완전히 풀지 않고 당장 필요한 것들만 꺼내 드레스룸에 정리했다. 지나치게 약소한 짐이었기에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실, 진짜 필요한 건 수면제뿐이었으니까.

침대에 걸터앉아 물 없이 수면제를 세 알 정도 씹어 삼켰다. 귀찮을 때마다 그냥 먹어 버릇했더니 혀에 남는 쓴맛이 이제는 익숙했다. 알약이 큰 편이 아니라 다행이지. 물이 필요했다고 해도 지금은 1층으로 내려가기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다.

“인사를 해야 하나…….”

나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 잠깐 망설였다. 밤이 늦었는데, 그에게 잘 자라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방으로 올라오기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어 버렸다.

‘내가 부르기 전엔 귀찮게 하지 말아요. 그쪽도 일상생활은 알아서 해도 되는데, 그 대신 내가 찾을 땐 무조건 시간 비워 두고.’

아마 권이도는 내가 이 집에서 가능하면 조용히 있길 바라나 보다. 그러니 그 말만 하고 휙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가 버렸겠지. 그가 어떤 방으로 갔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굳이 밤 인사를 건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피로가 잔뜩 쌓인 탓에 오랜 불면증에도 불구하고 잠기운이 몰려들었다. 한 세 시간 정도면 깨겠지만, 잠깐이나마 단잠을 취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정말 한 끼도 안 먹었네. 몸이 지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내일은 몇 시쯤 1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잡념을 끝으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 *

권이도와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염려했던 일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가령 내게 손찌검을 하는 권이도라든가, 침대에서 다리를 벌리는 일이라든가, 혹은 매일같이 듣는 모욕적인 말 따위들.

나는 미리 회사에 휴가를 냈지만, 권이도는 매일같이 출근길에 올랐다. 아침이 되면 출근했다가 저녁 늦을 즈음에야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없는 시간을 방 안에서 보내다가, 권이도가 퇴근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1층으로 내려오곤 했다.

‘……왜 여기 있습니까?’

처음 그를 마중 나갔을 때 권이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의도를 가늠하려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도 했다. 오셨다는 말을 들어서 나왔을 뿐이라고 답하자, 들릴 듯 말 듯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아부를 떨어도 꼭…….’

그냥, 마중을 나오려고 했을 뿐이다. 우선은 최대한 살갑게 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걸 아부라고 부르면야, 나로선 할 말이 없었지만.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요.’

나는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하단 한마디에 권이도가 더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물론 착각으로 치부해도 좋을 만큼 짧은 찰나였지만 말이다.

‘불편하시면 내일부턴 방에 있겠습니다.’

그 말엔 권이도가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고용인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미간을 좁혔을 뿐이다. 약간의 간격을 둔 뒤에야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었다.

‘이런 짓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쪽이 진짜 내 배우자라도 되는 양 착각하는 것 같아서 말한 거고.’

그가 내게 바라는 게 적어도 내조를 잘하는 배우자는 아니구나. 나와 결혼해서 무얼 하려던 건지는 몰라도 살갑게 굴 필요는 없었나 보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말했는데 이번에도 권이도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나를 지나쳐 방으로 올라갔고, 그날은 더 이상 권이도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후로 나흘, 나는 더 이상 권이도를 마중 나가지 않았다. 그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밖으로 정원을 구경했을 뿐이다. 자연스레 대화할 일은 줄어들었고, 권이도와 마주치는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비?”

그리고 금요일 아침. 일기 예보에도 없던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늘 그랬듯 창가에 앉아 정원을 구경했고, 열린 창문 틈으로는 온갖 젖은 냄새가 풍겨 왔다. 비를 맞은 흙냄새, 산뜻한 풀 내음, 그리고 간간이 섞여 드는 나무 냄새까지.

“그 사람 페로몬 같네…….”

열린 창문 틈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봤다. 잠깐 느껴 보았을 뿐이지만, 권이도의 페로몬은 비 오는 날의 공기와 비슷했다. 가을비를 맞은 나무처럼 살랑이는 향기가 우성의 존재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슬슬 말해야겠지.”

앞으로 이틀, 그 이후엔 내 휴가도 끝이었다. 월요일엔 다시 회사에 나가야 했고, 본부장으로 복귀해 그간 못 했던 업무를 해야만 했다. 물론 높은 확률로 병가를 써야겠지만, 그 전에 권이도에게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억제제가 안 듣는다고…….”

나는 페로몬샘이 기형이라서, 히트 사이클 때가 아니면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다. 권이도는 모르겠지만 그 여파로 인해 억제제도 듣지 않았다. 그나마 주기가 규칙적이라 다행이었는데, 하필 내일모레인 일요일이 바로 그 히트 사이클 날이었다.

“…….”

하자품이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가 내게 뭘 바라는진 모르겠지만, 억제제가 듣지 않는 오메가가 번거로울 법도 했다. 물론, 만약 내게 바라는 게 그런 쪽이라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길 것이다. 확률은 반반이었고, 나는 간결하고 정확하게 내게 있는 하자가 그리 크지 않다고 어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자품을 주워 와서…….’

한창, 생각에 잠긴 와중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점심을 먹으라는 고용인의 호출이었다. 식사는 잘 챙겨 주겠다던 약속대로 주방장은 내가 요구한 한식 위주의 식단을 꼬박꼬박 챙겨 줬다.

“네, 나갑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무릎 위에 얹어 놨던 책은 창틀에 잠깐 올려놨다. 센스 좋은 김 실장이 함께 챙겨 준 소설책이었다.

“……?”

그런데 한 발짝 떼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머리에 있던 피가 아래로 쏠리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었다. 혈압이 떨어진 건가, 그리 생각하기도 잠시. 눈 깜박할 새에 아랫배에서부터 열기가 뭉치기 시작했다.

“윽……!”

본능적으로 배를 움켜쥔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제대로 몸을 일으키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멈췄던 피가 온몸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안 돼.”

꽃향기가 났다. 익숙하고 진득한 향기가 연기가 나듯 풀풀 피어올랐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가 하면 머리털이 삐쭉 설 만큼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졌다.

히트 사이클이었다. 단 한 번도 주기를 벗어난 적 없던 그것. 억제제 따위로는 막을 수도 없고, 이성으로 버티기엔 너무도 가혹한 바로 그 시기.

“……흐으…….”

나는 기듯이 몸을 웅크린 채 이마를 바닥에 가져다 대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욕구가 이제는 아프게까지 느껴졌다. 대체 왜, 어째서 더 빨리 찾아온 건지. 그런 것들을 고민할 새도 없이 아래가 축축하게 젖었다.

“하아, 하아…….”

만약 이 모습을 보면 권이도가 뭐라고 할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발정한 오메가를 그가 얼마나 쓰레기처럼 취급할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런 미래가 또렷이 그려졌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몸은 도무지 일으킬 수가 없었다. 넘치도록 차오른 욕구가 터질 것 같아서 입가로 침이 줄줄 새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흐윽…….”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인이 들어왔다. 베타일 게 분명한 고용인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고, 그럼에도 열기를 해소하지 못한 채 몸을 뒤틀어야 했다.

권이도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고용인이 억제제를 종류별로 가져오고, 열에 들뜬 내가 정신없이 고개를 젓길 다섯 번쯤 반복한 뒤였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서 왜 억제제를 안 먹는지 설명할 여유도 없었다.

“억제제를 안 먹는다고?”

내 방으로 들어온 권이도는 침대 위 풍경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고용인이 무어라 대답하자 짜증스럽게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언뜻 풍기는 페로몬에 숨을 헐떡이는 내게, 조소 어린 한마디가 내려앉았다.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그는 성큼성큼 가까이 다가와 억세게 내 턱을 붙잡았다. 턱이 부서질 것 같은 악력이었으나 그의 손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물가물 눈을 뜨자, 싸늘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정세진.”

무거운 페로몬이 내 온몸을 짓눌렀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인 감각이었다. 자욱한 페로몬이 폐부를 난도질하고, 드러난 피부를 얇게 저미는 것만 같았다.

“뭘 기대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으니까 알아서 처신해.”

“허억…….”

아마 그는 내가 히트 사이클로 자신을 꾀어내려는 줄 알았나 보다. 방 안 가득 퍼진 무거운 존재감은 그렇게밖에 설명되지 않았으니. 아니라고, 억제제가 듣지 않을 뿐이라고. 그리 설명하고 싶었으나 나오는 건 오로지 눈물뿐이었다.

“저, 식사는 어떻게…….”

“안 먹으면 억지로라도 먹여. 억제제는 의사 불러서 주사로 놓든가 하고.”

그 말만 남기고, 권이도는 미련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닫히는 문이 그토록 원망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더 원망스러운 건, 미미하게 남은 페로몬에조차 발정하는 몸뚱어리였지만.

그 후로 이어진 기억은 뜨문뜨문 끊겨 있었다. 고용인은 정말 억지로 밥을 먹이려 했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치의를 불러왔다. 바르작거리는 나를 세 사람 정도가 붙잡은 뒤엔 팔뚝에 주사를 두 방이나 맞아야 했다.

“……흐.”

당연히, 주사된 억제제 역시 내게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나는 그로부터 꼬박 하루를 히트 사이클로 더 앓았고, 과하게 복용한 억제제 탓에 몇 번이나 속을 게워 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권이도는 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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