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Hiver Rigoureux(2)
순간,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조금 전, 그의 외모를 보고 잠깐이나마 두근거린 게 우스울 만큼. 퍽 무례한 평가였고 첫 만남에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하하…….”
그러나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손을 거둬들였다. 한가로이 악수나 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 거절당한 인사는 포기하는 게 좋았다. 그냥,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떠는 수밖에.
“다행이네요. 얼굴은 봐줄 만해서.”
장난스러운 대꾸에도 권이도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분위기를 맞출 생각도, 나를 따라 웃을 생각도 없나 보다. 그러니 사실을 말하듯 담담히 덧붙였겠지.
“그마저도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니까. 앞서 말했듯, 봐줄 만한 수준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꺼냈다.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 권이도가 나를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내게 용건이 있나 본데, 짐작되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얼굴은 한 번 보고 가려고요.”
그는 특유의 기품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 존댓말을 쓰는데도 반말처럼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우아하게 이어지는 음성이 무심한 눈빛과 어우러졌다.
“물건을 살 때도 눈으로 고르는데 결혼할 상대니까 봐두긴 해야죠.”
“…….”
나를 ‘결혼할 상대’라고 칭해 줘서 다행인 걸까. 표정만 보면 물건보다 못한 것 같다. 차라리 쇼핑할 때가 더 흥미로운 표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쪽이 나를 초면인 것처럼 대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하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런 건 미리 전달받았다. 연인이라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났는데 남들 보는 앞에서 데면데면하게 굴 생각도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돈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폐 끼치는 일 없게 하겠습니다.”
그래서 정중히 이야기하자, 권이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왜인지 만족스러워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곤 무심히 이야기했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군요.”
이걸…… 인정받았다고 해야 하나. 어찌 됐건 부정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가 혼잣말처럼 “아니, 주제 파악을 잘하는 건가.”라고 덧붙이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 하죠.”
권이도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대기실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장지문을 눈짓했다.
“저 문이 열리면 내가 그쪽을 데리러 올 겁니다. 내가 내민 손 자연스럽게 잡고, 최대한 행복한 얼굴로 웃어요.”
주문 사항은 간단했다. 내가 그리던 결혼식장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았다.
“인사를 좀 하러 다닐 건데, 그쪽이 이야기할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이랑 대화할 땐 나한테 팔짱 낀 거 빼지 말고.”
아마 장식품처럼 그의 옆에 머물기만 하면 되리라. 괜히 나설 필요 없이 방긋방긋 웃으면 그만이었다.
“알아서 처신하리라고 믿습니다. 날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없길 바라죠.”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대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내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가 까딱 고개를 움직였다.
“궁금한 게 있다면 들어는 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이 아버지보단 낫다고 해야 할까. 아버지는 내게 질문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
“아뇨, 궁금한 거 없습니다.”
하나 나는 그 무엇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어떤 상황이 돼도 내 쪽에서 저자세로 나가야 한단 사실은 변함없었으니까. 이건 선호와 해신 사이의 계약이고, 내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테니. 대충 눈치껏 행동하면 중간은 갈 것이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뭐, 굳이.”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는데 권이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굳이 편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의미가 아니라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였다.
“식이 끝나면 우선 내 집으로 갈 겁니다. 얘기 들었겠지만 그쪽은 당분간 거기서 살 거고.”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였으나 별로 상관은 없었다. 필요한 건 김 실장에게 부탁하면 되고 애초에 필요한 물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회사는 며칠 연차를 써놨으니 그 또한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얘기 끝났으니 이만 가보죠.”
그 말만 내뱉고 권이도는 곧장 몸을 돌렸다. 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가만히 그 너른 등판을 보는 와중에, 장지문을 연 권이도가 나직한 탄성과 함께 뒤를 돌아봤다.
“향수 취향은 바꾸는 게 좋겠군요.”
“……네?”
“향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말을 멈춘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한 시선이었다.
“그런 걸로 조잡한 페로몬을 숨기려고 하면 안 되지.”
“…….”
말을 해야 할까. 숨기고 있는 게 아니라 나오지 않는 거라고. 페로몬샘이 기형이라 이렇게라도 흉내를 냈을 뿐이라고.
그러나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드르륵, 닫힌 문틈으로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남은 건, 고작 향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묵직한 페로몬이 전부였다.
권이도가 떠난 후에도 대기는 끝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직원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들은 말없이 내 옷과 머리만 확인했다. 예복이 구겨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듯해서, 나중에는 소파에 앉지도 못한 채 서 있어야 했다.
“정세진 님, 준비하실게요.”
하염없이 이어지던 대기는 내내 굶은 배 속이 뒤집힐 즈음에야 끝이 났다.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김 실장 역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장지문 앞에 서자,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려운 건 없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시면 돼요.”
내 최후의 종착지가 결국은 결혼이었을까. 권이도를 잠깐 본 것만으로 어떤 결혼 생활이 될지 뻔하기만 했다. 본가에서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고, 본가에서의 삶보다 조금 더 보잘것없을 것이다.
“…….”
장지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손에 든 부케가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문 틈새로 스며든 햇살은 눈물이 날 것처럼 따사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시큰거리는 눈을 감았다가 뜨자, 널찍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정원을 가득 채운 하객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주단이 웨딩로드를 장식하고,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나를 보며 박수를 쏟아 냈다.
누가 봐도 과시가 분명한 식장 속,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화려한 정원의 한가운데.
그곳에 권이도가 있었다.
“…….”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나를 보는 시선에 감흥이라고는 없었다. 내게는 행복한 척 웃으라고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냉랭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사르르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오늘을 정말 기대하던 사람처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부족함 없는 연애를 한 것처럼, 지금 이 모든 게 정말 나를 위한 순간이라는 듯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늘, 아버지의 완벽한 아들을 연기했으니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 왔다고, 모두를 속이며 살아왔으니.
손이 닿는 순간엔 권이도가 눈가를 움찔거렸다. 아주 작은 반응이었기에 가까이 있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그의 손은 따사로운 봄 날씨에도 서늘했고, 내 손을 감싸는 손길 역시 그다지 다정하지 못했다.
우리는 나란히 새하얀 주단 위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수없이 많은 시선이 내 쪽으로 따라붙었다. 그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는데, 연신 터지는 셔터음은 조금 거슬린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상 앞에 다다를 때까지 일부러 가족들이 있는 쪽을 보지 않았다. 혹여나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재가 어떤 시선을 보낼지는 뻔한 일이었으니까.
“다음으로 예물 교환이 있겠습니다.”
주례는 생략됐고, 권이도가 미리 준비해 놨던 반지를 끼워 줬다. 은색의 반지 한가운데는 다이아몬드가 분명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소재는 백금인가.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그의 오른손이 내 뺨에 닿아 왔다.
“…….”
깜박,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서서히 얼굴을 가까이 했다. 아, 입을 맞추는 순서가 있었지. 나는 그런 생각으로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보드라운 입술이 닿을 땐,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떨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손은 차가운 사람이, 그래도 입술은 따뜻하구나. 딱 그 정도 생각을 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우리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였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찬가지로 눈을 뜬 그가 잠깐 그대로 나를 바라봤다.
기분 탓일까. 그의 시선이 짙게 물든 것 같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혀를 차고 느릿느릿 손을 떼어 냈다.
* * *
결혼식은 자칫 방심했다간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했다. 그나마 괜찮았던 건, 권이도가 성혼 선언문을 낭독하는 순간이었다. 발성을 따로 배우는 건지, 목소리가 웬만한 배우 못지않게 듣기 좋았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모든 식순이 끝난 뒤엔 권이도와 함께 하객들에게 인사를 돌리러 다녔다. 그가 말한 대로 팔짱을 끼고 있었고 눈이 마주치는 이들에겐 예의 바르게 웃었다. 모든 대화는 권이도가(정확히는 상대가 아부를 떨면 권이도는 듣기만 했다) 했기에 내가 나설 순간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액세서리 정도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옆에 달랑달랑 달린, 예쁘게 꾸며 놓은 장식품. 내게 돌아오는 평가 역시 ‘오메가라 그런지 확실히 다르다.’ 따위가 전부였다.
“저희 세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 상대에게 꼬박꼬박 ‘전무님’이라고 말을 높였다. 우스운 건, 권이도 역시 아버지를 ‘정 회장님’이라고 불렀다는 거다. 연애결혼으로 보이려면 호칭부터 바꾸는 게 좋을 텐데. 물론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진 않았지만 말이다.
“제가 저희 세진이 데려와서 제 자식처럼 아주 살뜰히 키웠거든요. 이렇게 전무님한테 보내려니까 마음이 아프고 그럽니다.”
“…….”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말문이 막혔을 뿐이지만, 남들이 보기엔 슬픔을 참는 모습으로 보이길 바랐다. 그래야 자꾸만 내려오려는 입꼬리가 민망하지 않을 테니.
나는 권이도와 함께 내 식구들은 물론 그의 식구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의 부모님과 누나 부부는 별말 없었지만, 그의 형만큼은 능글맞게 웃으며 흥미롭다는 양 내 얼굴을 살폈다.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에 이상하리만치 소름이 끼쳤다.
“와, 오메가라 그런가? 생각보다 훨씬…….”
뒷말은 대충 귓등으로 듣고 말았다. 곱상하다느니, 이 정도면 남자도 괜찮겠다느니, 별 영양가 없는 얘기였으니까. 내가 그다지 가녀린 체격은 아니었는데, 권이도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을 거다.
“쓰다 질리면 얘기해. 나도 맛이나 좀 보게.”
“말조심해. 여기 지금 듣는 귀 많아.”
“정색은. 이렇게 작게 말하는데 누가 듣는다고.”
권이정은 키득키득 웃으며 권이도의 어깨를 두드렸다. 먼 거리에서 보면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일 터였다. 진득한 눈으로 내 목덜미 따위를 훔쳐본 권이정이 목소리를 낮춘 채 한마디를 보탰다.
“내가 먹다 버린 건 잘 안 먹는데, 늘어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거든.”
“…….”
“그러니까 잘 좀 해봐. 알았지?”
살면서 많은 말을 들었지만, 이토록 적나라한 모욕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수치심이 든 건 아니었고, 그냥 뭐랄까 조금 신기했다.
“그쪽도 얘가 만족 못 시켜 주면 얘기해요. 그건 내가 나을 수도 있어.”
그 짓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며, 생각 있으면 한 번씩 연락하라고 했다. 이런 말에도 대답해 줘야 하나 싶었는데, 권이도가 나를 데리고 다른 쪽으로 가는 바람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얼핏 표정을 보니, 그다지 사이좋은 형제는 아닌가 보다.
뉘엿뉘엿 노을이 질 때쯤 길고 길었던 결혼식이 마무리됐다. 권이도가 잠깐 볼일이 있다며 가버리고, 나는 정원에서 이어진 산책로 근처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아직은 날이 제법 쌀쌀했던 터라 날이 어두워지면 공기가 차가울 것 같았다.
“정세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엔 민재가 있었다. 밝게 염색한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넥타이 없이 단정한 정장을 입은 채였다. 어머니를 꼭 닮아 곱상한 얼굴에 그득그득 지저분한 감정이 가득했다.
“너 씨발…….”
“…….”
나는 주변 눈치를 살피며 슬쩍 그에게 눈짓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조심하란 의미였는데, 민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짓씹듯 내뱉었다.
“배은망덕한 새끼.”
“……뭐?”
오늘 들은 말 중 권이정 다음으로 황당한 말이었다. 배은망덕하다니. 많고 많은 사람 중 민재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는데.
“돈 많은 놈이랑 결혼하니까 그렇게 좋냐?”
민재는 작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저 또한 이런 말을 할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얘가 대체 왜 이러나. 그런 생각으로 마주 보는 내게 민재가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키워 준 정이 있지, 아들이라는 새끼가 결혼식 내내 실실 웃으면서…….”
먼저, 이 결혼식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내내 웃고 있던 건 어디까지나 권이도의 요구였다. 물론 민재는 그 사실을 모를 테니 내가 좋아서 웃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버지 서운해하시는 거 몰라? 그러고도 네가 아들이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걸 민재에게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갑작스레 몰려든 피로감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나는 어제 채 5분을 자지 못했고, 오늘은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온종일 긴장한 상태였단 말이다.
“누가 오메가 아니랄까 봐 그딴 알파 새끼한테 혹해 가지고…….”
“민재야.”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민재는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움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만가만 속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이야기했다.
“아직 결혼식 중이잖아.”
자칫 민재를 더 흥분시킬 수 있는 이야기인 건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더 침착하게 말했을 텐데, 그러나 지금만큼은 여유가 부족했다.
“형 걱정해 주는 건 알겠는데…….”
“…….”
“그런 건 나중에 가족들끼리 있을 때 얘기하자.”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잔뜩 토라져 가버릴 민재를 알았기 때문이다. 형과 가족. 민재의 역린이 그 두 개라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
“하, 씨발.”
역시나 민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문제는 그런 민재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단 사실이었다. 향긋한 페로몬에 고개를 들자, 무표정하게 있던 권이도가 보였다.
“……아.”
낭패였다.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없었는데. 민재가 움찔하며 눈치를 살피는 사이, 권이도는 여전히 관심 없는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 재미없는 대화 더 할 겁니까?”
“…….”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방금까지 한 걱정이 참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권이도에게 중요한 건 계약일 테니, 민재와 내 사이가 어떻건 별반 상관없겠지.
“더 할 거여도 가죠.”
권이도는 먼저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민재의 시선을 피했다.
“남은 얘기는 다음에 하자.”
“…….”
“급한 일 있으면 전화로 하고…….”
이 말을 한 번 더 해도 될까. 고민이 되었지만, 그에게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형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