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억의 끝에 (73)화 (73/131)

73화. Hiver Rigoureux(1)

눈이 끝도 없이 내렸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변하고, 내뱉는 입김마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눈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머리와 어깨에 소복이 쌓였다.

“헉, 허억…….”

나는 그 거리를, 인적 드문 골목을 끝도 없이 걸었다. 숨을 한껏 몰아쉬며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얇은 티셔츠 한 장과 기장이 맞지 않는 바지를 입고, 신발조차 신지 않은 맨발로 쉼 없이 눈을 밟으며 말이다.

집을 나왔다. 이토록 추운 겨울날, 집이라고 부르기도 싫은 그 끔찍한 곳을. 퀴퀴한 곰팡이가 핀 바닥 위로 술병이 굴러다니던 그 조그만 방을.

부모님은 처음부터 없었다. 왜 없었는지는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이 함께였고, 정신을 차렸을 땐 항상 매를 맞고 있었다. 남자 새끼가 웬 오메가냐며, 제 어미를 똑 닮아 여우 같은 년이라며 온갖 욕지거리를 들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굶다 못해 위액을 토하는 순간이 싫어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력하게 맞아야만 하는 날들이 싫어서, 추울 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열이 펄펄 끓는 몸으로 일어나는 처지가 싫어서.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버둥이었다. 술에 취해 잠든 그 사람을 집에 놓고 반쯤 열린 문틈으로 뛰어나오는 것.

그러나 도피처라 생각했던 집 밖은 사실은 혹독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길거리는 너무 넓었고 피부로 느껴지는 계절은 춥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이제 발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어서 돌멩이에 스쳐 상처가 났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상에, 쟤 뭐지?”

“애가 혼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가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숙덕거렸다. 이따금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걸어갔다. 집을 나왔다고 하면, 다시 그 집으로 데려다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차갑게 식은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시야가 흐릿하게 변하는가 하면 드문드문 정신이 끊기기까지 했으니.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납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서 옮기는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었다.

“꼬마야, 여기로 오면 안 돼.”

그러다 커다란 건물 앞에서, 나는 웬 새카만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남자들은 짐짓 엄하게 나를 타일렀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자, 새카만 차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으로…… 야!”

그냥, 본능이 시켰던 것 같다. 길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과 저 남자는 좀 다르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척 보기에도 비싼 옷을 입고, 구경도 못 해본 커다란 차에서 내리니까, 나 정도는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초인적인 힘이었을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뿌리치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외투조차 없이 눈을 맞는 나와 달리, 남자는 두툼한 코트를 입고 누군가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뭐야, 이건.”

나는 그에게 다가가 덥석 코트를 붙잡았다. 이미 흐려진 시야 탓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인상을 찌푸렸단 사실만 알아차렸을 뿐.

“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음에도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저 오메가예요.”

그 사람이 그랬다. 너 같은 오메가는 언젠가 팔아먹고 말 거라고. 특이 형질이 귀한 세상이니 못해도 술값 정도는 벌 수 있을 거라고.

“……오메가?”

남자가 그리 물었을 때, 나는 딱 두 가지 사실에 안도했다. 하나는 그 목소리가 결코 부정적으로 들리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무너지는 내 몸을 그가 따뜻하게 안아 줬다는 것.

아버지에게 처음 입양되던 날이었다.

* * *

남자는 나를 데리고 오자마자 커다란 병원으로 데려가 피를 뽑았다. 키와 체중을 재고 이런저런 검사를 시킨 뒤에 오메가가 맞느냐며 의사에게 세 번이나 확인했다. 오메가가 확실하다는 말에는 혹시 하자가 있는지 잘 보라며 두 번쯤 더 닦달했다.

그리고 데려간 곳은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집이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데만 한참이 걸렸고, 신발을 벗는 현관은 내가 있던 집보다 훨씬 커다랬다.

“당신 왔어요?”

집이 커서일까, 그 안에는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푸근한 인상의 중년. 그리고 그런 중년의 옆에 서 있는 남자아이와 떨떠름한 표정의 여자까지.

“아무리 그래도 애를 막 주워 오면…….”

“줍다니. 하늘이 내린 거지.”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빨간 여자는 연신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부모는 어떻게 할 거냐며,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섣불리 결정을 내리냐며 계속해서 따져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기업을 위한 선물이라니까.”

선물.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잔뜩 들떠 있었다. 망할 새끼라든가, 쓰레기 같은 놈이라든가, 하여간 지금껏 내가 들었던 부름보단 훨씬 나은 말이었다.

“앞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단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는 호칭이 허락되고, 단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따뜻한 옷을 입었다. 난생처음 배부르게 밥을 먹었고, 솜이 들어간 이불 속에서 깊은 단잠을 청했다. 아무도 나를 때리지 않았고, 또 누구도 내게 폭언을 퍼붓지 않았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어.”

원래 나를 데리고 있던 사람은 내 먼 친척이라고 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떠맡듯 나를 돌보게 됐고, 늘 짐이라고 생각하며 지내 왔다고. 혹시 나를 데려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거지새끼. 누가 못 배운 놈 아니랄까 봐 그 귀한 오메가를 헐값에 넘기더라고.”

나한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어머니와 두 분이 대화하는 소리였지. 내가 모든 걸 듣고 있단 사실을, 아버지도 모르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정철호 회장의 입양아로서 지내게 됐다. 식사 예절에서부터 화술, 심지어 한글까지 새로 배우고 어디서 어떤 말을 듣건 동요하지 말라며 여러 훈련도 받았다.

“……안녕.”

그 모든 과정은 고작 네 살배기 꼬마가 함께했다. 늘 중년(나를 돌볼 집사라고 했다)의 뒤에 숨어 있던 아이는 아버지의 아들인 민재였다. 예쁘장한 얼굴이 어머니를 똑 닮았고, 그 경계하는 눈빛마저 비슷했다.

“잘 부탁해, 민재야.”

알은체도 안 하던 민재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집에 꽤 익숙해졌다. 몸에 있던 상처는 모두 사라졌고, 하루가 다르게 키가 쑥쑥 자라났다. 이따금 밀려드는 외로움은 몸이 편해지니 느끼는 배부른 감정이라며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이듬해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다. 열 달이 지나 서영이가 태어났고, 아버지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매일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화목한 가정, 그리고 부족함 없는 완벽한 집안. 이물질처럼 끼어든 나를 향한 관심은 고작 이런 거였다.

“발현은 아직이냐?”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게 아들 노릇이 아니라 오메가 노릇이라는 걸. 어서 빨리 본전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 매일 눈을 빛내는 것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중학교에 갈 무렵이었다. 아장아장 걷던 서영이가 간단한 의사 표현을 시작하고, 나를 잘 따르던 민재가 괜히 심술궂은 장난을 건넬 즈음. 아버지가 슬슬 나를 귀찮아하고, 어머니와는 여전히 대화조차 없을 시기. 나는 첫 히트 사이클을 겪었다.

* * *

아껴 두었던 보석이 사실은 돌멩이나 다름없단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때 빼고 광내느라 들인 돈을 회수하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면. 한껏 부풀었던 기대가 펑 터져 버리고, 손안에 남은 돌멩이를 그 어디에도 버릴 수 없게 된다면.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을 빙자해 오피스텔로 쫓아냈다. 대학과 가깝다는 이유였으나 더는 집에서 두기 싫다는 마음이 커다랬을 것이다. 물론 매몰차게 내보내면서도 혹시 어디서 사고를 칠까 경호를 핑계로 감시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휴학 한번 없이 모든 학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학점을 미리 다 채우고, 남는 시간엔 유학까지 다녀왔다.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될 수 있게, 누가 봐도 낙하산이지만 아닌 척 본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세진이 너한테 혼사가 들어왔어.”

그리고 스물아홉이 되던 해의 봄. 아버지는 나로 인해 이루려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아무런 예고 없이, 또 아무런 설명 없이, 다음 주 토요일에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다고 통보한 것이다.

“잘된 일이지. 그런 곳에서 너 같은 반편이 오메가를 데려가 준다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알았다는 것밖에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물을 필요도, 그 사람이 왜 나를 선택했는지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제 정말 끝이구나.’라는 생각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딱 하나 놀랐던 건, 그 상대가 선호그룹이라는 것 정도.

“본부장님! 결혼하신다면서요?”

“축하드려요. 언제 그렇게 연애까지 하셨어요?”

“역시 능력 있는 분들은 다르다니까.”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하루아침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선호그룹 측에서 기사를 뿌리고, 우리의 결혼을 낙인찍은 탓이었다.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알파가 내 비밀스러운 연애 상대이자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로 탈바꿈돼 있었다.

“선호 측에서 옷 사이즈와 반지 사이즈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김 실장이 말하길, 결혼 준비는 선호그룹이 다 한다고 했다. 내가 입을 옷도, 결혼반지도, 그들의 눈에 맞게 전부 준비해 놓겠다고. 나는 샵에 들러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수를 재고, 단 한 번도 잰 적 없던 반지 사이즈까지 측정했다.

“야, 주제 파악해. 너 팔려 가는 거야.”

민재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모르는 알파 새끼에게 다리나 벌리며 살 거냐고, 오메가 구실도 못 하는 게 무슨 결혼이냐고.

“모르지. 다리를 벌릴지, 아니면 입만 벌리고 끝날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불면증은 내가 민재의 어리광을 받아 주기 힘들게 만들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한밤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성의 없이 던져 준 수면제는, 역시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래도 역시 형 생각해 주는 건 민재밖에 없네.”

사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를 가족으로 보지 않는 민재가, 내 결혼으로 마음을 접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해가 바뀔수록 짙어지던 시선이 이제는 내게 닿지 않을 테니까.

“정세진 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결혼식 당일. 나는 이른 새벽부터 명성호텔로 향했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이었고, 역시나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도착한 스위트룸에서, 그들은 나를 인형 다루듯 다루며 머리와 옷가지를 세팅해 줬다.

새하얀 예복, 그리고 단정히 넘긴 머리. 은방울꽃으로 만든 부케와 비슷한 디자인의 부토니에까지.

“역시 내 아들이라니까.”

영빈관에 있는 대기실에 도착했을 때, 완벽히 치장한 나를 보고 아버지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대상이 나였는지, 아니면 나를 키운 본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곁에 서 있던 민재는 딱 이 말 한마디만 내뱉고 신경질적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씨발, 존나 안 어울리네.”

나 또한 동의하는 말이었다. 외모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내게는 과분한 차림이라는 점에서. 대놓고 보여 주기 위해 꾸민 모양새가 이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잘해야 해. 너한테 해신의 미래가 달려 있어.”

나는 그 말을 식이 시작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들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조용하길 바랐는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김 실장만이 착잡한 눈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봤을 뿐.

“이 애비가 믿는 거 알지?”

“……예, 아버지.”

습관적인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조그만 립스틱 크기의 무언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자, 이거 뿌리고 나가거라.”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안에 담긴 내용물이 충분히 짐작됐다. 역시나, 뚜껑을 열자마자 풍기는 꽃향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페로몬 향수가 분명했다. 한참을 멍하니 있는 내게 아버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얘기했다.

“김 실장이 골라 온 거야. 효과는 확실할 거다.”

그러는 김 실장도 베타가 아니냐고, 그리 묻지는 못했다. 이런 건 효과가 없다고,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나로선 그냥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향수를 뿌리는 게 최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돌리러 갔다. 모르긴 몰라도, 온갖 유명 인사를 다 초대한 모양이다. 김 실장까지 자리를 비운 탓에, 텅 빈 대기실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우습게도, 나는 그 공허한 정적을 외롭다고 느꼈다. 분명 조용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정작 혼자가 되니 사무치는 고독함이 밀려든 탓이다. 어쩌면 대기실 내부가 아무 장식도 없는 삭막한 공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권이도라…….”

결혼 상대가 권이도라고 했던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그는 나와는 평생 인연조차 닿지 않던 상대였다. 외모 좋고, 사업 수완 뛰어나고,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하며 절대 웃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랑 연애는 무슨.”

사람들도 순진하지, ‘그’ 권이도가 연애결혼 따위를 할 리가 없는데. 아니, 정략결혼임을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 축하를 건넨 걸 수도 있었다. 그에겐 결혼조차 사업을 이끌어 나갈 수단이라는 걸, 그 누가 모르고 있겠느냔 말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사소한 것들이었다. 손버릇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고, 침대 위에서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다리를 벌려야 할 운명이었으니,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참 생각에 잠긴 와중에 드르륵, 장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굳이 그쪽을 바라보진 않았다. 김 실장이거나, 아니면 민재.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으니까.

타박, 타박,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 발걸음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건, 근처에서 향긋한 나무 냄새가 풍겨 올 즈음에야 깨달았다. 목덜미를 스치는 은은한 페로몬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진짜 알파의 것이었다.

“…….”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나와 비슷한 디자인의 검은 예복을 입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만나 본 그 누구보다 키가 컸고, 나를 응시하는 얼굴은 현실감 없이 아름다웠다.

“…….”

권이도였다. 신문에서, 뉴스에서, 온갖 매체에서만 접했던 선호그룹 전무이사. 고작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선호전자 총책임자 자리에 앉아, 오늘 나와 결혼하게 될 내 결혼 상대.

“정세진?”

나직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울림이 독특한 음성은 내 이름을 내뱉는 발음마저 남다르게 느껴졌다. 짙은 눈동자가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물건의 값어치를 매기듯 나를 평가하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정세진입니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됐다. 나는 긴 시간 습관 된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최대한 상냥하게 눈을 접고, 나긋나긋 정중히 이야기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맞잡지 않았다. 흘긋 내민 손을 내려다보곤 느리게 시선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왠지 모르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드는 와중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은 오메가라더니…….”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아무런 감흥도 보이지 않았고, 그건 나를 대하는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흘러나온 한마디가 참으로 무미건조했다.

“얼굴 빼곤 봐줄 게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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