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Boite de Pandore(7)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지금껏 쌓여 왔던 답답함과 그를 향한 서운함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너.”
권이도는 떠듬떠듬 멍한 목소리를 냈다. 그답지 않게 당황한 듯했고, 얼빠진 모습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점 잃은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너 기억…….”
“기억?”
기억이라니. 이 얘기에 지금 ‘기억’이라는 표현을 쓴 건가.
“역으로 물어보죠.”
정말 무언가 숨기고 있었구나. 그 사실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내게 했던 말이 단순히 약에 취해 내뱉은 헛소리는 아니었구나. 그 사실에는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
권이도의 입이 딱 다물렸다. 굳게 닫힌 입술은 아마 웬만해선 다시 열리지 않을 거다. 낭패감 반, 두려움 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감정이 번갈아 떠올랐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상했어요.”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굳이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분노였고, 대상이 뚜렷한 배신감이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애정과 신의를 품은 상대에게, 내 감정을 오로지 쏟아붓게 됐다.
“권이도 씨.”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엔 유독 입 안이 썼다. 결국 이렇게 됐다는 사실이 사무치리만치 서러웠다.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압니까?”
이 질문을, 이제야 겨우 건네고 있다. 그를 보자마자 느꼈던 위화감을 몇 달이 지난 지금에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따금 밀려들던 기시감, 그리고 그가 내게 보여 줬던 알 수 없는 감정들. 애써 무시해 온 것들이 응어리져 튀어나왔다.
“내 취향, 입맛, 옷 사이즈에 반지 사이즈까지.”
“…….”
“나도 모르는 히트 사이클을 당신이 맞힌 게 벌써 세 번이에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지적할 수 없었다. 혹여나 그를 잃을까 봐, 이 아늑함을 영영 느끼지 못할까 봐 두려웠으니까. 그래서 인내하고 기다린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보답 받지 못한 마음에 억울함이 샘솟았다.
“이걸 설마, 다 우연이라고 부를 건 아니죠?”
이런 게 우연이라면 세상엔 필연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없을 터였다. 이 모든 게 그저 기분 탓이라면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겁니까?”
권이도는 내 말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번에도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생각이 없나 보다.
“이러다가 또 나만 모르게 결론 내리고 행동하려고?”
뭐가 나를 위한 일이냔 말이다. 대체 뭐가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거고.
“이게 뭐가 내 손으로 하는 선택이야…….”
짙은 무력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가 다정하게 속삭였던 말들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줄 몰랐다.
“이럴 거면 좋아하게 만들지 말지 그랬어요.”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꼈고, 또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그 이상의 것을 기대했다. 피치 못할 선택인 척했지만, 이 사람이라면 각인을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단 말이다.
“나한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을 거면, 그럼 이 집에 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죠.”
그런데 이제, 그를 떠나가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이 집에서 나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미래를 약속하지 않을 테니, 무의미한 관계를 끝내자고. 내게는 그게 잔인한 이별 통보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놓아줄 때가 됐다고?”
“…….”
“놓아주긴, 씨발…….”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르륵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속에서부터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세진아.”
권이도는 들릴 듯 말 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게 또 처량한 느낌이라, 안도감과 함께 억하심정이 생겼다.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서,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를 걱정하는 주제에.
“세진아, 내가…….”
“변명할 거면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문 채로 참아 냈다. 여기서 울기까지 했다간 정말 비참해지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나한테 다 말해 줄 게 아니면, 세진이라고 부르지도 말아요.”
우습게도, 그 말을 하자마자 권이도가 조용해졌다. 나는 얼굴을 가린 그대로 억눌린 숨을 토해 냈다. 그 침묵이 의미하는 바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진짜 말해 줄 생각 없구나, 당신.”
아마도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모든 걸 숨길 요량인가 보다. 나에 대한 마음은 보여 줄지언정 그 속에 담긴 각오는 꺼내 놓지 않는다. 모든 걸 안겨 주겠노라 말해 놓고 내가 그에게 속하는 건 끝까지 거부했다.
“……날 좋아하긴 합니까?”
작게 물어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고 억지로 입매를 말아 올리기도 했다. 권이도는 여전히 소리 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의미 있는 존재긴 해요?”
“……내가 의심스러운 건 알겠는데.”
그는 입가를 떨며 숨결처럼 이야기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만큼 조그마한 소리였다. 하나 그 뒷말만큼은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내 마음까지 의심하진 마.”
“…….”
왜,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지. 네가 필요 없으니까 꺼지라고 그렇게 말했으면 포기했을 텐데.
“어떻게 의심을 안 해요…….”
사실 단 한 번도 그러한 부분을 불신한 적은 없었다. 그가 내게 보여 주는 자상함이 결코 가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늘 정에 굶주려 있던 내가 그가 주는 온기에 난생처음 목이라도 축이지 않았던가.
“나한테 한 번이라도 솔직해진 적이 있어요?”
그러니 이건, 단순한 화풀이에 불과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어리광과 애정을 갈구하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내가 바라는 걸 다 해준다면서, 내가 진짜 뭘 바라는지 생각해 본 적은 있고?”
내가 바란 건 아주 사소한 안정이었는데. 받고 싶은 것에 비해 과분한 것들을 받아 버렸다. 곁가지로 얻은 즐거움이 무의미하진 않았지만, 근본적인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나를 위한 행동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다 당신을 위한 일이잖아.”
“…….”
“다 자기만족이라고, 지금.”
권이도는 그 말에는 반응을 보였다. 눈가를 움찔하며 입술을 달싹인 것이다. 자괴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내면에 엿보이는 감정이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애완동물이라도 키우는 기분이었겠어요.”
그는 내게 뭘 바라고 있던 걸까. 내가 빠져드는 모습을 보며 과연 만족하고 있었을까.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대충 돌보다가, 이제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거 아닙니까?”
한 번 사람 손을 탄 동물은 야생으로 돌아갔을 때 적응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자유가 아니라 박탈이었고, 방생이 아니라 유기였다. 그는 내게 모든 것을 준비해 줬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다.
“내가 멍청했죠.”
“…….”
“우리가 고작 이딴 관계였는지도 모르고.”
그간 쌓아 온 관계가 고작 이따위로 무너질 종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었을지언정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고 느껴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근덕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마구 헤집어진 가슴께를 진정시켰다. 내내 심장이 빠르게 뛰어서, 말을 잇는 동안에도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너는.”
권이도는 그제야 천천히 운을 뗐다. 시야가 캄캄한 터라 목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이윽고 흘러나온 한마디는 지금까지와 달리 억울함이 서려 있었다.
“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지.”
기분 탓일까, 그 또한 감정이 격해졌단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거기서 풍기는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늘 여유롭고 당당하던 권이도가 지금만큼은 한없이 초라한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매 순간순간이 지옥 같았어.”
“…….”
뭐가 그렇게 괴로웠냐고, 그렇게 묻지는 못했다. 그냥 손을 내리고 그와 시선을 맞췄을 뿐. 가슴께를 크게 들썩인 권이도가 눈가를 잔뜩 일그러뜨렸다.
“눈을 감으면 네가 없어질 것 같아서…… 하루도 맘 편히 지낸 날이 없었다고.”
“……그럼 앞으로는 불안할 일 없으시겠네요.”
픽, 헛웃음이 나왔다.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었으나 내 심정을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나 없는 삶을 상상하느라 매 순간이 지옥 같았다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통쾌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똑같이 당해 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젠 내가 있는 날이 없을 텐데.”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나는 절망으로 뒤덮인 눈을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죽을 일도 없겠지.”
상처가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곳을 떠나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욱하는 마음에 비꼬고 말았다.
“잘 지내요, 권이도 씨.”
“…….”
“잘 지내봐요, 한번.”
그대로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아 내렸다. 이대로 방을 빠져나가 캐리어를 챙겨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정말 내가 없는 삶이 지옥 같은지, 그 지옥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그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바라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열렸던 문이 닫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권이도가 주먹으로 문을 쾅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자욱한 페로몬과 함께 싸늘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내보라고?”
억센 손길이 내 팔을 붙잡았다. 휙, 돌아간 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에 부딪쳤다. 내 어깨를 잡아 벽에 내리누른 권이도는 내 턱을 붙잡아 억지로 들어 올리곤 단숨에 입술을 맞물렸다.
“……흡.”
따닥, 이가 부딪칠 만큼 다급한 입맞춤이었다. 입 안을 파고든 혀가 그 어느 때보다 강압적이었다. 부술 것처럼 아래턱을 움켜쥔 그가 숨결에 페로몬을 한가득 실어 보냈다.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농도 짙은 페로몬이었다. 권이도 특유의 나무 냄새가 저항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를 휘감았다.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고 양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고개를 들어 타액을 받아마시고, 파도치는 페로몬에 흠뻑 빠져들었다. 뇌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큼한 감각에 간절히 그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숨이 차오를 때가 되어서야 입술을 떼어 냈다. 누구 것인지 모를 숨결이 달뜬 열기를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턱을 움켜잡았던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린 그가 다 쉬어 빠진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세진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냥, 그 한마디에 그가 내게 애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떠나지 말라고, 그리고 내 곁에 머물라고. 내게 했던 말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내가 놓아줄 때 갔어야지.”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끝내, 권이도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소유욕과 집착으로 얼룩진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기분 좋았다.
“놓아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라고 했잖아.”
이번엔 내가 먼저 입술을 맞물렸다. 눈을 감고 혀를 섞는 나를, 권이도는 밀어 내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손으로 옷 속을 파고들어 맨살결을 어루만지며 위로 올라왔을 뿐.
이성은 순식간에 아득히 멀어졌다. 애초에 간당거렸던 것이었으니, 이제 와 붙잡은들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나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나를 안고 서재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위에 있던 물건들을 한 팔로 쓸어버린 뒤에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나를 그 위에 내려놨다. 정작 바닥으로 떨어진 물건들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는데 말이다.
“……흐.”
옷가지를 벗겨 내는 짧은 찰나. 그 순간조차 권이도와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칭얼칭얼 그에게 매달려 입술과 턱 언저리에 입술을 비비적거려야 할 정도로. 계절은 여름이었으나, 드러난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가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아……!”
그리고 전희라고 부르기엔 거친 행위가 연달아 이어졌다. 짐승처럼 내 상반신을 깨물고 빤 그가 아무런 전조 없이 아래쪽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젖지 않은 곳이었으나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건 금방이었다.
“권이도…… 흣…….”
그의 모든 행동이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머릿속이 이렇게 아득한데, 모든 순간순간이 뇌리에 남았다. 아래가 서서히 젖는 것도, 권이도가 온몸에 제 흔적을 남기는 것도,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쏟아지는 페로몬도.
“아흑……!”
아래가 꿰뚫리는 순간에는, 몸이 갈라지는 느낌에도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분명 덜 풀린 곳이었으나 고통보단 쾌감이 앞섰다. 그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에, 배 속이 아릴 정도의 충족감이 차올랐다.
“허윽, 흐, 아……!”
권이도는 아무런 배려 없이 본능만으로 행위를 이어 갔다. 내가 적응할 틈도 없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것이다. 평소라면 버거웠을 텐데, 지금은 나조차 그를 말릴 생각도 못 한 채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거기…… 아, 흐응, 으…….”
“……하.”
넣어도 넣어도 모자라단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조금 더 깊이 권이도를 느끼고 싶었다. 허리를 들썩이며 그를 조르는 동안, 권이도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품에 가두고 있었다.
“흑, 흐윽…….”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 나도 모르게 울고 있던 모양이다. 줄줄이 흐르는 눈물이 가뜩이나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가렸다. 몸이 잘못된 것처럼 심장이 뛰는데, 그의 품에 안기면 이다지도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세진아, 정세진.”
“아흐, 흐윽…….”
권이도는 내 눈물을 혀로 핥곤 으스러뜨릴 것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든 손가락이 뒤통수를 단단히 고정했다. 입술을 문지르며 목덜미까지 내려온 그가 움칠거리는 나를 억지로 고정시켰다.
“아흑……!”
깊은 삽입과 함께 배꼽과 가까운 곳에서 권이도의 성기가 크게 부풀었다. 안 그래도 빠듯하던 내벽이 찢어질 것처럼 압박됐다. 나는 그의 등에 손톱을 세우고, 울컥 참았던 정액을 사출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운 페로몬을 쏟은 그가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
찌릿, 오묘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숨이 턱 틀어 막히고 심장이 멈춘 것처럼 아득한 감각이 몰아쳤다. 머릿속이 새카맣게 죽었다가, 다시 새하얗게 변하길 반복했다.
“아, 아……!”
바닥이 없는 절벽에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쾌감 끝에, 멈췄던 시간이 차근차근 흐르기 시작했다. 속에서 요동치던 오메가 페로몬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권이도의 페로몬과 얽히기 시작했다.
묶였다고,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그에게 반응하듯 향긋한 꽃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무언가 그와 연결되었다고 느낀 순간.
‘정세진입니다.’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장면들이 있었다. 성대하고 요란한 결혼식, 그리고 새하얀 정장을 입은 내 모습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권이도.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웨딩로드와 그 끝에서 터져 나온 박수 소리까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나를 보며 웃지 않았고, 먼저 손을 내민 건 내 쪽이었다. 살갑게 웃으며 건넨 손은 그 누구와도 닿지 못한 채 어색하게 거둬들여졌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저택에 홀로 남아, 외로이 권이도의 뒷모습을 바라봤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갑작스레 몰아친 기억의 폭풍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비슷하지만 다르고, 같은 시간대지만 다른 순간들. 그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냉랭했던 그 기억 속의 권이도.
‘주제 파악을 똑바로 해야지.’
권이도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망각하고 있던 나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