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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의 끝에 (71)화 (71/131)

71화. Boite de Pandore(6)

나를 납작 엎드리게 해 개처럼 강간하던 사람. 너 같은 걸 믿는 게 아니었다던 그 냉랭한 한마디가 꿈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잊히질 않았다. 말을 하는 지금조차 원인 모를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올 정도로.

“웃기는 일이죠. 그럴 만한 일이 없었는데.”

가만히 눈을 내리깔며 미소를 그렸다. 억지로 말아 올린 입꼬리가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딱히 무언가 바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그냥 말문을 트기 위한 초석이면 모를까. 내가 이런 꿈을 꾸었고 솔직하게 말하니, 너도 내가 묻는 부분을 솔직히 답해 달라고.

“아무튼 그래서…….”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입을 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심상치 않던 권이도가 이번에야말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찬물을 맞은 것처럼 차게 식은 얼굴로 미동조차 없이 숨을 참고 있어서.

“……권이도 씨?”

조심스레 권이도를 불렀다. 그는 그제야 느릿느릿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마치 욕조 밖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때처럼, 무언가에 놀란 듯 아득한 표정이었다.

“…….”

“…….”

왜 이런 표정을 지을까. 잠깐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 못 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눈가를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제 말에 기분이 상하셨으면…….”

“……아뇨.”

더디게 대답한 권이도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왼손을 들어 제 눈가를 덮는다. 그대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조적으로 들렸다.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페로몬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우성이 아니라면 몰랐을 미미한 변화였는데, 가까이 붙어 앉은 게 아님에도 그의 페로몬엔 예민하게 반응했다.

“…….”

나는 말없이 권이도의 동태를 살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결코 좋지 못한 상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드러난 입매는 어색하게 굳어 있고 얼굴을 가린 손끝이 덜덜 떨렸다.

“권이도 씨.”

나는 조금 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공포감이 내게도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그가 왜 이러는지,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음에도 안쓰럽단 생각이 들 정도다.

“혹시 어디 안 좋으면…….”

“……정세진 씨.”

뚝, 내 말을 끊은 그가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이었으나, 여전히 그 짙은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일렁였다. 그는 감질날 만큼 느리게 눈을 깜박이곤 나직이 운을 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면접을 보는 사람처럼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본능적인 긴장감이 어깨를 바짝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겸사겸사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내가 이날을 기다렸듯, 그 또한 무언가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씀하세요.”

권이도는 내 허락이 떨어진 다음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눈가를 찌푸리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시기도 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에 시선을 고정하자, 매끄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새삼스럽지만…… 브랜드 론칭 축하해요. 그 회사는 오롯이 정세진 씨 거니 앞으로도 잘 키웠으면 좋겠군요.”

“……아뇨, 다 권이도 씨 덕분인걸요.”

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권이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투자만 했고, 그 과정엔 손댄 게 없어요. 시작을 정세진 씨가 하진 않았어도 이제는 정세진 씨가 일구어 낸 회사가 맞죠.”

몇 달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모든 과정에 내 손길이 닿은 건 맞았다. 이다음에 있을 프로젝트 역시 직원들과 내가 힘을 합쳐 만들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정 부담스러우면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 다녀 보라고.”

왜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수료증을 받고 나왔던 그 순간부터 내내 생각하던 것을.

“정세진 씨, 그 회사에 계속 다니고 싶습니까?”

약혼식 날, 그에게 들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본부장으로 계속 일하고 싶냐고 너그럽게 물었던 그 목소리. 그렇다고 하면 선뜻 그러라고 할 것처럼 기회를 주었던 그 질문 말이다.

‘아뇨, 말씀하신 조건에 맞추겠습니다.’

그 당시엔 내가 해야 할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이렇다 할 미련도 없었고, 딱히 그에게 밉보일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이번엔 정말 내가 바라는 대답을 해도 되지 않을까.

“……네.”

“…….”

“계속 다니고 싶습니다.”

내 말에 권이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빚어 놓은 얼굴이 완벽한 미소를 그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으나, 왜인지 딱히 웃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다음 컬렉션도 기대하죠.”

아마 권이도는 처음 회사를 넘겨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을 거다. 기간을 주는 척해 놓고, 내가 거절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짐작했겠지. 끝내, 자신이 주고자 한 물건을 다 안겨 줬던 사람이니까.

“자격증 수료한 것도 축하합니다. 일 다니면서 자격증까지 땄으니 앞으로 뭘 하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말씀 감사합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축하를 들을 뿐인데,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모든 건 그의 진짜 용건을 위한 밑밥이고, 그 용건이 내게는 결코 달가울 내용이 아닐 것처럼.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

그 말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미미하게 피어오른 의심이 그의 모든 말을 수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인사라고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미심쩍은 내용들이.

“갑자기 그 집에 들어와서 여러모로 힘들었을 거 압니다. 내가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정세진 씨한테 곤란한 일도 많았을 거고.”

작별 인사 같았다. 그가 하는 말들은 지금껏 고생했으니 이제는 그럴 필요 없다는 허락처럼 들렸다. 정확히는 내가 한 건 고생이 아니라 호사였는데 말이다.

“정세진 씨.”

“……예.”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그가 하는 말들이 귓가에 윙윙거리며 울렸다.

“슬슬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오늘이 날인 것 같으니까 얘기하죠.”

머리털이 삐쭉 섰다. 본능적인 촉이 이다음에 나올 말을 어렴풋이 예상했다. 그래서 황급히 그의 말을 끊으려던 찰나였다.

“잠시만요, 권이도 씨 지금…….”

“결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툭, 튀어나온 말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한 주변에 이명까지 들렸다. 내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무의미한 약혼은 이제 끝내야겠죠.”

내내 우려하던 현실이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지 몰랐다. 아버지가 잡혀갈 때부터 걱정했던 문제. 내내 품고 있었으나 미처 해소하지 못한 의문.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 나가도 좋아요.”

이 근사한 식사는 우리의 약혼이 끝나는 자리였나 보다. 그제야, 나는 앞서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권이도의 왼손에 나와의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 * *

이 약혼의 유통 기한은 언제까지일까. 그 사실을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처음 약혼한 그때부터, 아버지가 구속되던 그 날까지. 권이도와 통성명을 나눴던 그때부터 함께 한 침대에서 잠이 들던 그 날까지도.

‘우리가 약혼한 사실은 우리 두 사람을 제외하면 양가 가족들밖에 모릅니다. 해신 쪽 사람들은 입막음을 해놨고, 선호 쪽 사람들은 애초에 알릴 생각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끝을 맺을 줄은 몰랐다. 평생 지속되리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 끝이 이토록 허무한 통보이길 바라지는 않았다. 그가 또박또박 내뱉은 말들이 내게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세진 씨는 그냥, 나와 아무런 연관 없는 사람처럼 지내면 됩니다. ‘Sejin’의 대표로 일하면서,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하고.’

내게 연인이 되자고 하지 않았던가. 지나가는 말이었으나 나를 얼마나 욕심내도 될지 가늠이 안 된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나를 밀어 내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나와의 약혼이…… 지난 몇 달이, 정세진 씨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권이도는 처음부터 이러한 끝을 예상한 거라고. 그래서 약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내게 약혼반지를 껴도 된다는 허락을 해주지 않았노라고.

“…….”

“…….”

집으로 오는 길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고, 서로 눈길이 스치는 일도 없었다. 무어라 주고받을 얘기도 없을뿐더러 마땅히 그럴 만한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이나 울컥 솟구치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어영부영 파투 난 저녁 식사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일방적인 통보를 향한 억울함인지는 모르겠다. 그에게 물으려던 것들을 묻지 못했고, 알아내고 싶던 것들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답답함도 함께 밀려들었다.

배신감. 그 단어를 떠올린 건 집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우리 관계를 정의할 자격은 나한테 있다고 했으면서. 이 약혼은 계약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의 혼사라고, 그렇게 선을 그었으면서. 나는 을이 아니니 권리만 취하면 된다고 달큼한 말을 속삭인 주제에.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도 했다. 손끝이 차게 식는가 하면 금방이라도 비명이 터질 것처럼 명치가 옥죄였다.

그래서 나는 차고에 도착하자마자 권이도를 둔 채 집으로 올라왔다. 계단을 뛰듯이 올라 방으로 돌아왔고, 드레스룸을 뒤져 내가 가지고 왔던 캐리어를 꺼냈다. 식사를 위해 차려입었던 옷들을 성의 없이 벗어 버린 뒤엔, 내가 챙겨 온 옷가지 중 하나를 골라 갈아입었다.

짐을 늘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번거롭게 굴지 않은 게, 이날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고.

‘적어도, 권이도 전무가 도련님을 버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

짜증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이 감정을 감히 짜증 따위로 칭해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죄 없는 김 실장을 향해 원망의 말을 읊조리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

나는 가족을 잃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다. 권이도는 내킬 때 나가라고 했지만, 그건 허락을 가장한 통보에 불과했다. 그가 축객령을 내린 이상 그게 언제가 되었건 끝내 이 집을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정세진 씨는 을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고작 두 잔 마신 와인이 문제였을까. 머리가 어질어질 정신이 없었다. 캐리어를 챙겨 나갈 채비를 갖춘 건 문제가 아니었는데, 막상 방을 나서려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물건이 아니지만…….’

‘이 방에 있지 않아도 당신 소유긴 하지.’

“…….”

평생 내뱉지도 않던 욕지거리가 끝도 없이 떠올랐다. 입으로 내뱉고도 나아지질 않아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성을 잃는 바람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나를 선택해 달라고 애걸이라도 하고 싶은데.’

‘나한테 그럴 자격이 없어, 세진아.’

자격, 그딴 걸 대체 누가 정한다고. 내가 원하는 걸 전부 내어 주겠다고 다정히 약속한 주제에.

‘불안해서 그랬어.’

던지듯 캐리어를 내려놨다. 제대로 닫지도 않았던 터라 열린 지퍼 틈으로 옷가지가 삐쭉 튀어나왔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내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권이도는 아직 올라오지 않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멋대로 마지막을 고했다면, 나는 그에게 이유를 물어볼 자격 정도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러나 그의 방문을 열려던 순간, 왠지 모르게 싸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그 끝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불빛은 스며 나오지 않았지만, 이 안에 권이도가 있으리란 확신이 생겼다.

“…….”

판도라가 상자를 열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살며시 문고리를 잡고 아래로 내렸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심장이 쿵쿵 거칠게 뛰어 대고, 익숙한 페로몬이 피부로 느껴졌다.

“…….”

“…….”

역시나 서재에는 권이도가 있었다. 그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멍하니 서랍이 있는 쪽을 보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

나는 그런 권이도를 보며, 아무런 말 없이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이 느리게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 고요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놀라우리만치 강렬히 전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짐을 챙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서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더 정확히는 좌절감 비슷한 것. 표정은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데,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그 모든 걸 보여 줬다.

“인사라도 하러 왔나 보죠.”

그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그시 나를 향하는 시선에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나는 서재의 문을 닫고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섰다.

“……아뇨.”

“…….”

“도저히 납득이 안 돼서요.”

잠깐 잊어버렸던 분노가 다시금 차올랐다. 울컥, 솟구친 감정은 억누를 새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성적으로 질문을 건네는 것밖에 없었다.

“왜 이 약혼을 끝내겠다는 겁니까?”

나는 아직 향수를 만들어 주지 못했고 우리의 약속은 끝나지 않았다. 관계를 정의할 권리가 내게 있다면 관계를 끝낼 권리도 내게 있어야 했다. 이렇게 쫓겨나듯 도망칠 게 아니라, 이해가 될 때까지 그에게 따져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놓아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아까는 무의미한 약혼이라고 했으면서. 권이도는 순순히 다른 대답을 꺼내 놨다. 문제는, 그 대답이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단 사실이다.

“제가 억지로 잡혀 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놓아주다니. 인과 관계가 잘못된 말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나를 감금한 게 아니라고.

“틀린 말은 아니죠. 이 약혼의 시작에 정세진 씨 의견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따지면 제가 다니는 회사도 억지로 다니는 게 되겠군요.”

“그거랑 이건 다릅니다.”

“어디가 다른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얼음장을 걷는 듯했다. 누구 하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날 선 어투는 베일 것처럼 차가웠다. 나는 야트막한 숨을 내뱉으며 조그맣게 얘기했다.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권이도는 그 말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돌려 내게서 시선을 거뒀을 뿐.

“당신을 선택해 달라고 애걸하고 싶다면서요.”

“…….”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애걸을 해야지.”

그의 행동은 온통 모순투성이였다. 을을 자처하면서도 홀로 결론 내린 뒤에 내게 통보했다. 힌트는 주지도 않으면서 묻는 말에조차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를 갈망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모든 걸 초연한 것처럼 자꾸만 내려놓으려고 했다.

“이봐요, 권이도 씨.”

따지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생각 따위 이제는 들지도 않았다. 이 지저분한 기분을, 그리고 배신감을, 그에게 낱낱이 고해야겠다는 충동만 들었을 뿐.

“나는 당신 때문에 내지도 않던 욕심을 냈어.”

“…….”

“이 집에 들어와서, 평생 상상도 못 해본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고.”

“…….”

“근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리겠다고?”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미래를 권이도가 꿈꾸게 했다. 단 한 번도 선택해 본 적 없는 것들을 선택하고, 바라본 적 없는 것들을 바라게 됐다. 만약 이럴 거였다면 내게 그런 달큼한 것들을 안겨 주면 안 되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뭐가 그렇게 무섭습니까.”

답답했다. 이 상황이, 그리고 이 순간조차 속 시원히 말해 주지 않는 권이도가. 눈치만 살피느라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내 미련함에.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권이도 씨.”

권이도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건넨 질문도 아니었다. 고작 와인 두 잔으로 솔직해지기엔 그의 입이 너무도 무거울 테니.

“왜.”

“…….”

“내가 당신 눈앞에서 죽을까 봐?”

욱해서 건넨 말은 그의 얼굴을 경악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커다랗게 뜨인 두 눈엔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당혹이 서려 있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뒷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당신이 그런 나를 따라 죽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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